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
200. 이왕이면 확실하게 (2)
영어로는 ‘메리 고 라운드(Merry go round)’라고 부르고, 우리끼리는 ‘뺑뺑이’란 친숙한 이름으로 부르는 놀이기구가 있다.
누군가 홱 잡아채서 돌리면 하여간 돈다.
그걸 따라 달리기도 하고, 멋지게 점프해서 올라탈 수도 있는데, 재수 없으면 바닥에 엎어지기도 했다.
사람 사는 거랑 어쩌면 그리 비슷한지.
천호득은 가끔 그 놀이기구를 떠올린다.
인생이란 거대한 뺑뺑이에서 누구는 중심축에 서고, 누구는 바깥에 매달리며, 또 누군가는 뛰어오르다가 엎어져 좌절한다.
‘일어서! 무릎이나 손바닥 상처쯤 툭툭 털고 다시 달려서 올라타!’
멋진 조언 같은데 천호득이 보기에는 멍청하기 짝이 없는 소리다.
너의 인생이다.
네 인생의 뺑뺑이에서 너는 처음부터 중심인 거고.
천호득은 늘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다.
지금 어떤 모습이든 네가 사는 세상의 주인공은 너야!
때론 바깥에서 달려든 강한 놈이나 돈이 많은 집 자식이 중심을 뺏으려 들 수는 있지만, 하여튼 사람들은 자기 자리를 너무 쉽게 포기하거나 너무 일찍 양보한다.
산업은행에 들러 행장과 부행장을 차례로 만난 천호득은 삼청동으로 향했다.
마당이라고 별거 없는 작은 가정집이었다.
게다가 단층이었다.
그런 집의 앞에 차를 세운 천호득은 장만섭의 부축을 받으며 휠체어에 올랐다.
송달순까지 나서서 마당에 들어선 다음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현관에서 나온 남자는 쉰 초반으로 보였고, 단정한 차림이었다. 그 뒤로 보좌관이나 비서로 보이는 세 명의 남자가 나왔다.
“너희는 이곳에 있어.”
“예, 총수님.”
천호득의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안에서 나온 세 명의 남자가 휠체어를 붙들어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번거롭게 했소.”
“몸이 불편하신 걸 알고 있습니다.”
쉰 초반의 남자가 천호득의 맞은편 소파에 앉자 곧바로 녹차가 나왔다.
“총수님. 솔직하게 말씀해 주시면 차라리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겠습니다.”
“이번만큼은 내가 뺑뺑이 바깥에 매달린 모양이오.”
천호득을 지켜보던 남자가 가볍게 웃었다.
“신임회장이 그 정도입니까?”
“내가 우리 수석에게 어려운 청을 한 게 있었소?”
“그런 적 없었습니다, 총수님.”
“이번에 그 어려운 청을 하러 왔소.”
뜬금없이 이어진 대화의 끝에서 수석은 잠시 말이 없었다.
“총수님 덕분에 이 자리에 왔습니다.”
“내가 아니었어도 수석은 충분히 성공했을 분이오.”
“감사합니다, 총수님. 이제 원하시는 걸 말씀해 주십시오.”
부담스러운 침묵이 흐른 다음이었다.
“산업은행이 대기업에 시행한 대출을 500퍼센트 수준으로 줄여주시오.”
세 번째 침묵은 묵직하고 날카로웠다.
“대송입니까?”
“그렇게 될 것 같소. 산업은행이 먼저 발표해야 그나마 곤란한 상황을 조금은 피해가실 게요.”
“거절해도 되겠습니까?”
천호득은 먼저 입술만 움직여서 웃었다.
“수석이 지난번 남부증권과 포구에서 있었던 사건에 도움을 준 거야 알고 있었지. 그것만으로도 수석에게 미안한 참인데 이렇게 또 나섰으니.”
나직하게 말을 뱉어내던 천호득이 숨을 고른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자식이란 게 참 무섭소.”
“보기 좋습니다.”
수석은 고개를 틀어서 창을 바라보았다가 결심한 얼굴로 천호득에게 시선을 돌렸다.
“신임회장이 건전한 기업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VIP께서도 긍정적으로 판단하고 계셨습니다. 무리한 대출로 군림하는 기업이 있다면 이제는 개선해야 할 때도 되었습니다. 돌아가 계십시오.”
“고맙소.”
“총수님. 저는 여기까지입니다.”
“한 가지 부탁을 꼭 들어준다던 약속은 어쩌면 남부증권 사건에서 끝났을지 모르는데 내가 염치가 없소.”
소파에서 일어선 수석이 천호득을 향해 깍듯하게 고개 숙였다.
“장학금, 유학 시절, 그 이후로 5년 동안 주신 저와 가족들의 생활비, 행정부에 길을 열어주신 총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방송이나 언론에서 우리 수석의 기쁜 소식을 보게 되길 바라겠소.”
떨리며 내민 손을 수석이 공손하게 잡았고, 그의 손을 천호득이 왼손으로 다시 덮었다. 한 가지 부탁은 반드시 들어준다는 약속은 인연을 담보로 한다.
“부디 강녕하십시오.”
“승승장구하시게.”
그래서 이것이 살아서 보는 두 사람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
승용차가 용인의 주택 담에 멈췄을 때, 윤만석은 대원 셋과 함께 마당의 테이블에 있었다.
“회장님은 잠시 계십시오.”
박승양은 사람이 휙휙 바뀐다.
지금은 죽음을 각오한 사람처럼 굳은 모습이었는데 선글라스와 옆구리의 가방이 분위기를 망치는 느낌이었다.
운전석 뒷문으로 내린 박승양이 느긋하게 마당으로 향했다.
윤성일이 바라보는 저편에서 박승양은 테이블에 가방을 내려놓은 뒤에 지퍼를 열어 보였다.
‘저게 다 수표였다고?’
5만 원권인 줄 알았던 가방에서 보인 것은 낡아 보이는 수표였다.
현금이 최고다.
그러나 있는 대로 돌린 10만 원짜리 수표 역시 추적이 어렵다. 설사 누가 저 돈을 문제 삼으면 박승양이 빌려준 거라는 한 마디에 끝날 일이다.
천상기를 납치할 것도, 죽일 것도 아니어서 그렇다.
윤만석이 불편한 자세로 몸을 일으키고는 승용차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젠장!’
윤성일은 얼른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윤만석입니다, 회장님.”
그걸 질문으로 오해했는지 전충호가 충성스러운 음성으로 이름을 알려주었다.
‘에이! 2프로 부족한 놈!’
전충호는 늘 저렇게 살짝 아쉬운 맛이 있었다.
“이쪽으로 옵니다.”
그러다가 지금처럼 눈치껏 정보를 물어온다.
고개를 떨군 윤성일의 곁을 지나서 윤만석이 승용차의 뒤편 도로로 움직였다.
‘뭐야? 아예 자리를 비워주는 거야?’
슬쩍 고개를 든 윤성일의 시선에 홀로 서 있는 박승양이 들어왔다. 그의 손과 테이블에 가방이 없는 것으로 봐서 윤만석이 가져간 게 분명했다.
아까 그 크기의 가방에 10만 원짜리 수표가 가득하다면?
대략 3억에서 4억쯤 되겠다.
윤만석을 따라 고개를 돌렸던 박승양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똑똑똑.
“회장님. 이제 내리셔도 됩니다.”
그가 오른손 엄지를 옆으로 뉘여서 집을 가리켰다.
“움직이지.”
“예, 회장님.”
전충호가 먼저 내려서 승용차의 문을 열었고, 윤성일은 그제야 차에서 내렸다.
“용인만 해도 공기가 상큼합니다.”
어제 골프 친 곳이 이 근처란 걸 잊은 사람처럼 박승양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현관을 향해 움직였다.
딸각. 끼이익.
손잡이 위를 눌러 당기자 쇠로 된 현관이 열렸다.
정면에 방, 오른쪽으로 주방과 그 옆으로 계단, 왼쪽은 창으로 이어진 구조였다.
세 사람은 안으로 들어섰다.
“어디 보자? 정면에 있는 방이라고 했으니까 저 방인가 봅니다. 점심에 약을 걸러서 대화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들었습니다. 보셨죠? 내가 이렇게 일합니다.”
거실을 가로지른 박승양이 문의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어허! 우리 천상기 회장이!”
천상기는 책상 앞의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윤성일은 분명하게 보았다.
까치집처럼 부스스한 머리를 한 천상기가 박승양과 이쪽을 보며 만들어낸 놀란 눈과 표정을 말이다.
저건 연기가 아니다.
정말 놀란 얼굴이 맞다.
그렇다면 진짜로 박승양이 윤만석을 구워삶았다는 말이 된다.
“어어? 어?”
“아니 말도 잊어버리셨어? 우리 천 회장이 어쩌다가!”
천상기에게 다가가던 박승양이 고개를 떨며 움찔했다.
“에휴! 씻지도 못하셨네, 그래!”
천상기의 놀란 눈이 윤성일에게 고정되었다.
“누군지 아시나?”
“윤…, 윤 회장님?”
“하아. 우리 천상기 회장이 이렇게 지내는 줄 몰랐소. 진즉 한번 찾아봤어야 하는데 내가 늦었소.”
윤성일이 따뜻한 말을 건넨 직후였다.
삽시간에 벌겋게 변한 천상기의 눈에서 느닷없이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나왔다.
“에헤이! 뭘 또 이렇게 울기까지?”
박승양의 넉살을 외면한 채 천상기의 눈은 윤성일에게 향해 있었다.
“저 좀 살려주십시오, 윤 회장님! 저 좀 데리고 가주세요! 살려만 주시면 뭐든 다 하겠습니다!”
그렇게 천상기는 윤성일에게 매달렸다.
**
천중명은 곽대출과 함께 기흥에 있는 지경전자판매와 서비스, 물류창고를 방문했다.
이곳은 창고형 건물이라 본관 역시 서울 시내에 있는 계열사와는 달리 사각형의 조립식 건물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사청원입니다.”
“반갑습니다.”
승용차에서 내린 천중명을 사청원과 임원들이 맞았다.
“회장님. 물류창고를 먼저 들러보시고, 회의실로 모실까 합니다.”
“그러시죠.”
사청원이 시선을 주자 간부로 보이는 직원이 안전모 두 개를 가져다주었다.
“물류창고는 자동화 시스템을 모두 마쳤습니다. 각 지점에서 신청한 제품을 자동화 설비가 순서에 맞춰 출하하는 방식입니다.”
비행기 격납고처럼 높은 건물 안에서 열십자로 연결된 선로를 타고 집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제품은 아래쪽에서 기다리는 무인자동차가 받아서 통로를 따라 움직였다. 배터리로 움직이는지 옆을 지나는 무인자동차에서 모터 소리가 들렸다.
“하루 물동량으로 국내 최고입니다.”
거대한 창고에서 기계들이 움직이고, 몇 명 안 되는 직원들은 패드를 들여다보며 흐름만 파악하고 있었다.
물류창고에서 나오는 고요함이 천중명은 두려웠다.
저 자동화 설비가 들어오면서 이곳에서 일하던 백여 명의 직원이 명예퇴직을 선택하거나 다른 계열사로 자리를 옮겼다.
급여를 요구하지 않는다.
휴식 시간이나 특근수당, 심지어 식사도 필요 없다.
저런 자동화 설비가 4차 산업혁명의 한 모습이라는데 일부 정치권은 마치 새로운 시대가 오는 것처럼 홍보하기 바쁘다.
‘어떻게 할 건데? 이런 식으로 자리를 줄이면 이곳에서 일하던 직원들처럼 결국 모두 내몰릴 텐데?’
아직 자동화 설비에는 세금이 붙지 않는다. 세금은커녕, 값싼 전기요금도 모자라 보조금도 나온다.
천중명은 거대한 물류창고의 천장에서 움직이는 갈고리들을 무거운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마치 소리 없이 다가오는 거대자본을 보는 느낌이었다.
저런 식으로 조용하게 다가와 기업들을 삼킨 뒤에 직원들을 최소한으로 줄인다.
그렇게 살아남은 기업들은 버는 돈을 계속 해외로 보내고,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은 자영업, 일당직, 계약직으로 내몰린다.
“회장님?”
말없이 서 있는 천중명을 사청원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회의실로 모시겠습니다.”
“아! 설비에 너무 정신을 빼앗겼었나 보네요. 가시죠.”
천중명은 사청원의 안내로 본관 건물의 회의실로 향했다.
화려함은 확실히 앞에 들렀던 계열사들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임원 소개 후 이어진 브리핑은 흠잡을 바 없이 깔끔했다.
물류창고의 바닥처럼 본관 건물의 청소상태도 좋았고, 어제의 일이 있어서인지 브리핑을 담당한 직원은 아예 청소용역에 관한 보고를 따로 넣어두었다.
20분에 걸친 브리핑이 끝난 다음이었다.
“사청원 회장님. 이곳에서 지난 3년간 산업재해가 단 한 건도 없었습니다. 정확한 현황을 알고 싶습니다. 실제로 없었던 겁니까, 아니면 적당하게 덮은 겁니까?”
직원이 물러난 뒤에 천중명은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사청원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난 3년간 다섯 명이 다쳤고, 그중 두 명은 6개월을 병원에 있어야 할 정도로 중상이었습니다. 한 명은 1급 장애 판정을 받았는데 왜 이곳이 3년 무사고 표지를 걸었죠?”
사청원은 답을 하지 못했다.
“내가 그룹을 맡기 전에 일어났던 일이니 그 부분에 관해 더 추궁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경고합니다.”
“예, 회장님.”
“부상이 있을 때 달려온 구급차를 돌려보낸 적이 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앞으로 산업재해가 발생하면 가장 먼저 직원의 안전을 우선해서 처리하세요.”
“명심하겠습니다, 회장님.”
“산업재해가 발생하면 인사고과, 더 나아가 기업평가가 불리해진다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업무 중에 다친 사람을 두고 평가 하락이 무서워 병원 후송을 미루면…….”
천중명은 임원들을 쭉 둘러본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약속합니다. 근무 중 다친 직원을 이유로 임원들에게 불리한 평가가 없을 겁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 여러분 모두 새로운 직장을 구해야 할 겁니다.”
“반드시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사청원이 고개를 숙이며 답을 한 다음이었다.
“나상포 전무님.”
천중명이 부르자 사청원의 곁에 있던 나상포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염색을 진하게 한 머리에 눈꼬리가 위로 치켜진 쉰 후반의 임원이었다.
“대리점에서 출고 신청한 제품의 순서를 임의로 바꾼 적이 있습니까?”
이번엔 나상포가 답을 하지 못했다.
“곽 이사. 서류 줘 봐.”
천중명이 시선을 받은 곽대출이 가방에서 서류철을 꺼내 앞에 놓아주었다.
“제품 종류도 다양하던데요? 대리점주의 부인이 인척 관계인 것 맞습니까?”
“죄송합니다, 회장님.”
나상포의 답이 떨어진 것과 동시에 사청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충청도에서 우리 제품을 제대로 받으려면 천안의 신부동 대리점 점주 부인의 도움이 있어야 한답니다.”
말의 끝에서 천중명은 책임을 묻는 것처럼 이곳을 책임진 사청원을 노려보았다.
“회장님. 부당한 거래를 파악해서 문제점이 발견되면 나상포 전무를 해임하고, 대리점 점주 역시 해고토록 하겠습니다.”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우리 지경전자의 제품 배송과 설치 직원들을 개인사업자로 등록해서 수익을 높였습니다.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보고하세요.”
“예, 회장님.”
브리핑까지 좋았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살벌하게 변하더니 지금은 아예 새로 산 때수건으로 볼을 벅벅 문지르는 느낌마저 들었다.
“실적은 물론 중요한 항목입니다. 그렇더라도 정당하지 않은 실적과 부당한 이익은 결국 독으로 돌아옵니다. 명예회장님의 당부가 있어서 물류센터, 서비스에 마지막 기회를 주겠습니다.”
천중명의 말이 끝날 때쯤 사창원과 임원들의 시선이 모두 바닥을 향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