# 221
221. 들어줄 수밖에 없겠군요 (2)
천상기는 새카맣게 타버린 얼굴에 바닷물을 끼얹은 뒤에 시원하게 문질렀다.
“푸후-!”
가슴쯤 들어온 곳이라 파도가 천상기의 몸을 둥실 띄웠다가 내려놓곤 했는데 무릎에 부담이 없어서 그게 또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여기! 여기!”
그러던 천상기가 손을 번쩍 들고서 고함을 질렀다.
“기다려!
곧바로 근처에 있던 남자가 돌고래를 흉내 내듯 바닷속으로 들어갔고, 잠시 뒤에 천상기의 발목을 잡았다.
천상기의 발바닥 아래로 남자의 손이 들어왔다. 그리고 곧바로 그의 바로 앞에서 남자가 떠올랐다.
“푸! 여기!”
“와아!”
천상기는 주먹만 한 조개를 받고서 아이처럼 웃었다.
허리에 찬 망태에 벌써 조개가 만 넘어 담겼다.
“나가자, 상기 씨. 입술이 파래.”
남자가 턱짓으로 천상기의 얼굴을 가리켰다.
아닌 게 아니라 몸이 떨리기는 했다.
“뭐하냐! 이제 그만 나와라!”
게다가 밖에서 우두머리가 부르고 있어서 천상기는 자갈 깔린 해변을 향해 걸었다.
“이리 줘. 물 밖에 나가면 그거 꽤 무거워.”
남자는 심지어 천상기의 허리춤에 묶어두었던 망태까지 받아서 어깨에 걸치기도 했다.
타다닥! 타닥! 타다다닥!
잘 피워놓은 모닥불에 손을 뻗은 천상기는 몸을 떨었다.
그 직후였다.
석쇠를 준비하던 우두머리, 고기 팩의 비닐을 뜯던 남자, 그리고 물통을 들고 오던 다른 남자의 시선이 번득했고, 분위기가 삽시간에 살벌하게 변했다.
“오늘 하루만 놔둡시다. 처음 바다에 들어가면 춥잖습니까.”
“야! 강갑수! 너 왜 저 새끼를 그렇게 싸고돌아? 섬 나가면 뭐 받아먹기로 했어?”
“형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남자의 이름이 강갑수인 걸 천상기는 이제야 알았다.
“우리가 심부름하러 온 거야? 저 새끼 시다바리 하러 온 거냐고? 물놀이 끝나고 앉아 있으면 우리가 고기 준비해서 드십시오, 해? 그래?”
분위기에 눌린 천상기가 몸을 일으키려다가 휘청했다.
“다들 알면서 왜 그러십니까? 무릎 수술한 지 얼마 안 돼서 이렇게 움직이고 나면 밤에 몸살 납니다. 하루쯤 봐주셔도 되는 거 아닙니까?”
“그래도 이 새끼가?”
이런 분위기에서 어떻게 모닥불 앞에 계속 있겠나.
천상기가 억지로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씨발! 죽은 우리 형 생각나서 그래! 그때 내가 너무 어려서 아무것도 못 해줬던 게 한이 돼서!”
악에 받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놀라운 일은 그다음에 있었다.
보통 이런 고함이 터지면 동정표가 나오면서, 그랬구나, 우리가 몰랐다, 이래 줘야 그림이 되는데 마주 선 남자들은 당장에라도 일을 저지를 것처럼 독한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강갑수.”
우두머리가 나직하게 불렀고,
“예.”
고함을 질렀던 강갑수가 조용하게 답했다.
타다다닥. 타닥. 타다닥.
미안한데 나 아직 타고 있으니까 그만하면 안 될까, 하는 것처럼 모닥불이 남자들의 눈치를 살피며 타올랐다.
“죽고 싶어?”
허세가 아니라 진심이 담긴 질문처럼 들렸다.
타닥. 타다다닥. 쏴아아아! 철벅! 쏴아아! 철벅!
장작 타는 소리, 파도 소리를 배경으로 침묵은 제법 길게 이어졌다.
천상기는 확실히 알았다.
저 우두머리인 남자가 강갑수를 진짜로 죽일지, 여기에서 참을 건지를 고민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두 명의 남자 중 한 명이 거꾸로 쥔 칼의 의미로도 짐작할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형님.”
대차게 고함을 질렀던 강갑수가 고개를 떨군 직후였다.
절뚝. 절뚝. 절뚝. 절뚝.
“잘못했습니다. 내가 하겠습니다.”
천상기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굳은 무릎을 억지로 움직여 고기와 조개가 있는 곳으로 걸었다. 젖은 머리칼에서 짠 바닷물이 방울져 내리고, 얼굴과 목은 벌겋게 타서 따가운데, 무릎은 끊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앉아서만 지내다가 느닷없이 서너 시간을 서 있어서 그런지 다리가 후들거려 천상기의 몸뚱이가 휘청였다.
“거기 서.”
“예.”
“너는 가서 앉아.”
절뚝. 절뚝. 절뚝. 절뚝.
강갑수를 위해서 천상기는 또 얌전히 말을 들었다.
“강갑수. 한 번만 더 지랄하면 진짜 목을 따 버린다.”
“예.”
“커피 타.”
“예.”
숙연한 분위기에서 우두머리와 남자들이 고기와 조개와 석쇠를 준비하는 동안, 강갑수는 봉지 커피를 탔다. 바다의 비린내를 뚫고 코끝을 달달한 커피 향이 간질이고 있었다.
“커피 다 탔습니다.”
“가져와, 이 씨발 놈아.”
“예.”
강갑수가 두 손으로 가져다준 커피를 받은 우두머리가 그제야 픽 웃었다.
이 사람들은 정신이 좀 이상한 게 아닐까.
그렇게 살벌하게 칼을 거꾸로 쥔 채 노려보다가 커피 마시고는 그 직전의 상태로 훅 돌아가는 꼴이 천상기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아무튼, 그 덕분에 모닥불 앞에서 천상기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를 마셨다.
다음으로 모닥불 위에 석쇠를 올리고, 거기에 두툼한 삼겹살, 조개 커다란 거, 어디에서 잡았는지 생선도 눕혔다.
냄새 죽이지, 물놀이 끝나서 배고팠지, 분위기 돌아와서 킬킬거리지, 세상 이렇게 즐거운 시간이 또 있을까 싶었다.
이런 재미가 있는 줄 몰랐다.
심지어 돈도 그리 많이 들지 않는다. 고작해야 장작, 석쇠, 그리고 고기, 조개면 되는 건데….
우걱우걱.
겉이 탄 삼겹살을 입에 가득 넣고 씹던 천상기는 턱없이 용인에서 망연자실해 하던 천호득의 얼굴이 떠올랐다.
“흐으으! 흐으으으! 흐으으!”
“이 새끼는 왜 또 잘 처먹다가 지랄이야?”
우걱우걱. 우걱우걱.
“흐이이-!”
“얼래? 미친 거 아냐?”
삼겹살 맛 죽이지요, 바다의 풍광 가슴 저리지요, 모닥불은 뜨겁지요, 그 와중에 이런 재미 한 번 모르고 살았을 아버지 천호득의 얼굴 스쳐 지나가지요.
“야! 고기 더 줘라! 내가 산다, 내가 사!”
코를 훌쩍이며 삼겹살을 집는 천상기를 보며 우두머리는 기도 안 찬다는 얼굴이었다.
**
삼성동 빌라로 돌아온 천중명에게 허선영은 은서연의 방문을 알려주었다.
“선영 씨. 우리 저녁 밖에서 먹자.”
“뭐 먹고 싶은데요?”
“그냥 남들처럼 걷다가 눈에 띄는 거 먹고, 둘이서 스티커 사진도 찍고 하면 어때?”
허선영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천중명을 바라보았다.
결혼식 이후로 허선영이 저렇게 똑바로 바라보면 숨이 턱 막혀서 천중명은 가슴에 손을 올리고 숨을 들이마셨다.
“왜 그래요?”
“말했잖아. 선영 씨 눈을 정면에서 보면 숨이 막혀.”
“짓궂어, 진짜!”
“어 정말이라니까.”
허선영이 움직여서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얼굴을 붙였다.
“그럼 이건 어때요?”
“숨 막히게 행복해.”
“중명 씨, 표현이 좀 올드한 건 알아요?”
천중명은 조심스럽게 허선영을 안았다. 삼성동 빌라의 분위기가 또다시 영화처럼 흘렀다.
**
월요일 아침, 천중명은 오전 6시에 집무실에 도착했다.
그리고 재킷을 벗기 무섭게 유진교가 나타났다.
“준비되셨어요?”
“예, 회장님.”
“그럼 가시죠.”
천중명을 기다리던 최만호, 나인호, 이운재, 최치국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앉으세요. 우선 커피 한잔 마시고 시작하죠. 우리 커피 좀 부탁해.”
“예, 회장님.”
부속실 직원이 커피를 가져다주는 동안 천중명은 대송자동차그룹 네 개 회사의 분위기를 전해 들었다.
앞으로 한 달가량은 일주일에 두 번, 이렇게 새벽 6시에 모여서 전체 회의를 진행했으면 한다는 최만호의 요청에 따라 시작된 첫 번째 회의였다.
이러지 않으면 대송자동차그룹의 회장단 회의를 한 뒤에 그 내용을 천중명에게 보고하고, 다시 결과를 내려줘야 하기 때문에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어려웠다.
“임원과 중간 간부들의 교체가 거의 마무리되었습니다. 이번 주부터 회계부서의 책임자들을 교체할 예정입니다.”
대송자동차그룹을 이끌 최만호의 보고였다.
일주일 동안 얼마나 몸 고생,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그의 볼이 쑥 들어가 보일 지경이었다.
“지경그룹 감사팀과 법무팀의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특히 회계법인을 별도로 선정해서 강력한 회계감사를 시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점은 유 본부장님과 의논해서 협조 받으세요.”
결정할 사안들이 줄줄이 이어지면서 실제로 진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 정도로 지치고 힘겨웠는데 다른 방법은 없었다.
**
대송자동차를 날렸다고 해서 대송그룹이 없어진 것은 아니어서 대송건설, 대송상선, 대송물산, 대송증권 등등 아직 남은 계열사가 모두 10개가 넘었다.
“크흠.”
그래도 말이다.
대송자동차그룹을 쥐고 있을 때와는 회장단 회의의 위상과 분위기가 완전히 찌그러져 있어서 윤성일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다.
“당분간 언론에 말이 나오지 않도록 주의하고, 각자 맡은 계열사의 경영과 단속에 특히 신경 쓰도록.”
이것들이 얕보는 건 아니겠지?
어쩐지 답을 대신해 고개를 숙이는 임원들의 태도가 못마땅하게 느껴져서 윤성일은 눈꼬리를 매섭게 치켜떴다.
“이제 일어나!”
회의는 맥없이 끝났다. 회장단이 줄줄이 일어나 나가기 전에 하는 인사를 받으면서 윤성일은 가슴 한구석이 휑한 느낌이었다.
대송자동차그룹 본사 건물을 빼앗기고, 대송건설의 회의실에 앉아 있자니 사람이 또 왜 이리 서글퍼지는 건지, 윤성일은 입맛을 다시며 죄 없는 맞은편 벽을 노려보았다.
비록 ‘어어?’ 하다가 한방 얻어맞아 생살을 뜯기듯 대송자동차그룹을 빼앗기긴 했다만, 그렇다고 그동안의 인맥과 연륜마저 빼앗긴 건 아니니까.
“두고 보자, 천중명. 똑같이 갚아주마.”
당장 방법이 없다고 나중에도 그러리란 법은 없는 거니까.
대송건설의 회의실에 앉은 윤성일은 당장 천중명을 저주하는 것 말고 딱히 할 일이 없었다.
**
지경그룹의 회의는 계속 이어졌다.
“리콜 준비는요?”
“기존에 판매된 차량의 검사와 분석이 먼저 필요합니다. 품질 개선을 건의했던 직원들이 있어서 우선 의견을 들어볼 계획입니다. 회장님께 보고는 그 뒤에 하겠습니다.”
먼저 최만호가 보고했고,
“밴드사에 지불하는 단가를 워낙 낮춰놓아서 제대로 된 부품을 공급받기 어렵습니다. 밴드사의 제품수준을 일정수준으로 올리는 데 필요한 적정 단가가 얼마인지 알아본 후 보고 올리겠습니다.”
이어서 최치국의 우직한 보고가 이어졌다.
“외국에서 판매하는 차량과의 품질 차이가 없는지 확인해서 보고해 주세요. 또한, 세금을 제외한 판매가격의 차이만큼 국내 판매가격을 낮출 계획도 검토하시고.”
“신차의 가격을 낮추면 중고차 가격이 하락하게 돼서 그 점에 관한 해결책도 있어야 합니다.”
“중고차의 가격이라?”
천중명은 탁자에 기울였던 상체를 세웠다. 다들 셔츠와 넥타이 차림으로 앞에 서류를 잔뜩 쌓아두었고, 손에 연필이나 펜을 들고 있었다.
“고객의 재산이 줄어드는 현상이 발생하는 만큼 민감한 부분입니다. 이는 장기적으로도 결코 좋은 현상이 아닙니다.”
하긴, 자동차의 판매가격을 5백만 원 떨어트리면 중고차 가격은 일률적으로 그만큼 빠지게 된다.
“동일품질, 동일가격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우리 역시 고객을 우롱하는 꼴이 됩니다. 기본 방침을 마련하고, 그에 따른 문제점을 해결할 방안을 순서대로 강구하겠습니다.”
“예, 회장님.”
“잠시 쉬면서 아침 먹죠.”
천중명의 말에 최만호가 몸을 일으키려다가 움찔했다.
아직 비서실장이라는 타이틀을 제대로 떼지 못해서 몸이 먼저 반응한 모양이었다. 유진교가 웃으며 인터폰으로 조식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아직 최만호가 들고 온 서류의 검토조차 끝나지 않아서 나인호, 이운재, 최치국이 가져온 보고서는 들춰보지도 못한 상태였다.
유진교에게 알아서 처리하라고 해도 일은 돌아간다.
지시한 대로 이행할 사람인 것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익을 앞세운 결정이 내려질 테고, 그렇게 되면 결국 다른 그룹과 똑같은 모습으로 바뀔 게 분명했다.
천중명은 쌓인 서류를 보며 가볍게 웃었다.
꼴통 회장, 진짜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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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중명에게 박승양이 있다면 지경디자인 허선영에게는 고상득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었다.
원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비서실 직원들이 대기한 첫날인 데다, 정장 차림으로 기다린 은서연을 맥없이 돌려보내기 어려워서 준비된 차량으로 출근했다.
“크흑! 대표 사모님!”
S500에서 내리는 허선영을 고상득이 과장된 몸짓과 음성으로 맞았고, 쭉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직원들이 박수로 환영해주었다.
“결혼 축하드려요!”
초대하지 못한 것이 미안하고, 이렇게 나와 있는 것이 계면쩍어서 허선영은 쑥스럽게 웃으며 직원들에게 고개로 인사했다.
그렇게 대표이사의 방으로 들어간 허선영을 따라 비서 두 명이 함께 들어왔다. 불편하기 그지없지만, 우선 며칠만이라도 지켜본 뒤에 서로에게 편한 적당한 방법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은서연의 지시에 따라 커다란 박스 세 개가 바깥에서 들어오고 있었다.
“뭐예요?”
“지경디자인의 건물 증축을 위해 오늘 오후부터 지경건설이 공사를 시작합니다. 3주 예정인데 그때까지 사모님께서 드실 커피와 간식을 만들 간단한 도구와 건강식품들입니다.”
“공사라니요?”
“V2에 해당하는 분은 사무실의 넓이가 500평방미터로 제공되게 되어 있습니다.”
“150평이 넘잖아요?”
“좀 더 넓은 집무실을 원하시면 신청하겠습니다.”
은서연과 호흡을 맞추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구나.
‘회장 사모님, 쉽지 않네.’
허선영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