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4
214. 내 돈 함부로 쓰면 크게 다칩니다 (1)
비록 천호득 앞에서 기를 펴지 못했다고 해도 윤성일은 대송그룹을 이끄는 최고경영자였다. 그러니 그를 가볍게 보고 설치다가는 후회할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제가 지금 직접 뵙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습니다.”
- 천 회장. 그 나이에는 세상이 작게 보일 수 있겠지. 그렇지만, 나를 어천수나 박승양 같은 인간처럼 취급하지는 마시오.
“그렇게 들리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러나 어떤 말씀을 하셔도 제 결론은 같습니다.”
- 내가 무섭소?
“그렇게 들리셨습니까?”
- 무서울 게 없다면, 소공동 호텔에서 잠시 봅시다.
어떡해서든 천중명을 만나려고 애쓰는 윤성일의 음성이 수화기를 건너온 다음이었다.
“회장님. 제가 출근하는 길입니다.”
천중명은 그의 간절한 바람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자존심이 얼마나 상했는지 윤성일의 대꾸는 없었다.
“본사에 들러 일정을 확인한 뒤에 비서실을 통해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럼 먼저 끊겠습니다.”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천중명은 픽 웃으며 의자의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죽겠지? 약 올려도 안 되고?
윤세계를 통해 경고했었는데 말이지. 건드리면 안 되는 도깨비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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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동 호텔의 3층 크리스탈볼룸은 통상 30명의 소규모 모임에 적합한 곳이었다. 붉은 카펫이 깔린 그곳의 중앙에 홀로 앉아 있던 윤성일은 칼에 찔린 사람처럼 처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자존심 다 접고 먼저 전화를 걸었다.
좋은 음성으로 꼬드기면 어린 회장이 혹할 거라는 자신쯤 있었다. 그런데 보기 좋게 거절당한 것으로 모자라 비서실을 통하겠다는 치욕적인 말을 들었다.
“이런 괘씸한!”
홰애액! 콰드등!
윤성일은 아예 테이블을 뒤집어서 카펫 바닥에 쓰러트렸다.
오냐! 마지막 기회를 버렸으니 이제 남은 것은 하나밖에 없다. 두고 보자, 누가 죽는지!
윤성일의 눈이 독한 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
집무실로 들어서는 천중명을 향해 부속실 직원 세 명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휴일인데 미안해.”
“회장님을 모실 수 있어서 기쁘게 나왔습니다.”
뜻밖의 대답이었다. 그래서 집무실에 들어서려던 천중명은 직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같은 말이라도 저렇게 해주는 것이 고맙다.
“유진교 본부장과 최만호 실장 불러주고, 커피를 부탁해.”
“준비하겠습니다, 회장님.”
가볍게 웃어준 천중명은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비에 씻긴 도시를 배경으로 재킷을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똑똑똑.
“나오셨습니까, 회장님?”
유진교와 최만호는 평소보다 많은, 그리고 두툼한 결재판을 들고 들어왔다.
“앉으세요.”
천중명이 소파에 앉았을 때, 부속실 직원이 들어와 세 사람 앞에 커피를 놓아주었다.
“오는 길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서 누군가 했는데 윤성일 회장이었습니다.”
“윤 회장이 직접 전화를 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의 전화가 유진교는 확실히 놀랍다는 반응이었다.
커피를 마시며 잠시 통화 내용을 전해준 다음이었다.
“윤 회장은 곤경에 처했다고 격식을 무시한 채 매달릴 분이 아닙니다. 분명 무언가 노리는 수가 있었을 텐데 저는 짐작조차 못 하겠습니다.”
“두고 보면 알겠죠. 그나저나 오늘은 확실히 보고서가 많네요.”
천중명의 말을 들은 유진교가 기회를 잡았다는 것처럼 결재판을 테이블에 펼쳐주었다.
“법무팀은 회장님의 판단에 무리가 없다는 의견이었습니다. 임시주주총회를 통해 우리가 추천한 등기 이사를 선임한 뒤에 이사회에서 공동대표를 추천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습니다.”
천중명은 유진교가 펼쳐준 일곱 장짜리 보고서를 천천히 살폈다.
“본부장님. 이번에 대송 건을 진행하면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데요. 왜 두 분을 포함한 법무팀이 보수적인 관점에서 틀에 갇힌 판단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부족한 부분을 말씀해주시면 바로잡겠습니다.”
유진교는 전혀 언짢거나 서운한 기색이 없었다.
“우리 측 등기이사를 선임하기 위해 임시주주총회를 신청할 계획이라고 이렇게 보고서까지 올렸습니다. 그런데 왜 주주총회에서 정관을 변경하겠다는 의견이 없습니까?”
상법상 기업 정관의 변경은 주주총회를 거쳐야 한다. 대송의 정관에도 기재된 내용이었다.
그런 단순한 사실을 지적받은 유진교와 최만호의 얼굴이 아차했다가 곧바로 부끄러움으로 물들었다.
“황금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권한이 너무 막강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회사에 위해가 되는 안건은 거부하지 못한다는 조항도 있습니다.”
“예, 회장님.”
“통행료를 받는 하청업체는 대송자동차그룹에 위해가 되는 행위입니다.”
“월요일에 신청할 회계열람을 통해 그 점을 분명하게 밝히라고 해두겠습니다.”
이 두 사람이 과연 처음 보았을 때 천중명을 주눅 들게 했던 그 사람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멍한 모습이었는데 이왕 시작한 설명이었다.
“한 가지 더 짚죠. 국내 매출에서 대송자동차그룹은 매해 4조 원 가까운 이익을 얻습니다. 그런데 왜 해외에서 판매하는 모든 자동차를 합해도 수익이 거의 없을까요?”
“해외시장에서 가격을 낮게 책정해서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미국시장은 그렇다고 치고, 판매량이 훨씬 많은 중국은 전혀 다른 가격으로 판매하는데요.”
유진교의 눈이 흔들렸다.
“혹시 해외에 비자금을 만들고 있다고 판단하십니까?”
“그룹의 오너에 대한 인식을 먼저 바꾼 뒤에 이번 일을 진행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들은 왕족이나 절대 권력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쩐지 본부장님마저 한 걸음 양보한 선에서 출발하시는 느낌입니다.”
“회장님. 죄송하지만, 시원한 음료수를 마셨으면 합니다. 어떠십니까?”
“좋죠.”
갈증이 심해진 유진교의 요청을 천중명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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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하게 달려들었고, 극적으로 인수한 리온자동차였다.
리온자동차 연구소장 파크 피터슨의 제안을 받은 신상훈은 자신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건 위험한 도전입니다.”
“보스. 이미 준비하던 프로젝트입니다. 변한 것은 지경이 생산하는 블루크루드와 배터리를 이용해 유해물질을 전혀 배출하지 않는 트럭을 운행하겠다고 발표하는 것뿐입니다.”
파크 피터슨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배터리와 블루크루드를 이용해 질소를 제외한 어떤 유해물질도 배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계 픽업트럭 시장까지 완벽하게 장악할 수 있습니다.”
“흐음.”
“보스! 원자력, 화력 발전을 통해 전기를 생산한다는 약점은 조만간 부각됩니다. 이 기회를 통해 우리는 단숨에 트럭과 중장비 엔진 시장에서 선두자리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숨을 토해낸 신상훈은 입가와 턱을 문질렀다.
파크의 말대로만 된다면 세계 1위를 차지한 미국의 픽업트럭 분야까지 완벽하게 장악할 절호의 기회였다.
‘회장님이라면 어떻게 판단하실까?’
계속해서 입가와 턱을 매만지며 신상훈은 이번 도전이 지경에 가져다줄 이익을 떠올려보았다.
“파크. 새로 개발된 엔진의 가장 큰 약점이 있다면요?”
“기존의 엔진을 개량했습니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지경이 공급하는 블루크루드와 배터리가 극한 환경에서 견딜 수 있을 지도 의문입니다.”
신상훈의 염려에 파크 피터슨은 오히려 지경이 제공할 두 가지, 블루크루드와 배터리의 품질을 염려하고 있었다.
“보스, 우리 기술진을 믿어주십시오. 나는 우리 연구진을 믿어준 본사 회장님께 전 세계 트럭과 중장비 시장을 선물해 드리고 싶습니다.”
저런 열정을 어떻게 꺾을 수 있겠나.
신상훈은 마음을 굳혔다.
“내가 한국으로 출발해 회장님을 뵙고 오겠습니다.”
“본사 회장님께 내 열정을 꼭 전해주십시오.”
“물론입니다.”
두 사람이 비슷한 표정으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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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잠시 숨을 돌린 뒤에 유진교가 두툼한 결재판을 천중명 앞에 펼쳐주었다.
“밴드사와의 비리에 관한 보고입니다.”
“뭐가 이렇게 많아요?”
“죄송합니다, 회장님. 그 점에 관해서는 저와 여기 최 실장 모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앞쪽의 요약에 담긴 내용을 본 천중명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계열사 직원들의 폭언, 폭행, 각종 경조사 초대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체육대회 운영비를 부담하는 일들이 당연한 것처럼 벌어지고 있었다.
“뷔페에서 보았던 행동들이 공연히 나온 게 아니었군요.”
보고서의 두께를 가늠한 천중명은 결재판을 덮었다.
한 시간 이상을 읽어야 할 분량이어서 다른 의논을 마친 뒤에 천천히 살필 계획이었다.
“월요일에 진행할 일 중에 아직 결정 안 한 것들은요?”
“주식을 더 매집하실 생각이라면 금융감독원에 신고서를 제출해야 합니다. 송문철 회장은 공개매수를 통해 윤성일 회장이 거둘 수 있는 물량이 대략 17퍼센트 내외라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시장에 풀린 주식이 70퍼센트 수준인데요?”
“가격이 올라갈 거라 기대하며 기다리는 심리가 번지면 그 이상은 공개매수에 응하지 않는다는 것이 중론이었습니다.”
윤성일이 들으면 피를 토할 의견이었다.
“공개매수는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월요일에도 시장에 나오는 주식을 거둬들이는 작업은 계속하라고 지시하세요. 나머지는 밴드사와 관련된 보고서를 본 뒤에 다시 말씀하시죠.”
“예, 회장님.”
유진교와 최만호가 집무실을 나선 뒤에 천중명은 보고서를 들고 책상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보고서를 올려놓은 뒤에 몸을 돌려 기댄 자세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덫에 걸린 윤성일이 선택할 방법은 딱히 없었다.
판을 뒤집을 한방을 만들기 위해 애쓰겠지만, 그럴수록 목을 졸라맨 덫이 더 잔인하게 살을 파고드는 것 말고는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아무리 재벌이라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겠다만, 그때 윤성일에게 남은 것이 있을까?
무릎을 꿇으면 뭐, 생활비는 좀 도와줄까?
픽 웃은 천중명은 책상에 앉아 보고서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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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천7백억 원짜리 라면을 잡숴본 분이 세상에 몇 명이나 있을까?
천상기는 문어, 새우가 듬뿍 든 라면을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으며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아! 1천7백억 원짜리 라면에는 김치가 덤으로 온다.
“울 정도로 맛이 죽이나 본데?”
그의 근처에서 10만 원어치의 삼겹살을 숯불에 구워 먹는 가난한 남자들이 천상기를 보며 떠드는 소리였다.
새벽에 다섯 명의 남자가 더 나타났다.
천상기를 받은 남자까지 모두 일곱 명이 되었는가 싶은 순간에 우르르 달려들어서는 그중 두 명의 손을 뒤로 묶더니 발에 커다란 돌멩이를 매달아 산 채로 바다에 풍덩 던져 넣었다.
“개새끼들이 자꾸 잔머리를 굴려!”
파란 바다가 남자 둘을 꿀꺽 삼키는 장면을 보고 나서 천상기는 기가 제대로 꺾여 버렸다.
사람은 사람을 알아본다.
천상기의 보스턴백을 챙긴 남자, 그 뒤에 나타나 두 명을 바다에 던져버린 세 명은 확실히 사람 죽이는 일쯤 망설이는 인간들이 아니었다.
“저 새끼가 회장님이 말씀하신 그 인간이야?”
그때 천상기를 바라보던 남자들의 눈빛이 떠올라 천상기는 라면이 캑 목에 걸렸다.
씨발. 이 라면이 1천7백억 원이라니.
문어가 대략 1천억 원쯤 될 텐데 왜 이렇게 질기냐.
검지 크기의 새우는 한 마리에 1백억 원쯤 한다.
이걸 주고 어쩌면 바로 옆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는 건지.
내 편이 하나도 없는 하늘과 바다, 자갈밭, 그리고 살인마들이 분명한 남자들 틈에서 천상기는 처음으로 천호득을 떠올렸다.
용인에 와서 애처롭게 바라봐주던 천호득의 눈빛과 욕을 퍼붓고 난 뒤에 처참하게 변했던 그의 얼굴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흐이이-.”
결국, 천상기는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꼬드기거나 부릴 사람이 전혀 없는, 돈이라는 것이 힘을 쓰지 못하는 세상에서 천상기는 그저 무릎이 고장 난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다.
“거, 개새끼가 청승맞게!”
천상기는 울음을 꿀꺽 삼켰다.
죽이지는 않을 것 같다만, 따귀라도 맞으면 아픈 건 천상기 본인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아버지!
나 한 번만 살려주세요!
울음이 나오는 입에 천상기는 라면을 꾸역꾸역 넣었다.
어젯밤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것도 있고, 이 라면을 사느라 가진 돈을 다 뺏겨서 이젠 뭘 줄지, 언제 줄지 짐작도 못 하는 처지였다.
아버지!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나 좀 여기에서 빼줘요!
천상기는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입술을 바보처럼 벌리고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