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6
206. 최고셨습니다 (3)
비서실 직원들이 올라와 유진교가 지적한 지경프리터 소속 직원들의 직급과 이름을 확인했고,
“회장님. 제가 원래는 이런 일이 없는데 여기 직원이 하도 괘씸하게 굴어서….”
급하게 담배를 끈 조달호와 임원 두 명이 천중명 앞으로 달려와 고개를 떨궜다.
“여기 밴드 회사 임원 있어요?”
변명을 늘어놓는 조달호를 완벽하게 무시한 채 천중명은 홀을 둘러보았다.
“예, 회장님.”
머리가 하얀 노년의 남자 두 명이 서둘러 앞으로 나섰다.
“밴드 회사끼리 연락하시죠?”
“그렇습니다, 회장님.”
나이 든 두 명이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지경프리터와의 회식 내역, 현금을 포함해서 담배 한 갑 산 것까지 모두 작성해서 그룹발전본부에 제출하세요.”
아무래도 조달호와 근처의 임원들이 부담스러웠는지 눈치를 살피는 두 명에게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이대로 돌아가 버릴 천중명보다 계속 지경프리터에 남아 있을 간부들이 더 무섭고 걸리는 눈치였다.
그렇구나.
조달호와 임원들에게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밴드사를 괴롭힐 과장, 대리들이 지경프리터에 아직 더 있겠구나.
그들이 앙심을 품으면 밴드 회사는 견딜 재간이 없었다.
천중명은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본부장님. 감사실에 연락해서 지경프리터를 철저하게 조사하라고 지시하세요. 10원짜리 하나까지 파고들어서 발견된 모든 점을 형사로 고발하시고.”
유진교가 긴장된 표정으로 천중명의 다음 지시를 기다렸고, 앞쪽의 직원들이 시선을 마주치며 분위기를 살폈다.
“그 뒤에 지경프리터를 정리해서 새로 출발하겠습니다. 일반직원에 한해서만 지경전자를 포함해 다른 계열사로 분산해서 배치하고, 주임급 이상은 전원 해고하겠습니다.”
충격적인 지시였다.
피부에 와 닿는 홀 안의 공기가 ‘앗!’하고 소리를 지른 것처럼 그와 비슷한 충격이 직원들 사이를 떠돌았다.
“지경프리터의 직원들은 이직 전에 우리 그룹 최고 강도의 연수를 시행하겠습니다.”
“예, 회장님.”
섬뜩한 지시가 주는 충격과 침묵이 물결처럼 홀 내부를 채워나갔다.
답이 없는 계열사는 버린다.
과장, 대리까지 썩어빠진 이따위 계열사에 남은 미련은 없다.
“정상화를 위해 새롭게 출발하는 지경프리터의 회장은 최치국 지경글라스 회장이 겸임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조치하겠습니다.”
답을 한 유진교는 가슴 저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놀라움을 애써 감췄다.
지경프리터 하나로 시범케이스를 만들었고, 그 과정에서 최치국의 능력과 충성심을 시험하겠다는 의지도 보였다.
놀라운 점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출신이나 과거가 어찌 되었든 간에 고개 숙이는 임원에게는 분명하고 확실한 기회를 주겠다는 의지를 이토록 선명하게 드러낼 방법이 또 있을까.
그것도 즉흥적인 판단으로 말이다.
놀란 표정을 갈무리한 유진교의 앞에서 천중명은 천천히 홀을 둘러보았다.
“당신들이 작성한 근로계약서에 있는 모든 권리를 보장하려 애쓰는 동안, 지경의 이름을 가슴에 달고 이런 짓을 해? 그 계약서에 있는 지경의 직원으로 품위를 손상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조항은 어디에 팔아먹었어!”
진열된 음식 너머에서 위생복을 입은 주방 직원들과 서빙을 담당한 뷔페 직원들까지 숨죽인 채 이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오늘로 계열사 순시를 중단하겠습니다. 본부장님은 우리 그룹에 등록된 밴드 회사를 전수조사해서 유사한 행위가 있는지를 확인해서 사소한 것 하나까지 모두 보고해주세요.”
한바탕 피바람이 불 것을 짐작한 유진교가, “예, 회장님.” 하고는 독한 눈으로 조달호를 노려보았다.
“이곳의 상황을 신문고에 알려준 직원에게 현금 1억 원과 한 달간의 유급휴가를 포상으로 지급하고, 감사실로 발령 내.”
“예, 회장님.”
천중명의 시선을 받은 비서실 직원이 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천중명이 몸을 돌리자 유진교가 뒤를 따랐고, 비서실 직원 둘이 남았다. 뷔페식당 직원들에 대한 사과와 보상을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
비록 저녁에 일어난 일이지만, 지경프리터에서의 일은 지경계열사의 임원들에게 삽시간에 퍼졌고, 천중명에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윤성일, 윤병지의 귀에도 들어갔다.
전충호가 지경프리터의 일을 보고한 덕분이었다.
“지경글라스 최치국?”
“물러난 지경전자 조승필 회장의 심복이었습니다. 어제 순시에서 충성을 맹세했다던 그 인물입니다.”
전충호의 답에 윤성일은 느물거리며 웃었다.
“아직 어려. 어설퍼. 저렇게 기분대로 연매출 1조 원짜리 계열사를 날려서야 어디 남아나는 회사가 있겠나. 회장병에 걸린 것 같지는 않은데?”
고개를 저어가며 혼잣말을 뱉어낸 윤성일이 대꾸를 내놓으라는 듯 윤병지를 바라보았다.
“계열사 순시, 윤만석의 배신, 업무 과중에 따른 분노로 이성을 잃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보험사에서 있었던 일이 인터넷에 올라올 정도로 반응이 좋았던 직후에 엉뚱한 일이 터지니 망신스럽기도 했을 겁니다.”
“흥. 잘난 척이야 누군들 못해. 경영이 어디 그렇게 된다든가?”
윤병지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윤성일의 대꾸는 부드러웠다.
“너는 나가 있고, 방지병원을 잘 살펴.”
“예, 회장님.”
전충호가 나간 다음이었다.
“산업은행에서 대출금을 상환하라는 지시가 내려오면 운신의 폭이 줄어들어. 그러니 천중명이 저렇게 미쳐 날뛸 때를 이용해 지경을 손아귀에 넣자.”
문을 돌아본 윤성일이 나직하게 말을 건넸다.
“왜 대답이 없어?”
“워낙 큰일이라서 함부로 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 배포가 작아서야 어떻게 그룹을 이끌어?”
“죄송합니다, 회장님.”
대송물산의 부회장에게 하기에는 낯간지러운 말이었는데 윤성일은 거침이 없었다.
고개를 숙이며 답하는 그 짧은 순간에도 윤병지는 어떡해서든 윤성일을 말리고 싶었다.
“회장님. 박승양은 절대 신뢰할 수 없는 인물입니다.”
“내가 그걸 모를까. 우리는 박승양의 뒤를 잡아야 해. 아니라면 그 인간이 죽고 못 사는 돈으로 묶든가.”
윤병지가 다급하게 만들어낸 핑계를 윤성일이 가볍게 밀어냈다.
“최치국과 연락해 봐. 마지막엔 자네가 대송을 맡아야 할 테니 최치국 정도면 중간 역할로 적당하지. 조승필의 복귀를 언급하면서 우리 쪽으로 기울 수 있는지를 타진해.”
말을 마친 윤성일이 홱 시선을 들었고,
“예, 회장님.”
윤병지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
다음 날 아침이었다.
밖에서 보기에는 별것 없지만, 지경그룹은 숨 막히는 긴장에 휩싸여 있었다.
출근한 천중명이 재킷을 벗기 무섭게 유진교와 최만호가 집무실로 들어섰다.
“그리 앉으세요. 커피 괜찮죠?”
“예, 회장님.”
커피를 부탁한 천중명은 셔츠 차림으로 소파에 앉았다.
“표정들이 왜 그러세요? 무슨 일이 있습니까?”
“지경프리터의 일로 노조가 동요한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과장급 이하 주임까지 해고한 것은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닌가 하는 의견이었고, 필요하다면 부당해고로 노동위원회에 접수하겠다는 뜻도 밝혔습니다.”
“그럴 수 있겠네요.”
최만호의 보고를 천중명이 순순히 받아들일 때 부속실 직원이 커피를 가져다주었다.
“회장님. 그 회식에 참석하지 않았던 과장급 이하 직원들을 구제해 주시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밴드 회사와 함께 하는 회식에 단 한 번도 참석하지 않은 주임급 이상은 구제하겠습니다.”
커피를 앞에 두고 최만호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놓았고, 천중명이 분명하게 답했다.
“악성 고객에게서 지켜주고, 정직원으로 전환해주는 것은 그 잘난 갑질을 하라는 뜻이 아니라 최소한의 보장을 통해 지경의 직원으로 최선을 다하라는 의미입니다.”
천중명은 뜻을 분명하게 밝혔다.
“우리 직원이 뷔페식당에 가서 진상고객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보다 많은 급여, 안정된 직장이 있다는 이유로 갑질을 하는 직원은 그것이 비록 임원 앞이어서 그랬다손 치더라도 용서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답을 내놓지 못하는 최만호를 보며 천중명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틈을 주었다.
“부당해고로 소송이든, 구제절차를 밟는 직원이 있다면 적법한 절차를 통해 대항하겠습니다. 임원의 횡포도 용서 못 하지만, 어떠한 경우에라도 나는 우리 직원이 지경이란 이름으로 외부에 갑질 하는 것을 용납할 마음이 없습니다.”
“예, 회장님.”
지경프리터의 일이 쉽게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은 무거운 최만호의 표정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커피 드시면서 이야기하죠.”
이어서 천중명은 자이로텔레콤의 지분 인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법무팀과의 조율을 통해 발표와 이후의 과정, 그리고 압축 기술을 사용하는 데 따른 와이파이 망 개방에 관한 의논을 하는 데만 대략 30분이 훌쩍 지났다.
“벤처사업부는 오늘 오후에 삼성동의 4층 건물을 임대한 뒤에 정식으로 법인을 설립할 예정입니다.”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코피를 흘렸던 곽대출의 새로운 출발도 결정되었다.
“최 실장은 먼저 일어나지?”
“예, 그럼 이만 내려가 있겠습니다.”
최만호를 보낸 유진교가 아래에 있던 결재판을 천중명의 앞으로 내밀었다.
“어제 대송자동차그룹의 주식을 모두 3조3천억 원가량 매입했습니다. 한 회사당 8천억 원 수준입니다. 오늘부터 가격이 상승할 테고, 내일 3퍼센트를 넘길 때면 대송도 눈치챌 거라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내일이 금요일이죠?”
“그렇습니다, 회장님.”
“나쁘지 않네요. 이대로 진행하세요. 그리고 오늘 시간을 봐서 최만호 실장에게도 대송의 인수에 관한 내용을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유진교가 나간 직후였다.
잔을 치우러 들어온 부속실 직원이 전화메모를 책상에 올려주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러려니 하겠는데 최치국의 이름이 확실하게 눈에 띄었다.
당황스럽기도 하겠다.
“지경글라스 최치국 회장 연결해 줘.”
“예, 회장님.”
부속실 직원이 나가고 1분도 되지 않아서 최치국과의 통화가 연결되었다.
“여보세요?”
- 회장님. 최치국입니다.
“지경프리터의 일 때문인가요?”
- 그렇습니다, 회장님. 급작스럽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한데, 무엇보다 회장님의 의중을 여쭙고 싶었습니다.
천중명은 고개를 숙인 채 기다리던 최치국의 모습을 떠올렸다.
“나는 어제의 일로 상대적인 갑질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최 회장님은 그런 내 뜻이 증명될 수 있도록 지경프리터를 새롭게 만들어주세요.”
- 외람된 질문입니다, 회장님. 굳이 저에게 그런 임무를 맡기신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임원들 앞에서 고개 숙인 것에 대한 답입니다.”
천중명의 대꾸에 당황한 것처럼 짧은 침묵이 흘렀다.
- 알겠습니다, 회장님. 최선을 다해 믿어주신 것에 답하겠습니다.
그런 뒤에 최치국의 단단한 답이 있었다.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컴퓨터를 통해 내부통신망의 보고를 확인했고, 다음으로 새롭게 올라온 메모를 살폈다.
똑똑똑.
노크 소리에 고개를 든 천중명의 시선에 말끔한 얼굴의 곽대출이 들어왔다.
“어서 와. 앉아.”
“예, 회장님.”
부속실 직원을 의식해서 공손하게 인사한 곽대출이 소파로 다가오며 양손을 들었다.
“뭐야?”
“회장님께서 피곤하실 것 같아서 홍삼을 달여 왔습니다.”
텀블러를 두 개 든 곽대출을 보며 천중명은 픽 웃었다.
“너 아무래도 수상하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켕기는 곽대출의 표정이 답이었다.
“에효. 말해 뭐하냐.”
둘이서 소파에 앉아 곽대출이 달여왔다는 홍삼을 마셨다.
대추를 넣었는지 텁텁하면서도 뒷맛이 꽤 달았다.
“어제 일 얘기 들었지?”
“최치국 회장에게 맡기셨다는 것에 다들 놀라는 분위기고, 계열사 직원들 전체가 동요한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직원들을 끔찍하게 챙긴다는 신임회장이 주임급까지 전원 해고를 지시했으니 충격이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할 일이었다.
“임원들의 횡포와 고객의 갑질에 힘겨워하면서 정작 본인들 역시 을에 있는 이들을 함부로 대하는 걸 보니까 그건 아니다 싶었다.”
“예, 회장님.”
대꾸할 말이 없었는지 곽대출은 텀블러를 입으로 가져갔다.
“금요일 오후면 대송도 우리가 적대적 인수하는 걸 눈치챌 테니까 주말부터 함부로 움직이지 마.”
“오늘 오후에 임대계약하면 법인등록하고, 내부공사를 주말까지 하는 거라 급하게 다닐 일도 없으셔.”
“그래. 당분간 조심하자.”
“천상기 회장은?”
“박 회장이 알아서 하고 있을 거다.”
답을 한 천중명은 남은 내용물을 모두 마시고 텀블러를 곽대출에게 건네주었다.
“처음이라 받았는데 한 번 더 이런 거 들고 오면 뇌물로 간주할 거니까 알아서 해. 그리고 난 너처럼 코피 안 흘려. 알고 보니까 이거 영 약골이야.”
허를 찔린 것처럼 곽대출은 대꾸도 못 꺼냈다.
“적당히 해, 적당히. 힘도 없는 게.”
주둥이가 움찔거리는 곽대출을 두고 천중명이 먼저 일어섰다.
그래도 곽대출 덕분에 한 번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