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201화 (201/315)

# 201

201. 이왕이면 확실하게 (3)

커피를 타러 간다며 박승양이 거실로 나간 뒤에 윤성일은 확신했다. 박승양과 윤성일이 방문할 것을 천상기는 아예 짐작조차 못 하고 있었다.

“회장님. 제발 저 좀 살려주십시오. 제게 2천억 정도 돈도 있습니다. 사람 살려주는 셈 치고 외국으로라도 나갈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무엇보다 이 무릎이 더 굳기 전에 치료라도 받게 해주십시오.”

애처롭게 매달리는 천상기를 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부스스한 머리, 방의 청결함과 달리 그의 몸에서 풍기는 홀아비 냄새, 눈물과 콧물이 범벅되어 매달리는 천상기를 보며 윤성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랑한다 말해주세요-오! 정신을 못 차릴 거야-아! 오라버니 목소리에 울고 웃어요!”

거실에서 박승양의 흥얼거림이 들렸다.

이상하게 저 노래를 들으면 윤성일은 정신이 흩어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방법을 찾아볼 텐데 혹시 외부와 연락할 방법이 있소?”

“휴대 전화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지은이라고 서류나 심부름시킬 여자아이도 한 명 있습니다.”

“흠.”

“커다란 가슴에 얼굴을 묻고-오! 지금 이대로 죽어도 여한 없어요-오!”

저 인간을 정말 죽일 수 있을까?

윤성일이 흩어지는 정신을 추스릴 때였다.

“자, 자! 박승양 표 특제 커피입니다.”

종이컵이 올려진 쟁반을 들고 박승양이 방으로 들어왔다.

“당뇨라고 하지 않았소?”

“당이 떨어지는 것 같아서 준비했습니다.”

윤성일의 날카로운 질문에 박승양은 막힘이 없었다.

“천 회장. 어여 듭시다.”

눈물범벅인 천상기가 속없이 종이컵을 들어서 윤성일도 예의상 하나를 받았다.

“후루룩.”

쟁반을 책상에 올린 박승양은 침대에 걸터앉아 경망스럽게 커피를 마셨다.

“원하시는 시간에 내가 천상기 회장을 모시고 나가겠습니다. 그러면 깔끔하게 상황 끝! 의심되시면 지금 함께 나가도 됩니다. 대신 요게 좀 더 들지요.”

짙은 선글라스, 왼손에 종이컵을 든 박승양이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를 둥그렇게 말아서 흔들었다.

“박 회장님. 그 돈 내가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나 좀 데리고 나가서 보호해 주십시오!”

천상기가 그 틈을 파고들었고, 박승양이 탐욕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얼마 주실 건데?”

“얼마나 드리면 됩니까?”

“에이, 흥정은 곤란하지! 여기 윤 회장님께서 정말 기가 막힌 계획을 가지고 계시거든. 대송이 나서서 우리 천상기 회장을 밀어드리려고 하는데 어설픈 흥정을 하려 들면 서운하지요!”

이건 또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윤성일이 번갈아 바라보는 앞에서 천상기는 절박해 보였고, 박승양은 여유만만이었다.

“20억 드리겠습니다.”

천상기가 급하게 말을 뱉는 말을 들으며 가장 먼저 실망한 표정을 지은 사람은 윤성일이었다.

‘2천억이 있다며? 천중명의 손길에서 벗어나는데 돈이 아까워서 고작 20억을 쓴다고 하는 거냐?’

하마터면 튀어나올 뻔한 타박을 윤성일은 꿀꺽 삼켰다.

“윤 실장을 잘 아실 텐데 그러시네. 그 양반이 그거로 만족하겠어요? 그뿐이 아니에요. 신임회장을 몰라요? 어설프게 굴면 천상기 회장은 호수에 빠져서 자살한 거로 나오고 나는 손목 두 개와 발목 두 개를 모두 잃을 텐데?”

“50억?”

“발목은 건지겠네.”

“70억?”

“한쪽 손목만 날아가려나?”

뻔뻔하게 박승양은 오른쪽 손목을 이리저리 돌려 보였다.

“100억 드리겠습니다.”

천상기가 마침내 큰 금액을 불렀을 때였다.

입만 움직여 야비한 미소를 그려낸 박승양이 선글라스를 내렸다. 윤성일은 실제로 돈독이 오른 눈이 있다면 지금 딱 박승양의 눈일 거라고 생각했다.

“300억! 오늘 중으로 통장에 넣어주면 내가 내일 데리러 오겠소.”

지금까지 설렁대던 박승양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지금은 배고픈 승냥이 한 마리가 사악한 눈빛으로 홀아비 냄새 가득한 토끼를 노려보고 있었다.

**

삼청동을 나선 천호득은 뜻밖에도 여주로 방향을 잡았다.

“중간에 점심을 먹자. 간단하게 살 것도 있고.”

천호득은 워낙에 성격이 홱홱 바뀐다.

“휴게실에 세우겠습니다.”

“국도에서 찾아!”

“예, 총수님.”

‘흐헤헤헤’ 웃을 때도 있지만, 지금처럼 날이 서 있을 때도 있다. 숙연하고 무거운 분위기를 안고 달린 승용차가 국도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저 앞이 좋겠다.”

천호득은 여주 쌀을 사용한다는 돌솥밥 집을 가리켰다.

승용차가 멈췄고, 장만섭과 송달순이 빠르게 움직여서 휠체어를 준비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간 다음이었다.

송달순이 빠르게 테이블 두 개를 잡았고, 주문을 마쳤다.

천호득이 한 테이블, 장만섭과 송달순, 운전기사가 그 옆 테이블에 앉았다.

“덩치 큰 놈은 두 개를 시켰어?”

“예, 총수님.”

“떡갈비를 두 개 더 시켜줘. 저놈은 항상 그 정도로 먹어.”

“그렇게 하겠습니다.”

기본 반찬이 나왔다.

어지간하면 밥 나오기 전에 맛을 좀 보련만 천호득이 꾹 분위기를 틀어쥔 채 있으니 두 테이블 모두 젓가락을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다.

30분에 걸친 식사가 끝났다.

천호득은 누룽지를 조금 떴을 뿐인데 그 짧은 시간 안에 장만섭은 돌솥밥 두 개, 떡갈비 두 개, 그리고 반찬 한 벌을 완벽하게 비워내는 능력을 보였다.

“작은 애 너는 가서 소주 한 병과 담배 하나, 컵, 접시를 사와. 그리고 저기도 들러서 과일을 종류별로 담아오고.”

“예, 총수님.”

지시를 받은 송달순이 편의점으로 달렸고, 이어서 국도변에 있는 노점상에 들러 종류별로 과일을 담았다.

볕이 좋아서 차가 지날 때마다 피어오른 흙먼지가 또렷한 날이었다.

주문한 것으로 봐서 분위기는 알았다.

그리고 실제로 천호득이 가리킨 곳은 천봉서가 누워 있는 여주의 선산이었다.

승용차에서 휠체어로 옮겨탄 천호득이 지켜보는 앞이었다.

송달순이 일회용 접시에 과일을 쭉 놓았다.

“술을 부어줘. 담배도 하나 붙여주고.”

“예, 총수님.”

이제는 뗏장이 제법 자리 잡아서 흉한 꼴은 면했다.

송달순은 눈치가 있다.

고갯짓을 해서 장만섭과 운전기사를 뒤로 물린 뒤에 본인도 승용차의 건너편으로 움직였다.

“이렇게 누울 걸…….”

천호득의 고개가 떨리고 있었다.

“다음에 기회가 있거든, 우리도 삼겹살 구워 먹고, 아쉬운 살림이어도 보듬어주면서 사는 집에서 보자.”

목이 메는 모양이었다.

자꾸만 천호득은 올라오는 무언가를 삼켰다.

“그때는 꼭 크리스마스에 선물 잊지 않으마. 다리에 매달리면 안아주고 여차하면 출근 하루쯤 안 하마. 우리 그렇게 보자.”

맑은 날씨와 녹색의 잔디가 잔인한 느낌으로 천봉서의 무덤을 감쌌고, 찬란한 햇살이 처참한 천호득의 심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오후였다.

담배 하나가 다 타들어 가도록 천호득은 움직일 줄 몰랐다.

가야 하는데, 이제는 돌아설 시간인데 말이다.

이 사람아, 나도 이제 늙었어.

다음번에는 자네 옆으로 누우러 올 거야.

그러게 왜 그리 분에 넘치는 욕심을 부렸나.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어?

천호득이 온몸에 힘을 꽉 준 채 울음을 버텨낼 때였다.

우우웅. 우우웅. 우우웅.

그의 시선을 뺏는 것처럼 휴대 전화기가 울었다.

액정을 확인한 천호득은 이어셋을 귀에 걸었다.

“어떻게 됐어?”

- 박승양 회장을 따라나서기로 했답니다.

천호득은 칼에 찔린 표정이었다.

- 300억을 입금하기로 했다는데 결과가 나오면 알려주기로 했습니다.

“흐음.”

- 신임회장이 물류센터에서 총수님의 배려가 있으셔서 한번은 기회를 주겠다고 했답니다. 아마 총수님의 위신을 세워드리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알았다.”

평소라면 자세한 내용을 물어보고 특유의 웃음을 터트렸을 천호득이 짧게 말을 받았다.

- 들어가겠습니다, 총수님.

음성에 담긴 슬픔을 짐작한 윤만석이 보고를 마쳤고, 천호득은 이어셋을 내렸다.

“내가 그러라고 했다. 야비해지라고. 아무래도 상기 놈마저 먼저 갈 모양이다.”

커다란 봉분을 향해 천호득이 아픈 음성으로 말을 건넸다.

“미안하다는 말은 내가 그곳에 가서 함세. 자네가 어릴 적에 나를 아버지라 불러줘서 고마웠네.”

그림 같은 산세, 잘 깔린 잔디, 석축, 아랫부분을 돌판으로 감싼 화려하고 웅장한 봉분 앞에서 천호득이 시선을 돌렸다.

장만섭이 묵직하게 움직여 휠체어를 잡았을 때 천호득의 어깨가 머리와 함께 떨리고 있었다.

**

물류센터에서 나온 천중명은 곽대출과 함께 수원의 지경글라스를 향해 움직였다.

차가 막 출발한 직후였다.

지이이잉.

[회장님. 준비 마쳤습니다.]

송문철이 보낸 문자가 휴대 전화기에 떠올랐다.

[말이 나오지 않았으면 합니다.]

[특별히 주의하겠습니다.]

또 다른 싸움이 시작되고 있었다.

문자를 마친 천중명이 휴대 전화기를 내려놓을 때였다.

지이이잉.

이번엔 박승양의 이름이 액정에 떠올랐다.

[대송에서 출발했습니다.]

짧은 내용이었다.

운전기사를 살핀 천중명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 회장님. 박승양입니다.

“고생하셨습니다.”

- 천상기 회장에게 300억을 제시했습니다. 그 정도면 거절할 거라 보는데 만약 입금하면 말씀하셨던 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소곤거리는 음성으로 박승양이 건넨 말이었다.

- 윤성일은 아직 확신이 서지 않은 눈치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내가 부탁한 방향으로 일머리를 잡아주세요.”

- 그건 염려하지 마십시오, 회장님.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창밖으로 잠시 시선을 주었다.

어떻게 할래, 천상기.

너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박승양에게 이미 넘겼거든.

마지막 기회다.

너에게도, 나에게도, 나이 든 총수님께도.

만약 총수님이 눈을 감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그따위 한을 남게 한다면 내 손으로 널 죽일지 몰라.

그러니 정신 차려. 이 마지막 기회에.

빠르게 흐르는 국도를 배경으로 천중명은 천호득을 떠올렸다.

오늘 윤성일과 박승양의 방문을 윤만석이 보고했을 테고, 그렇다면 천호득은 이미 그 내용을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서운할 수도 있고, 원망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 천중명의 입으로 말하기는 이르다.

‘당부하셨던 일 잊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그렇게 잠시 창밖을 보던 천중명은 보고서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지금 향하는 지경글라스의 회장 최치국은 조승필의 사람이었다.

옛날로 따지면 밀려난 장수의 심복쯤 되겠다.

천호득과 유진교가 염려했던 사장단의 반발을 주도할 가장 첫 번째 위험인물이기도 했다.

지경전자에서 잔뼈가 굵은 그를 지경글라스의 회장으로 승진시킨 것도 조승필이었으니 그의 성향 따위 두말하면 입 아픈 수준이었다.

대다수 계열사와 마찬가지로 지경글라스 역시 폭언, 폭행, 추행이 가장 큰 문제였고, 이어서 공적 가로채기, 강압적인 회식 등의 순으로 불만이 접수되었다.

승용차가 국도에서 오른쪽으로 빠져나가자 진입로의 끝에서 창고형 공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방향을 커다랗게 튼 승용차가 현관에 멈추었을 때 점퍼 차림의 임원들이 우르르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최치국, 대한민국 최고 대학, 대학원 졸업, 유학파, 그리고 조승필의 오른팔이었던 사람이 고개를 숙이며 천중명을 맞았다.

“반갑습니다.”

천중명은 늘 하던 대로 손을 내밀어 그와 악수했다.

쉰이 넘은 최치국의 태도는 공손했다.

“회장님. 공장설비를 둘러보시고 회의실로 모시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간부가 들고 온 안전모를 최치국이 받아서 천중명에게 건네주었다.

둘 중 하나겠지.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언젠가 올지 모를 기회를 기다리거나, 아니면 완전히 꺾여서 반항할 마음이 없든가.

천중명은 덤덤하게 공장을 둘러보았다.

컨베이어 벨트가 물결처럼 흐르고, 그 좌우에서 로봇 팔이 제품을 만들어내는 자동화 설비였다.

공장을 돌아본 천중명은 곧장 회의실로 이동했다.

임원들 소개, 그리고 곽대출의 인사가 있었다.

“사업에 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이어서 브리핑도 있었다.

임원들은 극도로 조심하는 눈치였고, 천호득과 유진교가 가장 위험한 인물로 꼽는 최치국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공손했다.

브리핑은 15분쯤 뒤에 끝났다.

쉰이 넘는 계열사 회장이 거느린 임원들 앞에서 철저하게 고개를 숙인다. 그의 속을 알 길은 없으나 저 정도라면 한 번쯤 기회를 주고 싶었다.

“최치국 회장님.”

“예, 회장님.”

“우리는 곧 자동차를 생산할 예정입니다. 지금 납품하는 제품보다 좀 더 높은 수준, 그리고 법이 정한 것보다 안전한 유리를 생산할 수 있도록 노력해 주세요.”

“반드시 그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회장님.”

최치국이 굳은 얼굴로 답을 꺼낸 다음이었다.

그의 눈을 바라본 상태에서 천중명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직원들이 행복한 회사, 그 직원들이 고객에게 최선을 다하는 회사를 만들고 싶습니다. 내 방침에 따르겠습니까?”

천중명의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회의실 안이 침묵에 휩싸였다.

“제가 의심스러운 임원인 것을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곳에 있는 임직원들과 함께 회장님의 방침에 따라 최선을 다할 것이라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

배를 드러내고 누운 충견처럼 최치국은 말을 마친 뒤에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거 봐?

그런 뒤에 그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천중명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래서 조승필이 아껴 썼는지 모른다.

저 충성심에 반해서.

솔직히 저 충성심이 천중명을 향할 수 있다면 욕심난다.

짧고 묵직하며 강렬한 침묵이 흐른 뒤였다.

“최치국 회장님을 믿어보겠습니다. 앞으로 지경을 위해 큰일 해주리라 기대합니다.”

마침내 천중명이 대꾸를 꺼냈고,

“감사합니다, 회장님!”

굵직한 답을 내놓은 최치국이 그제야 상체를 들었다.

가장 강력하게 반기를 들 거라고 예상되는 임원의 완벽한 투항을, 곽대출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는 앞에서 임원들이 길게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었다.

천중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미는 손을 최치국이 황송하다는 듯 두 손으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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