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9
219. 그냥 죽어라, 윤성일 (3)
계속 얻어맞기만 하다가 시원하게 한 방 날려준 느낌에 윤성일의 이마를 물들였던 붉은색이 옅게 풀어져 있었다.
모처럼 숨을 고른 윤성일은 아랫입술을 내민 채 생각에 잠겼다.
대송장비는 대송자동차에 부품을 납품하는 회사다.
대송자동차와 연결고리가 끊긴 대송장비는 더 이상 제품을 팔 곳이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대송자동차도 당장 자동차의 부품이 필요하기는 하다만, 아쉬운 대로 중국이나 일본의 공장에서 조달하면 끝이다.
“그래. 이참에 네놈 덕도 봐야지.”
윤성일은 눈가를 좁혔다.
멍청한 놈 덕분에 남은 세 개 회사의 정직원을 해고할 명분도 쥐었다. 지경그룹 천중명 때문에 회사 사정이 어려워진 탓이라고 발표하면 분노의 화살마저 저쪽으로 향할 테니 장기적으로 그리 큰 손해는 아니었다.
오전 11시니까 2시간만 지나면 해결된다.
나중에 대송장비를 다시 사달라고 매달려 봐라.
눈이나 깜짝 하나.
앞에 천중명이 앉아있기라도 한다는 양, 윤성일이 도끼눈을 떴을 때였다.
똑똑똑.
노크 소리가 이상하게 윤성일의 심장을 쿵 떨어트렸다.
“뭐야?”
“윤병지 부회장이 대기 중입니다.”
윤성일은 매섭게 부속실 직원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저들이 무슨 죄가 있겠나.
“들어오라고 해.”
“예, 회장님.”
윤성일의 시선 앞에서 부속실 직원이 나가고, 곧바로 윤병지가 들어왔다.
“내가 근신하라고 했는데 뭐하는 짓이야!”
“회장님. 이걸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윤성일의 고함을 얻어맞은 윤병지가 힘겨운 얼굴로 작은 가죽가방에서 태블릿 PC를 꺼내 내밀었다.
이놈이 미쳤나? 이게 뭐라고?
매섭게 윤병지를 노려보던 윤성일이 손을 뻗쳐 태블릿 PC를 받았다.
뭐야, 이게?
태블릿 PC의 화면에는 한가운데 플레이 버튼을 의미하는 커다란 화살표가 전부였다. 힐끔 윤병지를 본 윤성일이 오른손 검지로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곧바로 바뀌었다. 그리고 타이핑을 하는 것처럼 위에서부터 글자가 주르륵 아래로 찍혀 나왔다.
“이… 이게….”
윤성일은 숨도 쉬지 못한 채 태블릿 PC를 들여다보았다.
잠시 뒤였다.
“하아. 하아-아! 하아!”
그는 태블릿 PC를 떨구고는 오른손으로 심장 부위를 움켜쥐었다.
“회장님!”
“조용히…. 조용히 해.”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윤성일은 밖의 누군가가 들어올 것을 염려하고 있었다.
그렇게 1분쯤 지났다.
겨우 진정한 윤성일이 지친 표정으로 앞의 소파를 가리켰고, 윤병지가 죄인처럼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설명부터 해봐. 네놈이 혹시 저쪽에 붙었던 거냐?”
“30분쯤 전에 모르는 남자가 찾아왔었습니다. 천중명 회장의 지시라고….”
“얼른 말해!”
“오후 1시에 주식을 양도한다면 이 모든 것이 세상에 알려질 거라는 말과…, 미국 현지 법인은 미국의 법으로 처벌받기 때문에….”
독이 확 오른 윤성일의 눈빛을 본 윤병지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자료에 있는 정도의 횡령이면 100년 이상의 징역형이 나올 거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끄윽.”
윤성일은 다시 가슴을 쥐어뜯듯 움켜쥐었다.
이번에는 진정하는 데 시간이 3분쯤 흘렀다.
“들은 것이 더 있다면 남김없이 말해.”
윤성일은 완전히 진이 빠진 얼굴이었다.
“비자금은 급발진으로 추정되는 사고의 보상비용과 해당 엔진을 사용한 6개 차종, 그리고 그 외 미션과 기타 결함 차종의 리콜비용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끄으….”
“회장님! 회장님!”
세 번째로 가슴을 움켜쥐며 상체를 굽혔던 윤성일이 마침내 바닥에 널브러졌다.
**
유진교는 지친 얼굴이었다.
비서실과 기획실을 두루 거쳐 미래발전본부를 맡았고, 지난 세월 동안 대한민국의 어지간한 재벌가와 그룹 임원들 사이에 이름을 알린 경영계의 인물이 되었다.
“후.”
그런 그가 최근 느낀 좌절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신임회장이 정보조직을 운영하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부쩍 성장했다는 사실도 누구보다 실감한다.
그러나 지금은 숫제 괴물로 변한 회장 앞에서 기본적인 서류 처리나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지금도 그렇다.
서류를 몇 번이나 확인했고, 증권사 송문철과 통화했으며, 법무팀에 자문해 본 결과 이번 적대적 인수는 이미 끝난 일과 같다는 답변을 들었다.
대송장비를 인수해도 부품을 팔 곳이 없어진 꼴이었다.
40조 원에 가까운 돈을 들이고 인수는커녕, 팔고 나올 시기만 노리며 대송의 자비를 바라는 처지가 되었다.
최치국에게 대송장비를 맡길 테니 나머지 세 개 회사의 회장단과 임원을 미리 생각해 놓으라고 들었다.
심지어 그중 하나는 최만호를 보낼 계획이라는 말도 있었다.
뭐가 더 있나?
유진교는 시간을 힐끔 보았다.
1시에 주식을 넘긴다는 발표였으니 이제 30분만 있으면 이번 프로젝트는 망신만 떨고 끝난다.
점심도 미룬 채 책상에 앉은 유진교가 다시 한 번 서류를 살필 때였다.
“본부장님!”
최만호의 다급한 음성이 들리고 그 뒤에 문이 열렸다.
저 냉정한 사람이 달려올 정도로 큰일이 뭐가 있을까?
시선을 든 유진교 앞으로 다가온 최만호는 확실히 당황한 얼굴이었다.
“윤성일 회장이 윤병지 대송물산 부회장과 방문했습니다. 지금 회장님 집무실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유진교는 목이 쑥 앞으로 나왔다.
**
윤성일은 반쯤 죽은 얼굴에 분노와 독기를 담았고, 윤병지는 보기 측은할 정도로 초췌한 얼굴이었다.
“앉으십시오.”
천중명이 권하기 무섭게 윤성일은 대뜸 먼저 소파에 앉았다. 천중명이 상석에 앉기를 기다렸던 윤병지까지 자리한 다음이었다.
“차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따뜻한 게 좋겠다.”
질문을 건넨 부속실 직원에게 거친 대꾸를 내놓은 윤성일이 천중명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저러다가 눈에서 피를 쏟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였는데 부속실 직원이 따뜻한 오미자차를 가져다주고 나갈 때까지 윤성일은 시뻘겋게 변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궁금한 게 있소.”
“말씀하십시오.”
“약점을 잡았으면 처음부터 그 방법을 사용하지 왜 일을 복잡하게 만들었소?”
“회장님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대항했다면 굳이 사용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내가 대송장비를 잘라낸 것이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다?”
거칠게 나온 질문이었는데 천중명이 보기에는 아직 이해할 만한 수준이었다.
“회장님 개인 돈으로 인수했다면 법원을 통해 해결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계열사의 유보금을 사용하시더군요. 그 회사에 투자한 사람들이 손해 볼 것을 알면서요.”
“내가! 우리 집안이 만든 회사요!”
“주식을 공개하는 순간, 주주들의 회사가 됩니다.”
“어디서 감히!”
윤병지가 움찔할 정도로 거친 태도였는데 천중명은 대꾸하지 않은 채 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이럴 때 긴장하거나 상대방의 기세에 눌리면 손이 떨린다. 그렇게 되면 손가락에 든 찻잔이 흔들리거나 아니어도 받침에 내려놓을 때 ‘달각’하는 게 아니라 ‘따르르’ 하며 떨리는 소리가 난다.
달각.
잔을 내려놓은 천중명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감정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내 집무실입니다.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십시오.”
독약을 삼킨 것처럼 윤성일의 볼이 씰룩였다.
“기회는 세 번 있었습니다. 대출금을 개인재산으로 상환했던가 오늘 주식 매입 자금을 그렇게 해결했어도 마지막 방법을 사용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두 가지잖아?
천중명이 말을 들은 윤성일이 고개를 갸웃했다.
“남은 하나는 적어도 오늘 이전에 선영 씨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다면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겁니다.”
“누구?”
“허선영, 이달 말에 나와 결혼할 사람, 허세직 의원의 딸입니다.”
“허!”
“재벌의 지위를 잃고, 돈마저 없어지면 윤세계가 같은 일을 당해도 당연하다고 여기실 겁니까?”
“감히 어디서!”
“내 집무실이라고 분명하게 알려드렸습니다.”
천중명의 눈빛이 매섭게 바뀌자 윤성일은 볼을 씰룩이며 애꿎은 어금니만 씹었다.
“원하는 것을 말해보시오.”
“대송자동차그룹입니다.”
“허허.”
“윤성일 회장님.”
천중명은 나직하게 윤성일을 불렀다.
“내가 마지막 패를 꺼내 든 것은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대송자동차그룹을 손에 넣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능력이 있으면 다른 사람의 인생쯤 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셨던 분이니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허선영인가 하는 아이 때문이오?”
찻잔을 향해 손을 뻗던 천중명은 천천히 자세를 세웠다.
“대송자동차그룹의 네 개 회사가 각각 100퍼센트씩, 총 400퍼센트로 계산했을 때, 회장님은 고작 4.7퍼센트의 주식밖에 안 가지고서 온갖 전횡을 일삼았습니다.”
윤성일은 천중명의 눈빛과 던지는 내용에 눌린 것처럼 보였다.
“해외에서 만든 비자금의 규모가 50조 원에 달합니다. 대송자동차그룹의 주식을 가진 주주 한 사람당 170만 원씩 돌아가는 큰돈입니다. 그런 범죄를 저지른 분이 너무 당당하게 나오시면 이후의 결과가 몹시 불행해 질 수 있습니다.”
천중명이 잔을 들었을 때, 윤성일은 완전히 기가 부러져 반쯤 남았던 생기마저 사라져버린 얼굴이었다.
**
[윤성일 대송자동차그룹 회장과 윤병지 대송물산 부회장이 전격적으로 지경그룹 천중명 회장을 방문한 지 한 시간이 넘었습니다.]
지경그룹 본사 건물 앞과 로비는 몰려든 기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지경그룹과 대송그룹 거의 모든 직원이 TV와 인터넷을 통해 보도를 지켜보았고, 일반 시청자들도 눈과 귀를 집중하고 있었다.
[방문 목적이 밝혀지지 않은 가운데 대송자동차그룹은 오후 1시로 예정되어 있던 주식의 양도를 연기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상황으로 봐서 지경그룹의 천중명 회장이 그린 메일을 수락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입니다.]
[이중도 기자. 그렇다면 윤성일 회장이 굳이 대송자동차의 지분을 매입하지 않아도 이번 사태가 원만하게 해결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순환출자를 통한 지배구조를 개선해야 하는 부담은 남지만, 대송장비의 지분을 회수한다면 당장 윤성일 회장이 개인적으로 지분을 매입할 이유는 없어집니다.]
지경그룹 본사의 로비에서 기자가 상황을 설명할 때였다.
느닷없이 뒤편에서 소란이 일었고 카메라 플래시가 거칠게 터져왔다.
“앞에 좀 숙여!”
“비켜! 비키라고!”
기자들의 고함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방송카메라가 급하게 움직여서 로비를 향해 나오는 남자의 상반신을 크게 잡았다.
[지경그룹 유진교 그룹발전본부 본부장입니다.]
화면에 플래시를 하얗게 뒤집어쓴 유진교가 들고 온 A4 용지에 시선을 주었다.
[주식회사 지경은 대송자동차그룹이 보유한 대송자동차, 대송모터스, 대송서비스의 주식 전부를 오늘 오후 3시에 어제 종가로 인수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촤자자자작. 촤자자자자자작. 촤자자작.
[이 결정은 본 그룹 천중명 회장과 대송자동차그룹 윤성일 회장의 회동에서 결정되었습니다. 이상입니다.]
“갑자기 그런 계약이 이루어진 배경을 설명해주세요!”
“오늘 회동은 누가 먼저 제안한 겁니까?”
유진교를 향해 달려드는 기자들을 비서실 직원들이 몸으로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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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국은 따귀를 얻어맞은 얼굴이었다.
대송장비의 회장을 맡으라는 말이 이제는 현실로 느껴졌다.
“이게 말이 돼?”
대송장비의 회장이 말이 되는 일이었다니! 그는 진심으로 천중명 회장이 괴물처럼 느껴졌다.
호텔의 객실에서 보도를 지켜보던 신상훈은 아예 넋이 빠져나간 것처럼 멍했다.
오전에 분명 면담했었다, 자신이 직접 천중명 회장을.
그때 있었던 전화 통화가 저런 의미였을까?
세상에 대송자동차그룹의 인수를 앞두고 트럭 랠리에 관해 그토록 세세하게 질문하며 문제점을 짚어갈 여유나 정신이 있다는 게 말이나 되나.
지경리온자동차에 대송자동차그룹까지 묶는다고?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신상훈은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
약정서를 작성한 뒤에도 윤성일은 일어서지 않았다.
“원하는 대로 다 해주었으니 비자금만큼은 내가 알아서 하게 두시오.”
“계약에 포함된 내용을 가지고 말씀하시면 서로 불편해집니다.”
“회사도 가져가고, 돈도 먹겠다면 그건 너무 한 일 아니오? 어차피 지경도 결국 회사 돈으로 대송자동차그룹의 지분을 인수한 게 아니냔 말이오.”
“주식회사 지경은 지주회사입니다. 그 정도는 아실 텐데요?”
“비자금을 리콜과 보상에 쓸 이유가 뭐가 있소? 우리 둘만 합의하면 누구도 몰라. 30퍼센트를 천 회장이 알아서 하고, 나머지는 내가 사용하겠소.”
애원처럼 윤성일이 매달리고 있었다.
“그렇게 하면 나도 결국 회장님처럼 될 겁니다.”
“천 회장만 아니었으면 나 역시 아무런 일 없었을 거요!”
“대신 억울한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겠죠. 돈 많은 집안에서 태어나 말도 안 되게 적은 지분으로 온갖 갑질을 해대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앞으로 뼈저리게 느끼시겠지만 알고 계셨으면 합니다.”
“허. 허허. 허허허.”
윤성일이 쓰러지듯 소파의 등받이로 털썩, 몸을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