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
202. 주식을 매입하세요 (1)
모처럼 대치동의 사채 사무실에 들어선 박승양이 책상 의자에 엉덩이를 대기도 전이었다.
휴대 전화기가 울더니 액정에 천상기의 이름이 올라왔다.
“흥. 딴소리나 하겠지.”
통화 버튼을 누른 그는 전화기를 귀에 가져갔다.
“여보세요?”
- 박 회장님. 천상기입니다.
“예, 말씀하세요.”
- 여태 생각해 봤는데 150억이면 부탁드리겠습니다.
박승양은 입술을 길게 늘이며 웃었다.
“천상기 회장님. 양복 입은 신사가 요릿집 문 앞에서 왜 매를 맞는지 아시나?”
천상기는 대꾸가 없었다.
“돈이 없어서 맞아요. 돈이. 돈 아시잖아요. 머니! 그건 빈대떡값이라 매로 끝났지, 목숨값으로 흥정하면 그냥 끝이에요. 왜냐? 캑하고 죽으면 아무리 많이 가졌어도 빈손으로 가거든.”
말투는 여전했는데 차갑기는 아예 얼음장 같은 수준이었다.
“그러지 마시고…….”
“천 회장이야말로 그러지 마시고. 대송이 천 회장을 밀기로 했다니까. 윤성일 회장이 달려든다는데 그걸 아껴요? 막말로 지경을 300억에 먹자는 건데? 대송! 재계 5위 했다가 4위도 한다는 그 대송의 윤성일 회장이요.”
“후.”
“나 바쁩니다. 이만 합시다.”
천상기의 한숨을 들은 박승양은 휴대 전화기의 종료 버튼을 눌렀다.
“하여간 그릇이 달라, 그릇이. 윤성일도 마찬가지고. 그러니 잡혀먹히지.”
그가 책상의 의자에 앉은 다음이었다.
또다시 휴대 전화기가 울었다.
“여보세요? 천 회장님. 나 바쁘다니까.”
- 오지은이라는 여자를 보내겠습니다. 양도성 예금증서니까 알아서 처리하세요. 약속 시간 알려주시고요. 그런데 돈만 먹고 끝나면 어떻게 합니까?
“거 참, 믿고 삽시다. 천상기 회장이 윤 실장에게 돈만 뜯겼노라고 털어놓으면요? 곧바로 내 손목, 발목이 날아가는데 그걸 뭘 걱정합니까?”
박승양의 말에 수긍한 모양이었다.
- 오지은이 한 시간 뒤에 도착할 겁니다. 내일 몇 시에 올지 알려주세요.
천상기의 답이 있었다.
“그런 건 걱정도 하지 마세요. 내일 봅시다, 천 회장님. 좀 씻고 자요. 아셨지? 샤워?”
통화를 마친 박승양은 비릿하게 한 번 웃어준 뒤에 빠르게 문자를 입력했다.
[천상기 회장이 물었습니다.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그리고 내일 몇 시에 데리러 갈지 결정해 주시면 싶습니다.]
“아후, 됐다.”
박승양은 이제야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사채업자가요. 돈을 먹으려고 하면요. 혼을 먼저 뺍니다. 아시겠습니까, 천상기 회장님?”
그런 뒤에 그는 승냥이처럼 사악한 미소를 잊지 않았다.
**
윤병지를 맞은 윤성일의 눈꼬리가 세차게 올라갔다.
“대출을 줄인다고? 누가?”
“경제 수석이 산업은행과 조율 중인 모양입니다.”
“얼마나? 어느 정도로 줄인다는데?”
“최대 500퍼센트를 넘기지 않는 선에서 가이드라인이 나온 모양입니다.”
윤병지의 답을 들은 윤성일은 잠시 말을 잊은 얼굴이었다.
산업은행을 통해 받은 대출금의 규모는 80조 원이었고, 대송자동차그룹의 현금 유보금은 100조 수준이었다.
그까짓 대출금의 절반인 40조 원을 갚으라면 못 갚을 건 없는데 그 뒤에 올 상황이 아팠다.
“기가 막히는군. 이 나라의 경제가 어떻게 되려고.”
윤성일은 잘려나갈 이익을 떠올렸다.
가진 돈 100조 원에서 대출 40조 원을 갚으면 60조 원이 남는다.
솔직히 말할까?
대송자동차그룹은 수출에서 남는 게 전혀 없어서 국내에서 발생하는 수익으로 굴러간다.
그중 가장 짭짤한 수익이 할부금융이었다.
산업은행에서 연리 1.2퍼센트에 빌린 돈을 할부로 자동차를 사는 고객들에게 연리 4퍼센트 이상의 이자를 받고 빌려주는 수익 모델이었다.
그렇게 돈을 굴려 1년에 1조 원 이상을 벌었는데 그게 날아가게 생긴 꼴이었다.
40조 원을 갚고도 60조 원이 남았으니 그걸 할부금융으로 돌리면 되잖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장사를 안 해 보신 분이다.
해외매출 70조 원은 수익이 거의 없다.
자동차를 만들어야 팔지!
70조 원을 들여서 자동차를 만들어서 본전으로 파는 건데 최소한 자재 구입비와 인건비는 쥐고 있어야 자동차를 만들 게 아닌가 말이다.
“수석이 어느 쪽 라인인지 알아보고 만날 수 있게 일정을 잡아봐. 혹시 뒤에 누가 움직였는지도 캐보고.”
“예, 회장님.”
윤병지가 나가자 윤성일은 볼을 씰룩였다.
대한민국은 이러면 안 된다.
굉장히 곤란한 짓이다.
한국 경제를 위해 일평생을 살아온 윤성일 일가와 대송자동차그룹을 이렇게 푸대접해서는 절대 발전 없고, 미래는 더더욱 없다.
이런 판국에 안전의 대명사라는 리온자동차를 국내에서 생산한다면? 게다가 2조 원의 연구개발비를 들여 블루크루드 엔진의 트럭과 중장비도 생산한단다.
‘리온을 인수했어야 해. 리온을.’
인수제안서가 왔을 때 왜 리온을 인수해야 한다며 목숨 걸고 달려든 임원이 한 놈도 없었는지, 윤성일은 그 점도 서운했다.
설마 천호득, 그 영감이 움직였나?
윤성일은 다시 위장이 뒤틀리는 느낌에 손을 명치쯤에 올렸다.
“어디 기업을 뺏기고 죽을 때 어떤 얼굴을 하는지 내 꼭 봐 드리리다!”
윤성일은 그동안 미뤄두던 결심을 굳혔다.
**
어둠이 깔린 평창동 저택의 마당은 그때마다 분위기가 달랐다. 저택에 도착한 천중명은 대문을 들어서서 계단을 올랐고, 은은한 조명 아래에 있는 천호득을 향해 고개 숙였다.
“저녁은?”
“먹었습니다. 아버지는 드셨어요?”
천호득은 고개를 끄덕인 뒤에 휠체어 옆의 의자를 손으로 두드렸다. 장만섭과 송달순의 인사를 받은 천중명이 의자에 앉은 다음이었다.
“시원한 음료수를 가져와.”
“예, 총수님.”
천호득의 지시를 받은 송달순이 안으로 움직였다.
“많이 힘들어 보이세요.”
“회장도 내 나이 돼봐. 아침에 일어나서 잠이 들 때까지 컨디션 좋은 때가 한 번도 없어.”
신분증처럼 고집을 얼굴에 바른 채로 천호득이 답을 내놓았다.
송달순이 돌아와서 잠시 말이 끊겼다.
천중명의 잔에만 얼음이 담겼다.
“아버지. 지경증권의 송 회장이 준비를 마쳤습니다. 허락하시면 내일부터 주식을 매입하겠습니다.”
천호득은 고개만 끄덕였다.
“말씀드린 대로 박승양 회장이 형을 찾아갔었습니다. 300억을 내놓겠답니다. 내일 데리러 갈 생각입니다.”
천호득의 입술이 고통을 견디려는 사람처럼 움찔거렸다.
“회장이 알아서 해.”
침묵을 통해 고통을 이겨낸 것처럼 천호득의 대꾸가 있었다.
파란빛에 속아 달려든 날벌레가 타악, 하는 소리를 끝으로 생을 마감하는 앞에서 천호득은 죽음보다 무거운 눈빛으로 담장 밖의 어두운 하늘을 보고 있었다.
“며칠 내로 대기업 집단의 대출을 500퍼센트 수준으로 맞춘다는 발표가 있을 게다.”
혼잣말처럼 내용을 전한 천호득이 힐끔 시선을 주었다.
“알고 있었어?”
“예, 지경글라스를 나온 뒤에 보고받았습니다.”
“누구? 그 윤 실장의 후배라는 아이?”
“예, 아버지.”
천호득은 고개를 끄덕인 뒤에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우리끼리는 묵시적인 약속이 있어. 결혼을 통해 이리저리 엮는 것도 그 때문이고. 서로의 목줄을 노리지는 않는다는 약속, 우리를 위협하는 정권에는 끝까지 함께 싸운다는 약속.”
말을 건넨 천호득이 천중명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걸 회장이 깨는 거야. 언론을 먼저 흔들어. 그리고 윤성일이 알게 되었다고 하는 순간에 일직선으로 밀어붙여. 윤성일은 당황하면 임원들에게 핑계를 미루는 버릇이 있다.”
마치 눈앞의 천중명이 윤성일이라는 양, 천호득은 매섭고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회장.”
“예, 아버지.”
천호득이 나직하게 불렀고, 천중명이 묵직하게 답했다.
“나는 이번 계획에 둘째도 던졌어. 대송을 인수하게 되거든, 윤 씨와 손톱 끝만큼이라도 관련 있는 놈들은 모조리 잘라내. 그다음으로 회계 감사를 하면서 회계부서에 있는 놈들을 전부 밀어내고. 그건 약속할 수 있지.”
예상하지 못했던 당부이자 지시였다.
“예, 아버지.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나 냉정한 현실에서 천중명을 따르는 이들을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위험을 제거하라는 지시를 거부하기는 어려웠다.
천상기를 이용하겠다는 것까지 허락한 천호득의 당부여서 더 그랬다.
“아버지. 괜찮으시겠어요?”
“뭐가?”
하여간 천호득은 쉽게 가는 법이 없었다.
“이렇게 돌아다니고, 대송까지 손대면 손녀는 언제 만들어?”
“예?”
“첫 번째는 손녀가 좋아. 나는 그 재롱 볼 때까지 조를 테니까 이제 어여 가서 만들어.”
느닷없고 황당한 말을 천호득은 날카로운 표정과 눈으로 전하는 재주가 있었다.
“자식을 잘 키우려면 애 엄마의 노력, 아빠의 무관심, 할아비의 재력이 필요하다는 건 알지?”
처음 듣는 말이었다.
“내가 선영이와 잘 키울 테니까 만들기만 해. 얼른!”
일어서자니 그걸 하러 가는 꼴이고, 버티자니 눈을 독하게 뜬 천호득에게 대드는 꼴이었다.
이런 양반을 윤성일이 이길 수 있겠나.
“회장도 그런 표정을 지을 때가 있어?”
천중명의 표정이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천호득은.
“음료수라도 다 마시고 가든가.”
그렇게 분위기를 바꾼 천호득이 지금은 넉넉한 표정으로 하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
지경증권의 송문철이 벨을 누르자 문을 연 것은 최상중 상무였다.
“오셨습니까?”
한쪽으로 비켜서는 최상중의 옆으로 송문철이 들어서자 셔츠와 정장 바지 차림의 다섯 명이 공손하게 상체를 숙였다.
“앉아들.”
“예, 회장님.”
최상중 아래로 부장, 과장, 대리 둘, 그리고 막내, 이렇게 한 팀이었다.
“회장님. 시원한 녹차입니다.”
최상중은 송문철이 과장일 때부터 데리고 있던 심복 중의 심복이어서 그에게 배신당하면 솔직히 어디 가서 하소연도 못 할 관계였다.
“전화기는?”
“휴대 전화기까지 전부 반납했고, 여기 내부 회선도 제가 다 잘라버렸습니다.”
거실 한쪽으로 모니터가 세 개씩 올려진 책상이 줄줄이 있었고, 오른쪽 끝에 침실로 향하는 문이 보였다.
“인터넷은 사용료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회선을 따로 연결했고, 컴퓨터의 메신저와 다른 것도 제가 모두 직접 제거했습니다. 여기 팀원 중에 배신자가 나오면 그건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급한 연락은?”
“제가 지문 인식으로만 작동하는 휴대 전화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송문철이 긴장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팀원들을 돌아보았다.
“오늘부터 길게는 열흘 정도 이 안에서 지내야 한다는 건 알지?”
팀원들이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회장님 특별 지시다.”
짐작한 모양이었다.
최상중과 팀원들의 눈빛을 보고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지금부터 자료 분석하고, 계획 세워.”
송문철의 지시가 떨어진 직후에 최상중과 팀원들이 긴장한 눈으로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아, 하면 옆구리 찔린 소리이고, 척, 하면 현찰 찔러주는 소리라는 거 알 만큼 아는 메이저 증권사 팀원들이었다.
이제 종목이 나온다.
회장이 특별하게 팀을 짜서 작전세력처럼 호텔에서 합숙까지 하며 만지기로 한 회사가 과연 어디일까?
“이제부터 대송자동차그룹을 적대적으로 인수합병한다.”
최상중이 입을 떡 벌렸고, 부장과 과장은 얼음, 땡 놀이에서 얼음을 맞은 사람처럼 딱딱하게 굳었으며, 대리 둘은 시선을 마주쳤다.
막내는 이게 뭔 소리지 하는, 아직 말귀를 못 알아먹은 얼굴이었다.
“회, 회, 회장님? 우리 지경증권사가, 아니 우리가 대송자동차그룹을 적대적 인수합병하는, 그러니까 그걸 위해서 여기에 모인 겁니까?”
최상중과 팀원들의 반응을 익히 짐작했던 송문철은 고개만 끄덕여주었다.
“하아.”
저 기다란 한숨을 내뱉을 때의 심정도 송문철은 익히 짐작한다.
“순환출자인 건 알고 있을 테고, 우리는 네 개를 돌아가면서 3퍼센트 수준에서 매수한다. 그리고 회장님의 지시가 내려오면 그때부터 공격적으로 한 개 회사의 지분을 20퍼센트 이상 매입하는 게 목표다.”
“자금이 엄청나게 들어갑니다.”
“20조 원까지 우선 결재받았다.”
“우하-.”
“필요하다면 10조 원을 추가로 요청할 수 있다.”
최상중은 아예 질문도 더 꺼내지 못한 채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짧은 침묵이 흐른 다음이었다.
“운영하던 펀드를 함께 돌려도 됩니까?”
“이 건과는 엮지 않는 게 좋아. 자칫하면 지경증권이 수익을 노리고 달려들었다는 오해를 살 수 있어.”
“알겠습니다, 회장님.”
답을 들은 최상중이 놀라움 뒤에서 떠오른 아쉬움을 삼켰다. 지금처럼 주가가 오를 종목을 알게 되었는데 돈을 못 먹게 되었다면 펀드 수익률을 챙겨야 하는 최상중은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