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1
211. 정말 되는 거네 (2)
윤성일은 아무리 화가 치밀어도 박태곤과 달리 최소한의 이성을 지키던 인물이었다.
“우아아-악!”
휘익! 와장창!
그런 그가 지금은 책상을 쓸다시피 물건을 패대기치는 것은 물론이고, 손에 잡히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던져댔다.
“박승양, 이 비열한 인간! 그런 짐승 같은 놈이 나를! 이 대송의 주인을 가지고 놀아!”
휘이익! 와장창!
인터폰을 집어 던진 윤성일이 책상에 팔을 짚은 채 가쁜 숨을 내쉬었다.
“허억. 허억.”
부서지고 깨진 그의 집무실이 지금 그의 처지를 적나라하게 증명해주었고, 암담함, 분노, 허탈, 치욕이 뒤엉켜서 그의 표정을 더욱 더 추악하게 만들었다.
윤병지가 몇 번을 경고했었던 말을 윤성일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세상에 대송자동차그룹을 적대적 인수하겠다고 달려들 미치광이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상상이나 할 수 있겠나.
그런데 그 미치광이가 실제로 나타났다.
대형 로펌이나 해외의 금융회사를 앞세운 것이라면 그나마 이해라도 하겠다.
사람의 자존심을 밟아도 어쩌면 이토록 처참하게!
박승양 같은 양아치 사채업자를 앞세워서!
“으아-아!”
와장창! 콰다당!
무섭다. 이 계략은.
이러면 대송자동차그룹만 죽어난다.
먼저 순환출자의 폐해를 세상에 증명하는 멍청한 꼴이 된 것이 아팠다.
다음으로 남은 것은 공개매수였다.
당장 발표와 동시에 대송자동차그룹 네 개 회사의 주가가 상한가로 치솟았고, 거래가 사라지다시피 끊겼다.
남은 방법은 지경과 대송자동차그룹 모두 오늘의 상한가 몇 배 위의 금액으로 주식을 사들이는 공개매수만 남았다.
지경은 어느 계열사를 이용해서라도 사면된다.
그러나 가뜩이나 순환출자로 문제를 일으킨 대송그룹은 최소한 대송자동차그룹에 속한 회사의 유보금을 사용하기 어렵게 됐다.
“설마 이래서…?”
지경과 자이로 텔레콤이 맺은 협약을 떠올린 윤성일은 등골이 서늘하게 식었다.
지경의 공개매수에 대항해 지분 확보를 부탁할 그룹 하나가 이미 저쪽과 손을 잡은 꼴이었다.
이렇게 되면 황금주가 가진 거부권을 활용해서 시간을 벌고, 누가 죽든 간에 끝장을 보는 방법밖에 없었다.
“오냐, 천중명! 내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반드시 네놈이 죽는 꼴을 봐주마! 어디 한번 붙어보자! 누가 돈이 많은지!”
손을 뻗던 그가 멈칫했다.
이미 인터폰은 소파 저 너머에 있었다.
“밖에 잠깐 들어와!”
그는 문을 향해 커다랗게 고함을 질렀다.
“예, 회장님.”
“계열사 모든 회장단에게 한 명도 빠짐없이 한 시간 내로 들어오라고 해! 해외 출장 중인 경우를 제외하고 부회장까지 모두 참석하라고! 한 시간이야! 한 시간!”
부속실 직원이 내용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 머뭇거렸다.
“뭐해! 시간 없는데!”
그러나 그녀는 윤성일의 고함을 얻어맞고는 바로 튀어나갔다.
“윤병지, 이 인간도 빨리 들어오라고 하고!”
윤성일은 문밖을 향해 또다시 고함을 내질렀다.
“기획실, 이 천하에 쓸모없는 것들!”
그의 분노가 엉뚱한 곳으로 튀어가고 있었다.
**
윤만석과 통화를 마친 천호득은 태블릿 PC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공시가 있었단다.
대송장비의 지분을 27퍼센트 이상 취득해서 순환출자의 고리 하나를 손에 넣었다는 말도 들었다.
송달순이 마당에 있는 천호득의 앞에 태블릿 PC를 켠 다음이었다.
“포털에서 경제란을 펼쳐 봐.”
굳이 경제란을 찾을 것도 없었다.
송달순이 포털을 열기 무섭게 ‘지경그룹의 대송자동차 지분 확보’라는 제목의 기사들이 줄줄이 있었다.
“대송자동차의 주가를 보자.”
송달순이 검색을 통해 대송자동차의 주가를 펼친 다음이었다.
“흐헤헤헤헤!”
엄청나게 쌓인 상한가 매수 잔량을 확인한 천호득이 특유의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지경의 주가를 보자.”
지경그룹의 주가 역시 덩달아 상한가 근처에 있었다.
“흐히헤헤헤헤! 흐헤헤헤! 흐히헤헤헤헤!”
그 직후에 전에 없었을 정도로 천호득의 웃음이 이어졌다.
“윤성일이…, 흐헤헤! 그놈은…, 흐히헤헤헤! 지금 이마가 빨갛게 됐을 거야! 흐히히헤헤헤헤!”
눈가에 눈물까지 맺힐 정도로 쏟아내는 웃음이었다.
“하아! 히! 흐히헤헤헤. 흐아헤헤헤.”
억지로 진정하던 천호득이 다시 주체하지 못하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아! 이거 어쩌지? 흐하하하하! 흐헤헤헤헤헤!”
뭐가 저리 웃길까?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송달순 앞에서 겨우 웃음을 그친 천호득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세상을 살면서 한 번쯤 절대 이길 수 없는, 아예 무슨 짓을 할지 상상조차 안 되는 미치광이 같은 인물을 만날 때가 있지.”
“예, 총수님.”
어쩐지 가르침을 주는 듯싶어서 송달순이 얼른 답을 하고 나섰다.
“그런 미치광이를 만나면 피하는 것이 상책이야. 정 마주치게 되면 굳이 맞서기보다는 차라리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이 좋지.”
앞을 보고 말하던 천호득이 시선을 들어서 송달순을 보았다.
“그런데 그 미치광이가 내 아들인 거지.”
“예?”
“흐헤헤헤헤헤! 윤성일이…! 그 멍청이가! 씩씩대는 꼴을 내가 알거든! 흐헤헤헤! 그러니! 흐헤헤헤! 내가! 흐흐! 흐으으! 흐헤헤헤!”
“총수님!”
휠체어 앞으로 상체를 구부린 천호득을 송달순이 급하게 안았다.
“흐으으! 흐으으으!”
천호득은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거래는 끝난 것과 같았다.
대송자동차그룹의 주가가 상한가로 고정되더니 아예 잠가놓은 것처럼 거래가 뚝 끊겼다.
어쩌다 한두 주 매도주문이 나오기는 하는데 그것 역시 매수주문을 낸 순서대로 체결되기 때문에 어차피 모두 지경의 계좌로 들어온다.
최상중과 팀원들이 커피를 마셔가며 빨간색으로 도배된 모니터를 바라볼 때였다.
딩동, 댕동.
객실의 벨이 울렸다.
화들짝 놀란 팀원들 앞에서 최상중이 얼른 문으로 다가가서 밖을 확인했다.
“어?”
놀란 그가 안을 향해 급한 손짓을 보이며 문을 열었다.
높은 사람? 아니면 단속?
이게 현행법에 걸릴 일은 아닌데?
그래도 부장과 과장은 서둘러 종이컵을 치우며 대리와 막내에게 서두르라는 눈짓을 날렸다.
“안녕하십니까?”
바싹 긴장한 최상중의 인사를 들으며 종이컵과 책상을 치우던 팀원들이 긴장한 채 문 앞을 살폈다.
“뭐해? 인사 안 드리고?”
최상중은 물론이고, 그의 팀원 모두 방을 들어서는 천중명을 보며 긴장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룹 회장을 계열사 부장과 과장, 대리와 막내 사원이 호텔 방에서 만나게 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지경그룹 국내와 해외 지사를 포함해 18만 명의 직원 중에서 이런 경험을 몇 명쯤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지 않을까?
“이번 거래를 책임진 최상중 상무입니다, 회장님.”
송문철이 자부심 가득한 표정으로 최상중을 소개했다.
“고생 많았죠?”
“아닙니다, 회장님.”
천중명이 내민 손을 최상중이 공손하게 맞잡았다.
이어서 최상중이 부장과 과장, 대리 둘, 막내를 소개했는데 천중명은 그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눴다.
“내가 회장이 되고 처음 있는 일인데.”
그런 뒤에 천중명은 웃는 얼굴로 재킷 안에 손을 넣었다.
“내 사비로 준비한 거니까 오늘 저녁만큼은 근사한 곳에서 즐겼으면 합니다. 그렇더라도 술 많이 마시고 사고 치면 알지?”
“술은 아예 안 마시겠습니다.”
저녁에 한잔하자고 했던 송문철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최상중을 바라보는 앞이었다.
“고생들 했고, 앞으로도 남은 과정이 있으니 회사로 복귀해서 이번 주식 인수 업무에 최선을 다해주기 바랍니다.”
“예, 회장님.”
최상중이 대표로 대답하는 동안 송문철은 나오는 웃음을 꿀꺽 삼켰다. 막내가 대통령을 만난 열성 지지자처럼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였다.
**
천상기의 병실에 들른 박승양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어이구! 우리 천 회장! 좀 어때요?”
그는 병실에 들어오기 무섭게 구석으로 움직여 봉지커피를 뜯고는 물을 부었다.
“식사는 좀 하셨고?”
“무릎에 통증이 심한데 원장이란 양반은 뭐라고 합니까?”
“생살을 째서 뼛조각을 빼냈으니 당연히 아프겠지요. 그리고 참! 거기 오지은 씨라고 했지?”
“예? 예.”
종이컵을 입에 대며 침대로 걸어온 박승양이 보조 침대에 앉아 있던 오지은을 잔인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아가씨는 말이야. 이제 집으로 가.”
“예?”
천상기를 바라보았던 오지은이 다시 박승양에게 시선을 가져왔다.
“내가 천 회장께 허락받았어. 그러니까 이제 가. 가도 돼.”
이게 지금 뭐라는 거야?
누구에게 허락을 받았다고? 천 회장이라니?
침대에 누워있던 천상기마저 고개를 들고서 조금 전 했던 박승양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설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혹시 빅픽쳐라고 아시나, 빅픽쳐? 큰 그림? 천상기 회장을 이용해서 대송자동차그룹을 거머쥐시겠다는 우리 천중명 회장님의 큰 그림이 오늘 완성됐거든. 그러니까 오지은 양은 이제 훨훨! 자유! 응? 프리덤! 고우!”
박승양은 아예 오지은을 털어내듯 손을 짧게 저었다.
“후루룩.”
그런 뒤에 커피를 요란하게 빨아들인 박승양은 곧바로 천상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가 천 회장을 모시게 됐어요. 그러니 잘해보시자고. 아직 1천7백억쯤 남았다는 거 아닙니까? 그렇죠?”
천상기는 대꾸조차 못 한 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오늘 우리는 섬으로 갑니다. 섬으로. 아시나? 섬? 섬마을 선생님? 얼마나 멀고 먼지, 차로 다섯 시간, 배로 다섯 시간을 가요. 거기에서 천상기 회장님은 새우? 어? 그걸 잡을 거야.”
뭔가를 말하려던 천상기를 박승양이 히죽 웃는 것으로 틀어막았다.
“나는 천중명 회장님이나 윤만석 실장하고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인 거 아시지? 괜히 껍죽대면 다시는 수술도 필요 없게 천상기 회장의 다리를 아예 썰어버릴 겁니다. 싹둑. 아시지? 싹둑!”
천상기는 확실히 대단한 근성의 소유자였다.
“지은아! 경찰에 신고해! 사람 살려요! 사람 좀 살려주세요!”
그는 병실이 떠나갈 정도로 목청껏 고함을 질러댔다.
“이 층을 우리가 다 써요. 그러니 올 사람이 없지.”
“지은아! 신고하라고!”
“그렇게 하면 아가씨는 팔다리가 잘린 채로 남은 평생을 살게 되거나.”
박승양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은 오지은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니면 정말 섬에 팔려가는 거야. 천호득 총수님과 천중명 회장님이 어떤 힘을 가졌는지 알지? 그러니 좋은 말 할 때 이대로 나가서 입 꽉 닫고 살아. 알았어?”
시선을 돌리던 박승양이 잊은 것이 있다는 듯 다시 고개를 돌렸다.
“혹시 우리 천상기 회장을 진심으로 사랑해서 떨어지기 싫다면 함께 섬으로 가도 좋고.”
오지은의 고개가 바쁘게 좌우로 움직였다.
“좋아. 아가씨는 나가고. 알지? 팔다리 싹둑? 섬 처녀?”
박승양이 손짓을 하자 보스턴백을 챙겨 든 오지은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허! 그건 천 회장의 통장이 든 가방이잖아. 어디에서 수작질을 해? 진짜 죽고 싶어?”
“착각해서 그랬어요. 가방이 비슷해서요.”
박승양의 지적에 오지은이 보조 침대 옆의 가방을 들고 급하게 병실을 나섰다.
드르륵. 타악.
“저, 저! 그래도 한집에서 살았는데 우리 천상기 회장에게 인사라도 하고 가지.”
침대의 발치 쪽 난간에 상체를 기댄 박승양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천상기를 바라보았다.
“점심 먹고 출발할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천상기 회장님.”
“박 회장님. 내가 가진 돈 중에서….”
“그거 다 이미 내 거 같은데?”
“어디에 있는지! 비밀번호가 뭔지도 모르잖아!”
“섬에 가서도 그렇게 버틸 수 있는지 봅시다.”
박승양이 펄펄 뿜어내는 야비함에 짓눌려 천상기의 얼굴과 눈에 감추지 못하는 공포가 피어올랐다.
그가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드르륵.
그리고 그때 문이 열렸다.
몸을 돌린 박승양이 세상 반가운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앞쪽 침대에서 천상기는 아예 얼이 빠졌다.
“수술이 잘 됐다며?”
천중명이 병실에 들어올 거라고 생각이나 했었나.
“박 회장님. 어려운 부탁드려서 죄송합니다.”
“1천7백억 원이나 생기는 데다, 우리 천 회장님께서 직접 부탁하신 일인데 당연히 제가 해야지요. 그냥 싹둑! 아니지. 일단 새우를 잡게 해보고, 안 되면 적당히! 다시는 회장님 앞길을 못 막게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박승양을 향해 고맙다는 의미의 고갯짓을 한 천중명이 천천히 천상기의 머리맡으로 움직였다.
확실히 꿩 잡는 게 매라더니, 이렇게 질린 표정의 천상기는 처음 봤다.
“용인에서 조용히 살랬더니 결국, 내 뒤통수를 치겠다고 윤성일과 손을 잡았다는 거지?”
“그게 아니라…. 이거 다 꾸민 거잖아! 나를 함정에 몰아넣어서 이렇게 만든 거 아냐.”
“함정 아니라 세상 없는 게 나타나도 그러면 안 됐지.”
픽 웃은 천중명이 안됐다는 의미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살려줘. 잘못했어. 이번 한 번만 용서해주면 다시는 안 그럴게.”
“너 이미 팔았어. 여기 박 회장께.”
천중명의 뒤에서 박승양이 몹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