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
195. 누군지 안됐네 (2)
지경엔지니어링 본사에 도착한 천중명은 지경물산과 다를 바 없는 직원들의 환호 속에서 회의실로 이동했다.
임원들의 인사를 받은 뒤에 이어지는 브리핑도 같았다.
그 뒤에 천중명은 임원들과 10분쯤 대화를 나누었다.
얼추 자리를 마칠 타이밍이었다.
“일어나기 전에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천중명은 마지막으로 마이크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경직된 기업문화와 관례라는 핑계를 버리기 바랍니다. 성추행, 폭언, 폭행 등의 행위가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임원들이 그런 범죄를 계속 눈 감을 경우.”
천중명은 잠시 말을 끊고서 임원들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관례에 물들지 않은 새로운 임원이 임명되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이전에 이런 경고를 할 때면 간혹 반항하거나 비웃는 임원들이 있었던 반면에, 지금은 다들 천중명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성동일 회장님.”
“예, 회장님.”
“기업문화를 한순간에 바꾸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렇더라도 성추행이나 폭행과 같은 행위를 덮거나 은폐하지 마세요. 그런 행동은 실수가 아니라 범죄입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답을 들은 천중명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성동일과 임원들이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현관에 도착한 다음, 천중명은 곽대출과 함께 대기하던 승용차를 타고 출발했다.
임원들과 함께 깊숙하게 고개를 숙였던 성동일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운이 좋았다. 진짜 좋았다.’
로비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에 오른 성동일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만약 오늘 천중명이 이곳 지경엔지니어링을 먼저 방문했더라면, 그리고 저런 양반에게 어설프게 대들었더라면?
성동일도 분명하게 들었다.
신임회장이 사실은 개망나니여서 적당히 무시해서 기를 꺾어야 한다는 헛소리 말이다. 어떤 미친 인간이 지껄인 말인지는 모르겠는데 앞에 있다면 입을 주먹으로 때려주고 남았다.
‘총수님보다 더한 분이네.’
성동일은 회의장에서 보았던 천중명의 날카로운 눈빛과 그의 등 뒤에서 피어나던 묵직한 카리스마를 떠올리며 오늘 방문을 무사히 지난 것에 감사했다.
우선 기업문화를 바꾸는 모습을 보이는 게 급했다.
“오늘부터 한 달간 우리 엔지니어링은 회식에서 원칙적으로 술을 금해. 그리고 폭행과 성추행 사건이 발생하면 이유를 따지지 말고 무조건 파면을 기준으로 처리하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성동일의 엄중한 지시를 사장이 얼른 고개를 숙여 받았다.
경직된 기업문화를 바꾸라며?
그런데 천중명의 지시에 의견 한 번 못 낸 채 따르는 것도 사실은 경직된 기업문화에서 나온 행동 아냐?
그룹회장과 임원들 사이에는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다.
**
예상보다 일정을 일찍 마친 천중명은 모처럼 잠실의 한강공원으로 향했다.
비서실 직원들에게 휴식을 지시한 곽대출이 양손에 시원한 음료수를 들고 천중명이 앉은 벤치로 다가왔다.
“어떻게 되신 거야?”
“뭐가?”
“임원들을 눈빛으로 그냥 찍어누르시던데?”
“내가?”
“아니면 힘없는 내가 그랬겠어, 회장님?”
농담을 던진 곽대출이 혹시 들은 사람은 없는지 얼른 주변을 살폈다.
“따로 연습한 것도 아닐 텐데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음성도 달라지셨어. 내가 사장단이었으면 숨이 꽉 막혔을 것 같더라고, 회장님.”
“담배나 받아.”
천중명이 내민 담배를 곽대출이 공손하게 받았다.
아무래도 비서실 직원들의 시선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후우.”
둘이서 불을 붙이고 사이좋게 한강을 향해 앉았다.
“계열사를 도는 것은 잘하신 것 같네.”
“일을 벌이기 전에 집안 단속을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벤처사업부를 신설하는 것에 딴소리 못 하게 하고도 싶었고.”
“감사합니다, 회장님.”
“지랄.”
천중명이 시원한 대꾸를 날렸을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주머니 속에서 휴대 전화기가 몸을 떨었다.
“여보세요?”
- 회장님 박승양입니다.
“네.”
- 대송의 윤성일 회장이 내일 오전에 골프를 치자고 해서 약속을 잡았습니다. 오전 8시 티-오프고, 클럽하우스에서 7시에 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요. 냄새가 납니다, 회장님.
“그래요?”
- 일단 나가서 적당하게 상대한 뒤에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틀림없이 돈으로 나를 매수하려고 할 겁니다. 제가 또 의리의 화신 아닙니까? 의리? 아시지요? 이 박승양의 의리.
천중명은 우선 가볍게 웃어주었다.
“박 회장님.”
- 예.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윤성일 회장의 신임을 받으세요. 어떤 말이 들리든 박 회장님을 믿을 테니까 내 흉을 보아도 좋고, 적당하게 정보를 넘겨줘도 좋습니다. 그 뒤에 부탁할 게 있어서요.”
날름 답이 건너올 줄 알았는데 묘한 침묵이 먼저 넘어왔다.
“박 회장님?”
- 회장님! 나는 회장님의 사람입니다. 염려마시고 끝나는 대로 전화 올리겠습니다.
참 종잡기 어려운 인물이었는데 여러모로 쓰임이 많은 사람이기도 했다.
“박승양 회장이다.”
해가 기울어지는 한강을 배경으로 천중명은 통화 내용을 곽대출에게 들려주었다.
“윤성일이 그렇게 모자랐나? 그날 호텔에서의 일만 봐도 당연히 박 회장이 우리 쪽 사람인 줄 알아야지.”
“돈만 주면 다 부릴 거라고 생각해서 그렇겠지. 박승양 회장이 천상기와 강승애를 얼마나 야비하게 상대했는지 생각해 봐. 그걸 알면 나라도 윤성일처럼 생각했을 것 같다.”
설명을 들은 곽대출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가 만에 하나 박승양이 진짜 윤성일에게 붙으면?”
곽대출의 질문에 천중명은 픽 웃었다.
“그러면 도깨비와 척을 지는 거지, 뭐.”
“에이!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겠네.”
엄지를 꺼덕거린 곽대출이 음료수를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한강 진짜 오랜만이다.”
“그러게, 회장님.”
이제 움직일 시간이었다.
주황빛으로 변한 늦은 햇살이 천중명의 얼굴과 재킷을 부드럽게 덮고서 오늘 하루의 수고를 다독여주고 있었다.
‘우리 잘하고 있는 거겠지, 대출아?’
천중명은 질문을 삼킨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벤처사업부를 맡아 달려야 할 곽대출에게 공연히 힘 빠지는 질문을 할 필요는 없었다.
**
맑은 날씨였다.
골프장 입구에 차가 멈춰 설 때마다 트렁크로 움직인 직원들이 골프 백을 꺼내느라 분주했다.
7시에 용인 CC에 도착한 박승양은 먼저 탈의실로 들어가 옷과 골프화를 착용했다. 그런 뒤에 그는 거만한 걸음으로 클럽하우스 안의 식당으로 향했다.
“윤 회장님이 예약하셨을 건데?”
“이쪽입니다, 회장님.”
상큼한 미소의 여직원이 병풍처럼 보이는 가림막 안쪽으로 박승양을 안내했다.
“어이구! 오랜만에 뵙습니다.”
박승양은 과장된 표정으로 테이블로 다가가 윤성일과 악수를 나눈 뒤에 함께 자리에 앉았다.
“식사는 어떤 거로 하시겠습니까?”
윤성일의 질문에 박승양은 테이블에 작은 가방을 올려놓았다.
“내가 요즘 당뇨 때문에 음식을 가립니다. 당뇨, 그게 사람 참 비겁하게 만듭니다.”
그러면서 그는 물, 보온병, 샌드위치를 주섬주섬 꺼냈다.
나는 오늘 내가 마실 물까지 싸왔다.
그러니 허세직에게 했던 것과 같은 엉뚱한 생각 하지 마라.
당뇨라고 핑계 대긴 했지만, 박승양이 보이는 바는 분명했다.
표정을 억지로 수습한 윤성일이 미국식 아침을 주문한 다음이었다.
“지난번 일은 송구하게 됐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지경에서 도움받은 게 많아서. 아시죠? 도움? 호텔에 도착하고서야 윤 회장님 일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걸렸으니 또 어쩌겠습니까?”
경박하게도 박승양은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만들어 가슴 앞에서 흔들어댔다.
“그렇지 않아도 그날 일로 영 찜찜하던 참인데 이렇게 불러주시니 확실히 그릇이 큰 분은 못 당하겠다 싶습니다.”
“허허허. 그러셨군요. 그나저나 우리 박 회장이 얼마나 도움을 받으셨길래 천 회장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셨을까요?”
박승양은 먼저 주변을 힐끔 돌아보았다.
“세 개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온 답을 윤성일은 바로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3조 원입니다.”
“그럼 남부증권에서 있었던 그 수익이 실제로는 천중명 회장의 돈이 맞았군요?”
윤성일이 결정적인 질문을 던진 순간이었다.
그가 주문한 미국식 조찬이 나와서 잠시 말이 잘렸다.
“이야! 회장님께서 주문하시니까 뭐가 달라도 다르네. 저거 봐, 저거. 계란 노른자 노란 거? 써니 사이드 업? 어? 햐!”
“드시겠습니까?”
“당뇨가 있어서요. 저는 이거로 하겠습니다. 얼른 드십시오, 회장님.”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 드는 윤성일 앞에서 박승양은 가져 온 샌드위치를 커다랗게 베어 물었다.
아까 잘린 대화에 집중해주면 좋으련만 박승양은 참 부산스러웠다. 느닷없이 냅킨으로 입을 닦는가 하면 탁자에 떨어진 샌드위치 내용물을 홀랑 주워 먹고 있었다.
“그래? 그게 전부입니까?”
“예?”
“3조 원 말고 더 없느냐는 겁니다.”
윤성일의 질문을 들은 박승양은 손에 남았던 샌드위치 조각을 단숨에 입에 욱여넣었다.
“워낙 큰 사업을 하셔서 그러신 모양인데 3조 원이라면 나는 내 영혼에 마누라를 덤으로 끼워 팝니다. 아시죠? 덤? 부록? 그런 거?”
“허허허. 그렇게 벌어서 뭐하시려고 그러십니까?”
박승양은 입에 남은 샌드위치를 질겅질겅 씹었다.
“정치하는 양반들은 누구나 대통령이 되는 꿈을 꿉니다. 나 같은 사채업자는 현찰을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가져보는 꿈을 꾸지요. 아쉬운 사람들이 애걸복걸 매달리는 모습을 볼 때의 쾌감을 아십니까?”
말을 마친 박승양이 광기 어린 눈을 들었다.
“회장님. 고민하실 게 없어요. 지난번에 당한 거 복수하고 싶으실 거 아닙니까? 천중명 회장의 숨통을 내가 손에 딱 쥐여 드리겠습니다.”
“허허허.”
“차명계좌 3조 원입니다. 내부자 거래에 관한 증인도 있지요. 남부증권에서는 사람이 여럿 죽어 나갔습니다. 중국의 폭력 조직입니다. 이거 엮으면 천 회장 끝날 것 같은데요?”
윤성일은 꼼짝도 않고 있었다.
“그건만 있습니까? 강승애, 천상기 회장까지. 후르륵! 천 회장 날아가는 거 한순간입니다.”
“정보가 비싸겠지요?”
“흐히히히히히!”
눈빛을 번들거리며 박승양은 참 듣기 거북한 웃음을 토해냈다.
“재계 서열 3위의 그룹 회장을 날리려면 좀 쓰셔야지요.”
그리고는 웃음을 자른 뒤에 사악한 표정으로 답을 건넸다.
**
출근한 천중명은 전화 메모와 일정을 확인하던 도중에 송문철의 이름을 확인했다.
어떻게 할까?
직접 연락할까, 아니면 일단 부속실을 통할까?
잠시 고민하던 천중명은 인터폰의 버튼을 눌렀다.
“지경증권 송문철 회장 연결해 줘.”
[네, 회장님.]
천중명이 나머지 전화 메모를 살피던 도중이었다.
[회장님. 지경증권 송문철 회장, 2번에 연결했습니다.]
천중명은 수화기를 든 뒤에 바로 2번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회장님. 송문철입니다. 지시하신 건에 관해 기본안이 나와서 보고드리려고 합니다.
“내용이 복잡한가요?”
-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대략 12페이지 정도의 자료가 있습니다.
“오전에 본사로 와줬으면 싶은데 시간이 어떻습니까?”
- 바로 출발할 수 있습니다.
“그럼 잠시 뒤에 보고 의논하지요.”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부속실에 연락해서 송문철의 방문을 알려주었다.
똑똑똑.
그 직후에 유진교가 두 가지 결재판을 들고 집무실에 들어섰다. 실시간 내비게이션 배포와 인터넷은행이 업무를 시작한 날이었다.
“은행업무야 아직 시작하지 않았을 테니 그렇고, 내비게이션 다운로드는 어떻습니까? CCTV 영상이 제대로 보이나요?”
“데이터에 과부하가 걸리는 지역이 있기는 합니다.”
포털에 접속해야 확인되던 도로 상황을 지경의 내비게이션은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천중명은 유진교가 가져온 보고서의 내용을 꼼꼼하게 살폈다.
회원이 내비게이션을 사용할 때마다 데이터가 축적된다.
지역 축제, 백화점, 쇼핑센터, 스포츠 센터, 영화관, 레스토랑, 이렇게 어떤 연령대의 누가 어디를 자주 가는지 데이터가 세분되면 그들에 맞는 광고가 가능해진다.
인터넷 쇼핑센터를 출범했을 때 고객에게 맞춤형 광고를 할 수 있는 데이터여서 가치로 따지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내비게이션 보고서를 덮은 천중명은 인터넷은행의 보고서를 펼쳤다.
“신용대출의 총액을 5조 원으로 정해두었고, 만 27세 미만의 고객 대출은 아직 막아두었습니다.”
“규정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대출을 계속 시행하세요. 기존의 은행은 너무 거만하고 방만했습니다.”
“예, 회장님.”
보고서를 끝까지 살핀 천중명이 상체를 들었을 때였다.
“대형 마트에서 대송의 직원들과 우리 직원들 간의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모양입니다.”
유진교가 특유의 저음으로 보고서에 없는 내용을 알려주었다.
“전자제품 쪽도 상황은 비슷합니다. 대송이 공격적이고, 적대적으로 나오고 있어서 자칫하다간 언론에 노출될 수준의 충돌이 있지 않을까 염려스럽습니다.”
“좀 지켜보죠.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으니까요.”
“예, 회장님.”
이번에도 유진교는 순순히 천중명의 뜻을 받아들었다.
“왜 그러십니까?”
“본부장님이 뭔가 조언을 안 해주시니까 어쩐지 서운할 정도인데요?”
유진교가 가볍게 웃었다.
“그렇다면 총수님을 한번 찾아뵈십시오. 계열사 순시 모습이 어떤지 몹시 궁금하신 모양이었습니다.”
“그런 거 번거로워하시지 않을까요?”
“은행과 내비게이션 소식까지 있어서 더 궁금하실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먼저 부르는 성격도 아니어서 지금 날카로우실 수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천중명은 궁금해할 천호득을 떠올렸다.
“저는 내려가 있겠습니다. 특별한 보고가 있으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러세요.”
유진교를 내려보낸 천중명은 메모에 시선을 내렸다.
대강 결론이 나는 대로 가장 먼저 천호득을 찾아가 볼 생각이었다.
도시락이 제법 먹을 만해서 핑계도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