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
197. 나는 그런 지경을 원합니다 (1)
평창동을 나선 천중명은 점심시간 이후에 도착해 기다리던 곽대출과 함께 서초동으로 향했다.
운전기사가 있는 차 안에서 박승양과 통화하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서 천중명은 문자를 이용했다.
[서초동 지경화재보험으로 움직이는 길입니다. 통화는 어렵고, 저녁에 뵙지요.]
[회장님. 대송 윤성일 회장이 확실히 천 회장님을 노리고 있습니다. 천상기 회장 쪽도 살펴본 게 틀림없습니다. 그쪽은 접근이 어렵다는 말을 했습니다.]
[계열사 방문 후에 뵙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제가 비밀스럽게 사용하는 사무실이 있습니다. 그곳 주소를 드릴 테니까 그곳에서 뵈면 되겠습니다.]
문자를 마친 천중명은 휴대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자료는?”
“여기 있습니다.”
옆자리에 있던 곽대출이 준비했던 자료를 건네주었다.
사실 금융회사에서는 직원들 간에 문제가 생길 여지가 없었다. 있다면 대개 그놈의 회식과 술이 항상 문제였다.
지이이잉.
서류를 살피던 천중명의 휴대 전화기가 짧게 울었다.
박승양이 보내준 주소였다.
문자를 확인한 천중명은 다시 서류에 시선을 주었다.
어둠은 영영 사라진 건가?
그 기계를 분해하면서 보인 핏빛 어둠을 끝으로?
후련하기는 한데, 뭐라도 중요한 장면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
지경화재보험과 생명보험, 카드사는 모두 서초동의 사옥에 입주해 있었다.
그 셋을 이끄는 대장급은 지경화재보험이었다.
서초동 사옥은 업무 시작과 동시에 청소와 주변 정리로 분주했다. 브리핑 자료를 만든 발표자는 새벽같이 출근해서 발표 연습만 세 번을 넘게 했다.
“오늘 순시에서 문제 생기는 부서는 각오해.”
지시가 내려올 때마다 사원들은 복장과 유니폼을 살폈고, 혹시라도 사원증을 깜박 잊고 움직였다가는 바로 불호령을 맞았다.
실시간 내비게이션과 인터넷은행을 시행한 첫날이다.
바쁜 일정을 소화하기에도 빠듯한 신임회장이 시간을 빼서 평창동에 들렀다는 말은 천호득에게 무언가 조언을 구할 일이 있다는 의미였다.
그게 만약 계열사 순시에 필요한 조언을 얻기 위해서라면?
소문은 무섭다.
과거 천호득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는다는 신임회장이었고,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임원진 전체 해임이었다.
반항하면 계열사 회장을 포함해 임원 전체를 싹 날려버린다. 그러고는 보란 듯이 기용도나 신상훈 같은 임원을 끌어올린다.
직원들 사이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신임회장이 임원들에겐 저승사자 같은 느낌이었다.
딩동댕동.
[우리 그룹 천중명 회장님께서 10분 뒤에 도착하십니다. 환영할 지경 가족 여러분은 로비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방송이 들리기 무섭게 장진해 화재보험 회장은 재킷과 넥타이를 매만졌다.
이곳에서 해임된다고 당장 밥을 굶거나 갈 곳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해임된 임원을 기다렸다는 듯 받아주는 곳은 없고, 지경만큼 대우해줄 기업은 더더욱 없었다.
로열패밀리에게 버려진 임원을 쉬 받아주는 다른 재벌이 없다는 현실도 장진해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내려가지.”
“예, 회장님.”
장진해는 회장 둘, 사장과 부사장 열을 이끌고 현관으로 향했다. 로비는 이미 유니폼을 입은 여직원들과 그 외의 직원들로 가득했다.
‘그리 좋을까?’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찍을 준비를 마친 직원들을 보며 장진해는 아랫입술을 내밀었다.
한순간이었다.
개망나니라는 소문이 돌던 신임회장이 지금은 임원들에게 저승사자가 된 것이 말이다.
승용차 두 대가 서초동 사옥으로 들어와 현관 앞에 멈췄다.
재킷을 여민 장진해가 급하게 앞으로 나가는 사이 앞선 직원이 문을 열었다. 몸을 틀어 뒷좌석에서 내리는 천중명을 본 장진해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이마를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사람이라더니 눈매 진짜 매섭다.
과거의 천호득 보다 더.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지경화재보험 장진해입니다.”
“반갑습니다.”
천중명이 내민 손을 잡는 장진해의 상체가 또다시 앞으로 숙었다.
의도한 게 아니라 저절로 숙어졌다.
“브리핑실로 모시겠습니다.”
“그러시죠.”
안을 손으로 가리킨 장진해가 천중명의 옆에서 걸었다.
“꺄야! 회장님! 환영합니다!”
“회장님! 멋있으세요!”
그래. 누가 뭐래도 이렇게 환영해주면 좋겠지.
장진해가 흐뭇한 심정으로 로비를 지날 때였다.
“저쪽을 잠시 보고 올라가죠. 곽 이사! 내가 말한 곳 확인해 봐!”
‘아니, 이게 무슨…?’
장진해의 시선을 받은 사장단도 내막을 모르는 눈치였다.
인상 사납게 생긴 곽대출이 천중명의 지시로 엘리베이터 앞을 빠르게 지났다.
그리고 천중명은 그 뒤를 따른다.
장진해와 사장단이 줄줄이 움직였고, 궁금한 직원들이 로비 저쪽을 돌아서 천중명이 향하는 방향으로 우르르 움직였다.
‘저기는 뭐 하는 곳이야?’
로비의 벽 중간에 남자와 여자 화장실로 들어가는 통로가 있었는데 곽대출은 그 옆의 회색 문을 열고 있었다.
천중명이 지켜보는 앞이었다.
문이 열리자 안에서 쪼그리고 있던 청소 용역 직원 다섯 명이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예순이 훨씬 넘은 노인 다섯이 송구해서 어쩔 줄 모르는 태도로 죄지은 사람처럼 구석에 몰렸다.
안은 배관 파이프가 머리 위를 지나고, 화장실 청소에 쓰이는 비품이 가득했다. 그리고 바닥에 늘어져 있던 야외놀이용 깔판을 노인 한 명이 급하게 거둬들이고 있었다.
그 앞으로 움직인 천중명은 안으로 상체를 집어넣은 채 구석구석 둘러보기까지 했다.
“여기서 밥도 해 드세요?”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야외용 가스레인지와 코펠, 하얀 플라스틱 김치통, 봉지 커피, 커다란 생수병 앞에서 용역 직원들이 천중명을 향해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천중명이 꾸짖는다고 생각한 눈치였다.
“다섯 분만 계세요?”
“예?”
“여기에서 일하는 분들이 몇 분인지 궁금해서요.”
“다섯이 돌아가면서 쉬고 청소하고 합니다. 절대 힘들지 않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천중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아직 이런 곳에서 힘겨워하는 이들이 있었다. 계약직, 임시직을 정직원으로 돌리라고 지시했는데 이들은 그 안에 포함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천중명의 시선에 시커멓게 변한 용역 직원의 수면 양말이 들어왔다. 건물 안쪽의 공간이 시원할 수도 있었는데 이들에게는 춥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다섯 분이라고 하셨죠? 급여는 얼마나 받으세요?”
“예? 예. 저희는 소속 회사에서 줍니다.”
어렵게 시선을 들었던 노인네가 답을 기다리는 천중명을 보고는 옆 직원의 손을 툭 쳤다.
“103만 원 받습니다.”
장진해와 사장단, 임원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지켜보았고, 그 주변에서 환영을 위해 몰려나온 직원들이 웅성대고 있었다.
“건물을 깨끗하게 유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섯 명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황송하다는 태도로 천중명을 향해 또 고개를 숙였다.
이런 거였구나.
천호득이 지시해도 그때만 잠시 바뀌었다가 또 이렇게 돌아오는 거구나.
“곽 이사. 여기 다섯 분 신원 확인해.”
“예, 회장님.”
천중명은 매섭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분명 정직원 전환을 지시했고, 명예회장께서도 과거에 직접 개선하라고 지시했던 이 열악한 환경이 아직 이대로 있는 이유가 있습니까?”
“죄송합니다, 회장님. 바로잡겠습니다.”
장진해가 급하게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며 천중명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지금 움직이면 이대로 서초동 본사 건물을 나서게 될 것 같아서 그랬다.
권력은 무섭다.
“당신들 전부 해임이야!”라고 고함지른 뒤에 본사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이 천중명을 자꾸만 간질였다.
“장진해 회장님. 진심으로 우리 지경의 직원을 가족으로 여길 각오가 돼 있습니까?”
뜬금없고 유치한 질문이었다.
“우리 지경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 저 가족들이 쉬는 시간이라도, 업무가 끝나서 집에 갈 시간만이라도 저런 열악한 환경에서, 그리고 회식이라는 불편하고 강압적인 자리에 참석하지 않도록 배려할 각오가 있느냐고 묻는 겁니다.”
“반드시 바로 잡겠습니다.”
장진해는 반항하는 기색 하나 없이 고개를 숙였다.
“직원분들도 들으세요! 정직원이라는 게 역할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 놓인 동료를 모른 척한다면 여러분도 언제 다시 계약직, 임시직이 될지 모릅니다!”
그 넓은 로비에 물결처럼 퍼진 천중명의 말이 벽을 타고 다시 돌아왔다.
“지경의 가치는 우리 모두가 만들고 지켜내는 겁니다! 행복한 직원이 고객에게 최선을 다하는 기업! 나는 그런 지경을 원합니다!”
로비에서 시간을 더 끌기는 어려웠다.
보험사와 카드사가 함께 입주한 건물이다 보니 고객들로 보이는 이들이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올라가죠.”
천중명이 엘리베이터로 향할 때였다.
짝짝짝.
몇 명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고,
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 때쯤에는 요란한 박수 소리가 로비를 가득 메웠다.
“오늘 모습은 죄송합니다, 회장님.”
장진해의 속을 읽지는 못했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전해주는 사과만큼은 진심으로 들렸다.
‘잘 참았다, 천중명.’
돌아가지 않은 것이 얼마나 잘한 일인지 모른다.
회의실로 들어간 장진해는 생명보험과 카드사의 회장들을 먼저 소개했고, 이어서 화재보험의 임원들을 한 명씩 인사시켰다.
다음은 생명보험, 그리고 카드사로 이어져서 인사하는 데만 대략 15분이 훌쩍 흘렀다.
“벤처사업부를 새로 맡게 된 곽대출 본부장입니다.”
마지막으로 카드사 회장의 옆에 앉은 곽대출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 숙여 인사했다.
**
보고를 들은 윤성일은 노트북을 켰다가 “허어!”하는 탄식을 뱉어냈다.
[누구도 못한 일을 우리 회장님이 하려나 봅니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제목의 글 아래로 로비에서 임원과 직원들을 나무라는 천중명의 모습이 포털사이트에 동영상으로 올라와 있었다.
작성자는 ‘낸시’라고 되어있었는데 틀림없이 지경보험사의 직원임이 틀림없었다.
“외국인도 아니고! 낸시는 또 뭐야.”
애써 무시했지만, 윤성일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댓글들을 읽던 그는 아예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유치한 동영상에는 대개 ‘구질구질하다’거나 ‘닭살이 돋는다’라고 써져야 하는데 오히려 칭찬 일색이었다.
윤성일도 임원들과 직원들 쭉 세워놓은 상태에서 이런 쇼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차마 낯간지럽고 부끄러워서 안 하는 거지.
“에이!”
동영상을 꺼버린 윤성일은 골프장에서의 대화를 떠올렸다.
승냥이와 다를 바 없는 그 인간도 분명 천상기를 언급했다.
이참에 천중명을 넘어트리고 지경을 먹어?
천상기를 손에 쥐는 거야 조카딸 하나 던져주면 그만이고.
그와 동시에 윤성일의 가슴에서 피어난 욕심이 그의 눈을 붉게 물들였다.
어차피 밟아주려던 천중명이니 정말 이 기회에 그룹을 뺏어서 세상 무서운 것을 알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박승양에게 당하지 않을 조건으로 정보를 얻어오는 것인데.
‘천상기만 만날 수 있다면…. 그래서 그를 우리 쪽으로 데려올 수만 있다면….’
윤성일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좀 위험하다.
윤성일이 천상기를 데려온 이유를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박승양을 믿느냐고?
사업 말아먹고 쪽박 차고 싶지 않은 다음에야 그럴 리가 있겠나. 신뢰나 믿음 없이 태어난 인간을 한 명 꼽으라면 윤성일은 숨도 안 쉬고 박승양을 꼽는다.
먹을 것이 떨어지면 언제고 그는 천중명의 뒤통수에 빨대를 꽂아 행여나 남은 것이 없는지 살필 인간이었다.
당연하게 오늘 골프 모임에서 나눈 이야기도 천중명에게 들어갈 게 분명한데 상관없다.
천상기를 끌어들이자는 제안은 박승양이 먼저 했고, 어차피 관계 다 틀어져서 이제는 누가 밟느냐만 남았으니까.
“하아! 어차피 이렇게 된 거라 이거지?”
두 주먹을 꼭 쥐었던 윤성일은 인터폰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전충호 실장을 들어오라고 해.”
[네, 회장님.]
지시를 내린 윤성일은 오른손을 명치에 올렸다.
지경을 잡아먹을 결심을 떠올리는 순간에 천호득의 섬뜩한 표정이 생각났고, 그러자 느닷없이 속이 쓰렸다.
“어디 두고 봅시다. 내가 전에 당했던 수모, 세계에게 부었던 망신을 그대로 돌려줄 테니까.”
모든 것을 빼앗긴 천호득의 모습을 떠올리며 윤성일이 비릿하게 웃을 때였다.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