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198화 (198/315)

# 198

198. 나는 그런 지경을 원합니다 (2)

박승양이 알려준 주소는 대치동에 있는 높다란 주상복합아파트의 맞은편 상가 건물이었다.

3층에 삼양증권 대치동지점 간판이 달린 상가로 들어선 천중명은 곽대출과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갔다.

때앵.

문이 열리자 오른편에 정체를 알기 어려운 회사가, 왼편에는 삼양증권 VIP 고객 전용 창구가 있었다.

뭐야? 증권사로 부른 건 아닐 테고?

곽대출이 좌우를 둘러볼 때 오른쪽 사무실에서 박승양이 시커멓게 칠해진 자동문을 열고 나왔다.

“이리 오십시오.”

그는 마치 첩보영화에서 접속하는 스파이처럼 속삭이듯 천중명과 곽대출을 불렀다.

자동문 안으로 들어간 천중명은 픽 웃고 말았다.

안쪽에 책상 하나, 소파 한 세트, 그리고 조립식 로봇이 줄줄이 서 있는 책장 하나, 마지막으로 커피를 타는 탁자가 전부였다.

“단속이 나올 때를 대비해서 파놓은 박승양의 굴입니다. 여기는 어지간해서 들킬 일이 없습니다.”

“추적하면 나오지 않나요?”

“삼양증권의 고객 거래실로 등록했습니다. 여기 임대료도 삼양증권 대치지점장이 냅니다. 앉으세요. 여기로.”

상석을 양보한 박승양이 구석으로 움직여 봉지커피를 준비했다.

“심복 이사님은 그냥 계세요. 내 사무실에서 모처럼 대접하는 거니까 이게 좋습니다.”

그래놓고 박승양은 곽대출과 함께 종이컵 세 개를 들고 왔다.

“지점장이나 증권사 직원이 고발하면 어떻게 합니까?”

곽대출이 증권사가 있는 방향을 향해 목을 뺐다가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되면 이 지점은 물론이고 삼양증권에 있는 사채업자 돈이 모조리 빠져나갑니다. 이곳의 비밀을 아는 직원도 지점장을 제외하면 한 명이나 더 있을 겁니다.”

“다른 지점도 비슷합니까?”

“심복 이사님도 이런 곳 하나 만들어드릴까? 강남과 명동 부근은 다 있는데?”

“저는 이런 곳에 있으면 갑갑해 죽을 겁니다.”

최근에 부쩍 친해진 것처럼 두 사람은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며 잠시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박승양이 힐끔 천중명에게 시선을 주었다.

“곽 이사는 괜찮습니다. 말씀하세요.”

“그러시지! 그래야 심복이시지!”

고개를 두 번이나 끄덕인 박승양이 대뜸 상체를 기울였다.

“윤성일 회장이 천상기 회장 주변을 살핀 건 분명합니다. 그래서 내가요. 약을 올렸거든요. 천중명 회장을 밀쳐내고 천상기 회장을 세워라.”

잽싸게 곽대출의 안색을 살핀 박승양이 얼른 말을 이었다.

“알아봤는데 틈이 없다고 했습니다. 예! 분명 그렇게 말했습니다!”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박승양이 말을 마쳤다.

“윤 회장이 박 회장님을 믿는 눈치던가요?”

박승양이 야비한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양반 눈치가 빤합니다. 사람 안 믿는 거로 따지면 천호득 회장…님. 이런 실례가! 하여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양반입니다.”

“그렇다면 믿게 할 뭔가가 필요하군요.”

“회장님. 윤성일 회장에게서 얻으려는 게 뭔지 알려주시면 작전이 나올 거 같은데…요. 부탁할 게 있다고 하셨던 말씀이 기억나서 여쭤보는 겁니다.”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박승양이 궁금한 눈으로 천중명과 곽대출을 번갈아 보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작은 일이 아니란 냄새를 맡은 눈치였다.

“곤란하시면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저야 그래도 우리 회장님께서 하시는 일에 열심히! 예! 부지런히!”

“대송을 적대적 인수하려고 준비 중입니다.”

“예! 적대적 인수도 제가 열심…. 열심…? 예에? 대송을 적대적? 그러니까 주식을 많이 사서 꿀꺽? 그 적대적 말씀이십니까?”

고개를 끄덕인 천중명을 박승양은 잠시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대략 얼마나 투입하실 계획이십니까?”

“이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이 총수님, 지경증권 송문철 회장, 그리고 우리 세 사람입니다. 송 회장은 20조 원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박승양은 확실히 받아들이는 것이 빨랐다.

그는 어느새 반쯤 뜯겨나간 짐승을 발견한 배고픈 승냥이의 눈을 하고 있었다.

“순환출자니까 한 놈만 패면 되겠습니다.”

“총수님과 송 회장도 같은 의견이었습니다.”

상황을 이해 못 하는 곽대출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을 정도로 박승양은 좀 전과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회장님. 천상기 회장님을 하루만 만나게 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용인이라면 가능할 것도 같은데 헛소리를 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럴수록 도움이 됩니다. 그래 줘야 하고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렇게만 해주시면 작전 시작 때까지 윤성일 회장은 다른 꿈을 꾸느라 이쪽의 계획은 짐작도 못 할 겁니다.”

“원하시는 걸 말씀해보세요.”

천중명이 질문을 던진 직후였다.

박승양이 세상 서운한 얼굴로 여태 기울이고 있던 상체를 세웠다.

“회장님. 남부증권에 있는 제 계좌에서 하루에 70억을 법니다. 내가 돈에 환장한 것도 아니고 그런 말씀은 서운합니다.”

뭔가 있다. 뒤에 요구할 무언가가 그의 이마와 눈, 입가에 선명하게 묻어 있었다.

잠자코 기다리는 천중명을 본 박승양이 슬쩍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은 그저 회장님의 사람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저거, 저축은행과 대부업체 인수하는 그 뒷일 할 때 저 꼭 끼워주십시오.”

결국, 그는 속을 드러냈다.

“그 계획은 실행할지 이대로 끝날지 아직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이미 그 계획에 박 회장님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번 일에서 원하는 바를 미리 말씀하세요.”

“정 그렇게 서운하시면 알아서 주십시오.”

천중명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일이 실패하면 리온이 발행하는 전환사채 2조 중에서 5천억 원어치를 넘겨드리겠습니다. 물론 5천억 원은 지불하셔야 하니까 가지고 계신 내 몫에서 입금해 주세요.”

입을 떡 벌린 박승양이 감동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곽대출은 이런 것보다 곱창에 소주 먹자고 해야 눈을 반갑게 뜰 사람이었다.

리액션이 아쉬운 얼굴로, 그러나 있는 대로 감동한 얼굴로 박승양이 다시 고개를 가져왔다.

“박승양이 우리 회장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사람을 정말이지 천중명은 처음 상대해보았다.

**

서초동 지경화재보험 건물 로비는 아예 난리가 난 수준이었다.

영업이 끝난 시간이어서 고객들이 드나들 일은 없었다.

그런 보험사 건물의 로비에 장진해 보험총괄 회장이 눈에 불을 켠 얼굴로 서 있었고, 그 앞에서 회장 둘과 사장단, 임원들이 줄줄이 넥타이에 셔츠 차림으로 짐을 옮겼다.

“당신들 나 물 먹여서 밀어내고 내 자리 차지하겠다는 거지?”

천중명이 떠난 뒤에 장진해가 현관에서 차갑게 뱉어낸 말이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보다는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방심하고서….”

“명예회장님 지시를 사소한 일이라고 보고도 안 하고, 처리도 안 했다는 거야? 내가 그 말을 회장님께 보고 드리면 당신 그거 감당할 수 있겠어?”

“죄송합니다, 회장님.”

생명보험과 카드사 회장이 얼른 고개를 처박았다.

“임원들이 직접 치워. 오늘 업무 끝나기 전까지 휴게실 공간 확보하고, 저기 있는 짐! 화장지 하나까지 전부 직접 옮겨!”

장진해는 고함을 지르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는 화가 날수록 깊숙하게 목소리를 까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어찌 된 일인지 고함을 버럭버럭 지르고 있었다.

송구해서 어쩔 줄 모르는 청소용역 직원들 다섯이 물범에게 밀려난 펭귄처럼 구석에 모여 있는 앞이었다.

임원들이 야외용 가스레인지, 반찬 통, 밥솥, 쌀, 믹스 커피와 진짜로 두루마리 화장지를 들고 계단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거기 이리들 오세요.”

장진해가 불렀다.

목을 잔뜩 움츠린 청소용역 직원들이 쭈뼛거리며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제가 챙겼어야 하는데.”

“아닙니다. 괜히 저희 같은 것들 때문에…, 죄송합니다. 용서하세요, 회장님.”

사과를 들은 장진해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틀었다.

“어떻게 됐어?”

“여기 있습니다.”

이사 한 명이 날듯이 다가와 결재판을 내밀었다.

“여기 오늘까지 용역비 정산한 내역입니다. 내일 용역회사에서 입금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회장님! 잘못했습니다! 자르지만 말아주세요! 저희 갈 곳도 없어요!”

다섯 명 중 두 명이 장진해를 향해 어린아이처럼 손을 빌었다.

“오해하신 모양인데 내일부터 정직원입니다. 소속은 화재보험이니까 그렇게 아시고, 급여 산정에 그동안 이곳에서 일한 2년을 호봉으로 인정했습니다. 급여가….”

장진해가 고개를 돌리자,

“실수령액 기준으로 270만 원 정도입니다.”

이사가 재빠르게 답을 내놓았다.

“그 정도 된답니다. 혹시 지내시다가 불편한 점이 있으면 내게 바로 연락하세요. 비서실에 말해 둘 테니까 염려 말고 바로 올라오세요.”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노인네들은 굽은 손가락으로 힘겨운 주름 아래의 눈을 닦아내며 눈물을 감추려 애썼다.

“점심은 직원 식당을 이용하세요. 이제는 그래야 합니다. 커피와 종이컵, 그리고 비품까지 총무과에 신청하세요. 보고서 양식이 어려우니까 그냥 가셔서 말하면 됩니다.”

“아이고, 하나님. 감사…, 감사합니다. 회장님.”

“나보다는 그룹회장님께 감사드리세요.”

장진해가 말을 건넨 직후였다.

“다 옮겼습니다.”

회장과 사장들이 장진해에게 다가왔다.

“앞장서! 내 눈으로 봐야겠어.”

끝난 줄 알았던 이사는 장진해의 확인을 거치고서야 마무리되었다.

“아이고, 하나님! 부처님! 회장님!”

감격한 청소직원들의 눈물이 있었고, 그 자리에서 천중명의 위상이 하나님과 부처님에 비견될 정도로 높아졌다.

‘이런 건가?’

신임회장이 원하는 가족 같은 회사 모습은?

어떻게 그 젊은 나이에 이런 부분을 먼저 배려하지?

회장실로 향하며 장진해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

보험사 방문에서 있었던 일은 인터넷으로 다 퍼졌다.

천중명이 불쑥 나타날 수 있는 지역인 경기도와 충청도에 소재한 계열사는 초비상이었다.

청소용역 휴게실의 비품이 바뀌었고 간이침대를 설치하는가 하면, 페인트를 새로 칠한다며 부산을 떠는 곳도 있었다.

“어쩜! 우리 회장님은 이러실 수가 있지?”

눈에 하트가 그려진 여직원들의 감탄은 말할 것도 없고, 노모를 둔 직원들의 감동 역시 대단했다.

아직 천중명이 방문하지 않은 계열사는 오늘 지적받은 문제점을 확인하느라 바빴다.

“이 부장. 그러니까 브리핑에서는 문제가 없었다는 거 아냐? 나 한 번 살려주는 셈 치고 오늘 브리핑했던 프레젠테이션 자료 좀 보내줘. 참고해서 다시 만들어 보게. 이 부장! 내가 이렇게 빈다, 진짜.”

이사급이 부장에게 매달려 브리핑 자료를 보내달라고 애걸복걸하는 곳도 많았다.

현장은 에폭시를 다시 깔았다.

그리고 저녁에 임원들의 가슴을 꽉 짓누르는 동영상이 또 하나 올라왔다.

[청소용역 직원분들의 이사예요.]

동영상은 장진해가 지켜보는 앞에서 임원들이 자질구레한 살림을 옮기는 모습이었다.

- 회사를 다니면서 감동받은 적 없었어요. 그런데 오늘은 정말 대박이에요!

‘은지은비맘’이란 이름으로 올라온 동영상은 청소용역 직원들을 챙겨주는 모습에 감동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걸 지켜보는 임원들까지 그렇게 끝날 수 있겠나.

한 번은 봐줄 수 있다고 치자.

그런데 같은 일이 두 번 생긴다면?

단칼에 임원 전체를 날리는 천중명 신임회장이 그 꼴을 두 번이나 참고 지켜본다고?

동영상을 본 임원들이 뒤늦게 혹시 놓친 것은 없는지를 찾느라 부산스러웠다.

**

천호득은 이어셋을 귀에 건 채 재미있다는 얼굴로 상대방의 말을 듣고 있었다.

“흐헤헤헤헤헤! 그거 내가 말해줬지! 내가!”

- 동영상이 하나 더 올라왔습니다. 혹시 보셨습니까?

“임원들이 줄줄이 움직이는 거 말인가?”

- 지방 쪽 계열사는 현재 초비상입니다. 회장님에 관한 소문이 너무 과장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울 정도입니다.

“흐헤헤헤! 흐히헤헤헤헤헤!”

동영상을 떠올렸는지 천호득의 웃음은 통쾌했다.

- 조승필 회장의 일로 다들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면 이번 순시로 완전히 꺾여버린 느낌입니다. 게다가 지경전자와 리온의 투자 역시 부풀려져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그래야지. 이제는 거머쥘 때도 됐지.”

- 괜찮으시겠습니까?

“흥! 이제 어떻게 하겠나?”

의미심장한 질문과 대꾸가 건너간 다음이었다.

- 총수님. 며칠 전부터 이곳을 살피는 눈이 있습니다. 처음 지시대로 나서지는 않고 있습니다만, 혹시 짐작 가는 곳이 있으십니까?

“짐작 가는 인간은 있지. 당분간은 지금처럼 모른 척해.”

- 알겠습니다. 그럼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윤만석과 통화를 마친 천호득은 떨리는 손으로 이어셋을 내렸다.

“윤성일이라고 조만간 쪽박을 찰 인간이 있기는 하지.”

그런 뒤에 천호득은 차가운 웃음을 담은 얼굴로 혼잣말을 뱉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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