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5
215. 내 돈 함부로 쓰면 크게 다칩니다 (2)
지경이 만든 거대한 너울은 토요일임에도 10대 재벌 그룹의 회장들과 기획실 직원들을 출근하게 만들었다.
특히 박태곤 회장은 이번 일을 맞이하는 자세가 남달랐다.
대송자동차그룹의 주가가 상한가에 꽂힌 채 끝났고, 지경의 거의 모든 계열사가 상한가 근처에서 마감하더니 덩달아 자이로텔레콤의 주식 역시 26퍼센트의 비약적인 상승을 기록했다.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진중하니 있어.”
그는 소파의 맞은편에 앉은 박영철에게 묵직하게 경고하고, 또 경고했다.
“윤세계니 송중대니 전화 따위 아예 받을 생각도 말고.”
“명심하겠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 상상이나 했겠나.
재계 3위의 지경그룹이 5위인 대송자동차그룹의 멱살을 움켜쥔 채 머리부터 버석버석 먹어버리겠다고 나서는 일이 말이다.
똑똑똑.
그때 박태곤의 집무실에 노크 소리가 들리고 기획실장이 들어왔다.
“회장님. 대송의 전략기획실에서 연락이 또 있었습니다. 윤성일 회장이 통화를 원한답니다.”
박태곤은 시선만 들었다.
“지시하신 대로 당분간은 일정이 바빠 연락을 드리지 못한다는 답을 전했습니다.”
“잘했어. 다른 그룹의 반응은?”
“문광그룹 송평길 회장 역시 우리와 비슷한 반응을 보인 것으로 확인했습니다.”
“흥. 그쪽이야 어천수 일로 머리를 두들겨 맞았으니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없겠지. 그런 의미에서 그 집안의 아들놈보다야 이놈이 좀 낫기는 하지.”
어쩐 일인지 박태곤은 앞에 앉은 박영철을 모처럼 뿌듯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세상을 살다 보면 천재라거나 타고났다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는 뛰어난 부류를 만날 때가 있다.”
“예, 회장님.”
기획실장을 세워 둔 상태에서 박태곤은 가르침을 내리는 양, 모처럼 자상한 음성이었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절대 경쟁하려고 들지 마. 하늘은 공평해서 또 그런 사람들에게는 근면함을 주지 않는데 특이하게 근면함까지 갖춘 사람이 있어. 그런 사람이 바로 지경그룹 천중명 회장이다.”
기획실장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흠칫 눈치를 살폈다.
“운이 좋았다. 그것이 너의 운이든, 우리 자이로텔레콤의 것이든, 우리는 이번에 운이 좋았어. 당분간은 지경이란 그늘에서 성장한다. 그러니 그의 신임을 얻어. 천 회장은 자기 사람의 어려움을 외면할 인물이 아니야.”
“명심하겠습니다, 회장님.”
“그놈의 멧돼지와 고스톱 치는 것도 줄이고.”
박태곤의 질책으로 대화가 마무리될 때였다.
우우웅. 우우웅. 우우웅.
박영철의 휴대 전화기가 울었다.
“윤세계 대표인데요?”
“받지 마!”
“예, 회장님.”
박영철은 아예 통화 거절 버튼을 눌렀다.
**
휴대 전화기를 손에 움켜쥔 윤세계는 참담한 얼굴로 앞에 놓은 화장대를 바라보았다. 이탈리아 장인이 꽃과 줄기 장식을 세세하게 깎아 만든 수제품이었다.
윤세계는 저 화장대 안의 거울을 통해 지금 같은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겁먹은 것 같기도 하고, 독이 잔뜩 오른 것처럼도 보였다.
건드리면 안 되는 도깨비라고 한 말쯤 멋있어 보이려고 한 줄 알았더니 그 인간은 진짜 경고를 날렸던 셈이었다.
윤세계는 거울에서 얼른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마법의 거울도 아닌데 눈물로 용서를 비는 자신의 앞에서 허선영이 통쾌하게 웃는 모습이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것도 천중명의 팔을 안은 자세로 말이다.
‘어쩌지?’
그런 일이 생기면?
이제 와서 무릎을 꿇겠다고 해봐야 상황을 돌이키기는 너무 늦었다. 바보도 아니고, 지경그룹이 고작 윤세계의 사과를 받았다고 양보할 리는 없지 않겠나.
우우웅. 우우웅. 우우웅.
그때 그녀의 휴대 전화기가 울었다.
“예, 회장님.”
- 어디냐?
“집에 있습니다.”
- 지금 본사로 나와.
“예.”
윤성일의 지시를 받은 윤세계가 서둘러 머리를 매만졌다.
**
곽대출과 박승양은 공사 중인 삼성동의 벤처사업부 건물 옥상에서 탄천을 내려다보았다.
“낮에 점심으로 먹은 짬뽕이 자꾸만 생각납니다. 혹시 마약을 탔을까요?”
박승양의 너스레에 웃은 곽대출이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입에 물었을 때였다.
계단을 통해 시커먼 남자 둘이 올라왔다.
박승양이 화들짝 놀란 눈을 했는데 두 사람은 곽대출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하며 다가왔다.
“다녀왔습니다.”
“어떻게 됐어?”
“우리 둘의 손을 뒤로 묶고 다리에 돌을 매달아 바다에 던지는 것을 보고 나자 완전히 꺾였답니다. 가진 돈을 전부 회수했고, 대신 해물 라면을 한 그릇 주었다고 들었습니다.”
“해물라면?”
“그냥 돈을 뺏으면 서운하니까 문어랑 새우 일곱 마리 넣은 라면을 주었는데 먹다가 많이 울었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픽 웃는 곽대출의 옆에서 박승양은 아직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인사드려. 박승양 회장님.”
곽대출의 지시에 두 사람이 꾸벅 인사를 마쳤다.
“그럼 너희 두 사람은 죽은 줄 알고 있겠네?”
“예, 선배님.”
“알았어. 고생했고, 공사 끝나면 이리 출근할 거니까 그동안 주변 정리 좀 해 놔. 가서 쉬고.”
“아닙니다. 모처럼 재미있었습니다. 그리고 오후에 잠시 쉬었다가 저녁에는 저희 둘이 박 회장님을 지키겠습니다.”
곽대출이 고개를 끄덕이자 두 사람이 다시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에 계단을 내려갔다.
“심복 이사님? 저분들은?”
“그냥 예전에 함께 있던 후배입니다.”
“아니, 무슨 후배가 심청이도 아니고 손을 뒤로 묶은 채로 돌을 매달아 던졌는데 서울에 나타나 보고를 하나? 심청이 아시지? 인당수? 풍덩! 아빠! 일어나! 심청이!”
박승양의 표현이 웃겨서 곽대출은 히죽 웃기만 했다.
“그럼 지금 누군가 나를, 우리 심복 이사님의 지시를 받고 이 박승양이를 지켜주신다는? 보디가드? 위험하면 나를 품에 안고 달리는?”
“회장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윤 회장이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르니 박 회장님이 절대 불편하지 않도록 지켜드리라는 지시였습니다.”
“크흑! 회장니-임!”
옥상의 난간을 양손으로 붙잡은 박승양이 지경그룹 본사가 있는 곳을 향해 과장된 톤으로 외쳤다.
“충성을 다하겠나이다-!”
힐끔 그를 본 곽대출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
천중명은 맑은 토요일 오후에 천호득과 함께 있었다.
“양평에 다녀와서 마음이 잡혔어?”
“예, 아버지.”
짧은 질문에 답을 한 천중명은 윤성일의 전화가 있었음을 먼저 알려주었다.
“그 인간이 화가 나면 이마가 볼보다 먼저 빨개져! 원숭이 엉덩이처럼! 흐히헤헤헤헤!”
웃음이 한바탕 지나간 뒤에는 앞으로 진행할 계획에 관해 느긋하게 천호득에게 설명해주었다.
복잡하고 지루한 이야기였다. 묵묵하게 설명을 들은 천호득이 손을 내밀어 천중명의 어깨에 올렸다.
“회장.”
“예, 아버지.”
“전화로 말했듯이 나는 이제 더 바라는 것 없어.”
천호득은 대견하고 기특하다는 눈으로 천중명을 바라보았다.
“나와의 약속을 지켜준 것으로 됐어. 고마워. 그리고 윤 실장을 나무라지 마.”
오른쪽 어깨에 올라와 있는 천호득의 떨리는 손을 천중명이 왼팔을 올려 잡았다.
“아버지. 형이 어떤 선택을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그 끝을 아버지께서 꼭 봐주셨으면 싶습니다.”
“손녀를 안겨주면 그거 보는 재미로 좀 오래 살고.”
“더 바라는 것 없으시다면서요?”
“그건 다르지!”
천중명이 웃었고, 천호득이 비슷한 웃음을 터트렸다.
**
윤세계는 고개를 숙인 뒤에 윤성일의 앞쪽 소파에 앉았다.
이마가 붉게 물든 윤성일은 무서운 눈빛과 깊게 가라앉은 표정이었다.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다.”
“예, 회장님.”
이런 앞에서 내용을 알려달라거나 못하겠다는 소리를 했다가는 맡고 있던 호텔 단숨에 빼앗기고 뒤로 쭉 밀린다.
“천중명 회장의 여자를 만나.”
그러나 이어진 윤성일의 지시에 윤세계는 바로 답을 내놓지 못했다.
번득!
답이 없는 것이 못마땅했던지 무서운 윤성일의 눈에서 살기가 번득였다.
“베개 속 청탁만큼 무서운 게 없어. 가서 무릎을 꿇든, 바닥에 엎드려 발을 붙들든, 적당한 선에서 타협안을 달라고 매달려.”
답을 강요하는 침묵이 윤세계의 눈을 찌르고 목을 조르며 달려들었다.
“대답을 해야지.”
“예, 회장님.”
돈을 위해 팔려간다는 느낌이 이런 건가?
사촌들이 윤성일의 결정에 따라 결혼하기 전에 울었다는 말은 들었다만, 그걸 윤세계가 실감할 줄은 몰랐다.
“타협안이 아니라면 천중명이 나를 만나게 하겠다는 답이라도 가져와. 그나마 주말이 있어서 다행이다만, 내일까지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반드시 결과가 필요하다.”
“예.”
“나가 봐.”
당장에라도 허선영을 찾아가라는 듯한 윤성일의 지시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윤세계가 고개를 숙이고는 몸을 돌렸다.
세상이 핑핑 돌고, 다리가 푹푹 꺼지고 있어서 쓰러지지 않으려 애쓰며 걸었다.
허선영에게 가서 매달리라고?
그 근본 없는 년에게 대송그룹의 딸이자 호텔을 경영하는 윤세계가?
눈앞이 캄캄해서 윤세계는 엘리베이터 앞의 벽을 짚은 채 멍하니 있었다.
때앵.
버튼을 누르지 않았는데도 문이 열렸다.
“세계야.”
그리고 윤병지의 음성이 들렸다.
“저 이제 어떻게 해요?”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기울이는 윤병지의 어깨에 기댄 채 윤세계는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허선영에게 찾아가 매달리라고 하셨어요. 어떻게 해야 해요? 나 정말 못할 것 같아요.”
“후. 아래에서 잠시 기다려라. 회장님 뵙고 내려갈 테니.”
눈물이 앞을 가려서 윤세계는 제대로 보지 못했다. 윤병지의 얼굴이 그녀보다 더 처참한 상태이고, 겁에 질려 있다는 것을 말이다.
**
최치국은 토요일에도 지경프리터에 출근해 상황을 점검했다.
억울하다고 농성을 펼치던 직원들이 하나둘 고개를 숙인 채 떠나서 지금 지경프리터는 그럭저럭 정리를 마친 상태였다.
대송자동차그룹과의 일로 임원을 정할 겨를이 없다는 것쯤 짐작한다. 그렇다고 공장을 멈출 수는 없는 일이어서 최치국은 연차가 있는 직원과 서너 명 살아남은 간부들을 불러서 생산일정을 체크했다.
“생산량에 차질이 있더라도 그건 어쩔 수 없어. 우선 이 계획안대로 공장을 가동하는데 무엇보다 불량률이 높아지지 않도록 특별히 신경 써. 하나 더.”
전무, 상무 하는 임원이 아니라 과장이 최치국을 직접 상대하려니 오죽이나 어렵겠나.
“밴드사와 연락할 때 감정이 나오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 그룹 전체에 조사가 시작돼서 이번에 한 번 더 문제가 일어나면 지경프리터는 아예 매각될지도 모른다.”
“예, 회장님.”
고개를 깍듯하게 숙인 과장이 나간 다음이었다.
셔츠 위로 생산점퍼를 입은 최치국이 숨을 길게 내쉬며 책상에서 일어났다.
젊은 회장은 거침이 없다.
계획하고 한 일인지, 하늘이 그를 이끄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노조가 불만을 품는 바로 그 시점에서 대송자동차그룹의 적대적 인수를 터트려 시선을 완전히 빼앗았다.
지금까지 젊은 혈기로 정의를 외쳤던 회장이라는 인식이 대송자동차그룹 건으로 단박에 범접할 수 없는 수준으로 바뀌었다.
노조가 움찔할 만도 했다.
저토록 냉정하고 저돌적이며, 선이 분명한 회장에게 대들려 하는데 이유가 밴드사와의 비리에 너무 가혹한 처벌이라면 명분에서부터 밀린다.
최치국은 입술에 힘을 꾹 주고서 한가한 공장의 주차장을 바라보았다.
저런 경영자, 저런 회장을 위해 남은 인생 최선을 다해 보필하고 싶은 욕망이 꿈틀꿈틀 피어났다.
사리사욕을 위해, 본사 임원, 계열사 회장, 다시 계열사 임원과 간부로 이어진 라인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회사와 직원을 위해 일해보고 싶다.
리온자동차 측에 승인해준 개발비 2조 원, 지경전자의 새로운 연구를 허가한 일처럼 최치국도 계획하던 프로젝트를 천중명에게 브리핑한 뒤에 마지막 불꽃을 피우고 싶었다.
낙인찍힌 최치국에게도 그런 기회가 있을까?
최치국은 고개를 들어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직장생활을 하다 임원이 되었고, 계열사 회장이 되었는데 이제 와 이런 열정이 다시 피어날 줄은 몰랐다.
“꼴통회장님을 모시더니 나까지 물드는 모양이지?”
그가 혼잣말을 중얼거릴 때였다.
우우웅. 우우웅. 우우웅.
점퍼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기가 울었다.
토요일 오후에 무슨 전화지?
휴대 전화기를 꺼내 액정을 확인한 최치국이 급하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예, 회장님. 최치국입니다.”
천중명 지경그룹 회장이 이 시간에 전화할 줄은 정말이지 상상조차 못 했었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