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
210. 정말 되는 거네 (1)
오전 9시가 넘어가면서 급한 문자들이 날아들 때마다 설명하기 어려운 긴장이 천중명의 집무실을 떠돌았다.
[회장님. 명동과 대치동에서 7조 원을 별도의 계좌에 넣어두었습니다.]
지경에서 송금한 돈으로 주식을 매입한다는 사실을 윤성일이 눈치 채지 못하게, 박승양은 실제로 명동과 대치동에서 도는 사채업자들의 돈을 실제로 긁어모았다.
그리고는 조 단위 돈의 입금될 때마다 지금처럼 문자로 알려주었다.
윤성일이 부린다는 전충호라는 정보원이 알아채라고 일부러 만들어내는 요란한 움직임이었다. 이 정도면 마지막 순간까지 윤성일은 박승양이 지불하는 돈의 출처를 의심하기 어렵다.
지이이잉.
[유비캅 직원 둘과 남부증권 건물에 있습니다.]
그 뒤로 박승양을 지키는 곽대출의 보고가 천중명의 휴대 전화기에 들어왔다.
천중명이 문자를 확인한 직후였다.
똑똑똑.
“회장님. 남부증권 박승양 계좌로 15조 원을 입금했습니다. 주식회사 지경과 박 회장의 주식 양도 계약서입니다.”
긴장을 감추지 못한 채 들어온 유진교가 주식회사 지경과 박승양의 15조 원짜리 주식 양도 계약서를 천중명의 책상에 올려놓았다.
“법무팀 확인하셨죠?”
“분명하게 확인했습니다. 발전본부에서 상황을 점검하고 거래가 이루어지면 다시 올라오겠습니다.”
계약서를 전해준 유진교가 집무실을 나섰다.
세상 참.
조 단위의 돈이 마치 친한 사이에 빌려주는 몇십만 원처럼 떠돌아다닌다.
천중명은 셔츠 차림으로 집무실의 창을 향해 섰다.
40조 원을 던져서 평가금액 400조 원의 대송자동차 그룹을 먹는 일이었다. 이번 인수를 통해 대송그룹을 전부 삼킨다면 평가금액 600조 원의 그룹을 40조 원에 먹는 엄청난 적대적인 인수였다.
지경증권의 송문철이 피가 마르는 심정으로 천중명의 지시를 기다리고, 풀어헤친 사자 머리를 로고로 사용하는 호텔의 스위트룸에서는 최상중 팀이 모니터를 노려본 채 대기 중이었다.
성공하면 대한민국 경제사에 전무후무한 전설이 될 테고, 실패하면 철부지 회장이 미친 짓을 시도했다는 추한 사례를 남긴다.
살펴야 할 결재서류들을 미뤄둔 채 천중명은 창밖에 펼쳐진 도시를 바라보았다.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
이 상황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돌발 상황으로 일이 틀어진다면 그건 아직 도깨비 회장에게 대송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신의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천중명은 고개를 들어서 하늘을 보았다.
픽.
그리고 특유의 웃음을 웃었다.
**
윤성일은 볼을 씰룩이며 스마트 폰에 귀를 기울였다.
- 우리 쪽과 남부증권 법무팀이 계약서 내용을 확인했고, 양쪽 법무팀이 모두 이의 없다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주식양도계약서에 특별한 게 있을 리가 있겠나.
- 남부증권 박 회장의 계좌에 15조 원의 입금 확인했고, 결재하시면 바로 주식을 넘기겠습니다.
남부증권에 도착한 대송증권 윤병지의 보고였다.
“수상한 점은?”
- 회장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혹시 몰라서 남부증권 문요양 회장을 참관인으로 계약서에 기록했습니다.
모처럼 윤병지가 일을 제대로 해내는 것 같아서 윤성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박승양과의 거래에서 20조 원, 대송증권사에서 매각한 주식 대금 20조 원, 이렇게 조달한 자금으로 대출금의 절반인 40조 원을 상환하고.
윤성일은 독한 눈으로 입술에 힘을 꾹 주었다.
그 뒤로 천상기를 앞세워서 천중명을 밀어낸다.
윤병지가 스마트폰 저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지만, 중대 결심을 앞두고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주식을 넘기자.
그런 뒤에 천상기를 손아귀에 쥐고 지경을 좌지우지하자.
이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그룹은 대송이 될 것이고, 윤성일은 그 그룹의 최고 경영인으로 추앙받는 일만 남았다.
지경그룹이 벌어들이는 돈으로 대송의 부채를 모조리 갚아주마. 그런 뒤에 그날 좌절하는 천호득과 천중명 부자 앞에서 통쾌하게 비웃음을 날려주마.
길게 숨을 내쉰 윤성일은 마침내 스마트 폰을 향해 입을 열었다.
“주식을 넘겨.”
- 예, 회장님. 이전을 마치고 보고 드리겠습니다.
윤병지의 답을 듣는 순간이었다.
섬뜩한 무언가가 윤성일의 등줄기를 타고 뒷목을 파고들었다.
혹시 놓친 게 있나?
그 빌어먹을 적대적 인수는 불가능하고, 그렇다면 박승양이 주식을 처먹고 돈을 안 주고 튀어?
그런 일이 생긴다면 증권분실신고서를 제출하는 것으로 깨끗하게 해결된다.
“어허! 참!”
사람이 고작 주식 20조 원에 이토록 쪼그라들다니!
그게 아니면 상대하는 인간이 박승양 같은 저질이라 공연히 걱정과 염려가 앞서서 그런지도 몰랐다.
스마트 폰을 내려놓은 윤성일은 이를 악물었다.
**
대송과 남부증권의 법무팀 직원이 계약서를 천천히 넘겼다.
“간인 하십시오.”
매도인 대리 윤병지, 매수인 박승양, 참관인 문요양 남부증권 회장이 순서대로 앞장을 접은 계약서의 중간 부분에 도장을 찍었다. 그런 뒤에 다시 계약서 두 부를 옆으로 늘어놓고는 연결 부위에 간인을 추가로 찍었다.
“이상 없습니다.”
계약서의 도장을 확인한 법무팀 부장의 보고를 들은 윤병지가 휴대 전화기를 들고서 번호를 눌렀다.
“나 윤병지 부회장입니다. 주식 이관하세요.”
지시를 내린 그의 손가락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20초쯤 지난 다음이었다.
“이관했습니다. 확인하시고, 송금 부탁드립니다.”
“드려야지요.”
박승양이 시원하게 답을 하고는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을 받은 문요양이 구내전화기를 들고서 내선 번호를 눌렀다.
“나다. 주식 입고 확인해. 확실해?”
수화기를 든 채로 문요양은 박승양을 향해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전해준 대송 계좌로 15조 원 송금해.”
지시를 내린 문요양이 마른침을 삼키며 결과를 기다렸다.
“확인했어? 그래.”
문요양이 수화기를 내린 직후였다.
윤병지의 휴대 전화기가 울었다.
“여보세요? 그래? 알았어.”
윤병지의 대꾸와 표정으로 거래가 무사히 끝났음을 그 자리에 앉은 모두가 알 수 있었다.
통화를 마친 윤병지는 홀가분한 얼굴이었다.
“입금 확인했습니다. 금감원 신고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건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어떻게? 시원한 음료수라도 한잔 하실까?”
“회장님께 보고가 남아서 오늘은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박승양의 권유를 사양한 윤병지가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
창을 향해 선 천중명의 손에서 휴대 전화기가 울었다.
[회장님. 대송장비 주식이 남부증권 박승양 계좌로 이관되었습니다.]
남부증권의 상황을 체크하던 유진교의 문자였다.
1단계는 됐고.
천중명이 휴대 전화기를 든 채 책상에 기대섰을 때였다.
지이잉.
[회장님. 제 계좌에 있던 주식을 주식회사 지경의 증권 계좌로 이관했습니다.]
어쩐지 손가락을 떨며 보냈을 것 같은 박승양의 문자가 들어왔다.
박승양은 이런 일에 실수할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지시를 내리기 전에 한 번쯤 확인할 필요는 있었다.
대략 1분쯤 지난 뒤였다.
똑똑똑.
“회장님. 대송장비의 주식이 이관되었습니다.”
유진교가 급하게 문을 열고 집무실로 들어와 주식 입고 증서가 담긴 결재판을 천중명의 책상 위에 펼쳐놓았다.
이제 2단계를 진행할 때였다.
“그럼 밀어붙여야죠.”
천중명은 인터폰에 손을 뻗었다.
“지경증권 송문철 회장을 연결해줘.”
[네, 회장님.]
천중명은 책상에 팔을 짚은 채 서서 인터폰을 기다렸고, 그런 앞에서 유진교가 묵묵하게 자리를 지켰다.
[1번에 송문철 회장 대기 중입니다.]
천중명은 곧바로 수화기를 들고서 1번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회장님! 송문철입니다.
“지금부터 대송자동차그룹의 지분을 최대한 확보하세요. 이후에는 유진교 본부장께 보고해서 남은 일을 처리하시고.”
- 알겠습니다, 회장님. 장 마감 뒤에 보고 드리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천중명은 유진교를 향해 시선을 들었다.
“송문철 회장과 의논해서 5퍼센트를 넘기는 순간에 주식 취득 신고와 공시 띄우세요.”
“예, 회장님.”
책상 앞에서 기다렸던 유진교가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에 집무실을 나섰다.
천중명은 인터폰에 다시 손을 뻗었다.
“시원한 미숫가루 한잔 부탁해.”
[네, 회장님.]
긴장했었나 싶어서 픽 웃음이 나왔다.
**
최상중은 9시 24분에 송문철의 전화를 받았다.
“최상중입니다, 회장님.”
- 지금부터 최대한 긁어. 오늘 끝날 것 같다. 호텔 나오게 되면 술 한잔하자.
“예, 회장님.”
통화를 마친 최상중은 앞쪽에 놓인 책상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시작해. 최대한 많이 거둬.”
“예, 상무님.”
부장과 과장, 대리 둘이 모니터를 향해 고개를 돌린 뒤에 바쁘게 숫자를 입력했다.
이미 어제 매입한 숫자가 적지 않아서 5퍼센트의 매수물량을 채우는 데 10분 이상 걸리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5퍼센트를 넘기는 순간, 대송자동차그룹의 주식을 인수했다며 공시를 띄워야 한다.
“후우.”
최상중은 쿵쾅거리며 뛰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해서 자꾸만 숨을 길게 뱉어냈다.
대송자동차 그룹의 적대적 인수라니?
오늘이 누군가에는 역사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치욕과 좌절의 하루로 기록된다.
나직하게 숨을 내쉰 최상중이 무심코 고개를 돌린 앞에서 막내는 아예 얼이 빠진 얼굴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
<오늘의 아침> 대표는 참으로 오랜만에 최만호 실장의 전화를 받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실장님! 최근 지경그룹의 눈부신 성장을 잘 보고 있었습니다. 저희가 지난주에 낸 기사를 보셨습니까? 천중명 회장님의 개혁과 혁신에 관한 기사였습니다.”
칭찬과 포상을 바라던 그가 귀를 쫑긋 세우고 최만호의 말에 집중했다.
“예, 실장님!”
그런 뒤에 그는 급하게 연필을 들어 메모지에 듣고 있던 내용을 받아 적었다.
“예에? 대송자동차의 지분을요?”
메모를 하면서도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발표는 언제 하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발표와 동시에 기사가 나가야 효과가 큽니다! 예, 실장님! 그런 기획기사라면 우리 오늘의 아침과 현충기 기자를 따라갈 사람이 없습니다.”
급하게 메모를 마친 대표가 급하게 혀를 핥았다.
“그런데 실장님. 이 정도라면 언론사 세 곳, 공중파 한 곳, 그리고 종편 세 곳은 함께 떠들어야 합니다. 제게 그 일을 맡겨주시면 제대로 해내겠습니다. 다만, 비용이….”
말꼬리를 흐렸던 <오늘의 아침> 대표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홍보비 선금이라고 하셨습니까, 실장님?”
그는 완전히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내년 광고비를 홍보비 명목으로 선금으로요?”
지금 대표는 완전히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실장님! 이 한 몸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지면으로! 충실한 기사로 보답하겠습니다!”
대표는 책상에 머리를 찧을 정도로 깊게 고개를 조아렸다.
**
금요일에 평화롭게 시작한 증권가에 가히 핵폭탄급이라 할 만한 발표였다.
[주식회사 지경, 대송장비 지분 매도인 박승양 20퍼센트, 장중 거래 5.7퍼센트, 합계 25.7퍼센트 취득, 지분 취득 사유, 경영 참여]
그 뒤로 대략 6퍼센트에 해당하는 대송자동차, 대송모터스, 대송서비스의 주식을 매수했다는 발표가 줄줄이 이어졌다.
“우에엑!”
호텔 스위트룸에서 주식을 매수하던 과장이 거래 프로그램 아래에 떠오른 속보를 확인하고는 기괴한 비명을 내질렀다.
“무슨 일인데 그래? 거래 날아갔어?”
최상중이 놀라 달려갔고, 옆에 있던 부장과 대리들이 상체를 기울여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게 아니라 이걸 좀 보십시오.”
과장이 속보에 화살표를 올리고 마우스 버튼을 두 번 클릭하자 화면에 주식 매입 공시가 떠올랐다.
“뭐야? 대송장비를 장외에서 20퍼센트나 매수했다는 거야? 이 정도면 대송서비스가 가진 대송장비 주식 전부를 우리 지경이 사 왔다는 거잖아?”
“상무님. 박승양이란 분이 송도상인, 그 박승양이겠지요?”
“이 정도로 움직이려면 그 양반일 확률이 높겠지?”
멍했던 최상중의 눈에 독기가 잔뜩 피어올랐다.
“뭐해? 얼른 최대한 매수해! 순환출자에서 한 개 고리를 우리가 완전히 잡아먹었는데 나머지 회사의 주식을 제대로 매입하지 못하면 나중에 무슨 변명을 하겠냐! 금액 신경 쓰지 말고 긁어!”
최상중의 지시에 부장을 비롯한 팀원들이 과감하게 숫자를 입력하고 있었다.
“정말 되는 거네. 대송자동차그룹의 적대적 인수.”
그런 팀원들의 뒤에서 최상중의 혼잣말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