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213화 (213/315)

# 213

213. 공개매수를 신청하겠다 (2)

유진교와 최만호, 고강도 법무팀장은 대송그룹의 그룹총괄 기획실 실장 우세환과 법무팀장 안소곤을 맞아 그룹 회의실로 들어섰다. 비가 내리는 날이라 그런지 에어컨이 만들어낸 쾌적함이 들어선 이들에게 서늘함으로 다가섰다.

“앉으시죠.”

“감사합니다.”

남북회담처럼 널따란 테이블에 마주한 두 그룹의 임원들이 차를 앞에 두었다. 이런 회의에서 바로 본론을 꺼내는 것은 세련되지 못한 행동이었다.

대략 5분쯤 금요일이라 길이 막혔다느니, 최근에는 골프를 나가본 적이 언제인지 모르겠다느니 하는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비가 시원하게 내립니다. 모쪼록 어려운 현안들이 말끔하게 씻겨 나가서 근심하는 국민들께 좋은 결과를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뒤에 대송의 우세환 실장이 기조연설과 같은 발언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리온자동차를 인수한 지경그룹의 의지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경영 참여를 이렇게까지 요란스럽게 요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 우리 대송 회장님의 의견이십니다.”

말을 마친 우세환이 유진교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린 메일로 처리하실 의향이 있으신가요?”

“우리 회장님께서는 그린메일을 고려하신 적이 없습니다.”

조심스러운 질문에 단호한 답이 있었다.

“그렇다면 오늘 방문을 보고 드리는 자리에서 의견을 여쭤봐 주실 수는 있을까요?”

“가능합니다. 어느 정도 선에서 보고를 드리면 되겠습니까?”

“통상 그린메일의 가격은 시가총액과 매출을 기준으로 산정합니다. 그렇게 계산했을 때, 지경이 이번에 취득한 지분가의 50퍼센트를 프리미엄으로 지불하면 적당하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총 20조 원의 수익을 주겠다는 안소곤의 제안을 유진교는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3자 배정 출자를 금지한 계약서, 순환출자 구조가 어쩌니 하는 말 따위 일절 없었다. 짧은 답만큼이나 유진교가 전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했다.

우리 지경그룹의 회장님은 절대 그린메일을 의논할 여지가 없다. 오너를 모신 입장에서 들은 대로 보고는 하겠다.

우세환과 안소곤이 잠시 유진교를 바라보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고등학교, 대학교, 유학 시절의 선후배, 그 모든 것을 뒤져 유진교와의 연결점이야 이미 진작에 찾아두었다. 누구를 아십니까, 한 마디면 그 양반의 체면을 봐서라도 좀 더 대화를 쉽게 풀어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우세환은 아쉬운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바늘처럼 날카로운 인상, 그와 반대로 묵직하게 깔리는 음성, 저런 사람에게 학연이나 지연이 어쩌고 했다가는 본전을 건지기도 어렵다.

“본부장님. 외람된 말씀인데 제가 나중에 천중명 회장님을 뵐 기회를 얻을 수 있을까요?”

“보고드리고 답이 있으시면 전해드리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일어서겠습니다.”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우세환.

저렇게 선이 분명한 사람을 어설프게 상대하려 했다가는 괜히 코만 깨트리고 끝난다.

**

승합차는 빗속을 빠르게 달렸다.

고인 물에 바퀴가 걸렸는지 촤악, 하는 소리와 함께 차체가 휘청했는데 운전하는 사람이나 중간에 앉은 이들 모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뒤편에서 반쯤 누운 천상기는 달랐다.

“박 회장님. 이러지 말고 내가 가진 거 절반을 지금 드리겠습니다.”

천상기는 병원에서보다 확실히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잘 아는 거 같더니만 우리 천 회장님은 너무 높은 곳에서만 사셔서 진짜 세상을 몰라.”

“이제 알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매달리는 천상기를 향해 박승양은 검지를 들어 옆에 앉은 곽대출을 가리켰다.

“사람을 팔 때는요. 넘기고, 되팔고, 다시 넘깁니다. 그래야 자금 회수도 빨리 되고, 또 받을 돈이 불어나거든요. 그걸 뭐라고 하더라? 축구나 야구 선수들 막 팔아서 돈 불리는 게 있었는데?”

곽대출은 몰라서 답을 못했고, 천상기는 기가 막혀서 입을 떼지 못했다.

“아무튼! 천상기 회장님을 이미 심복 본부장께 5백억에 팔았습니다. 그러니 나는 사실 권한이 없어요.”

“그게 말이 됩니까!”

“안되지요.”

천상기의 발악에 박승양의 답이 바로 나왔다.

“심복 본부장님이 아니었다면 최소 7백억 원은 받았을 텐데 내가 너무 헐값에 팔았지요.”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천상기는.

윤만석의 손목과 발목을 잘랐던 경험이 있으니 현실에서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긴 했다. 그러나 반대로 따지면 멀쩡한 사람을 섬으로 납치하는 이 상황이 말이나 되는가 싶었다. 그것도 1천7백억이나 돈을 가진 지경그룹의 둘째 천상기를 말이다.

“원하는 게 뭡니까? 가진 돈 전부 드리면 됩니까?”

고속도로에 세워진 여수 100킬로미터라는 표지판을 본 천상기의 음성이 다급하게 나온 직후였다.

곽대출이 다시 고개를 뒤로 돌리고는 천상기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적당히 해, 이 양반아. 적당히. 힘도 없어 보이는 게.”

‘아후, 후련해.’

그의 험악한 인상에 천상기는 질린 표정이었고, 곽대출은 후련한 얼굴이었으며, 박승양은 “아, 거! 비 참 시원하게 온다!”하는 엉뚱한 감탄을 쏟아냈다.

**

방송과 경제계를 벌컥 뒤집어놓다시피 한 장본인 천중명은 허선영과 갤러리에서 저녁을 먹었다.

어둠을 밀쳐내는 조명, 정원의 잔디 위로 떨어지는 빗물,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음악, 안쪽 벽난로에서 탁탁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온기까지 분위기는 최고였다.

“내가 적대적 인수를 잘 모르긴 하지만, 오늘 같은 날 이렇게 여유로워도 돼요?”

웨이브 살린 머릿결에 원피스 차림의 허선영을 갤러리의 조명이 고급스러운 느낌으로 받쳐주었다.

“순서를 보면 대송에서 그린메일을 제안하는 게 가장 먼저거든. 그런 순간에 내가 그룹의 회장실에 있으면 조건을 기다리는 꼴이 돼. 그러니 오늘은 이게 맞지.”

“난 모르겠어요. 기사 보니까 총액이 40조 원이 들어갔다는데 그게 얼마나 큰돈인지 감도 안 와요.”

굳이 돈이 아니라 세상을 이렇게 벌컥 뒤집어놓은 것이 더 놀랍다는 투였다.

“1조 원은 예수님이 태어난 날부터 오늘까지 매일 1백만 원씩 써도 2천5백억이 남는 돈이야. 이자를 계산하면 매일 60만 원씩 써도 원금이 남아. 그대로 1조 원이.”

이런 계산을 하는 이유가 뭐예요?

허선영의 눈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그런데 윤성일 회장이 순환출자라는 편법으로 지분을 확보하는 데 사용한 네 개 회사의 돈이 시가총액으로 80조 원인 거지.”

“하아.”

앞에 예시를 듣고 나자 80조 원이 얼마나 큰돈이었는지 짐작이나 하겠다는 투로 허선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투자자에게 돌아갈 몫을 그렇게 빼돌린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짓밟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는 거지. 선영 씨를 호텔에서 망치려고 했던 것처럼.”

식사는 이미 끝났지만, 천중명의 호출이 없어서 누구도 테이블로 다가오지 않았다.

“어떤 이유로든 선영 씨와 내가 그 자리에 설 기회가 생겼어. 그런데 우리도 그들처럼 사는 건 아닌 것 같았어. 가진 만큼 즐기는 것은 나쁘지 않지. 불행한 상황의 누군가, 나보다 힘겨운 상황인 누군가를 짓밟지만 않는다면.”

“어렵네요.”

허선영의 솔직한 감상을 들은 천중명이 가볍게 웃은 뒤였다.

“그래도 중명 씨 오늘 정말….”

문가를 힐끔 본 허선영이 고개를 앞으로 기울였다.

“섹시해요.”

“여기서?”

툭 하고 던진 천중명의 농담을,

“자신 없어요?”

허선영이 대담하게 받았다.

“실망인데요?”

홍삼 달인 물을 들고 왔던 아침에 곽대출이 제대로 대꾸하지 못했던 심정을 알게 된 천중명은 힘없이 웃고 말았다.

**

정말 왔다, 천상기는.

다섯 시간을 승합차로 달린 뒤에 다시 네 시간에 걸쳐 배를 타고서, 캄캄한 밤중에 작은 배로 옮겨탄 뒤에 멀미로 녹초가 된 자정쯤이었다.

“어후. 멀다! 잠깐 기다려요!”

“시커먼께 찬찬히 살피시요! 짠해서 어찌까! 심도 읍시 생겼구마는! 저딴 걸 뭣에 쓴다고 이리 먼 길을 고생햐!”

나이 든 선장은 얼마를 집어주었는지 천상기의 처량한 몰골을 완전히 외면한 채 박승양과 곽대출을 집안 조상 모시듯 받들었다.

“싸게 버리고 오시요!”

대꾸할 기력도 없었다.

파도 소리, 바다 특유의 비린내, 발을 내디딜 때마다 자각거리는 자갈밭, 빛이라고는 박승양의 졸개가 든 랜턴의 빛이 전부인 세상에서 천상기는 처음으로 죽음의 공포를 실감했다.

빛이다! 빛!

그런 천상기의 앞쪽에서 또다시 빛줄기가 다가왔다.

“곽 이사님?”

“어. 이 양반이거든. 얼른 계산하고 가져가.”

오래된 절의 문 앞을 지키면 꼭 어울릴 것 같은 남자가 들것에 실린 천상기의 위아래를 훑었다.

“위쪽은 잘 움직이니까 문제없고, 다리는 3개월이면 올림픽 육상 선수로 내보내도 된다고 들었으니까 걱정할 것 없어요.”

박승양의 부연 설명을 들은 남자가 왼손에 들고 있던 종이봉투를 곽대출에게 쓱 내밀었다.

“자. 그럼 나는 갑니다, 천 회장. 건강하게! 이제는 좀 착하게 사세요.”

“회장님! 박 회장님! 나 이렇게 두고 가지 마세요!”

“에이! 난 이제 권한이 없어요!”

“곽 이사님! 곽 이사님! 곽 이사님!”

“그러게 왜 우리 회장님께 끝까지 대들어, 이 양반아. 여기에서도 자꾸 속 썩이면 팔다리 잘라서 적당한데 묻을 거니까 남은 수명 잘 지켜요. 공연히 누가 와서 바람 잡는다고 덜컥 미끼 물지 말고. 알았어요?”

“이사님! 이사님!”

랜턴을 건네받은 곽대출이 겁에 질린 천상기의 얼굴을 향해 불빛을 돌렸다. 그런 뒤에 불쑥 섬뜩한 인상을 들이밀었다.

“나는 회장님 지시라면 못할 게 없어요.”

“예! 제가 잘못했습니다.”

“우리 회장님께서 혼자 죽을 때까지 놔두라셔서 그냥 갑니다. 그러니까 반항하세요. 탈출 시도도 하고. 혹시라도 경찰이든, 윤성일이든 와서 쿡 찌르면 냅다 또 회장님을 밀어내겠다고 나서시고. 그래야 그 핑계로 죽여 버리지.”

스윽 몸을 일으키는 곽대출이 워낙 무섭고 사나워서 천상기는 더 매달리지 못했다.

“가시죠.”

“어후! 무섭다.”

천상기를 힐끔 본 박승양이 냉큼 곽대출을 따랐고, 그 뒤에서 조직원 두 명이 어둠과 파도 소리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천상기 회장님이라고 들었습니다.”

이건 또 뭐야?

화들짝 고개를 돌린 앞에서 사천왕 자리에서 튀어나왔음직한 남자가 씨익 웃었다.

“얼른 기어, 이 새끼야! 자갈밭에서 잘 거야?”

남자는 천상기의 고급 보스턴백을 탐욕스러운 얼굴로 집어 들었다.

**

비가 내린 금요일이 지나고 보상처럼 토요일 오전은 맑고 깨끗했다.

“아무래도 나가봐야 할 것 같은데.”

“어제 그런 발표가 있었는데 주말을 쉬는 게 더 이상하죠.”

천중명은 허선영과 함께 토스트와 달걀 프라이, 과일, 시리얼 등을 앞에 두고서 토요일이랍시고 그나마 여유 있게 아침을 먹었다.

“나는 점심때 안성에 다녀올게요.”

“무슨 일 있어?”

“오랜만에 엄마 보려고요.”

“안부 전해드리고, 혹시 기자들이 붙으면 오늘만큼은 비서실에 연락해서 도움을 받아.”

“그럴게요.”

토요일에 비서실 직원의 근무가 달갑지 않지만, 상황이 상황이어서 허선영도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아침을 먹은 천중명은 비서실 직원들과 함께 삼성동을 나섰다.

그린메일 관련 보고, 계열사와 밴드사와의 비리 조사 내용, 최치국의 지경프리터 개선 계획, 대송과의 적대적 인수 진행 등 의논할 일이 산더미 같았고, 거기에 천상기를 보내고 온 곽대출과 나눌 이야기도 있었다.

다행히 삼성동 앞에서는 기자들이 보이지 않았고, 그룹 본사의 앞에도 한두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철수했다는 보고도 있었다.

천중명은 화창한 토요일의 바깥을 보며 픽 웃었다.

죽을 맛일 거다, 윤성일은.

살다 보면 아무리 발을 버둥대며 울부짖어도 뜻대로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그 단순하고 흔한 세상사를 그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불행한 사람들이 모두 그들의 게으름이나 잘못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마, 윤성일. 이번 기회에 돈이 많다고 해서 없는 사람을 짓밟아도 된다는 그 개 같은 인성도 고치고.

천중명이 시선을 앞으로 돌렸을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모르는 번호가 액정에 올라왔다.

잠시 휴대 전화기를 바라보던 천중명은 우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천중명 회장이시오?

윤성일이구나.

분노를 참는 듯한 억누름, 어딘가 윤병지와 닮았으면서도 전혀 다른 느낌을 받으며 확신처럼 든 생각이었다.

“누구십니까?”

- 나, 대송의 윤성일이오.

급한 건 뭐 천중명이 아니니까.

“그러시군요.”

- 크흠! 우리 잠시 만납시다. 만나서 이야기합시다.

가시를 삼키는 것처럼 천중명의 대꾸를 넘긴 윤성일이 또다시 굴욕을 삼키는 음성으로 제안을 건네 왔다.

천중명은 소리 없이 웃으며 차창 밖을 향해 시선을 들었다.

햇볕, 멋진 모양의 구름, 파란 하늘, 더할 수 없이 화창한 토요일 오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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