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203화 (203/315)

# 203

203. 주식을 매입하세요 (2)

집으로 향하는 박승양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해 지고 어두운 거리를 나 홀로 걸어가다가, 돈 냄새를 맡았지! 돈 냄새를 맡았어!”

그는 사채업에 뛰어든 명동 꼬마 시절부터 부르던 노래를 흥얼거리며 아파트로 향했다.

“딩동! 딩동!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돈 냄새를 맡았지! 돈 냄새를 맡았어!”

그가 아파트의 입구에 도착했을 때였다.

휴대 전화기가 떨리더니 액정에 윤성일의 이름이 올라왔다.

“여보세요?”

사람들이 없는 구석의 자리로 움직인 박승양의 음성은 점잖기 그지없었다.

- 박 회장. 나요.

“예, 회장님. 말씀하십시오.”

- 천상기 회장과는 어찌 되었소?

“내일 오후 2시에 나오기로 했습니다.”

나직한 윤성일의 숨소리가 먼저 들렸다.

- 내가 우리 박 회장의 의견대로 해볼까 하는데 도움을 좀 주실 수 있겠소?

“푸하하. 당연히 가능합니다. 얼마를 쓰시는지가 중요하지요.”

윤성일의 대꾸가 없는데도 박승양은 거침이 없었다.

“천상기 회장이 용인에서 나오는데 300억 원이 들어갑니다. 지경을 드시려면 통이 커야 한다는 것만 알고 말씀하십시오.”

- 얼마를 원하시오?

“함부로 말씀드리기는 그렇고, 우선 내일 천상기 회장을 모셔온 뒤에 의논하시면 어떻겠습니까?”

- 천중명 회장과 중국의 모임은 확실한 거요?

“그게 아니면 작업이 되겠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허 의원 잡아 돌리듯이 슬쩍 손을 쓰면 거기 다 죽어 나가는 건데 어려울 것도 없습니다.”

- 크흠.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녹음을 의식한 듯한 윤성일의 반응에 박승양은 비릿한 미소만 띄웠다.

“여직원 성폭행 좋지요. 그것도 중국 삼합회 3인자가 끼어 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지 않습니까? 그거 못 만드시나?”

-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는데 만나서 이야기합시다.

“제가 내일 천상기 회장과 움직인 뒤에 전화드리겠습니다. 들어가십시오, 회장님.”

통화를 마친 박승양은 또 빠르게 문자를 입력했다.

[윤성일 회장이 확실하게 물었습니다. 내일 따로 만나기로 했으니 참고하십시오, 회장님. 그리고 건강 꼭 챙기셔야 합니다. 저는 그저 그게 가장 염려됩니다.]

문자를 보낸 박승양은 다시 자동문을 향해 걸었다.

“꽃밭에 앉아서-어, 돈 냄새를 맡았지! 돈 냄새를 맡았어!”

그의 독특한 노래가 현관 안으로 사라졌다.

**

박승양의 문자를 확인한 천중명은, [고생했습니다.]하는 답을 보내 뒤에 휴대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었다.

탄천에 세운 조명 너머로 올림픽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의 불빛이 어둠을 밀어내는 시간이었다.

“바쁜 거 아니에요?”

“끝났어.”

모처럼 허선영과 손을 잡고 즐기는 산책이었다.

“중명 씨. 최근에 눈빛이 달라진 거 알고 있어요?”

무슨 의미냐는 것처럼 천중명은 허선영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전에는 일 생각할 때만 강하게 빛났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평소에도 그런 눈빛이에요. 힘들어서 그런가 싶은데 그러다가 일 생각을 할 때면 정말 무섭게 변해요.”

“그랬나?”

퇴근 후 운동과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이 꽤 있어서 오붓한 맛은 추운 날보다 확실히 적었다.

“계열사끼리는 소문이 꽤 빨리 돌아요. 나와 중명 씨 관계를 알기 때문에 그나마 걸러서 들리는 건데도 최근에 임원들 사이에서 무섭다는 평가가 많았어요.”

천중명은 가벼운 웃음으로 허선영의 말을 받았다.

충분히 이해되는 평가였다. 임원들의 말이 전해진 거라면.

그러나 천중명이 독하게 나설수록 직원들이 좀 더 편해진다고 생각하면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룹 총수님들이나 회장님들 보면 고집스럽고 매서워 보이잖아요. 앞으로 계속 중명 씨가 그런 얼굴이면 어떻게 할까 걱정은 돼요.”

“내가 선영 씨에게 무서운 얼굴을 한다고? 이렇게?”

일부러 매섭게 만든 얼굴을 들이밀자 허선영이 기가 막힌 얼굴로 웃었다.

“힘들 땐 내게 기대요.”

허선영이 힘을 전해주려는 것처럼 천중명의 손을 좀 더 꼭 잡아주었다.

달은 둥그렇지요.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 시원하지요.

오전 결재와 오후 계열사 순시에서 받았던 업무의 앙금이 씻겨 나가는 느낌이었다.

“고마워, 선영 씨.”

“나도요. 고마워요.”

이제는 따로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이 정도 감정은 충분히 전해지고 있었다.

천호득의 소원이 떠올랐으나 그건 뭐 결혼을 서두르라는 의미여서 천중명은 좀 더 걷기로 했다.

**

인간 곽대출은 퇴근 후에 거실에 놓인 식탁에 앉았다.

주방에 있던 식탁을 주인영이 혼자 거실 중앙으로 옮겨놓았고, 퇴근 후면 그곳에 앉아 함께 서류를 작성했다.

톡톡톡. 톡톡. 톡톡톡.

멋지다, 곽대출.

속도는 영 시원치 않지만, 어느새 독수리를 벗어나 시선을 모니터에 준 채 자판을 누르고 있었다.

“이거 좀 한번 봐 줘.”

그러던 그가 노트북을 맞은편에 앉은 주인영에게 돌렸다.

주인영이 상체를 움직여 모니터를 보았다.

풀러 놓은 셔츠 안으로 목에서 길게 이어진 흉터가 그의 강인함을 더욱 강조하는 느낌이었다.

곽대출은 모니터 중간을 가리킨 손가락도 강해 보인다.

“여기에서 이리 넘어가는 계산을 못 하겠어.”

“그건요. 해당 블록을 먼저 마우스로 지정하세요. 그럼 위에 블록 번호가 뜨잖아요. 거기에 수식을 더한 뒤에 뒤쪽을 잡아서 쭉 내리시면 돼요.”

엑셀을 들여다보던 곽대출이 주인영의 설명에 인상을 찌푸렸다. 자 들고 칸 그린 뒤에 손으로 쓰라면 훨씬 편할 사람이 엑셀 프로그램을 쓰려니 오죽하겠나.

그 모습이 멋있어서, 마치 시비를 거는 상대를 노려보는 것처럼 강렬한 곽대출의 눈매가 가슴을 흔들어서 주인영은 슬쩍 그의 볼에 입을 맞췄다.

곽대출의 고개가 슬쩍 돌아왔다.

“하려면 제대로 하든가.”

“감당하실 수 있어요?”

“아쭈? 나를 몰라? 자꾸 그러다가 주 과장 죽을지 몰라.”

“피이!”

둘이서 바람 빠지는 것처럼 웃었다.

“이사님. 차 드실래요?”

“그럴까?”

주인영이 일어나 커피를 타러 움직였다.

“전부터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요. 그때 용인에서요. 왜 이사님이 아니라 회장님께서 크레인에 올라가신 거예요? 누가 봐도 이사님이 올라가실 줄 알았거든요.”

노트북을 향해 고개를 숙였던 곽대출이 웃긴 말을 들었다는 것처럼 웃었다.

“왜 웃으세요?”

“잠깐만. 숫자 몇 개만 찍어놓고.”

곽대출이 자료에서 확인한 숫자를 입력하는 사이, 주인영이 믹스 커피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단박에 달달한 냄새가 좁은 거실을 메웠고, 곧바로 둘이서 커피를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왜 웃으신 건데요?”

“그날 회장님의 어깨, 팔뚝, 손목 관절이 모두 빠졌던 거 모르지.”

“정말요? 그런데 어떻게……?”

“타워크레인 기사의 무게를 못 이겨서 어깨, 팔뚝, 손목이 동시에 빠졌거든. 그런데도 기사를 붙들고 계셨잖아? 고통이 어느 정도냐 하면 칼로 그 세 곳을 계속 썰어댄다고 생각하면 얼추 비슷할 거야.”

주인영은 끔찍한 광경을 직접 본 사람처럼 몸서리를 쳤다.

“그건 나도 견뎠을지 모르지.”

커피잔에서 시선을 든 곽대출이 말을 이었다.

“영상 보면 타워크레인에서 떨어진 뒤에 허공에서 거꾸로 한 바퀴를 돌다시피 하셨거든. 그 뒤에 내가 내민 장대 끝을 잡으셨어. 그것도 타워크레인 기사를 붙든 상태에서.”

영상을 기억하다가 소름이 끼쳤는지 주인영이 팔을 엇갈려서 팔뚝을 문질렀다.

“혼자라면 몰라도 나는 사람을 붙잡은 상태에서 절대 그렇게 못 해.”

“회장님이 원래 그런 분이셨어요?”

커피를 마시던 곽대출이 픽 웃었다.

“그거보다 좀 더 강한 분이라고 생각하는 게 좋을걸?”

“그럼 이사님은 생각보다 강했던 게 아니네요?”

입에서 잔을 뗀 곽대출이 심오한 표정으로 주인영을 보았다.

“내가 얼마나 강한지 모르는 사람처럼 그런다?”

“모르겠어요, 이사님.”

“그래?”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곽대출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인영에게 다가갔다.

“왜 이러세요?”

“엇차!”

그런 뒤에 곽대출은 의자에 앉은 주인영을 번쩍 들었다.

“이사님!”

“서두르라고? 알았어!”

“이거 오늘 끝내놔야 내일 결재 올리죠!”

“살아날 걱정부터 하지?”

“크레인 기사 구한 거랑 밤에 강한 게……. 읍! 읍!”

주인영을 안고 침실로 들어간 곽대출이…….

문이 닫혔다.

**

천중명의 집무실은 오전 8시에 이미 회의가 한창이었다.

천중명, 유진교, 법무팀장 고강도, 그리고 지경증권 송문철 회장이 참석했다.

“회장님. 이대로라면 분명 현행법에 저촉됩니다. 지분만 확보한다면야 충분히 시도해볼 만한 방법입니다만, 추후 경영권 분쟁을 감안하면 재판에서 극히 불리한 판결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내용을 검토한 고강도가 순환출자와 관련한 자료를 엄지로 빠르게 넘겼다.

“5퍼센트 매수 직전에 공개 매수를 하시는 게 가장 현명합니다.”

“그렇게 되면 대송이 백기사를 불러들일 수 있습니다.”

“그건 인정해야죠. 그 상태에서 3자 배정 유상증가가 나온다고 가정해야 합니다. 그러니 지금은 백기사로 나설 그룹을 미리 다져놓는 작업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송문철의 의견에 고강도는 막힘없이 보완책을 제시했다.

“송 회장님. 이 정도 지분 싸움에서 백기사로 도움을 주려면 어느 정도 현금이 있어야 합니까?”

“최소 3조 원의 여유 자금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재계 서열 10위 바깥에서 달려들기는 어렵다고 봐야죠. 우리 지경과 척을 지면 곤란할 테니까요.”

이번엔 고강도가 질문을 던졌고, 송문철이 기다렸다는 듯 답을 내놓았다.

두 사람의 의견이 오간 다음이었다.

“그렇다면 송 회장님은 백기사로 나설 수 있는 그룹을 정리해주시고, 오후장부터 주식회사 지경의 법인 계좌로 대송이 눈치채지 못하게 주식을 매입하세요.”

“예, 회장님.”

“고 전무님은 3퍼센트 매입 이후에 언제고 공개 매수를 발표할 수 있도록 문구와 법적 내용을 검토해 주시고.”

“그렇게 준비해서 본부장께 보고하겠습니다, 회장님.”

“그럼 두 분은 먼저 일어나세요.”

천중명의 지시를 받은 송문철과 고강도가 공손한 인사를 남기고 집무실을 나섰다.

“시원한 거 한잔 마실까요?”

“제가 지시하겠습니다.”

소파에 있는 인터폰을 이용해 유진교가 음료수를 요청한 다음이었다.

“자이로텔레콤의 박영철 부회장을 끌어들이면 어떨까 합니다.”

천중명은 회의 중에 떠오른 생각을 꺼내놓았다.

“우리가 제공하는 실시간 내비게이션을 보면서 고민했었습니다. 그림이 아니라 실제 CCTV의 영상과 축소된 인공위성 영상을 이용하면 더 정확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자이로 텔레콤의 압축기술을 말씀하십니까?”

“그렇죠. 그걸 사용할까 했는데 아예 이참에 협력관계를 유지해서 대송과 다른 짓 못 하게 묶어버릴까 하거든요.”

“기술적인 분석을 다시 확인하겠습니다. 전에는 화상회의 시스템으로만 검토해서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서둘러 주세요.”

“예, 회장님.”

유진교에게 언제까지 검토할 수 있냐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그는 천중명만큼 서두를 사람이어서였다.

부속실 여직원이 가져다준 음료수를 마신 뒤에 유진교가 내놓은 몇 개의 서류를 검토하느라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고생하셨어요.”

유진교가 집무실을 나서자 천중명은 책상으로 움직였다.

오늘부터 주식을 매입하고, 천상기가 용인을 나서며, 윤성일이 박승양과 모종의 계획을 세운다.

대송의 적대적 인수를 시작하는 날, 바깥 날씨는 더할 나위 없이 화창해서 집무실 창으로 강렬한 햇살이 달려들고 있었다.

천중명은 창밖을 향해 픽 웃었다.

법무팀의 고강도 전무는 인수 과정과 인수 후에도 발생하는 문제들을 염려했고, 유진교는 인수 후에 점령군으로 해야 할 해고와 후속조치로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미친 짓이다.

그런데 또 그만큼의 묘한 흥분이 천중명을 사로잡았다.

똑똑똑.

창을 바라보는 천중명의 시선을 노크 소리가 잡아당겼다.

“벤처사업부 계획안을 가져왔습니다.”

고개를 숙인 곽대출이 소파로 다가왔다.

“눈이 왜 그래? 주둥이는 또 왜 그렇고? 도깨비 출신이 어디 가서 맞았을 리는 없고, 뭐야?”

밤에 아르바이트로 막노동이라도 하고 온 사람처럼 곽대출은 퀭한 얼굴로 소파 앞에 있었다.

“앉아.”

“예, 회장님.”

곽대출이 소파에 앉았을 때였다.

그의 코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냈다.

“야! 너…? 이거!”

천중명은 얼른 티슈를 뽑아 곽대출에게 건넸다.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야?”

곽대출은 답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뒤로 젖히고 코를 틀어막았다.

“너무 무리하지 마라. 서류작업 하루 이틀 늦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안 하던 거 배우는 게 쉽지 않다.”

티슈를 더 뽑아주면서 천중명은 의아한 눈으로 곽대출을 노려보았다.

놈의 팔이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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