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205화 (205/315)

# 205

205. 최고셨습니다 (2)

강남의 방지병원에 들어선 천상기는 바로 특실로 향했다.

‘병원이 뭐 이래?’

특실이라서 널찍하고, 침대도 커다랗긴 했는데 어쩐지 시설이 좋다는 느낌은 딱히 없었다.

“비밀 유지 되지, 원장님 실력 믿을 만하지. 강남에 이만한 병원 없습니다.”

천상기의 표정을 눈치챘는지 박승양이 병원에 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얼른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누웁시다. 원장님께 연락했으니까 이리 오실 거요.”

원장은커녕 아직 간호사도 못 봤으나 천상기는 오지은의 도움을 받아 환자복으로 갈아입고서 침대에 누웠다.

“아후.”

살았다는 안도감, 무릎을 치료할 수 있다는 희망에 몸을 눕힌 천상기의 입에서 신음이 절로 나왔다.

그때였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중년의 의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원장님?”

“저분이 말씀하셨던 환자분입니까?”

“그렇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박승양과 인사를 나눈 의사는 천상기를 힐끔 바라보고는 관심 없다는 듯 시선을 가져갔다.

“치료비와 입원비는 선금과 현찰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준비하셨습니까?”

천상기는 멍하니 얼이 빠졌다.

불쑥 나타난 원장은 무릎이나 천상기의 상태를 들여다보기는커녕, 그 흔한 링거도 꼽지 않은 채 검지와 중지를 엄지에 비벼가며 현찰을 요구하고 있었다.

“지금 찾아옵니다. 얼마 드리면 됩니까?”

“뭐 무릎 수술하고 치료니까 우선 2억이면 되겠네요.”

박승양은 침대 옆에 앉아 있는 오지은에게 시선을 돌렸다.

“거기 오지은 씨라고 했지? 은행 문 닫기 전에 얼른 가서 병원비 찾아와요.”

“예?”

“천상기 회장님 계좌 관리하잖아? 얼른 가서 찾아와.”

천상기는 기가 막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300억을 받아먹은 박승양이 지금은 병원비를 내란다.

이 쿰쿰한 특실과 수술, 치료비가 2억이라니?

박승양은 필시 병원비에서 소위 ‘뽀찌’를 받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어쩌겠나.

여기에서 악쓰다가 다시 잡혀가면 300억 허공에 날리고 용인에 처박히는 신세가 된다.

“뭐해? 은행 문 닫는다니까.”

“거기 가방에 제일 바깥에 넣어둔 통장에서 찾아와.”

박승양이 독촉하고, 천상기가 지시하자 오지은은 보스턴백에서 통장과 도장을 들고 병실을 나섰다.

“수술은 언제 합니까?”

“상태 봐서 하시죠.”

의사 가운의 주머니에 양손을 넣은 저 돌팔이 의사가 정말 무릎을 치료할 수 있을까?

“아! 수술 도중 사망할 경우에 장기를 기증한다는 서약서 하나 써줄 수 있을까요?”

“그럽시다.”

원장과 박승양의 대화를 듣던 천상기는 아예 눈을 질끈 감았다. 어쩐지 기껏 늑대 굴을 빠져나왔다고 좋아했더니 승냥이 굴에 잡힌 느낌이었다.

**

강남의 최고급 호텔 스위트룸에서 지경의 대표 펀드 매니저들이 대송의 주식에 매달렸다.

모두 네 개 종목이었다.

최상중이 네 개 회사의 차트를 보며 총괄상황을 지시했고, 부장이 대송자동차를 맡았고, 그 아래 과장이 대송모터스, 대리 둘이 대송서비스와 대송장비를 맡았다.

“차트는 어떻게 할까요?”

“일반 투자자들이 손실 보는 일 없도록 하라시니까 이대로 가.”

대송자동차를 적대적으로 인수하다니?

호텔 스위트룸에서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으면서도 최상중은 아직 이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현재가 아래로 나온 물량 놓치지 말고 담아.”

이 적대적 인수합병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이 방에 있는 최상중과 직원들의 이름은 앞으로 최소 20년 이상 증권 바닥을 떠돈다.

성공하면 영웅으로, 실패하면 이런 절호의 기회를 망친 얼간이쯤으로 평가받을 일이었다.

“대송 자동차 가격을 천 원 올려봐.”

“예, 상무님.”

최상중의 지시에 따라 부장이 빠르게 숫자 키패드를 누르며 주식을 공격적으로 매입했다.

10분쯤 지난 뒤였다.

“가격을 원래대로 내려.”

“예.”

최상중의 지시가 있고 나서 대송자동차의 주가가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커피.”

“예.”

지금껏 침묵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막내 직원이 빠르게 움직였다. 막내는 삼겹살집에 갔을 때 고기를 일정하고, 반듯하게 잘라 노릇하게 굽는 임무도 맡는다. 마늘이나 쌈장, 소주를 직접 가지러 가는 업무를 담당할 때도 많다.

열심히 믹스 커피를 타는 막내를 보며 최상중이 가볍게 웃었다.

최상중도 저 과정을 다 거쳐서 이 자리에 왔다.

회식이 끝난 것 같은 상에서 남은 반찬에 퍼 담듯 공깃밥을 먹어대는 직원을 보게 되면 딜링룸 경력 6개월 미만의 막내라고 생각하면 거의 맞는다.

저래야 나중에 펀드를 운영하다가 손실 냈을 때 선배들이 챙겨준다.

**

윤성일이 삼청동의 한정식집으로 들어섰을 때 수석은 이미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수석께서 기다리게 하다니? 제가 결례를 범했습니다.”

“근처에 일이 있어서 일찍 도착했을 뿐입니다.”

잠시 자리를 양보하느라 시간을 보냈는데 결국 병풍을 등진 상석에 윤성일이 앉았다.

“국정을 살피는 일이 쉽지 않지요?”

“우리 경제를 위해 애쓰시는 회장님들이 더 고생이시지요.”

수석은 윤성일의 말을 넉넉한 대꾸로 받았다.

“죄송합니다만, VIP께 보고 드릴 일이 있어서 식사는 제가 다음에 모시겠습니다.”

그런 뒤에 그는 정중하게 저녁을 거절했다.

윤성일은 마주한 수석의 속을 읽기 어려웠다.

“기재부 장관께서 전화도 주셨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총수께서 말씀이 있다고 하셔서 어렵게 시간을 냈습니다. 그러니 너무 서운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단호하게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일이 바쁜 사람처럼 보인 탓이었다.

“그럼 내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 산업은행에서 부채 비율을 조정하라는 지시가 내려온다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수석은 곤란한 표정으로 답을 하지 못했다.

“우리 기업인들은 늘 정권이 바뀔 때마다 범죄자 취급을 받아왔습니다. 그런데도 이리 노력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경제를 끌어간다는 막중한 책임감 때문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수석을 향해 윤성일은 바로 말을 이었다.

“수출만이 우리나라의 살길입니다. 우리 대송자동차그룹이 1년에 해외에서 판매하는 자동차 대수와 금액이 얼마인지는 우리 수석도 잘 아실 것 아닙니까?”

“예,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수석. 다른 말 할 것 없이 이번 산업은행의 대출 축소 계획을 3년만 유예해 주시오.”

“흠.”

“수석을 모욕하려는 게 아니라 정치자금을 내놓고라도 대출 축소를 막고 싶은 심정입니다.”

윤성일의 의미심장한 말을 수석은 가벼운 웃음으로 받았다.

“안 된다면 이 계획이 누구 머리에서 나왔는지만 알려주시오. 내가 알아서 손을 쓰겠습니다.”

수석은 망설이는 눈치였다.

“정치자금을 원하십니까?”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솔직하게 답을 드리겠습니다. 이번에 대송자동차가 엔진 결함에 관해 미국에서 대대적인 보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엔진을 사용하는 우리나라에서는 리콜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야….”

“그것만이면 어떻게 넘기겠는데 조향장치와 미션도 미국에서만 리콜을 시행하셨습니다. 그 바람에 VIP께서 심기가 불편하십니다.”

수석이 내놓은 뜻밖의 말에 윤성일은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이번 대출 축소에 강하게 반발하시면 리콜을 지시하지 않은 국토부 담당자들이 모두 날아가게 됩니다. 게다가 대송은 다른 기업집단 평균의 배 이상 대출을 받았습니다. 이게 불거지면 특혜 시비가 나옵니다.”

윤성일은 볼을 씰룩이며 불편한 심기를 표시할 뿐이었다.

“국내에서 리콜을 시행하신다면 산업은행은 제가 책임지고 막아내겠습니다.”

혹 떼려다가 혹 붙인다더니 윤성일이 딱 그 경우였다.

“혹시 천호득 회장이 문제를 일으켰습니까?”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신지?”

“천호득 회장이 산업은행의 행장과 부행장을 만났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천 회장이 일을 만든 건 아닌가 해서 여쭙습니다.”

“지경 역시 리온자동차 인수로 자금이 필요한 상황에서 대출을 오히려 축소하는 것은 불리하다는 의견이었습니다.”

윤성일은 더 입을 떼지도 못했다.

“그럼 이만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오늘의 결례를 사과드릴 겸해서 이번 조치를 발표한 뒤에 따로 한번 모시겠습니다.”

배웅을 위해 일어선 윤성일과 악수를 나눈 수석은 또 공손하게 고개까지 숙이는 예의를 보인 뒤에야 방을 나섰다.

달각.

그가 방을 나선 다음이었다.

“에이!”

VIP를 어쩌지 못하는 윤성일의 짜증이 거칠게 튀어나왔다.

**

천중명은 유진교와 함께 천안으로 향했다.

곽대출이 몹시 서운해 했으나 주먹을 쓸 일이 아닌 다음에야 코피를 흘리는 그를 굳이 데려갈 이유는 없었다.

저녁을 먹은 뒤에 출발한 터라 벌써 7시가 넘었다.

[회장 아들인 조달호 상무가 직원들과 밴드 회사의 나이 든 임원들에게 욕설은 물론이고, 심지어 폭행하는 일도 있습니다. 회식이 있습니다. 본사에서 오셔서 확인하면 아실 겁니다.]

승용차의 뒷자리에서 신문고에 올라온 내용을 살피던 천중명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천안에 있는 지경프리터라는 계열사였다.

지경전자에서 사용하는 전자부품을 납품하는 회사로, 지경프리터 자체적으로 밴드 회사를 7개나 거느릴 정도로 규모가 있었다.

“내가 그토록 강조했던 일이고, 계열사 순시 기간이라 어지간한 계열사 회장들도 조심하는 상황에서 오늘 회식을 하는 배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밴드 회사와의 회식인 데다, 근무 시간이 끝난 뒤라서 방심한 모양입니다.”

이미 신문고 내용을 확인한 유진교가 조심하는 음성으로 내놓은 답이었다.

지경프리터의 회장 조진강은 마흔두 살의 아들 조달호에게 상무 직책을 달아주고 자재와 품질관리를 맡겼다.

그리고 그 조달호는 직책과 업무를 핑계로 밴드 회사의 임원들을 짓눌러가며 회식을 강요하거나 폭언, 폭행을 일삼는 모양이었다.

승용차가 천안의 뷔페식당에 도착한 것은 오후 7시 40분쯤 되었다.

오늘 회식이 있으니 제발 이 자리에 본사 직원이 나와서 힘겨운 직원들과 밴드 회사 임원들을 구해달라는 당부가 있었다.

조수석에서 내린 비서실 직원이 문을 열어주었고, 뒤차에서 내린 직원들이 빠르게 다가왔다.

“비서실 직원은 여기 있어.”

“예, 회장님.”

혹시 우르르 올라가면 상황을 감출지 모르고, 또 회식이 취소됐을 수도 있어서 천중명은 우선 유진교와 둘이서만 계단을 올라갔다.

“후우-!”

2층의 뷔페식당 입구에 도착한 천중명이 고개를 모로 틀고서 숨을 뱉었다. 환기도 제대로 되지 않는 계단에 역한 담배 냄새와 연기가 가득했다.

담배야 천중명도 피운다.

그러나 뷔페식당 안쪽 테이블에서 저렇게 당당하게 피울 생각은 하지 못했다.

법으로도 금지한 일이었다.

“이 건방진 새끼가 말이야!”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린놈의 새끼가 저분이 누군 줄 알고 담배를 꺼라, 마라야? 너 이 새끼 뭐야? 여기는 직원 교육을 이따위로 시켜?”

“그렇다고 사람을 때리면 어떻게 합니까?”

울었는지 눈가에 눈물이 맺힌 스물 초반의 청년과 그 앞을 막아선 서른 후반 남자는 뷔페식당의 서빙 복장이었다.

“때릴 만하니까 때리지! 건방지게 말이야! 어?”

열댓 명의 남자들이 뷔페식당 직원 두 사람을 둘러싼 채 이마와 가슴을 밀어대고 있었다.

사진에서 본 조달호는 아직 테이블에 앉아 담배 연기를 내뿜었고, 그 외의 직원들이 힐끔거리며 입구에 들어선 천중명과 유진교를 살폈다.

“개판이네.”

천중명은 기가 막힌 심정을 먼저 토해냈다.

지경의 이름이 박힌 점퍼를 입은 직원들이 이런 짓을 하고 다니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렇게 술 처먹고 지랄들 떨지 말라고 회장단과 임원을 단속했는데, 직원들이 행복한 회사를 만들겠다고 눈매를 독하게 뜨고 순시까지 다니는데 이런 일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었다.

“누구십니까?”

천중명의 얼굴을 알아봤는지 질문을 던졌던 직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본부장님.”

“예, 회장님.”

천중명이 불렀고, 유진교가 답했다.

질문을 던졌던 직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고, 뷔페 직원들을 둘러쌌던 남자들과 조달호가 이쪽으로 시선을 주고 있었다.

“지경프리터의 임원 전부를 해임하겠습니다. 그리고 비서실 직원 불러서 저기 둘러싼 직원들 명단 전부 확인해서 해고하세요. 뷔페식당과 저기 식당 직원 두 명에게 충분히 사과하고, 보상해주시고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답을 한 유진교가 휴대 전화기를 들었을 때, 조달호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앞에서 질문을 던졌던 직원은 인사조차 잊은 채 얼이 빠진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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