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220화 (220/315)

# 220

220. 들어줄 수밖에 없겠군요 (1)

최근 며칠, 눈물 마를 날이 없던 윤세계가 코를 훌쩍이며 또다시 서러운 눈물을 닦았다.

호텔은 말이다. 특성과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인테리어에 엄청난 공을 들인다.

특히, 대표이사가 사용하는 방은 호텔의 이미지를 완성하는 장소이다 보니, 문을 열고 들어가면 보이는 전망, 커튼, 집기, 비품, 카펫, 스탠드, 벽지, 하다못해 전기 콘센트까지 신경 써 꾸민다.

그렇게 세심하게 꾸민 삼중호텔 대표이사 집무실에서 윤세계는 박스에 개인 물품을 담았다. 대송자동차그룹에 지분이 찢겨 있는 호텔이니 당연하게 임원을 선임하는 권한 역시 주식회사 지경에 있었다.

“수요일에 새로운 대표이사를 임명하겠습니다. 화요일 오후까지 개인 물품을 정리하시기 바랍니다.”

말투는 공손했는데 최만호의 태도는 얼음을 뒤집어쓴 것처럼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비서실장이 통보해 준 것이 그나마 대우해준 걸까, 아니면 로열패밀리니 뭐니 까불지 말라는 의미였을까.

책상에 있던 액자를 손에 든 윤세계는 겨우 눌렀던 울음을 왈칵 터트렸다. 하필이면 팔짱을 낀 채 책상에 기대서 이 방의 멋진 야경을 바라보는 사진을 두었던 건지.

이제 박영철이나 송중대와의 만남은 커녕, 코리아클럽도 안녕인 삶이었다. 나갈 수야 있겠다만, 무슨 낯으로 그곳에 앉아 동정 어린 시선, 혹은 비웃음을 감당하겠나.

‘잔인한 인간!’

어쩌면 주말에 결혼한다고 발표해서 사람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건지.

윤세계는 고개를 떨군 채 또다시 티슈로 눈물을 닦았다.

**

어슴푸레 바다 저쪽이 밝아질 때 일어난 천상기는 저 바다가 다시 어두워질 때까지 탁자에 앉아서 굴을 깠다. 오른손에 든 검지 길이의 칼을 정교하게 움직여 왼손에 집어 든 굴을 벌리는 작업이었다.

천상기가 반신욕을 할 수 있음직한 크기의 플라스틱 통에 가득 담긴 굴을 모조리 까면 2만 원을 준단다. 처음엔 사람을 가지고 노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남자들은 실제로 돈을 주었다.

“흐이!”

1천7백억 원을 빼앗긴 뒤에 손가락이 아리도록 굴을 까서 4만 원을 손에 쥐었던 순간에 천상기는 이해하기 어려운 울음을 쏟았다.

삼겹살 네 줄이 든 팩 한 개에 2만 원, 라면 4천 원, 김치 한 봉에 5천 원, 쌀도 사고, 가스도 살 수 있었다.

“굴 잘 까네!”

욕처럼 들리는 칭찬도 들었다.

“이거 마시고 해.”

사람이 함께 부대끼며 산다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일일까? 며칠 사이에 남자들은 그 비싼 봉지커피를 틈틈이 천상기에게 권하며 이런저런 농담도 주고받았다.

“다리 이리 펴 봐.”

“아! 아아!”

“굳었잖아. 자기 전에 억지로라도 펴야 한다니까.”

눈 끝이 쭉 찢어졌고, 입가에 칼자국이 그대로 남은 남자가 천상기의 다리를 잡아서 억지로 펴주기도 한다. 고작 그 며칠 얼굴 봤다고 말이다.

“너는 어쩐지 이 섬을 나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주변을 슬쩍 둘러본 남자가 피식 웃은 뒤에 건넨 말이었다.

혹시 죽이려고 꼬드기는 건가?

“나가게 되면 제대로 살아봐. 안 그러면 내가 상기 씨를 죽이러 가야 돼.”

“아-!”

말을 하면서도 쉬는 시간이 끝나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다리를 펴주겠다는 것처럼 남자는 천상기의 발을 어깨에 걸고서 무릎을 누르고 주물러주었다.

어? 그러고 보니 중간에 상기 씨라고, 그렇게 부르지 않았어?

천상기의 눈을 본 남자가 히죽 웃었다.

“저녁에 내가 삼겹살 살 테니까 그거 먹고, 자기 전에 계속 무릎 펴 버릇해. 며칠만 해도 뛰어다니겠다.”

“왜 나한테 이래? 다른 사람들은 안 그러잖아.”

남자는 아프게 웃었다.

“공사장 4층에서 떨어져 죽었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던 형이. 그때 몸이 저리면 내가 이렇게 주물러 줬거든. 어려서 그런 것도 있는데 당시에 왜 그렇게 멍청했는지.”

“보상은? 뭔가 받았을 거 아냐?”

“일용직이 그런 게 어디 있냐? 산재 걸리면 회사 등급 떨어진다고 쉬쉬하다가 주정뱅이 아버지 술값 쥐여 준 거로 끝났지. 어차! 이제 일할 시간이다.”

천상기는 검지 크기의 칼을 들고 테이블로 몸을 돌렸다.

“상기 씨.”

그런 그를 남자가 조용하게 불렀다.

세상에 사람 눈빛이 어떻게 저리 독하고 잔인하게 변할 수 있는 거지?

“내가 죽이러 가게 하지 마라. 부탁이다.”

몸을 일으킨 남자가 힐끔 움막 밖을 살핀 뒤에 다시 고개를 가져왔다.

“마음만 바로 쓰면 좋은 집에서 걱정 없이 살 수 있잖아. 나같이도 사는데 더 뭘 욕심내? 그러니까 기회 잡으면 절대….”

남자가 고개를 흔들었다.

백 마디 말보다 천상기의 가슴에 더 깊게 박힌 당부였다.

“아, 씨발! 날씨 진짜 좋네!”

밖에서 쏟아지는 뜨거운 볕을 향해 남자가 나가려고 할 때였다.

펄럭!

누군가 먼저 안으로 들어왔다.

“야! 바다에 나가자. 여기 허리춤만 들어가도 조개 커다란 게 널렸다.”

지금껏 함께 있던 남자가 고개로 천상기를 가리켰다.

“너 이 새끼. 너무 마음 주면 곤란해.”

“그냥 같이 놉시다. 감시하기도 좋지 뭘 그래요?”

망설이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바다 나갈래? 대신 오후 일당 없고 저녁은….”

“내가 삼겹살 사기로 했어요.”

“삼겹살 먹는단다.”

속없이 천상기는 칼을 얼른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슴과 바지를 털었다. 절뚝이는 걸음이지만 이제 혼자서 제법 잘 걸었다.

**

대송자동차 회장에 최만호, 미래발전본부 나인호 상무가 대송모터스의 회장에, 이운재 기획실 부실장이 대송서비스 회장, 그리고 최치국이 대송장비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피의 숙청이라고 불리는 한 주가 훌쩍 흘러가는 동안, 대송자동차그룹에서는 기존의 회장단과 임원은 말할 것도 없고, 윤 씨 일가의 피붙이는 부장, 과장마저 모두 희망퇴직이라는 방식으로 자리에서 밀려났다.

미래발전본부와 기획실의 근무가 죽을 맛이기는 한데 이번 승진을 통해 미래가 보장된 부서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나인호와 이운재의 빈자리, 그들이 데려간 중간 간부와 사원들의 빈자리에 지원하는 직원들의 이력서가 단숨에 그룹발전본부에 몰려들었다.

햇살이 여유로운 토요일에 천중명은 멋진 수트 차림으로 평창동의 정원 안쪽에 서 있었다.

곳곳에 놓인 꽃을 레이스가 연결했고, 하얀 탁자에 앉은 이은명, 송순주, 유진교, 최만호, 곽대출, 특별출연 주인영, 송달순이 지켜보았다.

김순례를 비롯한 메이드들이 한쪽에 손을 모으고 서 있는 앞이었다.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허선영이 천호득의 손을 잡고 걸어 나왔다.

장만섭이 걸음의 보조를 맞추느라 애쓰는 가운데 울음을 삼키는 송순주를 이은명이 감싸 안았고, 허선영은 입술에 힘을 꾹 준 채 눈물을 참았다.

원체 원피스가 잘 어울리는 허선영이었다.

조춘아 디자이너가 특별히 신경 써 만든 심플한 디자인의 드레스가 허선영의 매력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느낌이었다.

레이스를 이용한 웨딩 헤어밴드와 작은 진주 귀걸이로 단아함을 강조한 허선영은 마치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여주인공처럼 보였다.

지켜보던 이들이 탄성을 지를 정도로 아름답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허선영이 천중명에게 다가왔다.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었고, 스크린에서나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매력적인 신부가 천중명 앞에 있었다.

걸음을 멈춘 허선영이 고개를 들어 천중명을 보았다.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를 아름다움과 감동에 천중명은 숨이 턱 막혔다.

“뭐해?”

천호득의 타박이 없었다면 아마 그렇게 바라보기만 했을지 모른다. 천중명은 천호득이 건네준 허선영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이 순간만큼은 천호득도 만감이 교차하는지 감정을 감추려 애썼다.

“살다가 회장님의 주례를 맡을 줄은 몰랐습니다.”

굵직한 유진교의 음성에 담긴 농담이 그나마 분위기를 바꿔주었다.

“신랑은 신부에게 성혼 맹세를 전하십시오.”

“나 천중명은 허선영을 신부로 맞아 평생을 함께할 것을 맹세합니다.”

“신부는 신랑에게 성혼 맹세를 전하십시오.”

“나, 허선영은…, 천중명을 신랑으로 맞아 평생을 함께할 것을 맹세합니다.”

지켜보던 주인영이 붉어진 눈으로 바라보는 앞에서 허선영이 성혼 맹세를 마쳤다.

“두 분이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천중명은 몸을 돌려 울음이 터진 허선영을 조심스럽게 안았다.

“인사 안 하고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천호득의 고함이 있고 나서 천중명과 허선영은 급하게 송순주에게 먼저 인사했고, 다음으로 천호득과 이은명을 향해 고개 숙였다.

대한민국 재계 1위로 올라선 지경그룹 천중명 회장의 결혼식은 그렇게 단출하게 진행되었다.

**

신상훈은 닷새 중 사흘을 여수의 지경케미컬에서 보냈고, 그 뒤 이틀은 지경전자의 연구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최첨단 시대였다.

요구하는 즉시 스웨덴의 리온자동차에서 보낸 자료가 지경케미컬과 지경전자에 바로 넘어왔다.

“배터리의 구조를 바꿀 수는 없을까요?”

“지금 연구하는 물질이 있기는 한데 아직 테스트도 거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승용차와는 확실히 출력과 구조가 달라서 기존의 배터리를 접목하는 부분도 쉽지 않습니다.”

트럭의 도면과 엔진의 성능, 출력, 동력 전달 체계를 확인한 지경전자의 연구소장이 머리칼에 손을 깊숙하게 집어넣은 채 고민에 휩싸여 있었다.

“블루크루드로 기존 연료를 충분히 대체할 수 있는데 굳이 위험부담을 안아가면서 배터리를 접목하려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완주가 아니라 우승이 목표라 그렇습니다. 유해물질이 전혀 나오지 않는 트럭으로 출전합니다. 연비가 떨어져도 비난의 대상이 되고, 멈추기라도 하면 돌이킬 수 없는 이미지 손상을 받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걸 왜 이렇게 서두르시냐는 겁니다. 이번은 기존 엔진으로 나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나 역시 그렇게 말했었습니다.”

연구소장의 불만이 신상훈은 오히려 반갑다는 투였다.

“파크 피터슨이라고 이렇게 콧수염을 두툼하게 기른 스웨덴연구소장이 있습니다. 그 양반이 지금 제가 소장님을 붙든 것처럼 매달려서 괴롭히지 뭡니까?”

오른손 검지를 콧수염처럼 입술 위로 붙여 보인 신상훈이 말을 이었다.

“우리 본사 회장님께 이번 랠리의 우승을 전해드리고 싶다고 하지 뭡니까? 세계적인 지경의 기술을 접목한 지경리온 트럭으로요.”

“들어줄 수밖에 없겠군요.”

“그래서 제가 스웨덴에서 날아와 회장님을 뵈었고, 다시 지경케미컬을 거쳐 소장님께 매달리는 거 아니겠습니까?”

졌다는 투로 연구소장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총괄 사장님.”

“말씀하십시오. 간식으로 족발이라도 사 올까요? 모처럼 한국에 왔더니 저도 먹고 싶은 것이 머리 위로 떠다닙니다.”

“원래 그렇게 유쾌하십니까?”

“이렇게 해서라도 회장님께 우승을 안겨드리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참! 아까 왜 부르셨습니까?”

“배터리 제작에 얼마나 시간을 주실 수 있습니까?”

신상훈은 앞에 놓인 일정표를 뒤적였다.

“조립과 최소로 테스트할 시간을 계산하면 꼭 열흘이 남습니다.”

“스웨덴에 가 계십시오.”

멍한 신상훈을 보며 연구소장이 짓궂은 표정으로 웃었다.

“그 트럭 랠리도 트로피 같은 거 줍니까?”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한 팀이 받는 것처럼 커다란 트로피를 받습니다.”

“거기에 우리 지경전자 이름을 새겨주십시오. 출력을 맞추는 건 무조건 열흘 안에 우리가 해내겠습니다. 엔진과 구동축 연결은 리온자동차의 몫입니다.”

“고맙습니다, 소장님.”

신상훈이 정말 기쁜 얼굴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

일요일 오후에 허선영은 삼성동 집에서 비서실 직원의 방문을 받았다. 공사가 끝난 벤처사업부를 돌아보고 온다며 천중명이 잠시 나간 틈이었다.

“사모님을 모시게 된 은서연입니다. 오늘부터 사모님은 지경그룹 V2 레벨로 지정되셔서 비서실 직원 세 명과 운전기사, 그리고 차량 세 대를 배정받으셨습니다.”

서른 중반의 은서연이 카탈로그 다섯 장을 허선영 앞으로 내밀었다.

“신용카드는 바로 사용하시면 됩니다. 그 외에 비서실이 도움 드릴 일의 종류와 제 전화번호를 카탈로그에 적어놓았습니다.”

이걸 몇 사람을 위해 일부러 만들었다는 거야?

허선영의 시선에 담긴 궁금함을 이해한 모양이었다.

“S1이 천호득 명예회장님, S2가 천중명 지경그룹 회장님, V1은 이은명 사모님.”

“내가 V2라는 거네요.”

“그렇습니다. 카탈로그는 그렇게 직계존비속만 받아볼 수 있습니다.”

카탈로그를 받는 허선영보다 건네는 은서연이 더 자부심 넘치는 느낌이었다.

“고마워요.”

당장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거절할 것도 아니어서 허선영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깍듯하게 인사한 은서연이 삼성동을 나서자 허선영은 카탈로그를 천천히 살폈다.

호텔 피트니스, 쇼핑, 가사도우미, 심지어 간단한 장보기까지 포함되어 있어서 카탈로그에 있는 모든 도움을 이용하면 허선영은 입만 벌려도 밥이 들어올 정도였다.

게다가 카드 한도는 말이 안 나오는 수준이었고, 비서실에 요청해 1년에 30억 원의 현금을 별도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카탈로그를 다 살핀 허선영은 그걸 원래대로 접어서 서재의 책상 서랍에 넣었다.

윤세계가 어떻게 망가졌는지, 필요 이상으로 많은 돈이 사람을 어떻게 망가트리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허선영이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을 천중명이 얼마나 끔찍하게 싫어하는지도.

은서연의 방문을 통해 한 가지 실감한 것도 있었다.

지경그룹 천중명 회장의 부인이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허선영은 탄천이 보이는 거실 창을 향해 서서 기지개를 켜는 것처럼 팔을 위로 쭉 들었다.

천중명과 허선영은 이제 정말 부부가 되었다.

“잘하자, 허선영! 청탁은 냉정하리만치 단호하게 거절하고! 내 것이 아닌 것에 욕심내지 말고! 다른 사람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자! 도깨비 회장의 사모님답게!”

허선영의 다짐이 삼성동 거실을 메운 뒤에 참기름 향처럼 풍기는 행복에 밀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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