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208화 (208/315)

# 208

208. 지금 그럴 여유가 있나? (2)

메이저에 속하는 대송증권의 주식 담당 양길세 상무는 증권바닥에서 그래도 오래 묵은 이무기쯤 됐다.

그런 그가 고개를 갸웃한 채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이 정도면 작정하고 받아내는 건데?”

내일까지 주식을 팔아서 20조 원을 만들라는 지시였다.

이쪽에서 아무리 자전을 돌리고, 거래량 늘려도 최소 12퍼센트 가량의 주가하락을 각오했었다.

그런데 양길세의 팀이 낸 매도주문을 지경이 워낙 시원하게 잡아먹고 있어서 마치 펀드끼리 물량을 주고받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거래를 담당한 딜링룸의 부장과 과장, 대리들이 양길세의 눈치를 살폈다.

이건 작정하고 거둬들인다는 말 외에 다른 판단을 내릴 여지가 없었다. 당장 지경은 양길세 팀이 내놓은 대주주 물량뿐만 아니라 일반인이 내놓는 열 주 미만의 주식까지 싹싹 긁어서 가져가고 있었다.

“지경 측과 우리 회장 사이에 밀약이 있는 게 아닐까요?”

부장의 의견에 양길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저 말이 가장 일리 있는 의견이었다.

“지금까지 매도 금액이 얼마나 돼?”

양길세의 질문에 계산기를 두드리던 부장이 새삼 놀라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12조 원이 넘었습니다.”

“지경이 왜 현재가를 지키며 받아가지? 그냥 두면 무조건 5퍼센트는 아래에서도 충분히 긁어갈 텐데?”

양길세는 턱을 감싸듯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답은 하나였다.

‘다른 쪽에서 주문 내기 전에 모조리 가져가겠다는 건데?’

대송자동차그룹의 주식을 매도하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 지경이 이토록 적극적으로 받아갈 거란 언질은 없었다.

윤성일과 천중명 회장 간에 숨겨진 밀약이 아니라면…….

섬뜩한 느낌에 양길세는 휴대 전화기를 들어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두 번 울린 다음이었다.

- 여보세요?

“부회장님. 대송증권 양길세입니다.

- 그래요. 무슨 일입니까?

“주식을 매각하던 중에 아무래도 걸리는 점이 있어서 전화 드렸습니다.”

- 걸리는 점이라니요?

“우리가 내놓은 주식을 지경이 대놓고 받아들입니다.”

- 지경이? 지경 어디에서?

“매수 우위 증권사를 말씀드린 겁니다. 물론 개인이나 기관이 낸 주문일 수는 있는데 아무래도 지경이 직접 나서지 않았나 싶습니다.”

- 지금까지 얼마나 매도했어요?

“이미 12조 원이 넘었습니다. 지금 상태로라면 오늘 중으로 20조 원을 충분히 매각할 수 있습니다.”

- 후우.

윤병지의 한숨이 길게 넘어왔다.

- 회장님께서는 경영권 방어는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하시던데 혹시 내가 말씀드려야 할 부분이 있습니까?

“오늘 지경이 20조 원의 주식을 다 가져간다고 해도 네 곳의 주식을 5퍼센트씩 매수한 거라 실제로 대송자동차그룹의 경영권을 어쩌지는 못합니다.”

말을 하고 보니 사실 별일 아니란 생각에 양길세가 입맛을 다셨다.

- 만약 지경이 우리 물량을 다 받아낸 거라면 대주주 지분을 신고해야 하지 않습니까?

“예, 부회장님. 지금 지경이 주식을 모두 받는 거라면 5퍼센트를 넘긴 직후에 금감원에 대주주 지분 취득 신고를 해야 합니다.”

- 5퍼센트로 염려할 부분은 없어요. 그러니 일단 매도를 계속 진행하고, 혹여 특이 사항이 더 발생할 때 알려 주세요.

“예, 부회장님.”

통화를 마친 양길세는 안도의 숨을 조용하게 내쉬었다.

윤병지가 중간에 있어서 다행이었지, 윤성일에게 조금 전의 보고를 했다면 당장 불벼락이 떨어졌을 게 분명했다.

뭔가 있는데?

급하게 파는 주식을 제값에 모두 찍어갈 때는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부장의 의견대로 대송과 지경의 합작 발표가 있을까?

리온자동차와 대송자동차의 합작?

양길세는 갑갑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

대치동의 박승양 사무실에 들어선 윤성일은 불편한 표정을 감추려 애썼다. 대송그룹의 최고 경영자라고 해도 경영을 위해서 사채업자 사무실쯤 얼마든지 방문할 수 있다.

그러나 말이다.

혼자서 책상을 지키는 여직원의 심드렁한 표정도 그렇거니와 박승양의 방에 놓인 싸구려 가구, 퍼팅 연습기, 조악한 그림을 보노라니 당최 눈살을 펴기 어려웠다.

“앉으십시오, 여기! 커피 좀 가져와!”

밖에 대고 고함을 지른 박승양이 원탁 테이블의 맞은편에 앉았다.

“결심이 서셨습니까?”

“그보다는 우리 관계를 좀 더 확실히 해둬야 하지 않을까 싶소.”

“설마 저와의 잠자리를 원하는 것은 아니실 테고?”

박승양이 두 팔로 가슴을 가린 직후에 여직원이 종이컵 두 개를 내려주고 방을 나섰다.

저런 수준 떨어지는 인간과 일을 해야 하다니!

윤성일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욕구를 초인적인 의지로 삼켰다.

“박 회장이 우리 대송자동차그룹의 주식을 소유하는 게 어떻겠소?”

“주식을요? 얼마나 주시게요?”

종이컵을 입으로 가져가며 박승양이 던진 질문이었다.

“내가 가진 대송장비의 지분을 5조 원 정도 사두면 서로 좋지 않겠습니까? 이번 계획이 성공하면 배 이상 수익이 날 테고, 실패하게 되면 뭐…….”

“윤 회장님이 다시 받아주지 않는 한 처분할 방법이 없겠습니다?”

“시장에 팔면 손해가 나긴 하겠지요.”

“그걸 윤 회장님이 낮은 가격에서 다시 받으실 테고?”

“그런 생각은 못 해봤소.”

“에이! 그건 아니지요.”

종이컵을 내려놓은 박승양이 아랫입술을 내밀었다.

“월요일에 발표하는 대출금 축소 방침 때문에 현금이 필요하신 모양인데, 확실히 그룹을 경영하셔서 그런지 참 이기적이십니다. 돈을 빌려달라고 하셔도 고민할 판에 주식을 사서 기다리라면 저는 거절입니다, 회장님.”

박승양은 냉정한 음성으로 윤성일의 제안을 단칼에 잘라냈다.

“돈이 없는 건 아니고?”

“에이, 아시면서! 당장 현찰 5조 원이 계좌에 있습니다. 그 외에 남부증권에서 돌리는 돈 1조 원, 그리고 들으셨을지 모르겠는데 제가 한알저축은행을 손에 쥐었습니다. 거기에서 2조나 3조 원쯤 돌립니다.”

박승양은 막힘이 없었다.

“지난번에 워낙 짭짤하게 먹은 게 있어서 이 박승양의 신용도가 부쩍 올랐습니다. 당장 제가 전화하면 한 시간 안에 대략 10조 원쯤 가져옵니다. 푸하하하.”

이 인간이 정말 16조 원을 당길 수 있다고?

윤성일은 눈가를 좁히며 박승양을 살폈다.

“차 드세요. 회장님.”

“내가 갑자기 당뇨가 생겨서요.”

테이블을 마주한 상태에서 박승양이 권했고, 윤성일이 거절했다. 돈이라면 마누라도 부록으로 끼워준다는 박승양의 커피를 함부로 마셨다가는 인생 망가질 수도 있었다.

윤성일의 거절을 타고 어색한 침묵이 테이블을 떠돌았다.

“박 회장. 내가 천상기 회장을 앞세워 지경을 먹게 되면 원하는 계열사를 하나 떼어 드리지.”

“그건 지경을 잡숫고 난 다음에 하실 말씀 같습니다. 그리고 그 전에 먼저 천상기 회장을 앞세우는 일에 얼마를 주실지를 결정하는 일이 먼저입니다.”

“중국에서 온다는 발표나 움직임이 없던데?”

윤성일의 말이 짧았는데 박승양은 상관없다는 투였다.

“그걸 알아내는 것이 실력 아니겠습니까? 의심스러우시면 안 하면 됩니다. 나야 천상기 회장에게서 이미 부수입 챙겼으니 그 정도로 만족합니다.”

“나도 우리 박 회장이 한편이라는 보장이 있어야지. 그래야 마음을 놓고 함께 갈 것 아니오?”

박승양은 기가 차다는 투로 웃었다.

“기껏 일 다 끝난 뒤에 알아서 팔고 나가라 하시면 나는 하소연할 곳도 없습니다.”

“나를 그렇게 못 믿는단 말이오?”

“회장님. 나는 돈만 믿습니다. 돈만요.”

종이컵에서 치켜뜬 박승양의 눈빛이 전에 없이 독하게 빛났다.

“죽은 아버지가 꿈에서 저승길 노자 30만 원만 달라고 하는 말에 고함지르다 깬 사람입니다, 제가요. 그러니 믿음 같은 말은 보이스카우트 야영장에 가서 하시고 거래를 하려면 담보나 돈을 주십시오.”

“월요일에 있을 산업은행 조치까지 알고 있다니 박 회장도 생각해 놓은 뭔가가 있을 것 아니오?”

“모자란 금액이 얼마나 되십니까?”

박승양의 질문에 윤성일은 답을 내놓지 않았다.

“회장님이 가지고 계신 대송장비 주식 21퍼센트를 20조 원에 넘기십시오.”

윤성일의 침묵이나 꿈틀거리는 눈빛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투로 박승양은 다부지게 조건을 내놓았다.

“이번 계획에 성공하면 따블로 먹고 빠지겠습니다. 지경이 회장님 손에 들어갔으니 그 정도는 지경 돈으로 사줘도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실패하면?”

“회장님이 사주셔야죠. 내가 시장에 내다 팔면 주가가 고꾸라지고, 대주주 지분이 없어지는데 받아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원금에?”

“나는 20조 원의 이자를 매일 손실 봅니다. 명동 이자로 따지면 하루 200억입니다. 그 정도는 생각해 주셔야지요. 대신.”

“뭐가 더 있소?”

윤성일의 질문을 받은 박승양은 기가 막히게도 손톱을 들여다보며 잠시 시간을 끌었다.

“지분을 인수하는 순간에 회장님은 대송장비의 3자 배정 주식 발행 권한이 없어지는 조건입니다.”

박승양의 조건을 들은 윤성일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천상기 회장이 지경을 먹더라도, 내 주식을 사주지 않은 채 회장님께서 3자 배정으로 지분을 늘리면 나는 죽는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그럴 리가 있겠소?”

“회장님이야 그러실 리가 없지요. 그런데 돈이란 놈은 그렇게 합니다. 20조 원이나 되는 내 주식을 두 배로 사주느니 윤병지 회장이나 따님 이름으로 20조 원의 주식을 새로 발행하는 게 훨씬 쉽지 않겠습니까.”

“그야…….”

뭔가를 말하려던 윤성일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믿어달라는 말 말고는 정말이지 할 말도 없었다.

손톱을 들여다보던 박승양이 말문이 막힌 윤성일을 보며 차갑게 웃었다.

“믿음은 분명하고 확실한 계약서에서 나옵니다. 3자 배정 권한 없애더라도 나중에 내 주식을 두 배 가격으로 사주시면 예쁘게 끝날 일입니다.”

“그 조건으로 계약했는데 지경의 일이 실패하면 어떻게 할 참이오?”

“그렇게 되면 나는 하루에 200억 원의 이자를 물어야 합니다. 내 돈 6조 원을 날리는 한이 있더라도 시장에 내다 팔아야지요. 신용을 지켜야 다음번에 돈이라도 굴리니까요.”

“그 내용도 공증계약서에 넣을 수 있소?”

“물론입니다. 계약은 공평해야 한다는 게 제 지론입니다.”

말을 마친 박승양이 상체를 세운 뒤에 주머니 속의 휴대 전화기를 매만졌다.

“회장님이 황금주를 가지고 계신 동안은 그 한 주로 네 개 회사의 경영권을 빼앗길 일은 없을 것 아닙니까? 그 정도 믿음은 주셔야지요.”

“계약은 언제 하겠소?”

“당장 나가시죠. 아래에 법률사무소가 있습니다. 계약금으로 5조 원을 지금 보내드리지요. 위약금 세 배, 나머지는 내일 오전 10시에 드리겠습니다.”

“입금이 확인되면 우리 법무팀을 통해서 박 회장의 계좌로 주식을 입고하겠소.”

“에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동시에 처리하셔야지요. 동시 패션! 아시나? 왼손, 오른손이 함께!”

윤성일의 고개가 나직하게 끄덕이는 것을 보며 박승양은 비릿한 미소를 얼른 삼켰다.

**

몸을 떨어대는 휴대 전화기를 최상중이 얼른 들었다.

“최상중입니다, 회장님.”

- 고생 많다. 지금 어느 정도 매입했지?

“네 개 회사 모두 4퍼센트를 넘긴 수준입니다.”

송문철의 질문에 최상중이 빠르게 답했다.

- 그렇다면 지시가 있을 때까지 5퍼센트를 넘기지 말고 대기해. 어쩌면 오늘부터 시장을 모두 긁어버릴 수 있어.

“예, 회장님.”

통화를 마친 최상중은 급하게 고개를 들었다.

“계산 잘해! 5퍼센트 넘기지 마! 그리고 오늘이라도 연락이 오면 그때부터 긁을 거니까 준비들 하고.”

최상중의 말뜻을 막내까지 모두 알아들었다.

무언가 중요한 사안이 급하게 진행 중인데 그 결과에 따라 공개 매수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였다.

진짜 적대적 인수가 시작된다.

상황을 짐작한 부장과 과장, 대리, 막내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흥분이 맴돌았다.

궁금한 것도 있었다.

무엇보다 어떻게 대송이 지분을 이토록 내다 파는지 그게 가장 궁금했다.

바라는 것도 있었다.

천중명 회장이 직접 이곳에 와서 악수라도 한 번 해주면 얼마나 짜릿할까 싶은 바람이었다.

장을 마감할 때까지 아직 한 시간이나 있어서 그나마 경력이 있는 부장과 과장은 단숨에 살 수 있는 주식이 얼마나 될지를 계산했다.

“가격이 내려갑니다.”

“놔둬.”

대리의 보고를 들은 최상중이 입술을 늘이며 웃었다.

“양길세가 죽을 맛이겠는데?”

“대송증권 양 상무님 말씀이십니까?”

부장의 질문에 최상중은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천중명은 몸을 떨어대는 휴대 전화기를 들고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회장님! 제가 드디어 윤성일 회장의 목줄을 움켜쥐었습니다! 푸하하하하!

천중명이 귀에서 잠시 전화기를 뗄 정도로 박승양은 흥분한 음성이었다.

- 물었습니다! 물었어요! 회장님 말씀대로 3자 배정을 금지하는 조항으로 공증계약서를 꽉! 그리고 그 직후에 한알 김도정 부장시켜서 5조 원을 통쾌하게 입금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 아니, 어떻게 윤성일 회장이 3자 배정을 양보할 거란 생각을 하셨습니까? 앞으로 영원히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회장님!

천중명은 여전히 전화기를 잠시 뗀 상태였다.

“누가 듣지 않을까요?”

- 차 안입니다! 염려 마십시오, 회장님!

사채업자로 돌다가 대송자동차그룹 윤성일의 멱살을 움켜쥐는 역할을 맡고 보니 박승양은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 모양이었다.

- 공증계약서를 어떻게 전달해드릴까요, 회장님?

“법무팀에 넘겨야 하니까 조용하게 받는 게 좋겠습니다. 덕분에 내일은 정말 불타는 금요일이 되겠네요.”

- 푸하하하하! 윤성일 회장은 지옥에서 불타는 기분 아니겠습니까? 아! 제가 공증계약서를 사진으로 우선 보내드리고, 원본은 지시하시는 방법대로 전해드리겠습니다.

“정말 고생 많았습니다, 박 회장님.”

- 크흑!

박승양의 과장된 반응을 끝으로 통화가 끝났다.

지이이잉.

잠시 후, 박승양이 보내준 계약서를 살핀 천중명이 휴대 전화기를 내려놓을 때였다.

똑똑똑.

유진교가 최만호와 함께 집무실로 들어왔다.

“자이로 텔레콤의 지분 35퍼센트를 주식회사 지경에서 인수했습니다. 박태곤 회장이 기자들과 공식 회견 중이어서 1분 안에 속보가 뜰 것 같습니다.”

그나마 표정을 갈무리한 유진교와 달리 최만호는 복잡한 심정을 전혀 감추지 못한 얼굴이었다.

“실장님은 표정이 왜 그러세요?”

“회장님. 조금 전에 들었습니다. 정말 대송자동차그룹을 인수하십니까?”

“내일 끝날 것 같은데요?”

“예에?”

최만호가 고개를 불쑥 들이미는 옆에서 유진교 역시 꽤 놀란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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