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209화 (209/315)

# 209

209. 지금 그럴 여유가 있나? (3)

유진교, 최만호와 함께 소파에 앉은 천중명은 조금 전에 있었던 박승양과의 통화 내용을 알려주었다.

“윤 회장이 그렇게 쉽게 대송장비의 주식을 넘길 줄은 몰랐습니다. 자동차그룹도 그렇지만 다른 계열사의 유보금을 가져와도 됐을 텐데요.”

심지어 유진교는 혹여 속임수가 있지는 않은지 염려하는 눈빛이었다.

“다른 계열사의 돈을 가져오면 대송자동차그룹의 이익금을 지분 확보에 사용했다고 떠드는 모양새가 나옵니다. 거기에 황금주마저 쥐고 있어서 적대적 인수합병을 걱정할 필요도 없을 테고요.”

“회장님. 그 점은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윤 회장이 황금주를 쥐고 있는 동안은 지분을 아무리 가져봐야 소용없지 않습니까?”

유진교의 진지한 질문에 천중명이 먼저 가볍게 웃었다.

“설마 대송자동차 그룹을 적대적으로 인수할 곳이 있으리라 예상했을까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고정관념은 이렇게 무섭다.

“우리가 최대 주주가 됩니다. 가장 먼저 뭘 하시겠습니까?”

“그야 당연히 임시주총을 요구합니다.”

“그다음은요?”

빤한 질문에도 유진교의 태도는 진지했다.

“이사를 선임합니다…?”

말을 하던 유진교가 뺨을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한 눈으로 천중명을 바라보았다.

뭔데요? 왜 그러시는데요?

그 똑똑하고 냉정하던 최만호가 얼빠진 사람처럼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천중명과 유진교를 애타게 바라보았다.

“이사회! 이사회를 여시는 거군요. 그리고 우리도 이사와 대표이사를 선임하시려는! 공동대표이사!”

확실히 유진교는 빨랐다.

황금주를 쥔 그룹에 대한 적대적 인수가 처음이라 그렇지, 대송자동차그룹을 먹고 나면 비슷한 일이 발생할 여지가 다분히 있었다.

“황금주는 이사를 선임할 권한이 있지, 해임할 권한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이사와 대표이사를 선임할 수 있죠.”

천중명이 설명을 덧붙인 직후였다.

이번엔 최만호가 뺨을 맞은 사람처럼 멍한 눈으로 천중명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네 곳 모두 5퍼센트 이상 지분을 확보하시는 것도 그런 의미십니까?”

“3퍼센트 이상 보유한 주주는 회계자료 열람권이 있고, 5퍼센트 이상의 주주는 임시주총을 요구할 권한이 있습니다. 순환출자니까 우린 거꾸로 갑니다. 대송장비에서 자동차로, 그렇게 네 곳에 모두 공동 대표이사를 선임할 생각입니다.”

냉정하고 날카롭기로 지경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울 유진교와 최만호가 멍한 얼굴을 오래도 하고 있었다.

천중명은 박승양이 보내준 공증계약서 사진을 휴대전화에서 찾았다.

“계약서 사진을 보내드릴 테니 박승양 회장이 넘겨받는 주식을 지경이 같은 가격에 매입하는 별도의 계약서를 작성하세요. 10시 이전에 남부증권 계좌로 15조 원을 입금해 주시고요.”

“박 회장이 돈으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겠습니까?”

“그런 일 잘 처리할 심복이 있어서 괜찮을 겁니다.”

곽대출을 떠올렸는지 유진교와 최만호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우우웅.

유진교에게 사진이 건너간 다음이었다.

“회장님. 공동대표이사는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 전에 파생상품이야 자금이 많은 쪽이 이기는 싸움이라고 이해한다고 해도 공동대표이사는 생각조차 못 했던 일입니다.”

유진교가 나직하게 질문을 건넸다.

“지분율이 형편없어서 해외 헤지펀드의 가장 좋은 먹잇감이 우리나라의 대기업입니다. 그들이 만든 사례가 우리 지경연구소의 리포트에 꽤 올라와 있습니다.”

“헤지펀드가 실제로 경영권을 노린 적은 없지 않습니까?”

“주가로 배불리 먹었으니까요. 단기 수익을 노리고 들어와서 그렇지, 그들이 실제로 경영권을 노렸다면 이미 많은 그룹이 경영권을 빼앗겼을 겁니다.”

천중명이 무섭게 느껴졌는지 유진교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계약서 사진을 확인했다.

**

회장실 책상에 앉은 윤성일은 지쳤고, 한편으로 참기 어려울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어떻게 된 그룹이 하나에서 열까지, 심지어 대출금 상환을 위한 자금까지 회장이 모두 나서서 해결해야 하는 건지, 급여를 받아가는 임원들을 줄줄이 세워놓고 모가지를 뎅겅뎅겅 자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박승양 같은 사채업자와 단둘이 공증계약서도 작성했다.

치욕스럽게도 신분증을 꺼내 내놓았는데 당장 월요일까지 20조 원을 만들려면 다른 방법도 없었다.

회사에 돈이야 있다.

그런데 갚고 나면 할부금융이 망가진다.

다른 계열사에서 당겨오자니 지분 확보를 위해 대송자동차그룹의 이익금을 사용했노라 광고하는 꼴이고.

‘사람이 없어, 사람이. 대가리 있는 것들은 없고 죄 눈치 보며 급여에만 신경 쓰는 벌레들뿐이야!’

똑똑똑.

그때 노크와 함께 윤병지가 들어섰다.

“뭐야?”

“오늘 주식 매각한 내용을 보고드리려고 왔습니다.”

“어떻게 됐어?”

“현재까지 18조7천억 원의 현금을 확보했습니다.”

“주가는?”

“종가에 1퍼센트 하락했습니다.”

그 정도면 예상보다 훌륭한 마무리였다.

흡족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넘어가겠다는 투로 윤성일은 시선을 노트북으로 옮겼다.

“박태곤이 이 모자란 인간! 지분의 35퍼센트를 넘긴 것도 멍청한 짓인데 와이파이망까지 얻어 쓰다니! 이러다가 지경이 와이파이망을 닫아버리면 그때는 어떻게 하려고!”

어쩐지 지경에 자꾸만 밀리는 것 같아서 짜증과 분노를 토해내던 윤성일이 힐끔 시선을 들었다.

“뭐야? 왜 그러고 있어? 다른 보고가 있어?”

“오늘 거래에서 아무래도 지경의 움직임이 수상합니다.”

노트북으로 향하던 윤성일의 고개가 퍼뜩 위로 들렸다.

“지경이 왜?”

“18조7천억 원의 주식을 매수한 창구가 대부분 지경증권이었습니다.”

숨을 천천히 들이마신 윤성일은 출발하기 직전의 증기기관차처럼 “푸후!”하는 느낌으로 내뱉었다.

“그러니까! 또 그 미친 적대적 인수를 걱정한다?”

“꼭 그런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회장님.”

“월요일에 대출금을 상환하기 위해 내가! 이 대송그룹의 회장이 사채업자에게 수모를 받으며 돌아다녔는데 너는 편안한 사무실에 앉아 자리 빼앗길 것을 염려했다?”

“그보다는 조심하시는 게 어떠시냐는….”

“야, 이 쓸모없는 인간아-아!”

윤성일의 집무실이 쩌렁 하고 울렸다.

“황금주를 가졌다고! 황금주를! 황금으로 만든 게 아니라 이사를 임명할 권한이 있는 황금주를 내가 가지고 있다고! 원숭이도 이 정도 설명하면 알아듣겠다, 이 멍청한 인간아!”

“생각이 짧았습니다, 회장님.”

책상을 향해 고개를 처박은 윤병지를 향해 윤성일은 거친 숨소리를 내뿜었다.

“리온자동차를 인수하자고 그렇게 매달려보든가. 좋은 건 다 놓치고, 이제와서 죽어라 돈을 만들고 온 내 앞에서 팔자 좋은 소리를 늘어놔? 대송을 빼앗기면 누가 더 아프겠어? 너야, 나야?”

“잘못했습니다, 회장님.”

“푸후!”

목덜미에 손을 올린 채 몇 번이나 목을 뒤로 젖힌 뒤에야 윤성일은 그나마 이성을 붙들었다.

“20조 원에서 부족한 금액은 내일 매각해서 채우기로 하고, 내일 매각하면 화요일에 입금이지?”

“그렇습니다, 회장님.”

“월요일에 건설이나 다른 곳에서 잠시 현금을 돌릴 테니까 그렇게 알아.”

지시를 내린 윤성일이 윤병지를 위아래로 노려보았다.

“꼴도 보기 싫어! 나가!”

“예, 회장님.”

윤성일은 파리를 쫓듯 손등을 바깥으로 휘저었다.

**

가뜩이나 새로운 업무가 비처럼 쏟아지는 그룹발전본부로 산더미 같은 제안서가 쏟아져 들어왔다.

벤처사업부를 신설한다는 소문에 개발자들이 서둘러 제안서를 보냈고, 그와 별도로 어떡해서든 도움이 되겠다며 손도운과 이관수가 마음 급하게 뛰어다닌 덕분이었다.

삼성동 건물의 내부공사와 가구 배치가 끝나기도 전인데 반응이 이렇게 뜨거울 줄은 몰랐다.

“특허가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먼저 분류해줘요.”

대리 두 명에게 필요한 업무를 지시한 주인영은 그와 관련한 보고서를 별도로 작성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곽대출의 방을 바라보았다.

직장생활의 꽃이 상사의 총애와 승진이라면 시기와 질투, 중상모략은 그에 따른 당연한 대가가 아니겠나.

아직 세상에 나타난 적 없는 제품들에 관한 제안서였다.

저 속에서 보석을 찾아내 빛나게 하는 기쁨이 있다면 엉뚱한 선택으로 돈과 시간을 낭비할지 모른다는 걱정도 많았다.

그나저나 천중명 회장님과 곽대출 이사는 우연히 소개를 통해 만났다고 하는데 어떻게 저리 호흡이 척척 맞을까?

게다가 곽대출 이사를 끝없이 챙겨주는 회장님은 또 어떻고?

주인영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회장님의 호출을 받고 달려간 곽대출을 대신해 업무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

컴퓨터 화면에 올라온 주식의 숫자를 꼼꼼하게 확인한 최상중이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신임회장의 지시로 10조 원이 넘는 주식을 매수한 날이었다.

가격이 너무 오르면 어쩌나, 혹여 직원 중 누가 불쑥 5퍼센트를 넘겨서 매입하면 어쩌나, 최상중은 오늘 하루 몸속에서 한 주전자쯤 되는 피가 말라버린 느낌이었다.

그것뿐이면 말을 안 한다.

주식 거래 프로그램의 속보 칸에 자이로 텔레콤의 지분 35퍼센트를 인수했다는 발표까지 나왔다.

도대체 지경은 어디까지 갈까?

리온자동차 인수, 새로운 엔진 개발, 블루크루드, 지경전자의 상장과 신소재 개발 프로젝트까지.

그것으로도 모자라 오늘은 자이로 텔레콤의 지분을 인수했고, 조만간 대송자동차 그룹의 지분 인수 발표로 세상을 벌컥 뒤집어놓을 게 분명했다.

그나저나 지분을 인수한다고 경영권을 뺏어오기는 어려운데 회장님은 무슨 계획이 있으신 거지?

바깥의 사정을 모르는 최상중이 끝없이 떠오르는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고민할 때였다.

“상무님. 저녁은 어떻게 할까요?”

막내의 질문이 최상중을 깨웠다.

“나는 비빔밥.”

“예.”

막내가 거실을 돌아다니며 부장과 과장의 저녁 주문을 받은 다음이었다.

딩동댕동.

객실의 벨이 울렸다.

이곳에 올 사람은 한 명밖에 없다.

벌떡 일어난 최상중의 뒤에서 팀원들이 급하게 복장을 매만졌다.

돋보기를 통해 밖을 확인한 최상중이 문을 열었고, 예상대로 지경증권의 송문철 회장이 들어왔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받아.”

“이게 뭡니까?”

“저녁.”

최상중이 받아든 커다란 두 개의 비닐 백 안에서 고기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갑갑할 텐데 먹는 거라도 제대로 먹어야지. 얼른 준비해. 나도 먹고 갈 거니까.”

이렇게 고생을 알아주는 상사는 고맙다.

부장과 과장까지 나서서 테이블을 옮겼고, 곧바로 숯불에 구운 양념갈비에 푸짐한 반찬과 밥을 놓고 다 함께 달려들었다.

“밖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다음 주 월요일에 금융권에 중대 발표가 있다는 말이 도는 거 말고는 딱히 걸리는 건 없다. 방송이나 보도야 여기 TV로 나오는 게 전부고.”

최상중의 질문에 답을 해준 송문철이 씹던 음식을 삼키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대기업집단의 대출을 규제한다는 소문인데 그거야 발표를 봐야 알지.”

최상중은 송문철의 심복 중 심복이었다.

“월요일에 결판이 날 거라 보십니까?”

“그보다는 5퍼센트 이상의 주식을 매입하라는 지시가 내려오면 그날 끝날 확률이 높아 보인다. 어쩌면 내일이 될 수도 있지.”

끼끅.

송문철의 말에 놀란 것처럼 막내의 딸꾹질이 터져 나왔다.

“물을 마셔 가며 먹어, 인마. 천천히. 고기 처음 봐?”

“죄송합니다. 끼끅.”

물을 마시는 막내를 회장 송문철이 안쓰럽게, 최상중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부장과 과장은 속 터진다는 듯 바라보았다.

**

천중명은 곽대출과 함께 대치동의 박승양이 꾸며놓은 가짜 사무실에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오늘 고생 많으셨죠?”

“회장님을 위한 일편단심이 가실 줄이 있겠습니까?”

낯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쏟아내는 박승양의 뻔뻔스러운 말을 피해 곽대출은 커피가 놓인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 말입니다, 회장님.”

그리고 그때부터 20분에 걸쳐 박승양의 원맨쇼가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박승양과 윤성일이 마주한 것보다 지금 설명한 시간이 좀 더 길지 않았나 싶었는데 그걸 굳이 따질 일은 아니었다.

“회장님. 여기 계약서 원본입니다.”

그런 뒤에 박승양은 등 뒤, 재킷의 안쪽에 꽂아두었던 종이봉투를 꺼내 천중명에게 내밀었다.

“내일 오전에 남부증권 박 회장님 계좌로 15조 원이 입금될 겁니다. 그 전에 계약서를 보낼 테니 서명해서 사진으로 보내주세요. 그래야 횡령과 배임의 책임에서 피합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주식이 입고되면 바로 네 개 회사의 주식을 5퍼센트 이상 인수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 이후로 며칠은 여기 곽 이사와 함께 계세요.”

척하면 착이다.

혹시 눈이 뒤집힌 윤성일이 해코지할 것을 염려하는 천중명의 염려를 박승양은 바로 알아들었다.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시니 제가 어떻게 충성을 마다하겠습니까!”

말끝에 “전하-!”라는 한 마디만 붙이면 바로 사극이 될 정도로 박승양의 음성은 과장, 그 자체였다.

“수술은 어떻게 됐는지 혹시 들으셨습니까?”

“아차! 수술! 그걸 잊었네.”

박승양의 표정이 단박에 바뀌었다.

“뭐라고 하더라, 하여간 내시경인가 하는 걸 넣어서 깨진 뼛조각을 꺼냈다는데 일상생활에는 지장이 없을 거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보고를 마친 박승양의 표정이 또 바뀌었다.

“그런데 회장님. 천상기 회장이 마취에서 깨어나면서 회장님을 벼르더라고…….”

“윤성일 회장이 밀어준다고 생각할 테니 그야 당연하겠죠.”

“아, 예. 그렇더라도 조심하시라는 의미로 말씀드렸습니다.”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천중명은 여유 있는 태도로 박승양을 다독였다.

“박 회장님께 부탁드린 일도 있고, 또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정신을 못 차리면 아예 목을 부러트려 버릴 생각이니까요.”

“아, 예! 목을…. 목을요?”

화들짝 놀란 박승양이 곽대출을 보았다가 얼른 시선을 떨궜다. 어쩐지 곽대출은 목을 뽑아버릴 것처럼 독한 눈빛을 하고 있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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