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2
212. 공개매수를 신청하겠다 (1)
분노하는 윤성일과 좌절한 천상기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처럼 금요일 점심 이후에 비가 내렸다.
최치국이 지경프리터의 정문에 도착했을 때는 입구를 이십여 명의 직원이 막아서고 있었다.
[부당한 해고 즉각 중단하라.]
[회장의 독단에 직원들만 죽어난다.]
붉은 래커로 쓴 플래카드를 든 직원들 앞에서 최치국이 차에서 내렸다.
시커먼 하늘에서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금요일이었다.
우산을 들고서 다가온 비서실 직원을 최치국은 손을 들어 만류했다. 그 바람에 비닐 옷을 입고 서 있는 직원들 앞에서 정장을 입은 최치국의 머리와 어깨, 등과 손이 차례대로 비에 젖었다.
“안에 연락해서 여기 직원들 천막이라도 설치해 주라고 하지.”
“예, 회장님.”
어정쩡하게 서 있던 비서실 직원이 급하게 휴대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부당 해고 즉각 중단하라!”
“중단하라! 중단하라!”
문을 막아선 직원들이 최치국에게 플래카드를 들어가며 구호를 외친 다음이었다.
“여기 있는 분들이 전부 이번에 해고된 직원들인가?”
“부당 해고 중단하라!”
“밴드 회사와 부당한 거래가 없었다면 절대 해고되는 일이 없도록 할 텐데 정당하게 권리를 주장하는 게 어때요?”
최치국은 피켓과 플래카드를 들어 보이는 직원들에게 두어 번에 걸쳐 점잖게 권유했다.
안에서 점퍼 차림의 직원 몇 명이 바퀴 달린 접이식 간이 천막을 끌고 나오는 것도 보였다.
“우리 회장님이 어떤 분인가 하면요.”
최치국이 도착했다는 말에 공장 안에 있던 직원들이 고개를 내밀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제 고객들을 그룹 계열사 어느 곳에서도 받지 말라고 지시하신 분입니다. 대리점 직원을 인격적으로 모욕했다는 이유로 지경전자의 회장과 임원을 모두 해고하신 분입니다.”
드르르륵!
직원 네 명이 접이식 천막을 펼쳐서 항의하던 직원들의 머리를 가려주었는데 그제야 최치국은 비서가 씌워주는 우산을 허락했다.
“밴드사와의 관계에서 억울하게 해고당한 분이 있다면 내가 물러나는 한이 있더라도 바로 잡겠습니다. 대신, 부정한 행위를 한 직원이 계속 이렇게 항의한다면.”
앞에 서 있는 직원들을 쭉 둘러본 뒤에 최치국이 다시 입을 열었다.
“회장님의 지시와 관계없이 법적 책임을 묻겠습니다.”
“최 회장님은 하청업체와 한 번도 식사 안 하십니까? 업무와 관련해서 밥 먹을 수 있잖습니까!”
“먹을 수 있습니다. 얼마짜리 식사를, 왜 먹었는지가 문제가 되는 거지요. 여기 지경 프리터의 직원들이 몰려가 밴드사 회장과 임원들이 사는 뷔페를 먹는 것이 업무와 관련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상무님이 나오라고 하니까! 나가기 싫은 데도 가서 밥 먹은 죄밖에 없습니다! 안 그러면 찍혀서 직장 생활이 어렵습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최치국은 항의하는 직원들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공장에서 눈치를 살피던 직원들이 하나둘 정문 앞으로 움직이더니 지금은 제법 많은 숫자의 직원들이 점퍼 차림에 우산을 쓴 채 최치국과 해고된 직원들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부당한 지시를 거부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체 회식 외에 개별적으로 밴드사 간부에게 식사, 노래방, 심지어 돌잔치에 초대를 강요한 것도 상사의 부당한 지시였습니까?”
항의하던 직원들이 시선을 교환하며 곤란한 표정을 그려냈다.
“실내에서 흡연, 제지하는 식당 직원 폭행, 그런 행동들이 정당한 업무 과정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만약, 이 중에서 그런 행위를 조달호 상무가 지시했다고 진술할 직원이 있다면 해고를 취소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급하게 펼친 천막과 비서가 내민 우산에서 빗소리가 요란하게 울렸고, 그들 사이의 바닥에서 커다랗게 빗방울이 튀었다.
물에 젖은 직원들과 최치국이 마주한 채 시간이 흘렀다.
“서러울 겁니다. 서운하고, 아플 겁니다. 당신들이 손찌검한 그 스무 살 갓 넘긴 뷔페 직원도 그랬을 겁니다. 그런 일이! 사회적 위치와 수입에 따라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며 그룹 회장님이 뛰어다니셨습니다.”
빗소리를 이겨낸 최치국의 꾸중이 공장의 입구에 퍼졌다.
“부당하게 해고되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안으로 들어와서 면담을 요청하세요. 내가 직접 듣겠습니다.”
말을 마친 최치국이 걸음을 옮겼다.
화들짝 놀란 비서가 급하게 우산을 앞으로 옮겼는데 누구도 지금 공장으로 향하는 최치국을 막아서지 못했다.
**
지경그룹과 대송그룹 본사 건물에 엄청난 취재진이 몰렸는데 이번에도 지경의 기획실과 홍보실이 한발 빨랐다.
[이번 사태에는 편법으로 지분을 확보한 대송의 정직하지 못한 경영과 그에 따른 약점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뉴스 방송은 지경그룹의 대송자동차그룹 지분 확보와 경영권 참여를 보도하면서 순환출자의 문제점을 계속 떠들었다.
대송자동차그룹만 해도 매출 100조를 거두는 거대기업집단이었다. 그러니 대송그룹 전체는 얼마의 규모이겠나.
그 대송그룹의 모든 계열사 회장단이 급하게 달려왔다.
거대한 타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은 대송그룹의 계열사 회장과 부회장들이 무거운 표정으로 중앙에 자리한 윤성일의 말을 기다렸다.
“기획실과 법무팀에서 올린 보고서를 봐.”
윤성일의 말에 따라 계열사의 회장과 부회장들이 앞에 놓인 서류를 펼쳤다.
“황금주를 이용해서 거부권을 행사할 범위가 제한적이라는 부정적인 의견이 있어서 그에 따른 대책을 준비했다.”
검고 얇은 마이크가 윤성일의 음성을 받아서 쇳소리 묻은 독한 느낌으로 스피커를 통해 토해냈다.
“오늘 금융감독원과 증권거래소에 위법한 사실이 있는지를 확인해달라고 공문을 보낼 테고, 이 시간 이후로 계열사의 필수불가결한 결재를 제외한 현금 지불을 금한다.”
시선만 들어 회장단을 살폈던 윤성일이 다시 보고서를 내려다보았다.
“적정주가를 확인해서 공개매수를 신청하겠다. 여러분이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상체를 세운 윤성일이 보고서를 내려놓자 약속이나 한 것처럼 회장단 모두 보고서를 놓고는 시선을 앞으로 주었다.
“만에 하나, 지경이 대송을 삼키는 일이 생기면 여기 있는 누구도 자리를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명심해. 천호득 명예회장과 천중명이가 그동안 했던 일을 생각해보면 답이 있지.”
묵직한 현실이 회의실을 짓눌렀다.
“비록 망신을 떨었지만, 시간과 법은 우리 편이야. 이 기회를 잘 이겨내서 더욱 단단한 대송이 될 수 있도록 계열사 전체가 힘을 모아주길 바라고. 앞으로 지시가 있을 때까지 개인 의견을 밝히는 일이 없도록.”
회장단이 고개를 앞으로 숙이는 동작으로 윤성일의 지시를 받았다.
“또한, 언론의 시선이 집중된 시기이니만큼 비난이나 지탄받을 만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각 계열사가 거느린 하청업체를 잘 단속해.”
급하게 부른 것치고 회의는 짧았다.
“대송그룹 창사 이래 가장 큰 위기를 맞았으나 나는 이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 나갈 것이라 약속한다. 세부사항은 보고서를 참조해.”
그러나 요구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계열사는 반드시 응징이 있을 것이란 윤성일의 의지를 전달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윤성일은 3자 배정을 금지한 계약서 내용을 말하지 않았다.
“이상.”
윤성일의 냉정한 말 한마디에 회장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실의 출입구는 앞과 뒤쪽, 두 곳이었다.
그런데 자리에서 일어난 회장단은 마치 깡패들이 큰형님에게 인사하듯이 줄줄이 앞으로 걸어와 윤성일을 향해 고개를 숙인 뒤에 문을 나섰다.
1분쯤 걸려 회장단이 모두 나선 다음이었다.
윤성일의 앞에 고개를 떨군 윤병지가 섰다.
휘이이익! 철썩!
“너는 뭐 하는 인간이야!”
윤병지의 얼굴을 때린 보고서가 그의 옆으로 떨어졌다.
“남부증권에 기획실 임원이 아니라 너를 보낸 이유가 뭐야! 3자 배정까지 막아놓은 주식 거래를 이따위로 허술하게 하면 어떻게 하라고!”
“죄송합니다, 회장님.”
“정상적으로 처리되었다는 일이 왜 이따위 결과를 만들어! 세계가 뺨을 맞을 때도 멍청하니 보고만 있더니, 이제는 내 얼굴에 이렇게 먹칠을 해!”
마이크를 통해 윤성일의 고함이 메아리처럼 두 번씩 윤병지를 때리고 있었다.
“최치국이는 어떻게 됐어!”
“당분간은 만나기 어려울 것 같다는 답변이….”
휘익! 퍼억!
이번엔 윤성일이 던진 결재판이 윤병지의 가슴을 때리고는 그의 앞으로 떨어졌다.
“전충호와 함께 움직여! 그래서 천상기를 어떡해서든 설득해! 천중명이 얼마나 사악하고 야비한 짓을 했는지 방송에서 떠들게 만들라고! 그거 해낼 때까지 내 앞에 나타나지도 마!”
고개를 숙여 인사한 윤병지가 참담한 얼굴로 회의실을 나섰다.
**
양평의 갤러리에도 빗줄기가 세차게 내렸다.
길게 빼낸 차양막과 그 앞의 바닥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천중명은 모처럼 책을 읽고 있었다.
지이이잉.
[출발했습니다.]
[박 회장님이 고생이 많습니다.]
[심복 이사님과 움직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좋습니다. 서울에 올라가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책에서 시선을 든 천중명은 박승양과 문자를 나누었다.
노란색과 흰색의 조명 아래에서 정장 차림의 천중명이 커피를 옆에 두고서 책장을 넘길 때, 널따란 창밖의 정원에서는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그런 천중명의 여유가 샘난 것처럼 휴대 전화기가 울었다.
“여보세요?”
- 어디야?
괄괄한 천호득의 음성이 물에 젖은 것처럼 무겁게 건너왔다.
“양평입니다, 아버지.”
- 마음이 편치 않아? 그런 짓을 해놓고?
“이상하게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천중명이 솔직하게 속을 털어놓은 다음이었다.
- 고마워.
생각지도 못했던 천호득의 말이 수화기를 타고 넘어왔다.
- 결과가 어떻든 이제는 더 바라는 것이 없어. 실망할 일도 없고. 회장이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아니까….
“비가 오니까 아버지도 마음이 약해지세요?”
- 내가 그럴 사람이야! 그리고 애비가 말을 하는데!
천중명이 바람 빠지는 것처럼 웃었고, 그 바로 뒤에 천호득의 비슷한 웃음이 들렸다.
“아버지. 이번 일을 진행하며 알았습니다. 아버지께서 지켜주시지 않으면 저는 아직 멀었구나 하고요. 그러니까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기운 잃지 마세요.”
- 흐헤헤헤.
천호득의 호탕한 웃음이 주는 위로가 좋았다.
세상이 어떤 모습으로 바뀌어도 내 편이 되어줄 사람, 천호득, 곽대출, 허선영, 이은명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내일 아버지 뵙고 의논드릴까 했습니다.”
- 그래.
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통화가 뚝 끊겼다.
하여간 예측하기 어려운 양반이란 생각에 픽 웃은 천중명은 옆에 두었던 책을 집어 들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그리고 그 직후에 어딜 책을 읽어, 하는 것처럼 또 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 지금 출발했어요. 무슨 일이에요?
조심스러운 허선영의 질문이었다.
“회장이 부르면 계열사 사장이 잠자코 와야지.”
- 와! 무섭다!
대송과의 발표를 알고 있을 텐데도 천중명이 건넨 장난을 허선영은 재미있는 말투로 받았다.
“기자들이 몰려갈지 몰라. 괜히 자리에 있다가 곤란하게 되느니 남은 오후는 나랑 있자. 빗소리 들으면서 함께 차 마시고 저녁 먹게.”
- 지금 출발했으니까 한 시간 안에 도착할 거예요.
천중명이 보낸 S600에는 운전기사와 수행비서가 함께 있어서 허선영은 더 대꾸하기 어려운 눈치였다.
“천천히 와.”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고개를 돌려 갤러리 안쪽을 바라보았다.
“예, 회장님.”
“저녁을 먹었으면 하는데? 선영 씨를 불렀으니까 두 사람.”
“스테이크가 괜찮습니다, 회장님.”
“그거로 부탁해.”
“커피를 좀 더 드릴까요?”
“그럴까?”
고개를 숙인 직원이 물러가자 천중명은 느긋하게 책을 들었다.
**
전충호를 앞세운 윤병지가 방지병원에 도착했을 때 천상기는 그곳에 없었다.
“여기 천상기 환자라고 입원했었잖아!”
“퇴원했다니까요.”
“그러니까! 어디로 갔냐고!”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알아요?”
특실을 뒤진 전충호가 눈에 불을 켜고 업무과에 따졌으나 천상기의 행방을 찾을 길은 없었다.
“당신들 정말 이렇게 나올 거야!”
윤성일의 추궁이 무서운 전충호가 고함을 버럭 지른 다음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당신이 여기 책임자야?”
“원장입니다.”
소란을 듣고 나타난 유헌우가 궁금한 눈으로 윤병지와 전충호를 차례로 보았다.
“좋은 말로 할 때 천상기 회장 어디 있는지 말해.”
“난 또 뭐라고.”
전충호의 사나운 기세에도 유헌우는 태연했다.
“내가 무릎 수술을 했는데 하루 만에 나아서 나갔습니다. 수술이 정말 잘 됐거든요.”
심지어 유헌우는 검지와 중지를 거꾸로 세워 걷는 모양을 보여주기까지 했다.
“원장님. 천상기 회장이 어디로 갔는지 혹시 아십니까? 우리가 상황이 정말 급해서 그렇습니다.”
보다 못한 윤병지가 그래도 예의를 갖춰 질문을 던졌다.
“듣기로는 멀리 간다던데요? 장소는 못 들었습니다.”
“누구와 함께 움직였는지는 모르십니까?”
“처음 보는 사람들이어서요. 나야 수술 끝나고 병원비 계산했으니 더 말릴 수가 없지요.”
전충호가 독한 눈으로 노려보았으나 유헌우는 능글맞은 표정 그대로 요지부동이었다.
“실례했습니다, 원장님.”
윤병지는 전충호를 끌고 현관으로 향했다.
“정보를 다룬다는 사람이 천상기 회장이 없어진 걸 몰랐어?”
“분명 나간 흔적이 없었습니다.”
윤성일에게 욕을 퍼먹을 것을 각오한 윤병지가 처량한 심정으로 비가 쏟아지는 주차장을 바라보았다.
경영 참여가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지를 파악하고, 지경이 가진 주식을 되살 방법이 있는지를 타진하기 위해 대송의 기획실과 법무팀 임원들이 지경을 방문했을 시간이었다.
‘차라리 지금에라도 천중명 회장을 찾아가 살려달라고 매달리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윤성일이 들었다면 길길이 날뛰다 못해 목을 조르겠다고 달려들 대책이었다.
“후우-.”
쏟아지는 비를 보며 윤병지는 답답한 속을 길게 토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