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7
207. 지금 그럴 여유가 있나? (1)
앉아서 천 리를 본다는 말처럼 이어셋을 걸고 통화하는 것만으로도 천호득은 지경그룹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짐작하는 수준이었다.
- 노조들의 반발이 심상치 않습니다.
“임원들이 막아주어야 하는데 그걸 회장이 내친 게 아닌가. 그토록 싸고돌던 직원들이 권리만 주장하는 꼴을 보면 느끼는 바가 있겠지. 회장에게 좋은 공부가 될 게야.”
천호득은 그다지 걱정하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자네의 후배라는 아이들은 여전히 밥값을 못하고 있나?”
- 목표를 분명하게 정해서 달리는 눈치였습니다.
“주인이 곤경에 빠지는 것도 모른 채 미래를 준비하는 것들이 무슨 정보 일을 한다고!”
황성규에 대한 박한 평가를 윤만석은 침묵으로 받아들였다.
“윤성일은?”
- 아직 주식 매입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입니다. 윤 회장이 어제 수석을 만났고, 전충호가 회장님의 뒷조사를 맡아서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그 친구는 늘 그런 식으로 눈앞만 보고 달려. 세상이 바뀌었는데 여전히 일이 벌어진 뒤에 뒷돈으로 무언가를 얻으려 하지.”
천호득이 윤성일의 평가를 마쳤을 때였다.
- 총수님. 오늘 둘째 아드님의 수술이 있습니다.
윤만석이 전한 소식에 그의 작은 눈이 꿈틀하고 움직였다.
“수술? 무슨 수술?”
- 관절경을 이용한 무릎 수술입니다. 방지병원의 유헌우 원장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입니다. 돌팔이라는 말도 있고, 반면에 현찰만 주면 어떤 수술도…….
“그걸 회장이 알고 있나?”
뒤쪽에 있던 장만섭이 슬쩍 송달순을 바라볼 정도로 천호득의 음성이 높았다.
- 총수님. 그 수술을 지시한 분이 회장님이십니다.
“뭐라?”
- 총수님과 약속했던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자네가 들었어? 그걸 직접 들었느냐고?”
- 용인에서 데려가겠다고 하실 때 제게 직접 말씀해주신 내용입니다. 총수님께는 말씀드리지 말라는 당부도 있었습니다.
천호득은 감정이 올라와 일그러진 얼굴을 하늘로 들었다.
“형을 살려줘.”
“약속드릴게요.”
그걸 잊지 않았어?
이 힘 빠진 늙은이와의 약속을 잊지 않아서 수술을 지시했다는 게야?
내가 그놈을 안쓰러워하는 걸 알고서?
“수술을 받는다는 말이지? 무릎을?”
- 수술 후 일주일이면 목발을 이용해 걷고, 3개월 뒤라면 정상적인 활동이 가능할 거라는 진단입니다.
“다시 부러트리려고 수술시키는 것은 아니겠지?”
엉뚱한 질문이어서 그런지 웃음을 참는 윤만석의 숨소리가 묘하게 들렸다.
“그런데 왜 내게는 말하지 말라고 했지? 고약하게?”
- 둘째 아드님이 언제 바로잡힐지 모른다고 염려하는 눈치였습니다. 총수님께서 희망을 품으셨다가 실망하시면 연세가 있으셔서…….
“에이! 나쁜 사람! 내가 뭐 그런 일로 쓰러지기라도 한다든가?”
감정이 치닫던 천호득의 눈이 갑자기 독하게 변했다.
- 박승양이 조직원을 동원해서 병실과 수술실을 지키고 있고, 그 바깥을 유비캅이라는 경호 회사가 감싸고 있습니다. 지금 정도라면 윤 회장은 절대 둘째 아드님을 어쩌지 못합니다.
“그래. 고생했어.”
- 전충호가 저의 뒤를 파고드는 눈치입니다. 혹시나 회장님과 연락하지는 않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수준 낮은 것들이 어딜 감히.”
자부심 넘치는 윤만석의 웃음이 들렸다.
“근처에 있나?”
- 부르시면 3분 안에 도착합니다.
“알았어.”
이어셋을 내린 천호득이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에이, 고얀 사람.
천봉서의 남겨진 아이들을 챙겨주는 것도 말 않더니 천상기의 수술을 말하지 말라고 지시해?
“흐헤헤헤헤헤.”
눈물이 그렁그렁한데도 천호득은 특유의 웃음을 쏟아냈다.
그리고 그 웃음의 중간에 뜬금없이 한 줄기 눈물이 검버섯 피어난 그의 볼을 타고 내렸다.
**
지경그룹은 벼락이 내리친 꼴이었다.
감사실이 가장 앞에서 움직였다.
먼저 직원을 파견해서 지경프리터를 살폈고, 다음으로 각 계열사에 밴드사와의 관계에 관해 자체 감사를 실시할 것과 회식 내역 별로 영수증을 첨부해서 올리라는 협조공문을 발송했다.
천중명의 순시를 기다리며 청소용역 직원들의 정규직 전환, 환경개선 등을 마쳤던 계열사들은 폭탄을 얻어맞은 꼴이었다.
임원은 물론이고, 단 한 번이라도 밴드사와의 회식에 참석했던 지경프리터의 주임까지 전부 해고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계열사의 자재과, 품질관리부서는 담당 직원부터 이사급까지 발칵 뒤집혔다.
“솔직히 말해. 지금까지 있었던 건 내가 회장님께 매달려서라도 막을 테니까 나 모르게 밖에서 불러내 회식, 술자리, 향응, 접대받은 게 있다면 지금 털어놔. 전부!”
계열사 회장들의 지시에 곤란한 임원과 간부들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자체 감사 전에 보고해.”
계열사 회장단이 직접 나서서 챙기는 자체 감사여서 숨길 수도 없었다.
최치국은 출근과 동시에 지경글라스의 자체 감사를 지시했다.
“처벌은 추후에 따질 문제야. 그러니까 우선 자체 조사한 내용을 하나도 빠트리지 말고 보고해.”
지시를 내린 그는 창을 향해 섰다.
천중명 회장과 통화한 뒤에 그는 지경프리터의 조진강 회장과 조달호 상무와 연달아 통화했었다.
- 최 회장님. 우리의 과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해임은 가혹하리만치 잔인한 징계입니다.
조진강이 전화로 매달리는 의미를 최치국은 모르지 않았다.
- 지경프리터의 노조도 동요하고 있습니다. 회장님의 독선적인 경영에 반기를 들겠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그는 최치국이 앞장서 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이런 정황을 빤히 알 천중명 회장이 다른 사람 아닌 최치국에게 지경프리터의 정상화를 맡겼다.
그것도 임원들 앞에서 고개 숙인 것에 대한 답이라는 말로.
이젠 정말 때가 되었다.
배신이라고 해도 좋고, 욕을 먹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얀 셔츠에 파랑과 빨강의 세로줄 무늬 타이, 정장 바지, 지경 작업 점퍼 차림의 그는 시간을 확인한 뒤에 휴대 전화기를 들었다.
번호를 누르자 길게 늘어지는 신호음이 들렸다.
- 여보세요?
그런 뒤에 익숙한 음성이 울림을 타고 건너왔다.
“회장님. 최치국입니다.”
- 잘 지냈나?
“저야 늘 같은 모습입니다. 회장님께서는 어떠십니까?”
- 지금 그럴 여유가 있나?
이쪽의 상황을 잘 아는 듯한 조승필의 대꾸가 넘어왔다.
- 이미 고개를 숙였다고 들었는데? 그래놓고 뭐하러 전화를 해?
최치국은 답을 하지 못했다.
- 앞섰던 수장으로 난 이미 실패했어. 새롭게 밀려오는 물결에 대항했던 것으로 모자라 천상기 회장과 신임회장 중에서 누가 인물인지를 알아보는 판단도 부족했다.
조승필은 최치국의 침묵을 이해하는 눈치였고, 그래서인지 설득처럼 나직한 음성이었다.
- 마음이 불편한 모양인데 그럴 필요 없어. 내가 아꼈던 자네가 능력을 발휘했다는 말 이상으로 듣기 좋은 소식은 없을 테니까 그렇게 알고 능력을 발휘해.
“지금에라도 부르시면 넘어가겠습니다.”
- 이봐, 최치국 회장.
“예, 회장님.”
- 나는 이미 끝난 사람이야. 지난번에 고개 숙였던 것이 데리고 있는 임원들 신세 망치지 않으려 그랬던 것이라면 이제부터는 제대로 신임회장을 따라가. 내가 아는 최치국은 그런 사람이야.
“죄송합니다, 회장님.”
조승필의 가벼운 웃음이 먼저 넘어왔다.
- 성공해! 그리고 이제는 전화하지 말고. 자네를 시기하는 임원들에게 공연히 먹잇감을 줄 필요 없다.
전화기를 든 채로 최치국은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의 인사를 알아챈 모양이었다.
답이 없었는데도 조승필은 전화를 끊었다.
**
15만 원이던 대송자동차의 주가가 16만 원 근처에서 놀기 시작하면서 최상중은 날을 날카롭게 세운 눈으로 모니터를 주시했다.
단타가 문제였다.
가격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데이 트레이더’가 달려들어서 주문을 왜곡시키고 있었다.
이번 적대적 인수의 주포는 최상중이었고, 그래서 모든 판단과 결정은 그의 몫이었다.
“어제 매수했던 주식 중에서 2천억 선까지는 괜찮으니까 일단 저 일개미들이 떨어지도록 가격을 흔들어.”
“예, 상무님.”
매수가 들어가면 주가는 당연히 오른다.
그 상황에서 단타 세력들이 붙으면 빤한 물량을 서로 주고받기만 할 뿐, 다른 물량이 나오지 않는다.
최상중은 여름날 밤에 귓가를 맴도는 모기떼를 상대하는 사람처럼 눈살을 찌푸렸다.
이럴 때 외부와의 메신저 연락이 아쉽다.
증권가 선수들끼리 정보를 주고받는 ‘미스터 리’라도 연결되었으면 도움이 되련만 상황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최상중이 종합주가지수와 해외 선물지수를 확인할 때였다.
“대송서비스에서 물량 나옵니다. 받아버릴까요?”
대리의 짧은 질문이 있었다.
최상중은 재빨리 대송서비스를 담당하는 대리의 뒤로 움직여서 모니터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그 직후에 대리가 마우스의 화살표를 움직여 새로 나온 매도 수량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건 개인이 아니라 펀드에서 나온 건데? 일단 슬슬 주워.”
타다닥. 타다닥. 탁.
“야, 인마! 슬슬 주우라고, 슬슬! 백 단위로 끊어가야지, 냅다 천 단위로 주문을 넣으면 어떻게 해! 대리씩이나 된 놈이 슬슬을 몰라?”
불쑥 1천3백 주를 집어먹은 대리를 향해 최상중이 벌컥 화를 토해냈다.
“지금 나간 저 주문 수량을 개미도 보고, 펀드 매니저도 본다고. 그런 놈들 앞에서 10만 원이 넘는 주식을 그렇게 찍어오면 어떻게 해? 아예 적대적 인수를 노린다고 고함이라도 지르지 왜?”
“죄송합니다, 상무님.”
“하여간 삼겹살을 반듯하게 못 자르는 놈들은 뭘 하든 티를 내요, 티를! 너 과장한테 안 배웠어? 삼겹살은 반듯하게! 위아래 간격을 딱딱 맞춰서! 그래야 비계와 살의 균형이 맞잖아!”
“조심하겠습니다.”
모니터에서 상체를 세운 최상중이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커피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저 정도 눈치는 있어야지.”
얼른 테이블로 움직이는 막내의 표정에 자부심이 담겼다.
비록 커피와 샌드위치, 식사 준비만 하더라도 적대적 인수가 이뤄지고 나면 막내의 이름까지 주식 시장에 전설로 떠돌 것이 분명했다.
“숫자 불러!”
달달한 커피 향이 퍼질 때 최상중이 지시를 내렸고,
“대송자동차 1.7퍼센트입니다.”
“대송모터스 1.6퍼센트입니다.”
“대송서비스는 2.16퍼센트 매입했습니다.”
“대송장비 1.9퍼센트입니다.”
부장부터 대리가 순서대로 보고를 마쳤다.
최상중은 다시 아까의 대리 뒤에서 상체를 숙여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매수 우위 증권사 옆으로 매도 우위 증권사가 나온다.
“대송증권에서 나온 물량이지?”
“예. 매도 1순위가 대송입니다.”
대리가 모니터 구석을 검지로 가리키며 답을 한 다음이었다.
“상무님. 대송자동차도 물량이 나옵니다.”
“대송모터스도 그렇습니다.”
뜻밖의 보고가 이어졌다.
“이거 봐?”
“어? 대송장비도 나옵니다.”
자리를 옮기며 모니터를 확인한 최상중이 상체를 세웠다.
“뭔지는 몰라도 펀드에서 아예 대놓고 뿌린 물량인데? 일단 지금처럼 슬슬 거둬.”
“예, 상무님.”
지금까지 분위기는 순조로웠다.
**
월요일에 대기업집단의 대출을 500퍼센트 선으로 줄인다는 발표가 나온다.
그 조치에 반항했다가는 대송이 국토부에 심어둔 직원들이 날아가게 생겼고, 80조 원을 대출받아서 사업에 실패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는 언론의 비난에 직면할 수도 있었다.
“주식 매각은 어때?”
“순조롭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가격은?”
“현재가에서 잘 버티고 있습니다.”
대출금 상환을 위해 자금을 만들던 윤성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개 회사에서 5조 원씩 매각하면 20조 원이지?”
“예, 회장님.”
윤병지의 답을 들은 윤성일은 뒤통수를 긁었다.
갚아야 할 돈이 40조 원이니까 아직 20조 원을 더 만들어야 한다.
물론 윤성일의 개인 자산 2조 원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가진 주식도 파는 판국에 힘들게 번 돈까지 대출금 상환에 넣으라는 건 너무 잔인한 짓이다.
20조 원을 어디에서 만들지?
골똘하게 생각에 잠겼던 윤성일이 앞에 앉은 윤병지를 향해 고개를 비틀었다.
“표정이 왜 그래? 무슨 문제가 있나?”
“대주주 지분이 염려돼서 그렇습니다.”
“그 사람 참! 이번 고비 넘긴 뒤에 주가 눌러서 다시 받아오면 되지, 그게 뭐가 문제야? 그리고 대주주 지분이 부족한들, 어떤 미친 인간이 경영권을 노리겠나?”
윤성일은 짜증이 솟구친 것처럼 벌컥 화를 쏟아냈다.
“외국에서 적대적 인수가 들어오면 국민들이 사줘요, 국민들이! 게다가 임원 선정은 황금주를 가진 나만 할 수 있고, 급하면 3자 배정으로 주식을 불리면 되잖아!”
윤병지는 지경증권이 주식을 계속 매입하고 있다는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그런 헛소리 말고 20조 원을 어디에서 만들지나 걱정해! 당장 할부금융 수익이 날아가게 생겼는데 무슨 태평하게 대주주 지분을 걱정해?”
“생각이 짧았습니다, 회장님. 죄송합니다.”
“내가 황금주 한 주만 쥐고 있어도 아무도 못 대들어! 알았어?”
고개를 숙이는 윤병지를 윤성일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
유진교가 결재판을 들고 집무실로 들어왔다.
“자이로 텔레콤 지분 매입을 위한 결재입니다.”
그는 곧바로 책상으로 다가와 천중명의 앞에 결재판을 펼쳐주었다.
“법무팀은 문제 될 부분이 없다는 의견이었습니다. 발표는 주식 거래가 끝난 직후에 공동발표 형태로 언론에 자료를 배포하기로 했습니다.”
천중명은 뒤편에 있는 법무팀의 의견과 발표 문구들을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그룹 간의 가벼운 파장이 우려된다는 건 무슨 뜻인가요?”
“지경이 자이로 텔레콤을 인수하고도 통신사업의 독과점 규제를 피하고자 투자 형식을 취한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올 수 있습니다.”
“이게 문제가 될 소지는요?”
“법규상으로는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다만, 뒤에서 말이 돌 여지는 있습니다.”
답을 들은 천중명은 만년필을 들었다.
그런 뒤에 거침없이 이름을 적어넣었다.
“처리 뒤에 보고드리겠습니다.”
유진교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결재판을 받아들었다.
“최 실장에게 대송의 적대적 인수에 관해 말씀하셨어요?”
“오전에 최 실장이 더 바빴습니다. 이제 내려가서 말해줄 참입니다.”
“꽤 놀랄 것 같은데 지금까지 비밀로 했던 점이 서운하지 않도록 잘 전해주세요.”
“예, 회장님.”
최만호의 놀란 표정을 기대하는 듯한 눈빛으로 유진교가 답을 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