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216화 (216/315)

# 216

216. 내 돈 함부로 쓰면 크게 다칩니다 (3)

최치국은 대략 3분쯤에 걸쳐 지경 프리터의 상황을 설명했다.

- 고생했습니다.

“아닙니다, 회장님. 다만, 어수선한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업무와 생산이 본궤도에 오르기 위해서 임원 선임을 서둘러 주시길 바랍니다.”

- 그렇군요.

천중명의 음성은 덤덤했다.

- 임원 선임을 비롯해 의논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내일 오전 10시쯤 본사로 나와 줄 수 있습니까?

“예, 회장님. 10시에 찾아뵙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최치국은 휴대 전화기를 계속 들여다보았다.

임원 선임을 의논한다고?

그 외에 의논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도 들었다.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화창한 토요일 오후에 최치국은 번호 네 개가 맞은 로또 복권을 들고 남은 숫자 두 개를 확인하기 직전의 심정이었다.

내일 오전 10시라고 들었다.

**

윤병지가 보기에 윤성일은 이성을 잃은 상태였고, 그 정도가 직전에 보았던 것보다 월등히 심해져 있었다.

원하는 대로 일이 돌아가지 않거나 화가 치밀 때면 이마가 붉어지는 것이 윤성일의 특징이기는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예 고장 난 신호등처럼 내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떻게 그거 하나를 못 찾아-!”

당연하게 과거에도 고함을 지를 때는 있었다. 그러나 곧바로 이성을 찾곤 했는데 지금은 목이 갈라지도록 악에 받친 소리를 질러댔다.

“어떻게 주식을 넘기는 걸 모를 수가 있어! 눈은 뭐에 쓰려고 달고 다녀!”

박승양에게 주식을 넘기겠다고 결정한 사람이 윤병지는 아니었다. 원체 기가 죽어 있던 터라 반항은 꿈도 못 꾸지만, 윤병지 역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나가! 나가서 천상기를 찾아와! 아니면 천중명의 바짓가랑이라도 붙들고 매달려서 일을 돌려놓던가!”

나가라는 거야, 아니면 아직 남아있어야 하는 거야?

“나가라는데 뭘 하고 서 있어!”

고개를 꾸벅 숙인 윤병지가 문을 향해 걸을 때였다.

“저런 화상을 믿고 일을 시킨 내가 모자란 거지! 주변에 사람이 없어! 사람이! 죄다 개, 원숭이, 벌레들뿐이야!”

윤성일의 가시 돋친 말들이 윤병지의 뒤를 잔인하게 쑤셔댔다.

“후우.”

넥타이를 당겨 숨을 내쉰 윤병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적대적 인수를 당하면 이성을 잃을 수야 있겠다. 그러나 윤성일의 반응은 아픈 곳을 제대로 찔린 사람과 같았다.

‘그룹 회장이니 내게도 말 못한 거야 있겠지! 혹시?’

엘리베이터 안에서 윤병지는 깨달음처럼 얻은 것이 있었다.

‘비자금? 해외?’

생각은 점점 달려 나갔고, 그러자 윤성일의 지금 반응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젠장!”

만약 지금 떠오른 생각이 진실이라면 윤병지는 만져보지도 못한 돈 때문에 함께 엮여서 구치소로 향할지 모른다.

때앵.

생각 그만하고 얼른 내려서 살 궁리를 하라는 것처럼 엘리베이터가 윤병지를 토해냈다. 로비를 살피던 그의 시선에 구석의 소파에 앉아 있던 윤세계가 들어왔다.

언제고 도도함과 여유를 잃지 않던 윤세계가 로비 소파에 후줄근하게 앉아서 그를 기다리는 모습이 마치 대송그룹의 현재를 보는 것 같았다.

“여기는 보는 눈들이 많다. 나가자.”

토요일이라 그나마 좀 낫기는 했는데 비상 상황이라 오가는 직원이 제법 보였고, 개중에는 인사를 하는 직원도 있었다.

그나마 로열패밀리라고 차를 현관 앞에 둔 것이 다행이어서 윤병지는 윤세계와 함께 10분쯤 떨어진 곳의 호텔로 향했다.

발렛 파킹을 부탁한 두 사람은 커피숍으로 들어가 차를 주문했다.

“회장님이 제게 그런 일을 시키실 줄은 몰랐어요. 내가 그걸 어떻게 해요?”

윤병지는 ‘천상기를 찾는 일과 바꿀래?’ 하는 말을 꿀꺽 삼켰다. 사람이 사라진다는 것이 이렇게 막막한 줄은 몰랐다.

“황금주 있으시잖아요. 3자 배정으로 주식수를 불려도 되고요. 왜 저렇게 흥분하시는지 이해를 못 하겠어요.”

3자 배정은 공증계약서를 통해 막혔고, 해외 비자금이 있을지도 모른다. 대나무 숲에 소리치고 싶은 심정을 감추며 윤병지는 묵묵하게 듣고만 있었다.

“삼촌. 삼촌이 허선영을 만나주시면 안 돼요?”

“결과가 좋으면 몰라도, 그렇지 않았을 때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회장님께서 그걸 받아들이실 것 같으냐?”

“그럼 어떻게 해요! 정말 허선영에게 가서 매달리기라도 해요? 난 정말 못해요, 삼촌!”

직원이 커피를 가져오는 순간에 윤세계는 백에서 고급 티슈를 꺼내 눈물을 찍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불륜 관계를 정리하는 나이 든 상간남과 신세 망친 젊은 여자로 보이기 꼭 좋았다.

윤병지는 쓰디쓴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너는 허선영이 어디 있는지나 알지. 안 되면 월요일에 지경디자인을 찾아갈 수도 있고. 나는 어디에서 죽여 파묻었는지조차 모르는 천상기라는 사람을 찾아다닌다.’

비참한 심정에 윤병지는 숨을 내쉬었다.

전충호가 미친 사람처럼 뛰어다니고는 있을 텐데 아직 연락이 없는 것을 보면 딱히 얻은 것은 없는 모양이었다.

천상기, 당신 어디 있어?

전화라도 좀 해봐요! 제발!

울음을 수습하는 윤세계를 보며 윤병지는 턱없는 소망을 떠올렸다.

**

파도 소리가 귀가 아프도록 크게 울린다는 사실을 천상기는 처음 알았다. 바다에서 풍기는 묘한 비린내에 머리가 아프다는 것도 이름 모를 섬에서 배웠다.

세상에 태어나서 라면을 처음 끓여본다.

문어도, 새우도, 심지어 김치도 없는 라면을 말이다.

배는 왜 이렇게 고픈지, 고급 호텔 한식 레스토랑에 앉아 기름기 거둬낸 갈비 구워서 윤기 흐르는 밥과 정갈한 반찬에….

“뭐하냐? 라면을 종일 처먹어?”

그때 누군가 천상기의 움막으로 불쑥 들어왔다.

나무로 인디언 움막처럼 틀을 잡고, 두꺼운 방수비닐을 둘러서 실제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물이 아직 안 끓어서….”

“개새끼! 라면 하나 끓이는데 물을 이렇게 많이 부으니까 여태 안 끓지! 에라, 이!”

물이 많았나?

새벽에 들어와 사람 둘을 바다에 처넣은 남자가 거칠게 다가와서 냄비의 물을 절반쯤 옆의 그릇에 덜어냈다.

“빨리 처먹고 나와!”

야외용 가스레인지와 양은 냄비, 라면 봉지, 그리고 추레한 천상기를 번갈아 본 남자가 돌아서려다 말고 앞에 쪼그려 앉았다.

“상기야.”

존댓말을 하자니 자존심 상하고, 반말은 무섭고, 천상기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거 먹고, 요 움막 앞에 바위 있잖아, 그리 올라가서 앞으로 뛰어버려. 물에 빠지면 1분쯤이 고통스럽지, 그 뒤에는 뭐가 어떻게 되는지 겁만 좀 나고 아픈 건 전혀 못 느껴.”

천상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렇게 살아서 뭐할래? 곽 이사님의 지시가 있어서 우리 손으로 죽이지는 않는다만, 네가 죽는 건 상관없다고 하셨거든. 그러니까 그냥 죽어주라. 응?”

입술을 늘린 천상기가 흑흑흑흑, 끊어져 나오는 숨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천상기가 훌쩍, 코를 들이마신 다음이었다.

“아니면 우리가 요 앞에 휴대 전화기를 슬쩍 놓을 테니까 밖에 연락할래? 그래도 되는데. 그럼 죽여도 되거든.”

“아닙니….”

“울기는, 씨발! 그래! 처먹고 살아라! 어디 얼마나 버티나 보자! 물 끓는다.”

쪼그려 앉았던 남자가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움막을 나서던 남자가 스윽 고개를 뒤로 돌리는 바람에 면발을 냄비에 넣으려던 천상기가 움찔했다.

저걸 그냥 바다에 처넣은 뒤에 죽었다고 보고해?

남자의 눈에 담긴 망설임과 살기를 보며 천상기는 또다시 입술을 길게 늘이며 울음을 터트렸다.

“에이, 개새끼! 마음 약해지게! 돈은 위에서 다 먹어버리고 저 새끼 때문에 신세 조졌네, 나도!”

펄럭 휘장을 날리며 남자가 사라지자 천상기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면발을 양은 냄비에 넣었다.

수프! 수프!

“아흐! 아흐흐!”

코를 훌쩍이는데 매콤한 냄새는 또 왜 이렇게 맛있게 느껴지는지, 서럽고, 서글프고, 하여간 울음만 나왔다.

사람을 사고판다더니 가진 돈을 다 뺏은 뒤로는 아예 얼른 죽어달라고 꼬드기는 수준이었다.

아버지! 내가 잘못했어요.

좀 살려주세요….

젓가락으로 면발을 휘저으며 천상기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천호득을 애타게 불렀다.

**

숨 가쁜 토요일을 보내고 일요일 아침으로 샌드위치에 베이컨, 프라이, 과일까지 먹고 난 뒤였다.

“내일은 평창동에 들러서 인사드리고 올게요. 중명 씨 저녁 일정 봐서 괜찮으면 저녁도 먹을까 해요.”

9시에 나서면 되는 터라 평소와는 다른 여유가 있었다.

“중명 씨.”

커피를 놓아준 허선영이 홈 바의 맞은편에서 천중명을 불렀다.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일이 많은 것도 있고, 우리 아버지가 자유롭지 못한 상태인 것도 생각해서 시간을 더 늦추기보다는 가족들끼리 결혼식을 했으면 어떤가 하고 의논하셨던 모양이에요. 평창동 정원에서요.”

말을 마친 허선영의 시선이 잔으로 떨어졌다.

허세직의 이야기만 나오면 저렇게 자신을 잃는다. 바빠서, 일이 많아서 제대로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다고 말을 하면서 오히려 화를 내야 맞는데.

“화려하지는 않더라도 웨딩드레스를 입은 선영 씨가 빛나는 결혼식을 하고 싶었는데 그런 말 하게 해서 미안해.”

진심이었다. 그래서 당장 지금 허선영이 했던 제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염려하는 마음은 있었다.

“부탁은 있어요. 두 가지예요.”

검지와 중지를 펼쳐 보이는 허선영의 다음 말을 천중명은 궁금한 시선으로 기다렸다.

“하나는 나중에 우리 라스베이거스나 하와이에 가서 결혼식 한 번 더해요.”

그런 부탁이라면 오히려 천중명이 바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 천중명의 머릿속에 확실히 떠오르는 장소가 하나 있었다.

“혹시 다른 곳이어도 될까?”

“어디요?”

“나중에 보여줄게. 괜찮다고만 해주면 돼.”

“그건 좋아요.”

반 템포쯤 뜸을 들인 허선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 평창동에서 짧게라도 신부 입장 하잖아요.”

말을 하다가 목이 멨는지 허선영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그때요. 평창동 아버님 손잡고 중명 씨에게 가고 싶어…요.”

입술에 힘을 꾹 준 채 견디는 허선영을 향해 천중명은 홈바를 돌아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안았다.

“노인네가 괴팍하셔서 힘들 텐데?”

감정이 올라온 상태에서 웃음이 터져서 그런지 허선영이 묘한 웃음을 토해냈다.

“고마워. 그렇게 마음 써줘서. 그리고 미안해. 이렇게 결혼식 해서. 대신 내가 세상에서 가장 멋진 두 번째 결혼식을 선물해줄게.”

“정말이죠?”

“응.”

천중명은 그렇게 허선영을 안은 채 위로와 고마움을 전했다.

“어제 이 일 때문에 안성에 갔었던 거구나?”

“엄마가 중명 씨에게 고맙다고 전해달라셨어요. 그리고 정말 반지만 해준다고, 그것도 미안하다고.”

“고마워. 이렇게 함께해줘서.”

짧은 대화를 나눈 뒤에 분위기가 영화처럼 흘렀다.

**

최치국은 오전 9시 45분에 지경그룹 회장실에 도착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그러지.”

부속실 앞쪽에 천중명을 만날 때까지 편히 기다릴 수 있도록 소파를 준비한 대기실이 따로 있었다. 접견실이나 회의실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회장의 집무실에서 보겠다는 의미였다.

천호득 회장 시절에도 못 들어간 집무실을 조승필이 밀려난 뒤에 들어가 보게 생겼다.

최치국이 소파에 앉아 시간을 확인할 때였다.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고, 문이 열렸으며, 부속실 직원이 들어왔다.

“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

“그래요?”

최치국은 재킷의 단추를 확인한 뒤에 부속실 직원을 따라 집무실로 들어갔다.

“회장님. 최치국입니다.”

“휴일에 오게 해서 미안합니다. 그리 앉으세요.”

젊은 회장은 집무실 창으로 들어오는 빛을 아우라처럼 뒤에 받은 모습으로 책상에서 소파를 향해 걸어왔다.

“우리 커피는 그렇고, 힘이 날 만한 거 뭐 없을까?”

“홍삼차가 괜찮습니다, 회장님.”

“그럼 그거로 부탁해.”

아직 힘이 넘칠 회장이 홍삼차를 요구했다.

분명 나이 든 최치국을 배려하는 눈치였다.

“지경프리터를 맡아줄 임원이 필요한데 혹시 추천해 줄 만한 분이 있나요?”

“어제 말씀하신 부분이 있어서 몇 명 생각은 해두었습니다.”

그때부터 홍삼차를 마셔가며 대략 20분쯤 지경프리터의 정상화 관련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럼 임원 선발 문제는 유 본부장과 의논해서 결정하기로 하고, 오늘 보자고 한 건, 감사실의 인원만으로 밴드 사와의 비리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최치국은 천중명의 다음 말을 짐작도 하지 못했다.

“밴드 사와의 비리 문제를 최치국 회장이 맡아서 해결해 주었으면 합니다. 시간은 한 달입니다. 그 뒤에 대송장비를 맡으세요.”

왜 그랬을까?

빛나는 천중명의 눈을 보며 최치국은 울컥 눈물이 올라왔다. 그룹 회장이 믿어준다는 사실이 고마워서 그런지, 이런 기회를 만들어 준 것 때문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동안의 직장생활이 주르륵 그의 뇌리를 흐르며 울컥해서 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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