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218화 (218/315)

# 218

218. 그냥 죽어라, 윤성일 (2)

일요일 저녁에 윤성일의 이마는 불로 지져놓은 것처럼 붉디 붉은색이었다.

“천하에 쓸모없는 것들.”

그는 이제 고함도 지르지 않았다.

대신 당장에라도 밟아서 죽일 수 있는 벌레를 상대하는 듯한 눈길과 음성으로 소파에 앉은 윤병지와 윤세계를 대했다.

“대송의 그늘에서만 사람 구실을 하는 너희 같은 것들이 호텔을 맡고, 대송물산의 부회장을 했었으니 이런 꼴이 생겼지.”

소파의 팔걸이를 짚은 윤성일이 올라오는 혈압을 누르려는 사람처럼 목을 뒤로 꺾었다가 바로 세웠다.

“세계, 너는 당분간 호텔에 나가지 말고 근신해.”

“예, 회장님.”

“나가!”

차갑게 윤세계를 내보낸 윤성일의 눈이 더욱 독하게 변했다.

“사람을 찾으랬더니 그나마 정보를 물어오는 놈의 눈을 망쳐서 돌아와? 네놈도 당분간 외출하지 말고 근신해. 외부와 연락하거나 골프장, 식당을 다닌다는 말이 들리면, 각오하는 것이 좋을 게다.”

참담한 얼굴로 일어난 윤병지가 고개를 숙이고 집무실을 나선 다음이었다.

“우 실장 들어오라고 해!”

잔을 치우는 부속실 직원에게 윤성일이 지시했고, 곧바로 밖에 있던 우세환이 안으로 들어왔다.

“이젠 다른 방법이 없다. 계열사 유보금을 이용해서 내일 주식을 매입할 테니 법무팀을 통해 서류 준비하고, 오전에 발표해.”

“발표자는 어느 급으로 정하시겠습니까?”

“우 실장이 해. 그 정도 선이 좋아.”

“알겠습니다, 회장님.”

비장한 표정의 우세환이 집무실을 나선 다음이었다.

상체를 앞으로 숙인 윤성일은 세수하듯 얼굴을 문지른 뒤에 길게 쓸어내렸다.

“그래! 대송장비는 네가 이겼다! 거기까지다. 내가 다시 힘을 얻은 뒤에 보자.”

고개를 다시 든 윤성일의 이마와 눈이 피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

월요일 아침에 지경그룹 본사의 현관과 로비는 기자들의 차지였다.

[주말에도 두 그룹 모두 회장단과 주요 부서의 임원들이 출근해서 앞으로의 계획과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긴박하게 움직였습니다. 금요일 오후에 대송그룹 기획실에서 방문한 것을 제외하면 아직 두 그룹 간의 접촉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이크를 든 기자가 지경의 로비에서 빠르게 뉴스를 전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경제사에 처음 있는 그룹간 적대적 인수이고, 해외에서조차 관심을 둘 정도로 보기 드문 사례입니다. 공식적인 발표를 내지 않았으나 지경그룹은 오늘 회계자료 열람과 임시주주총회를 정식으로 신청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TV 화면이 바뀌었다.

승용차에서 내린 천중명이 엄청난 플래시 세례 속에서 본사 건물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이었다. 비서실 직원들이 팔을 벌려 동선을 확보하려 애쓰는 모습도 나왔다.

[지경그룹은 예상 외로 차분한 모습입니다. 다만, 이번 적대적 인수에 실패했을 경우, 최근 강력하게 확보한 신임 천중명 회장의 지배력이 급격하게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습니다.]

뉴스를 보던 천호득이 리모컨을 들어서 TV를 껐다.

그런 뒤에 그는 흔들리는 고개를 서재의 창으로 돌렸다.

“꼬리를 자를 테지. 팔이나 다리를 잘리는 것처럼 아프겠고, 미칠 것처럼 자존심 상하는 일이겠지만, 윤성일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지.”

천호득의 눈빛에 복잡한 감정이 올라와 있었다.

“어쩔 텐가, 회장. 회장은 어찌할 거야.”

달려가서 지켜보고 싶은 욕구를 삼키며 천호득은 그렇게 서재의 창을 바라보았다.

**

15만 원이던 대송장비의 주가가 금요일 저녁에 20만 원이 되더니, 월요일 장이 시작되기 무섭게 26만 원으로 상한가를 기록했다.

지경그룹이 사들인 주식이 대략 40조 원어치다.

금요일의 상한가로 대략 10조 원의 장부상 이익이 있었고, 월요일 개장과 동시에 다시 15조 원의 수익이 잡혔다.

이틀 만에 장부상 가격이 25조 원 부풀어지는 세상이라니, 천중명은 기가 막힌 심정으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물론 주식을 시장에 내다 팔면 바로 하한가로 돌아서서 실제로 수익이 저리 나오지는 않겠지만, 자산 평가는 아무튼 그렇다.

똑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고 집무실에 들어선 유진교가 책상에 앉은 천중명에게 곧장 다가왔다.

“회계자료열람 신청과 임시주주총회 신청을 마쳤습니다.”

“고생하셨어요.”

결재판을 받은 천중명이 신청서 내용을 확인할 때였다.

모니터에 올라온 숫자들이 빠르게 변하는 것이 보였다.

뭐야, 이건?

대송장비의 매도물량이 급격하게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똑똑똑.

그리고 그 직후에 최만호가 급한 얼굴로 집무실을 향해 들어왔다.

“회장님. 대송그룹에서 순환출자로 보유 중이던 대송자동차와 대송모터스의 주식을 윤성일 회장이 직접 매입하겠다고 발표한답니다. 오전 9시 20분에 기자회견을 한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우선 지시부터 내리고 의논하죠.”

천중명은 인터폰에 손을 뻗었다.

“지경증권 송문철 회장 연결해 줘.”

[네, 회장님.]

유진교와 최만호가 기다리는 앞에서 답은 바로 있었다.

[2번에 송문철 회장 대기 중입니다.]

수화기를 든 천중명은 2번 버튼을 눌렀다.

“송 회장님.”

- 예, 회장님.

“대송장비의 주식은 충분합니다. 이제부터 자동차와 서비스의 주식을 시장 상황에 맞춰 매입하세요. 오늘 사용할 수 있는 한도는 5조 원이 적당합니다.”

- 알겠습니다, 회장님.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몸을 일으켜 책상 서랍에서 리모컨을 꺼냈다. 아직 시간이 있는 데도 화면은 회의장의 빈 단상을 비추고 있었다.

소리를 줄인 천중명은 리모컨을 들고 소파로 움직였다.

“앉으세요.”

두 사람이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천중명의 앞에 앉았다.

“그리 놀랄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내가 윤성일 회장이었어도 대송장비를 잘라주고 자동차를 지키려 했을 테니까요.”

“회장님. 적대적 인수를 해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온통 당황스러운 일뿐입니다. 임시주총에서 정관변경을 신청하는 것도 그렇고, 오늘 아침 윤성일 회장이 지분을 취득하겠다는 발표도 그렇고, 정말 단순한 방법이었는데 그런 것들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어쩐지 5년쯤 늙어 버린 듯한 얼굴로 유진교가 고백처럼 말을 꺼냈다.

“설마 물러나야겠다는 생각을 하시는 건 아니시죠?”

“죄송합니다, 회장님.”

생각을 읽힌 것이 민망했는지 유진교가 시선을 떨궜다. 그러다가 생각난 것이 있는지 그가 고개를 들었다.

“회장님께선 이 모든 상황을 짐작하셨습니까?”

“어제 윤성일 회장이 폭력을 행사하는 선까지 움직였습니다. 남은 것은 대송장비를 우리에게 잘라주는 것밖에 없죠.”

“그렇다면 지금에라도 지분매각금지가처분을 신청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천중명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하면 대송자동차그룹을 가져오는 일이 윤성일 회장의 뜻대로 소송전으로 가게 됩니다. 시작하나 보네요. 일단 들어보고 의논하죠.”

말을 중단한 천중명은 리모컨을 집어서 줄여놓았던 볼륨을 키웠다. TV 화면에서 플래시가 요란하게 터지는 가운데 묵직하게 생긴 남자가 걸어 나왔다.

“대송자동차그룹 우세환 기획실장입니다.”

최만호가 남자의 정체를 알려준 직후였다.

[기획실장 우세환입니다. 윤성일 그룹 회장이나 부회장급이 발표하리라 짐작했는데 대송자동차그룹은 이 발표의 격을 애써 낮추는 느낌입니다.]

사회자가 소곤대는 것처럼 말을 하는 사이 정장 차림의 우세환이 단상 앞에 서서 올려놓은 서류에 시선을 주었다.

[지난주 금요일에 천박한 방식의 불행하고 부도덕한 경영권 침해가 있었습니다. 주말 동안 대송자동차그룹은 다각도로 원만한 협상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그 모든 제안이 거절되었습니다.]

플래시를 받으며 숨을 고른 우세환이 다시 입을 열었다.

[대송자동차그룹은 순환출자를 통해 기업의 결속을 극대화하려 애썼고, 그동안 대한민국의 경제와 낙후된 자동차산업을 이끌며 고군분투하였습니다.]

천중명이 픽 웃는 것을 본 유진교와 최만호가 얼른 시선을 화면으로 돌렸다.

[오늘 오후에 1시에 대송장비가 가진 대송자동차의 지분 20.16퍼센트, 또 대송모터스가 가진 대송서비스의 지분 19.22퍼센트를 윤성일 대송자동차그룹 회장에게 매각합니다.]

발표와 동시에 플래시가 요란하게 터져 나왔다.

[대송자동차그룹은 이번의 불행한 사태를 통해 그룹의 구조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 것이며, 앞으로도 자동차산업을 선도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기자들이 급하게 손을 들거나 고함처럼 질문을 던졌는데 우세환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발표장을 떠났다.

[기습적인 발표였습니다만, 꽤 효과적인 대책인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경제 전문 기자의 말이 나온 직후에 천중명은 리모컨을 들어 TV를 껐다.

대송장비의 지분을 확보했더라도 아직 그곳의 대표이사회장을 비롯한 임원들은 그대로 윤성일의 사람이었다.

나중에 절차상 하자가 생길지언정 당장 윤성일은 자기 사람을 이용해 대송장비가 가진 대송자동차의 지분을 사들이겠다고 발표했다.

유진교와 최만호는 이번 발표에 꽤 놀란 눈치였다.

“우선 회계자료 열람과 임시주총에 신경 쓰세요. 나머지는 천천히 가면 됩니다. 참 본부장님.”

몸을 일으키려던 유진교가 얼른 시선을 주었다.

“밴드사와의 비리를 정리하고 나면 최치국 회장을 대송장비 회장으로 발령 낼 생각입니다. 나머지 대송자동차와 모터스, 그리고 서비스의 임원들을 미리 생각해두세요. 예상보다 더 빠르게 결과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잠시 멈칫했던 유진교가 “예, 회장님.”하고는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몇 번 당하고 나자 시킨 일이라도 제대로 해보겠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실장님이 아무래도 그중 하나를 맡아주셔야 할지 모릅니다. 대송의 그늘을 지우고 우리 지경의 색을 입힐 만한 능력자로 실장님 같은 분이 없으니까요.”

상황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유진교의 태도를 본 최만호가 분명하게 고개 숙여 답했다.

두 사람이 나간 다음이었다.

천중명은 책상에 앉아 검지와 중지로 눈썹을 매만졌다.

시간이 걸리는 정공법,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찌르라는 천호득의 조언, 둘 중 어느 것이 현명하고 효과적인 방법일까?

이럴 때 천호득의 독한 말을 듣고 나면 힘이 좀 날 것 같은데 누가 뭐래도 결정은 온전히 천중명의 몫이었다.

천중명은 전화기를 들고서 번호를 눌렀다.

- 황성규입니다, 회장님.

“보도 보셨나요?”

- 예, 회장님.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그 전에 윤성일 회장이 주식을 매입하는 돈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확인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 30분 안으로 연락 드리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주가를 확인했다.

대송장비는 무너진 상한가 아래에서 출렁였고, 반대로 대송자동차는 상한가를 단단하게 굳힌 모양새였다.

똑똑똑.

그때 노크와 함께 부속실 직원이 들어왔다.

“리온자동차, 신상훈 총괄사장이 도착했습니다.”

“들어오라고 해요.”

휴대 전화기를 든 천중명이 몸을 일으켰을 때, 신상훈이 집무실로 들어섰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앉읍시다.”

소파에 앉은 천중명이 리온자동차의 분위기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부속실 직원이 차를 주고 나갔다.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회장님. 송구하게도 스웨덴에 있느라 최근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괜찮으니까 화상회의를 두고도 굳이 직접 온 이유를 말해보세요.”

눈치를 살피던 신상훈이 3부의 계획서를 꺼내서 천중명 앞에 놓아주었다.

“회장님.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해 지중해를 거쳐 사하라 사막을 통과하는 다카르랠리입니다. 통상 승용차와 지프, SUV가 참가하는데 이벤트 형태로 트럭 랠리가 따로 있습니다.”

다카르랠리는 들어봤지만, 트럭만 참여하는 랠리가 있다는 말은 처음이었다.

“트럭을 제조하는 회사의 참여도 부진하고, 더불어 차종이 적어서 언론에 크게 보도되지는 않았습니다.”

“이걸 보고하는 이유는요?”

“한 달 뒤에 있을 랠리에 블루크루드와 배터리를 이용한 트럭으로 참여하고 싶습니다.”

이게 뭔 소리야?

“유해물질이 전혀 나오지 않는 트럭으로 랠리를 완주한다면 유럽, 중국의 새로운 트럭시장은 물론이고, 미국이 주도하는 픽업트럭 시장도 리온이 가져올 수 있습니다.”

천중명의 표정을 본 신상훈이 얼른 설명을 덧붙였다.

“그래서 직접 들어온 거네요? 내가 허락하면 지경케미컬의 블루크루드와 지경전자의 배터리 상황을 체크하려고?”

“외람되지만 그렇습니다, 회장님. 연구진들은 엔진의 성능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신상훈이 답을 마쳤을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천중명의 휴대 전화기가 울었다.

“잠시만.”

액정을 확인한 천중명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황성규입니다, 회장님. 윤성일 회장은 계열사 유보금을 차입 형태로 동원할 예정입니다.

황성규가 빤히 예상했던 내용을 알려주었다.

- 그나마 차입은 5조 원이고, 나머지 27조 원은 다른 계열사에서 직접 인수하는 방식입니다.

천중명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순환출자를 벗어나겠다더니 결국 다른 계열사 돈으로 뺑뺑이의 방향만 돌리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게다가 윤성일이 인수한다고 해놓고 개인 돈은 1백만 원도 내놓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추하게 나올 거라면 그냥 죽어라, 윤성일.

“시작하세요. 윤병지 부회장을 통하는 게 좋겠습니다.”

- 예, 회장님.

통화를 마친 천중명의 눈빛이 매섭게 빛나고 있어서 앞에 앉아있는 신상훈이 눈치를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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