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196화 (196/315)

# 196

196. 누군지 안됐네 (3)

일찍 시작해 한낮을 피한 골프는 즐거웠다.

무엇보다 박승양이 돈을 따서 더 즐거울 수 있었다.

윤성일의 지시 덕분에 여유롭게 즐긴 황제 골프의 마지막 홀을 돌고 나왔을 때, 박승양은 깔끔하게 7천9백만 원을 챙겼다.

사이 좋게 탈의실을 거쳐 샤워실로 들어선 두 사람은 약속한 것처럼 사우나실 안에 나란히 앉았다.

“박 회장님의 진심을 내가 어떻게 믿지요?”

수건으로 추한 부분을 가린 윤성일의 질문이었다.

“지경을 먹어버리세요.”

윤성일의 놀란 표정 앞에서 박승양은 땀이 흐르는 팔뚝을 문질렀다.

“천호득 명예회장은 끝났습니다. 천중명 회장을 찍어내세요. 그리고 천상기를 앞에 세우시면 됩니다. 그 모자란 위인의 욕심은 들으셨을 게 아닙니까.”

“흐음. 그쪽에 접근이 어렵던데요?”

“내가 그 정보를 곱게 접어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물론 천중명 회장의 아픈 부분이지요. 아시나? 아픈 거? 쿡 찌르면 아! 하는 그런 거? 천상기와의 연결도 내가 하지요.”

윤성일의 표정을 들여다본 박승양은 계속 말을 이었다.

“남부증권을 내가 꽉 쥐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파생상품을 거래한 여직원도 내 말을 따릅니다. 왜냐? 지금 내 돈, 내 고래 심줄 같은 돈 1조 원을 거래하니까요. 푸하하하.”

“그러니까 박승양 회장을 어떻게 믿느냐 이 말입니다.”

“싫으시면 관두면 되는 거지요.”

박승양은 손해 볼 것이 없다는 태도였다.

“천중명 회장은 내게 3조 원이 넘는 거금을 턱턱 맡기던데 아무래도 우리 윤성일 회장님은 배포가 부족하신 것 같네요. 그러니 싸움에서 밀리지.”

빈정대는 말을 툭 던진 박승양이 사우나실을 나섰다.

자존심이 상한 윤성일이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고, 그 뒤로 두 사람은 옷을 갈아입도록 한 마디 대화도 주고받지 않았다.

탈의실을 나선 다음이었다.

이대로 차를 타면 끝인 그 직전에 박승양이 고개를 돌렸다.

“내가 대송의 회장이었다면 이런 기회 안 놓칩니다. 싸움이 벌어졌고, 따님이 얼굴을 얻어맞았는데 지경을 잡아먹기 이보다 좋은 명분이 어디 있습니까?”

눈을 똑바로 들여다본 상태였다.

“나는 대송 같은 그룹이 없습니다. 지경을 먹겠다고 천중명 회장을 밀쳐내 봐야 결국엔 천상기에게 밀려나겠지요. 왜? 조직이 없으니까. 하지만 우리 윤 회장은 다르시잖습니까.”

말을 한 박승양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클럽 하우스의 현관으로 움직였다.

**

9시 15분에 집무실에 들어선 송문철은 대송자동차 그룹의 네 개 회사에 관한 정보를 꼼꼼하게 준비했다.

“회장님. 간단하게 우리는 공격할 곳이 네 곳이고, 저쪽은 막아야 하는 곳이 네 곳인 싸움입니다.”

“방어하는 쪽이 훨씬 고통스럽겠군요.”

“그렇습니다.”

송문철은 천중명의 앞에 놓아준 보고서의 페이지를 넘겼다.

“여기 보시면 대송자동차 그룹의 방어전략입니다. 임원 선임의 권한을 특정 주식 보유자에게 지정해 두었습니다. 그 외에 3자배정 유상증자를 실시할 권한도 가지고 있습니다.”

커다란 글씨로 된 페이지를 송문철이 바로 넘겼다.

“그렇더라도 우리가 5퍼센트 이상의 주식을 확보하면 이사 선임을 요구할 근거가 있습니다.”

“소송으로 가게 된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지 않나요?”

“지분의 3퍼센트 이상을 보유하면 회계자료를 열람할 권한이 생깁니다.”

송문철이 말하는 바를 단숨에 이해한 천중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송자동차그룹이 회계를 엉망으로 만들었을 리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5퍼센트 이상의 지분을 확보한 지경이 회계집행에 태클을 걸려고 하면 그것 또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주식 매입은요?”

“우리가 시장에서 거둬들이는 데 사흘이 필요합니다. 가격 변동과 주 매입처가 알려지게 될 테니 첫날 의심할 테고, 둘째 날이면 확신하게 될 겁니다.”

“그건 좀 곤란한데? 이걸 분산해서 매입하면 어떻습니까?”

“적대적 인수합병은 금감원에 신고하지 않았을 경우, 처벌 대상이 됩니다. 우리는 5퍼센트 대주주 신고를 마친 뒤에 경영참여로 명분을 내걸면 됩니다. 마침 리온자동차를 인수한 뒤라서 시기상으로는 적당합니다.”

천중명은 보고서를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경영참여라는 명분으로 서너 곳이 동시에 주식을 매입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기는 합니다. 물론 추후에 금융감독원에 해명 자료를 제출해야 합니다.”

그런 천중명의 곁에서 송문철이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필요한 자금은요?”

“처음부터 한 곳을 정해놓고 매입할 생각입니다. 가능하다면 계좌를 분산하는 것이 좋습니다. 다음으로 네 개 회사를 돌아가면서 공격할 생각입니다. 대송이 정신없이 방어할 때, 우리는 목표했던 하나 회사에 화력을 집중합니다.”

송문철은 막힘없이 답을 꺼내놓았다.

“필요한 자금은 20조 원으로 예상했습니다.”

“지시를 내리면 준비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요?”

“이 매수는 비밀유지가 사업의 절반입니다. 팀을 짜서 호텔에 숙박시키겠습니다. 대략 일주일 정도 외부와 연락을 차단하고 회장님 지시만 받도록 해야 합니다. 그 준비에 이틀이 걸립니다.”

천중명이 앞에 놓인 커피를 마시는 동안, 송문철은 물을 단숨에 비워냈다. 목이 탔던 모양이었다.

“비밀유지하고, 팀을 짜세요.”

“예, 회장님.”

지시를 받은 송문철이 고개를 깊숙하게 숙였다.

그런 뒤에 상체를 드는 그의 얼굴이 흥분으로 벌겋게 변해 있었다.

**

천호득에게 전화를 넣은 천중명은 11시 30분쯤 본사를 나서 평창동으로 향했다. 곽대출에게는 점심시간 이후에 평창동으로 오라는 통화도 마쳤다.

“아버지. 저 왔습니다.”

천중명이 저택에 들어섰을 때, 장만섭과 송달순이 마당의 테이블에 도시락을 준비하고 있었다.

“앉아.”

“건강은 어떠세요?”

“집에 밥이 허술한 것도 아닌데 이게 뭐하는 거야?”

“가끔 회사에서 먹을 때마다 아버지 생각이 나서요. 언제 한번 드시면 좋아하실 텐데 싶었어요.”

투박한 말을 던지고는 있었지만, 천호득은 내심 반가운 눈치였다. 심술로 가린 그의 눈매 끝에 옅은 미소가 매달린 것이 그랬다.

천중명은 장만섭과 송달순에게 고개를 돌렸다.

“뭐해? 얼른 들어가서 먹어.”

“예, 회장님. 맛있게 드십시오. 잘 먹겠습니다.”

천중명의 지시를 받은 장만섭과 송달순이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지. 드세요.”

“그래. 나중에 엄마 것도 하나 새로 주문해줘.”

“예. 외출하신 줄 몰라서 그랬으니까 제가 통화해서 따로 주문할게요.”

대화의 끝에서 천호득이 포크를 들었다.

그에게 이 도시락이 새로울 게 있겠나.

그런데도 천호득은 소풍 나온 아이처럼 웃는 얼굴로 음식을 입으로 가져갔다.

“아버지. 오늘 실시간 내비게이션 배포했고, 인터넷은행이 영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런 게 돈이 돼?”

“수익 모델이 확실해서 그 두 사업은 염려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답을 들은 천호득이 떨리는 손으로 다시 포크를 움직였다.

나뭇잎에 부서져 떨어지는 햇살이 그의 얼굴에 깔린 옅은 행복을 흔들리며 보여주었다.

“계열사 순시는?”

“어제 두 곳 돌았습니다. 물산과 엔지니어링이었는데 딱히 문제 될 것 없었습니다.”

“임원들이 공손하게 굴어?”

“예.”

천호득은 며칠 사이에 또 말랐다.

“건강은 좀 어떠세요?”

“귀찮아. 운동해야 한다는 말에 덩치 큰 놈이 사람을 어찌나 번거롭게 하는지.”

그렇게 편안한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마친 천중명은 그 테이블에서 천호득과 함께 차를 앞에 두었다.

“오늘은 어딜 돌아?”

“화재보험과 생명보험, 카드사를 돌아볼 생각입니다.”

“화재보험에 가면 1층 엘리베이터 지나서 뒤편 작은 로비가 있어. 그 구석에 화장실 비품 놓는 곳이 있는데 그곳을 한번 돌아봐.”

하여간 천호득을 종잡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전에 그곳에서 청소 용역들이 밥 해먹는 걸 알고 내가 몹시 나무랐거든. 아직도 그러고 있으면 담당 임원 놈 모가지를 날려버려.”

“예?”

“그런 거 바로 잡는 일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어제 물산과 엔지니어링 돌아보기 전에도 찾아뵐 것 그랬어요.”

“흐헤헤.”

천중명의 놀란 반응이 흡족한 사람처럼 천호득이 짧게 웃었다.

고민했었다.

대송의 일을 지금 말할까, 아니면 좀 더 확실해진 뒤에 의논할까를 말이다.

“아버지, 의논 드릴 일이 있습니다.”

“의논?”

그래. 일을 다 계획한 뒤에 통보처럼 전하는 것보다야 이렇게 시작하기 전에 허락을 구하는 모양새가 훨씬 마음 편한 일이지.

“대송을 인수할까 합니다. 정확하게는 대송자동차그룹을 인수할 생각인데 결국은 그룹 전체가 넘어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대송이 그걸 매각하겠대?”

“적대적 인수를 할 생각입니다.”

눈 끝에 매달린 주름을 잔뜩 찌푸린 채 천호득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니까 회장이 말한 인수라는 게 적대적으로 뺏어오겠다는 뜻이야?”

“예, 아버지.”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어지간해서는 놀라는 법이 없는 천호득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눈치였다.

“재벌이라는 게 지분율이나 지배구조가 취약하기는 하지. 그렇다고 해도.”

말의 중간에서 천호득은 고개를 모로 비틀었다.

“윤성일 일가에 법조계, 정치계, 행정부의 인맥들이 줄줄이 혼사로 묶여있어. 그 인맥을 다 털어보면 아마 우리와도 먼 친척쯤 될 거다.”

아무래도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아직 결정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대송과 어차피 불편한 관계이고, 그쪽에서 아버지까지 파고들 정도로 벼르고 있어서 이참에 아예 인수하면 어떨까 합니다.”

“나를? 윤성일이?”

“예, 아버지.”

“흥. 그깟 놈이 나를 노려봤자지. 권력의 힘을 이용하려고 해도 서로 엉켜있어서 저나 나나 그쪽으로는 어려운 일이고.”

천호득은 적대적 인수보다 윤성일이 노린다는 말이 더 괘씸한 눈치였다.

“감정적으로 하기에는 무리한 일이야. 인수 후에도 정부의 미움을 사게 될 여지가 많아. 게다가 실패하면 두고두고 망신이 될 텐데. 회장이 감정이 상했다고 대송을 노리지는 않았을 테고, 진짜 이유가 뭐야? 윤세계인가 하는 아이를 둘째로 앉히고 싶어?”

이렇게 파고드는 천호득의 눈은 무섭다.

확신에 차서 던지는 질문과 음성, 그리고 저 눈빛을 마주하고 있으면 혹시 내막을 다 알고 있나 싶을 정도였다.

“나머지 하나는 확실해지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대송이 우리를 벼르는 거 하나, 아직 확실하지 않은 이유 하나, 그렇게 두 가지 때문에 대송을 인수하겠다? 그것도 적대적으로?”

“지금까지는 그렇습니다.”

익히 짐작했던 반응이어서 오히려 속이 편했다.

떨리는 손으로 차를 마신 천호득은 지금껏 보지 못했을 정도로 차가운 눈빛이었다.

“회장이 모두 쥐었으니 회장이 알아서 할 일이지. 그렇지만 내게 의견을 묻는다면 이건 아니야. 그게 뭐야? 대송이 우리를 벼르기 때문에 인수를 한다니.”

“아버지께서 안 된다고 하신다면 이 계획은 뒤로 미루겠습니다.”

“내가 늙었다고 봐주는 거야?”

“그런 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연륜이 있으시니까 제 짧은 생각을 꾸짖으시는 거로 여겼습니다.”

“차라리 대한민국 자동차 시장을 한 손에 넣겠다거나, 그 뭐야, 대송을 먹어서 재계 서열 1위를 해보겠다든가, 그런 이유여야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싸움에 적대적 인수가 나와?”

이건 또 뭐지?

차가운 천호득의 눈빛 저 깊은 곳에서 묘한 흥분이 일렁이고 있었다.

“대송자동차그룹이 순환출자 형식이지?”

“예, 아버지.”

“야비해질 자신 있어?”

천호득이 냉정하게 묻고 있었다.

“깨끗하게 하는 적대적 인수가 있을 것 같아? 구경하는 사람들은 멋있어 보일지 몰라도, 적대적 인수합병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야 하는데.”

“윤세계의 따귀를 때렸을 때 각오는 있었습니다. 이대로 두면 저는 물론이고, 아버지와 선영 씨를 노립니다. 멍청하게 당하고 싶지 않습니다.”

천호득의 입 끝이 살짝 늘어졌다.

“하나만 잘라 먹어. 경영권 필요 없어. 어차피 임총 가는 데 시간이 걸려. 송문철이 그쪽으로 나쁘지 않아.”

어쩌면 이러지?

평창동 저택에 앉은 천호득은 단숨에 송문철과 같은 의견을 내놓고 있었다.

“지경증권 회장 말씀이시죠?”

“그럼! 송문철이 개똥도 아니고 사방에 널렸을까 봐.”

시선을 마주한 상태에서 나온 황당한 표현이어서 천중명은 그만 픽 웃고 말았다.

“살다가 대송자동차를 인수하겠다는 회장을 볼 줄은 몰랐는데 그게 내 아들일 거란 생각은 정말 못했지.”

천중명은 멋쩍게 있었다.

“윤성일 딸내미의 따귀를 때릴 것도.”

말을 뱉어낸 천호득이 천중명을 흉내 내듯 짧게 웃었다.

“돈을 들고 싸울 때 가장 무서운 게 뭔지 알아?”

그런 뒤에 그는 또다시 종잡기 어려운 말을 꺼내 들었다.

“내가 가진 게 부족하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거야. 저 인간이 나보다 더 만들면 어쩌지? 그게 가장 무섭고, 그럴 때 흔들려. 놓칠 수 없는 것을 두고 싸울 때 특히 더 그래.”

아직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 알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곧 알게 될 이야기처럼 들렸다.

“대송의 부채를 흔들어. 주식을 매입하면서 부채를 상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내. 거기에서 승부가 갈릴 거야.”

천호득의 말을 들은 직후에 천중명의 눈빛이 반짝하고 빛났다.

대송의 부채비율이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연결하는 방법은 아직 생각 못 했었다.

놀라고 감탄하는 천중명을 보며 천호득은 “흥.”하는 웃음을 테이블에 툭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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