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217화 (217/315)

# 217

217. 그냥 죽어라, 윤성일 (1)

윤세계는 결국 허선영에게 전화하지 못했다.

토요일 내내 번호를 띄웠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는데 마지막까지 통화 버튼을 누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밤이 깊었다.

탁자에 올려놓은 휴대 전화기가 쑤우욱 거대하게 몸집을 키우더니 느닷없이 팔과 다리가 불쑥 나왔고,

“그깟 전화 한 통을 못해!”

위쪽이 붉게 달아올라서는 윤세계를 죽일 듯이 달려들었다.

“허선영에게 전화해! 살려달라고 말하라고!”

시커먼 동굴에서 울려 나오는 듯한 고함과 함께 휴대 전화기가 윤세계의 목줄을 움켜쥐고는 다른 팔로 통화 버튼을 불쑥 눌렀다.

“아-아악!”

그렇게 잠에서 깨어난 윤세계는 무서운 침대를 피해 거실 소파에 멍하니 앉아 아침을 맞았다.

세련되게 꾸민 거실이 지옥처럼 느껴졌고, 눈은 모래를 부어 넣은 것처럼 껄끄러웠으며, 피부는 수분을 빨아낸 것처럼 푸석거렸다.

몇 시나 되었을까.

우우웅. 우우웅. 우우웅.

그녀의 휴대 전화기가 울었다.

마른 침을 삼킨 뒤에 윤세계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회장님.”

- 어떻게 됐길래 보고가 없어?

“전화를 안 받습니다. 지금부터 다시 연락해 보고….”

- 전화를 안 받는다?

아차! 나중에 통화목록을 보여 달라면 들통 나는데!

“정오까지 연락을 안 받으면 찾아가 보겠습니다.”

- 시간이 없다.

“예, 회장님.”

통화를 마친 윤세계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짧은 울음을 터트렸다. 그래! 전화 한 통 한다고 해서, 자존심 꺾고 만나자고 매달린들, 사람이 죽는 건 아니다.

윤성일이 무섭지, 허선영은 두려운 존재가 아니니까.

밤을 새우다시피 한 윤세계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번호를 찾았고, 몇 번이나 호흡을 가다듬은 뒤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

허선영이 평창동 저택에 들어설 때 마침 천호득은 장만섭과 함께 정원으로 나서고 있었다.

“저 왔습니다, 아버님.”

“앉아.”

“어머님께 인사드리고 나오겠습니다.”

천호득에게 말을 건넨 허선영이 정원을 돌아 현관으로 향할 때였다.

우우웅. 우우웅. 우우웅.

그녀의 핸드백에서 휴대 전화기가 울었다.

걸음을 멈춘 허선영이 꺼내 든 휴대 전화기의 액정에는 뜻밖에도 윤세계의 이름이 올라와 있었다. 허선영의 인생을 망치기 위해 준비하고 그걸 지켜보기 위해 기다렸던 여자였다.

그래놓고 이렇게 전화를 하다니, 대송그룹이 곤란한 처지에 놓이자 전에 무슨 짓을 했는지 잊어버렸나?

망설이는 사이 진동이 멈췄다.

우우웅. 우우웅. 우우웅.

그런 뒤에 곧바로 다시 울기 시작했다.

반드시 통화할 거야! 받아! 받으라고!

통화를 거절하면 윤세계는 회사로 찾아오고도 남을 여자였다. 현관을 벗어난 벽에 붙어서 허선영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윤세계예요.

뭔가 꺼끌꺼끌한 음성이었는데 허선영은 답을 하지 않았다.

- 오늘 잠깐 봐요.

“미안하지만, 만나고 싶지 않아요. 혹시라도 나를 통해서 중명 씨에게 무언가를 바란다면 잘못 짚었어요.”

- 그러니까 일단 만나요.

“싫어요. 그러니까 전화하지 마세요.”

대꾸가 없는 틈을 이용해 허선영은 얼른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후우.”

가슴을 진정시킨 허선영이 몸을 돌리다가는 화들짝 놀랐다.

“아버님?”

장만섭을 뒤에 세운 천호득이 휠체어에 앉아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윤 씨 집안 아이지?”

“예.”

우우웅. 우우웅. 우우웅.

“네 아버지를 망가트렸고, 이 천호득의 며느리, 지경그룹의 회장 부인이 될 너를 망치려 했던 여자아이다! 왜 네가 사정하는 것처럼 전화를 받아? 그깟 통화가 무서워서야 앞으로 더 큰 일이 있을 때 어떻게 중심을 잡고 버텨?”

천호득은 언젠가 백화점 지하에서 보았던 그 눈빛을 하고 있었다.

울리던 진동이 끊겼다.

우우웅. 우우웅. 우우웅.

그리고 연달아 다시 울렸다.

“그런 여자아이가 함부로 전화할 수 있을 정도로 네가 모자란 사람인 게냐, 아니면 지경그룹이 그 정도로 얕보이는 수준이었던 게냐?”

“죄송합니다.”

“고개 들어! 당당해! 앞으로 그런 청탁 전화는 끝이 없다. 매달리기도 하고, 협박도 하지. 매번 그렇게 시달리며 살 테냐! 전화 받아! 받아서 누가 위인지, 칼자루를 잡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그 윤 씨 집안 아이에게 분명하게 알려줘.”

희한한 경험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며 겪은 일들이, 매서운 천호득의 눈빛이, 천중명이라는 남자가 있다는 사실이 허선영을 강하게 만들어주는 느낌이었다.

각오를 다진 허선영은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여보세요? 선영 씨?

“윤세계 씨. 내가 말했는데요? 만나고 싶지 않고 전화하지 말라고요.”

허선영의 음성이 전에 없이 강하고 매몰찼으며, 냉정했다.

- 선영 씨. 내가 사과할게요. 그전의 일은….

“나는 당신을 용서할 마음이 없어요. 그러니 내게 매달리지 말고, 당신의 그 잘난 능력으로 해결해요. 그리고 그럴 능력도 없지만, 설사 할 수 있다고 해도 나는 중명 씨가 하는 일에 함부로 끼어들 생각이 전혀 없어요.”

손은 떨리고 마른 침이 넘어가는데 가슴 속에 사이다를 통으로 부어 넣은 것처럼 속이 이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잘했다! 조금 더! 강하게!

바로 정면에서 천호득이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흔들리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지금 평창동이거든요. 만약 또 전화하면 내가 우리 아버님께 말씀드려서라도 대송 회장님께 항의할 테니 그렇게 알아요.”

당황했는지, 할 말이 없었는지 윤세계는 침묵을 유지했다.

“분명히 말하지만, 다시 전화하면 윤성일 회장님이 곤란하게 되실 거예요. 우리 아버님 아시죠? 그렇게 알고 끊어요.”

통화를 마친 허선영이 잠수를 끝낸 사람처럼 숨을 들이마시는 것을 보며 천호득이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어떠냐? 후련하지?”

“시원한데 떨려요.”

“흐헤헤헤.”

천호득은 무척이나 대견하다는 투였다.

**

이성이 날아간 윤성일의 모습이 역병처럼 주변으로 번져 기획실, 비서실을 오염시키더니 이제는 임원들까지 미쳐 날뛰는 지경이었다.

전충호의 승용차 뒷좌석에 앉은 윤병지는 그나마 마지막 남은 한줄기 이성을 붙들고서 시간을 끌었다.

“부회장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박승양, 저 인간은 천상기 회장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데리고 나오더라도 사채업자와의 분쟁으로 몰고 가면 크게 문제 될 것도 없습니다.”

20미터쯤 앞의 건물 옥상에 곽대출과 박승양이 함께 있었다.

“곽 이사라는 사람이 워낙 날래. 내가 호텔에서 봤거든. 게다가 천 회장의 심복 아닌가? 일이 커지면 돌이키지 못해.”

“우리가 데려온 인원이 승합차 두 대에 이십 명이고, 저쪽은 옥상에 곽대출, 박승양, 그리고 1층에 세 명이 전부입니다.”

기회가 멀어진다는 것처럼 전충호는 다급하게 매달렸다.

“박승양만 데리고 나오면 끝입니다. 곽대출이 아무리 설쳐도 숫자에서 워낙 차이 나는 걸 어쩌겠습니까? 호텔에서는 저쪽 숫자가 더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윤병지는 참담한 심정으로 건물을 바라보았다.

“부회장님! 휴일을 이대로 허비하고 나서 저녁에 회장님을 어떻게 감당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우리에게 남은 건 이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런 그의 마지막 이성을 전충호가 교묘한 말로 툭 끊어버렸다.

“곽 이사는 절대 다치면 안 돼.”

“맡겨주십시오. 구석으로 몰아놓은 뒤에 얼른 박승양만 데리고 나오겠습니다.”

뒷좌석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인 전충호가 차에서 내렸다.

그가 재킷의 단추를 풀자 두 대의 승합차에서 건장한 남자가 우르르 내렸다.

“가자! 안에 있는 인간들을 한 놈 남김없이 싹 쓸어 버려!”

전충호는 승용차에서 했던 것과 전혀 다른 지시를 남자들에게 내렸다.

**

숨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집에만 있기 갑갑해서 박승양은 일요일인데도 삼성동의 건물 옥상에 있었다.

“어? 심복 이사님? 저기!”

놀란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서 거친 남자들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많이 왔네요.”

“아래 세 명밖에 없던데….”

“괜찮을 겁니다.”

휴일이라 공사하는 사람들도 없어서 아래에는 진짜 세 명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곽대출은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걸음걸이를 보면 앞에 서서 오는 쥐색 양복의 남자는 훈련을 좀 받았고, 나머지 대부분은 모아온 놈들인 데다….”

곽대출은 하릴없이 길 가는 사람을 평가하는 놈팡이처럼 다가오는 남자들을 바라보다가 히죽 웃었다.

시선을 든 전충호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개새끼. 힘도 없이 생긴 게 눈알을 파줄까?”

전충호에게 들리기 어려울 정도로 나직한 말이었지만, 박승양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곽대출이 한 말이 절대 농담처럼 들리지 않아서였다.

거리가 가까웠다.

건물 바로 앞에서 우르르 달린 남자들이 안으로 뛰어들었고,

퍼억! 콰작! 퍼버벅! 퍽퍽!

곧바로 고함과 함께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계단을 타고 거칠게 올라왔다.

“뒤로 오시죠.”

박승양이 얼른 몸을 돌려 곽대출의 뒤편으로 움직인 직후였다.

와락! 와라락!

세 명의 남자가 불쑥 위로 올라왔다.

“박승양 회장님. 우리와 함께 가주셔야겠습니다.”

전충호가 곽대출의 앞을 막듯이 나선 뒤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뭐해? 얼른 끌고 와!”

남자 둘이 박승양에게 달려든 직후였다.

콰악! 콱!

“끄아-!”

“끄아아-!”

어딜 어떻게 맞았는지 두 인간 모두 눈을 움켜쥔 채 절을 하듯 곽대출의 앞으로 몸을 구부렸다.

전충호는 곽대출이 손을 쓰는 것도 못 봤다. 게다가 아래에서 올라와야 할 부하들이 아직 한 놈도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콰악! 털썩! 콰자작! 털썩!

상체를 구부린 두 놈의 얼굴을 무릎으로 걷어찬 곽대출이 목을 좌우로 꺾으며 전충호에게 다가섰다.

“왜 이래?”

히죽!

“너 다쳐!”

퍼억!

“컥!”

울대를 얻어맞은 전충호가 목을 부여잡는 순간에,

꽈악.

곽대출의 억센 손이 그의 이마와 눈을 감싸듯 움켜쥐었다.

“끄억! 끄어어억!”

전충호는 앞의 두 놈보다 더 적극적인 자세로 곽대출의 앞에 엎어져 버둥거렸다. 눈알을 파낸 건 아니지만, 두 눈에서 피를 흘리는 것만은 분명했다.

박승양이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살필 때, 아래에서 불쑥 남자 둘이 올라왔다.

“뭐 이런 것들을 못 막아서 셋씩이나 올려 보내? 너희 도깨비 출신 맞아?”

“죄송합니다.”

“이런 일이 처음이니까 이해하겠다만, 회장님 앞에서도 이런 추한 꼴을 보이면 내가 너희를 죽여 버릴지 몰라. 그따위로 할 거면 도깨비란 이름 팔지 말고 돌아가.”

“죄송합니다, 선배님.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조심하겠습니다.”

“이것들 치워.”

고개를 끄덕인 두 남자가 독한 눈으로 움직여서 한 명은 전충호의 뒷덜미를 끌어갔고, 다른 한 명은 얼굴이 엉망으로 망가진 남자 둘의 재킷 목덜미를 잡아서 끌었다.

**

천중명은 집무실 책상에 앉아서 전화를 받았다.

- 데려온 놈 중 하나가 입을 열었습니다. 전충호라고 윤성일 회장이 부리는 사람이랍니다. 윤병지 부회장은 근처 승용차에 있다는데 일단 놔뒀습니다.

“잘했다. 박 회장이 다치거나 한 건 아니지?”

- 서운합니다, 회장님.

곽대출의 대꾸가 웃겨서 천중명은 웃으며 통화를 마쳤다.

대송장비의 주식을 지경에 빼돌린 것에 보복하려 했다면 우선 칼을 휘둘렀어야 맞는데 박승양을 끌고 가려 했다고 들었다.

천상기를 찾아내 천중명을 곤란하게 만들려는 의도로 봐야 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어찌할 수 없어 윤성일이 미쳐 날뛴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윤성일에게 남은 것은 팔다리를 자르는 일 말고는 없다.

생각을 정리한 천중명은 휴대 전화기를 들어 모처럼 황성규의 번호를 눌렀다.

- 예, 회장님. 황성규입니다.

“윤성일 회장의 숨통을 끊을 때가 되었습니다. 준비는 어떻습니까?”

- 대송자동차그룹의 해외공장과 판매망을 통해 비자금을 조성한 자료를 확보했습니다. 그 외에 정치자금으로 흘러들어온 정황, 주가를 조작한 자료들을 모아두었습니다.

“준비해두시는 게 좋겠어요.”

- 지시하시면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회장님.

통화는 간단하게 끝났다.

자, 팔다리를 잘라도 뜻대로 안 되면 어떻게 할래, 윤성일?

천중명이 왼손 검지와 중지로 눈썹을 매만질 때였다.

똑똑똑.

적대적 인수가 벌어지는 긴박한 상황이어서 그런지 일요일인데도 부속실 직원은 두 시간에 한 번씩 메모를 전하고 있었다.

“신상훈 총괄사장?”

천중명은 메모에 적힌 이름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내용에 면담요청이라고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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