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4
204. 최고셨습니다 (1)
박승양은 조직원 셋을 데리고 정확하게 오후 한 시에 용인의 저택에 나타났다.
똑똑똑.
“천 회장님?”
전날의 시커먼 선글라스를 낀 박승양이 문을 열고서 씨익 웃었다. 침대에 걸터앉았던 오지은이 몸을 일으켰고, 휠체어에 있던 천상기는 긴장한 얼굴이었다.
“어이구? 머리도 감으셨네?”
“윤 실장은요?”
“돈 먹고 머-얼리, 저 멀리 갔습니다. 안심하고 나와도 됩니다.”
말을 마친 박승양이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거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뭐하냐? 얼른 모셔야지.”
조직원 셋이 들어와서는 천상기의 휠체어를 밀고 당겨서 방을 나섰다.
천상기는 모처럼 단정했다.
셔츠에 카디건을 걸쳤고, 정장 바지까지 꺼내 입어서 그나마 과거에 보였던 깔끔함을 되찾은 얼굴이었다.
휠체어가 앞서고, 양손에 보스턴백을 든 오지은이 그 뒤를 따랐다.
“어디로 갑니까?”
“병원으로 모실까 하는데? 다리를 치료하셔야지요?”
주택의 정문 옆에 서 있는 승합차를 본 천상기가 용인의 부드러운 산새와 그 모든 풍경을 밝히는 햇살을 새삼스럽다는 얼굴로 돌아보았다.
이렇게 나서는 상황에서 만감이 교차하는 모양이었다.
셋이서 휠체어를 번쩍 들어 천상기를 승합차에 올렸다.
오지은이 차에 올랐고, 조직원이 운전석과 뒤쪽으로 몸을 넣을 때까지 주택 주변에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부으으응.
“후!”
교도소에서 탈주한 사람처럼 천상기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병원이 좀 쪼글쪼글합니다. 너무 큰 곳으로 옮기면 천중명 회장이 알아채고 피곤해질 수가 있어요.”
“내가 우리 박 회장님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승합차는 국도를 시원하게 달렸다.
“개새끼. 이번엔 진짜 두고 보자.”
빠르게 지나가는 용인의 풍경을 향해 천상기가 뱉어낸 욕이 승합차의 바닥으로 녹아내렸다.
**
천호득은 이어셋을 귀에 걸었다.
- 조금 전에 출발했습니다.
“다른 문제는 없었고?”
- 예, 총수님.
그 짧은 답에서도 윤만석은 확연히 천호득을 염려하는 음성이었다.
“거기 아이들 어디 바닷가라도 데려가서 맛있는 것 좀 실컷 먹여.”
- 당분간 총수님 근처에 몸을 숨기고 있겠습니다.
“갑갑하지도 않아?”
- 평생 이렇게 살아서인지 그냥 돌아다니면 누가 꼭 뒤를 따라붙은 것 같아서 한시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천호득이 허탈하게 웃었다.
- 지시하시면 천상기 회장을 지켜보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그리고 이어진 윤만석의 의견을 천호득은 단숨에 잘라버렸다.
“이미 결정한 일을 자꾸 뒤돌아볼 필요가 뭐가 있어.”
- 알겠습니다, 총수님.
“쉬어.”
짧은 한마디 말을 끝으로 천호득은 이어셋을 내렸다.
천호득은 편안한 모습이었다.
아침에 감은 머리칼이 자연스럽게 내려와 있었고, 스웨터와 면바지 차림이었다.
“아비에게도 욕하며 덤비는 사람이 동생을 받아들일 수가 있겠나. 그리 당하고도 대송과 손을 잡겠다면 나도 더는….”
말끝을 흐린 천호득이 기다랗게 숨을 토해냈다.
**
오후의 계열사 방문 일정을 모두 취소한 천중명은 유진교와 함께 삼성동의 국제호텔에 도착했다.
오늘의 승용차는 검은색 S600이었다. 그 외에 비서실 직원들이 탄 승용차가 바로 뒤따라 움직였다.
호텔의 입구에 S600과 중형 승용차가 멈추었고, 키가 훤칠한 벨보이가 다가오는 동안 조수석에서 내린 비서가 먼저 뒷문을 열었다.
뒷좌석에서 내리는 천중명을 근처에 있던 이들이 힐끔거렸다.
시선을 당기는 독일제 승용차,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 브랜드의 셔츠와 정장, 구두, 거기에 뒤차에서 내린 비서들의 움직임, 운전석 뒤편에서 내린 유진교의 태도가 그들의 시선을 당기는 눈치였다.
이런 거 번거롭다.
그러나 지경의 이름으로 움직인다면 그에 걸맞은 무언가를 보여야 한다는 것을 스웨덴에서 배웠던 참이라 천중명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경례하는 벨보이에게 고개를 짧게 숙여준 천중명은 곧장 안으로 들어섰고,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VIP 라운지로 향했다.
“저쪽입니다, 회장님.”
입구에 들어선 유진교가 안쪽을 가리켰다.
천중명의 시선 저 안쪽에서 박영철과 함께 진한 염색에 클래식한 정장, 그리고 매서운 눈초리의 남자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점심시간을 지나서인지 라운지는 한가했다.
천중명은 먼저 박영철과 눈인사를 나누었고, 유진교는 예순이 넘어 보이는 매서운 눈매의 남자에게 고개 숙였다.
“회장님. 자이로텔레콤 회장님이십니다.”
박영철의 어색하고 어정쩡한 소개를 받은 천중명이 시선을 돌리고 손을 내밀었다.
“천중명입니다.”
“박태곤이오. 만나 뵈어서 반갑소.”
“이쪽은….”
“유진교 본부장이야 명예회장님을 뵐 때 이미 인사가 있었습니다. 반갑소, 유 본부장.”
“오랜만에 뵙습니다, 회장님.”
유진교와 박태곤이 악수를 나눈 다음이었다.
“이쪽은 박영철 부회장이오. 부족한 사람이니 많이 좀 도와주시오.”
“이미 인사가 있었습니다.”
박태곤의 소개로 유진교와 박영철이 악수를 나눈 뒤에 네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명예 회장께선 강건하시오?”
“덕분에 무탈하게 지내십니다.”
“어찌 그리 두문불출이신지. 공치는 자리에라도 한번 모시고 싶은데 워낙 성격이 강하셔서….”
이쪽 총수고, 저쪽 회장이고 하여간 천호득을 이긴 사람은 없어 보였다.
시원한 음료를 주문한 뒤였다.
“우리 천 회장은 골프 좀 하시나?”
“아닙니다. 기회도 없었고, 최근에는 시간도 부족해서 엄두를 못 내고 있었습니다.”
“그렇더라도 운동 하나쯤은 해두는 게 좋아요. 건강은 젊어 지켜야지, 나이 들면 서글픕니다.”
음료가 나올 때까지 매서운 눈매와 달리 박태곤은 이야기를 부드럽게 풀어내고 있었다.
“드시죠?”
“허허. 그럽시다.”
대략 10분쯤 이어진 대화에서 유진교와 박영철은 아직 한 마디도 끼어들지 못했다.
“바쁘신 분이 부르셔서 급하게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대화의 끝에서 박태곤이 본론을 내놓으라고 천중명의 등을 떠밀었다.
“그럼 편안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허허허. 내가 집중해서 듣겠소.”
늙은 생강이 매운 내를 펄펄 풍기며 상체를 기울였다.
“지난번에 우리 박영철 부회장이 모처럼 제안했던 사업을 거절한 것이 마음에 걸렸었습니다.”
박태곤이 ‘이놈이 그 정도였다고?’ 하는 눈으로 박영철을 돌아보았다가 얼른 시선을 가져왔다.
“압축 기술은 훌륭하다는 평가입니다. 물론 자체 기술을 개발할 수도 있지만, 그건 어쩐지 박영철 부회장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 이렇게 뵙자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말을 마친 천중명이 유진교에게 시선을 돌렸다.
“기술적인 부분은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유진교는 가방에서 두 부의 제안서를 꺼내 박태곤과 박영철에게 각각 건넸다.
“실시간 내비게이션의 지도를 포털에서 제공하는 위성사진으로 제공할 계획입니다. 또한, CCTV가 설치된 도로는 실시간으로 영상을 확인할 수 있도록 서비스를 개선할 방침입니다.”
“흐음.”
박태곤이 아쉬움 가득한 탄식을 쏟아냈다.
데이터를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 가능한 계획임을 알아본 눈치였다.
“이 계획대로라면 기존의 내비게이션 생산업체들의 타격이 꽤 크겠소.”
“하드웨어가 개척한 시장은 언제고 소프트웨어와 교체됩니다. 당장 내비게이션 제품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혁신과 새로운 기술을 접목하지 못한다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박태곤의 의견을 유진교가 굵직한 톤으로 받았다.
“우리 압축 기술을 사용하고 싶다 하셨는데 혹시 조건을 들을 수 있겠소?”
질문을 받은 천중명은 박영철을 향해 먼저 시선을 주었다.
‘왜요? 뭐?’
화들짝 놀라는 그를 박태곤이 갑갑한 얼굴로 바라본 다음이었다.
“자이로텔레콤에 3조 원가량을 투자하고 싶습니다.”
박태곤의 고개가 불쑥 나왔다.
“그런 뒤에 와이파이 망을 개방해드리겠습니다.”
유진교는 평소에도 표정 변화가 거의 없다.
그러나 마른침을 삼키는 박태곤을 보며 그의 눈가에 올라온 자부심을 천중명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그가 모시는 회장의 모습이 그에게는 자부심으로 다가서는 모양이었다.
“3조 원이라고 하셨소?”
“그렇습니다. 자이로텔레콤 주식의 현재가로 시간 외 거래를 통해서 매입하겠습니다. 우리 계산으로는 대략 35퍼센트의 지분입니다.”
“현재가? 현재가로 말씀이오?”
“원하시면 MOU 작성 뒤에 내일이라도 주식을 먼저 매입하겠습니다.”
박태곤의 눈에 감출 수 없는 욕심이 피어났다.
대주주인 그의 지분 35퍼센트를 지경그룹이 현재가로 매입했다는 소식이 발표되면?
자이로텔레콤의 주식은 최소 50퍼센트 이상 상승한다.
최소다, 최소.
만약 100퍼센트 상승하면 박태곤은 앉아서 주식 평가금액이 10조 원쯤 늘어난다.
거기에 자이로텔레콤이 지경의 와이파이 망을 함께 사용한다는 발표까지 연달아 나온다면?
참고 참으려 했지만, 박태곤은 어쩔 수 없이 입안에 고인 침을 삼키고 말았다.
“지분 매입은 시장에 소문이 돌기 전에 처리하고 싶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주가는 오늘 종가를 기준으로 삼겠습니다.”
천중명의 음성을 들은 박태곤이 신음처럼 숨을 내쉬었다.
‘이미 내가 결정한 사안이다. 그러니 협상할 생각하지 마.’
천중명의 음성과 눈빛, 태도에서는 정말이지 바늘 하나 꽂을 여지도 보이지 않았다.
젊은 시절의 천호득보다 더한 인물이라고 하더니.
부럽다, 천호득이.
저런 잘난 아들 앞에서 기를 못 펴는 박영철을 보고 있자니 언제일지 모르지만, 박태곤은 죽는 순간에도 눈을 감지 못할 것 같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박태곤은 나름 오래 묵은 생강이었다.
“천 회장님. 지경이 얼마든지 개발할 수 있을 압축 기술을 사용하는 것치고는 너무 파격적인 조건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그는 초인적인 의지로 욕심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이런 제안을 하는 궁금함을 슬쩍 내밀었다.
“앞으로 2년 이내에 고글이 전 세계를 상대로 와이파이 망을 개방할 수 있습니다. 이미 기본 테스트가 끝난 상황입니다.”
“흐음.”
“우리가 기술을 개발하느라 시간을 허비하느니 이미 그 방면의 선두에 선 자이로텔레콤과 손을 잡겠다는 뜻입니다.”
말의 끝에서 천중명은 다시 박영철을 슬쩍 본 뒤에 시선을 돌렸다.
“앞으로의 자동차 시장이 대변혁을 맡게 됩니다. 자율주행의 가장 기본은 내비게이션입니다. 실시간 데이터를 이보다 빠르게 진행할 기술을 가진 업체가 국내에는 자이로텔레콤뿐입니다.”
“하아. 천 회장은 그릇이 다르군요.”
천중명의 말끝에 박태곤은 엉뚱한 감탄을 뱉어냈다.
그런 뒤에 그는 시선을 음료수 잔에 떨군 채 잠시 볼을 씰룩였다.
짧은 침묵이 흐른 다음이었다.
다시 고개를 든 그가 유진교를 보았다.
“혹시 MOU도 작성해 오셨소?”
“초안입니다.”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는 유진교를 보며 박태곤은 완전히 기가 꺾인 얼굴이었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주식 이전을 내일 종가 이후에 처리하면 어떻겠소? 시간 외 거래로 하고, 바로 금감원에 신고하면 될 것 같소만?”
“주가 가격의 변동이 3퍼센트를 넘으면 곤란합니다.”
“내가 가진 주식을 시장에 던져서라도 3퍼센트 이상 상승하는 일은 없게 하겠소.”
이미 마음이 굳은 박태곤의 의지를 시험할 이유는 없었다.
“뜻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장님.”
천중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고,
“내 자식 놈 말이오. 우리 천 회장이 끝까지 외면하지 말아 주시오. 나는 그거 하나만 덧붙이겠소.”
맞은편에서 일어선 박태곤이 상체를 기울여 천중명의 손을 잡았다.
유진교와 박영철이 몸을 세워 지켜보는 앞이었다.
박태곤은 왼손을 들어 진심을 전하겠다는 듯 천중명의 손을 덮었다.
“그럼 내일 오전에 우리 법무팀을 보낼 테니 유 본부장이 천 회장님의 서명을 받아주는 거로 합시다. 발표는 내일 주식을 매입한 직후에 하면 되겠는데….”
“자이로텔레콤 측에서 발표하십시오.”
“고맙소, 천 회장. 이렇게 마지막까지 내 체면을 세워준 점 절대 잊지 않겠소.”
기쁨과 부러움, 서운함, 아쉬움이 뒤섞인 박태곤이 고개를 몇 번 끄덕인 뒤에 박영철과 함께 먼저 테이블을 떠났다.
바로 나가면 현관에서 다시 인사를 나눠야 할 형편이어서 천중명은 잠시 자리에 다시 앉았다.
“회장님.”
그리고 그렇게 자리에 앉은 천중명을 유진교가 나직하게 불렀다.
“모시는 분이 자랑스러운 임원의 심정을 짐작하십니까?”
“제가 그랬나요?”
“최고셨습니다.”
천중명의 농담 섞인 질문에 유진교가 자부심 넘치는 미소를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