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
194. 누군지 안됐네 (1)
찻잔을 내려놓은 천중명은 김경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김경준 회장이 보이는 성의와 노력을 믿겠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지켜보겠습니다. 지경물산과 함께 하는 직원들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기업을 만들어주리라 믿습니다.”
김경준의 오른편에 앉은 이중배가 귀를 쫑긋 세운 꼴로 집중하고 있었다.
“추가 조사 결과와 조치를 기다리겠습니다. 그 과정마저도 의구심이 든다면 다음번엔 불편한 얼굴로 보게 될 겁니다.”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숨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가까운 자리였다.
천중명의 눈에 담긴 진심과 열의를 김경준은 분명하게 보았다.
“회장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김경준은 강렬한 천중명의 눈빛에 끌려 생각하지 않았던 질문을 꺼냈다.
“언짢으시라고 드리는 질문은 아닙니다. 우선 그 점을 알아주십시오.”
“괜찮으니까 말씀해보세요.”
어쩌면 천중명의 모습에서 보이는 천호득의 강단과 카리스마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전직원을 정규화하셨습니다. 거기에 기업문화를 바꾸는 것은 경영상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기업의 가장 큰 미덕인 이익을 어느 수준까지 양보하실 생각입니까?”
그 외에도 철학이 있어서 이러는지, 아니면 젊은 혈기에 인기를 얻기 위해 설치는 것인지를 알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지도 않았던 질문을 던졌다.
“지금껏 우리는 울타리 안에서 성장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이제는 세계적인 기업들과 경쟁해서 당당하게 수주를 이뤄내는 실력을 쌓았습니다.”
김경준은 고개를 살짝 숙이는 것으로 천중명의 말을 받았다.
“100원을 투여했을 때 적정 마진이 30원이라면 그동안 우리는 애국심과 보호라는 테두리 안에서 60원, 70원의 이득을 얻었습니다. 언제까지 그 보호와 애국심이 남아 있을 것 같습니까?”
지금의 천중명이 김경준에게는 느닷없이 젊어진 천호득처럼 보였다.
“정당한 마진은 기업이 하는 선한 활동입니다. 그러나 폭리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더불어 우리가 설정한 마진에는 직원의 고용비용이 이미 산정돼 있습니다. 그걸 임시직과 계약직으로 돌려 더 많은 이득을 얻는 거지요.”
이 젊은 나이에 철학을 지닌 그룹 최고 경영자라니?
이 양반은 진짜배기구나.
김경준은 적당히 하루를 넘어가려던 것이 얼마나 위험한 생각이었는지를 깨달았고, 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음 세대에도 통할 제품, 기술, 그리고 올바른 기업문화, 이 세 가지를 만들지 못한다면 지경의 미래는 없습니다.”
“예, 회장님.”
김경준은 고개를 숙이며 천중명의 뜻을 받았다.
추가 조사를 어설프게 했다가는 지경물산 역시 전자와 다를 바 없는 꼴이 될 테고, 김경준은 조승필과 같이 슬픈 기록을 남긴 채 사라질 게 분명했다.
“기대해도 되겠습니까?”
“반드시 변화된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웃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 천중명이 손을 내밀었고, 황급히 일어난 임원들 앞에서 김경준이 공손한 태도로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천중명을 로비까지 따라간 김경준은 출발하는 승용차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고생하셨습니다, 회장님.”
저 앞을 달리는 승용차의 뒷모습을 보며 이중배가 슬쩍 건넨 치사였다.
“그 부장 이름이 뭐지?”
“예?”
“당신이 감싸던 그 부장 말이야? 여직원 몸 더듬은?”
이중배가 급하게 김경준의 눈치를 살핀 직후였다.
“솔직히 말해봐요. 실제로 추행한 걸 덮은 거야? 아니면 여직원이 오바한 거야?”
“그게…….”
“오후까지 재조사해서 보고서 올려. 내가 회장님께 직접 제출할 거니까 만약 거기에 장난질 치면 당신은 물론이고, 그쪽 라인 전부 날려버릴 테니까 알아서 해. 알았어요?”
“예, 회장님.”
이중배의 답을 제대로 듣지도 않은 채 김경준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
천중명이 지경엔지니어링의 본사인 서초동을 방문한다는 것쯤 사장단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인천 공장과 군산 공장은 아예 오전 업무를 중단한 채 물청소를 했고, 심지어 동선 바깥쪽의 공장바닥에는 에폭시를 새로 까는 노력을 들였다.
오후 2시가 넘어서였다.
“예! 예.”
휴대 전화기를 든 공장장은 통화 중에 시간을 얼른 확인했다.
“본사에 도착하시면 알려주십시오. 한 시간 안에 본사에 안 들르시면 인천이나 우리 공장으로 출발하신 것으로 알겠습니다. 예. 준비는 철저하게 했습니다.”
현장에서 통화를 마친 공장장은 빠르게 안을 훑었다.
“야, 저거 뭐야!”
그러던 그가 날이 바짝 선 고함을 버럭 질렀다.
“들고 다니라고 안전모를 준 게 아니라고!”
옆구리에 안전모를 끼고 있던 직원이 화들짝 놀라서 머리 위에 덮었다.
지경전자의 임원이 날아간 건 별개로 치자.
그러나 지경냉동창고, 지경건설의 경우에는 현장의 잘못을 지적한 뒤에 수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책임자들을 단숨에 날려버릴 만큼 강단 있는 인물이었다.
반항하던 조승필은 또 어땠고?
물러난 명예회장 천호득이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그룹 최고 경영자였다.
지경전자의 일화가 사장단과 임원진들에게 공포로 전달되었다면, 지경건설과 냉동창고의 일은 현장직원들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사건이었다.
올 거라면 이렇게 정리 깔끔하게 했을 때 오는 게 좋다.
그러나 아무래도 오늘은 아닐 것 같았다.
공장장은 아쉬움을 삼키며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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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교는 최만호가 올린 보고서를 살피다 말고 휴대 전화기를 들었다.
“예, 총수님. 유진교입니다.”
- 바빠서 통화하기가 어려워?
같은 말이라도 천호득은 이상하게 날이 있었다.
“전화 자주 못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저 날카로운 대화 속에 담긴 진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서 “통화 괜찮습니다.”라고 답했던 임원들은 모두 옷을 벗었다.
- 회장이 왜 갑자기 계열사를 돌지?
“때가 됐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벤처사업부를 신설하는 과정에서 마침 필요했던 일정이라고 보시면 적당할 것 같습니다.”
- 다른 문제는 없고?
“예, 총수님.”
유진교가 답을 하기 무섭게 통화가 끊겼다.
궁금한 눈치였다.
천중명의 계열사 순시를 옆에서 지켜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총수님을 찾아뵈라고 조언을 드려야 하나?’
고개를 갸웃했던 유진교는 이내 보고서를 당겼다.
지금은 그런 사소한 것을 고민하느라 시간을 보내기에는 할 일이 워낙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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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경증권 회장 송문철은 자료를 펼쳐놓고 입술이 앞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고민에 빠졌다.
대송자동차는 세 개의 계열사를 가지고 있다.
대송모터스, 대송서비스, 대송장비가 대송자동차의 핵심 부품을 공급하는 구조였다.
네 개 회사가 돌아가면서 지분을 확보한 순환출자가 문제였다.
순환출자가 말이 좀 어려워서 그렇지 풀면 간단하다.
1번이 2번 회사의 지분을, 2번이 3번 회사의 지분을, 3번이 4번의 지분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4번이 다시 1번의 지분을 사들인다.
이런 식으로 해서 윤성일 일가는 자기 돈 한 푼 안 들이고 네 개 회사의 지분을 확보한 효과를 얻었다.
대송자동차가 모터스의 지분을 가졌고, 모터스가 서비스의 지분을, 서비스가 대송장비를, 마지막으로 대송장비가 다시 대송자동차의 지분을 가진 뺑뺑이 구조였다.
이건 양아치 짓이다.
주주에게 돌려주어야 할 이익을 빼돌려서 그룹 일가의 지배를 위해 주식을 산 꼴이라 그렇다.
윤성일 일가가 지닌 지분 5퍼센트를 대송자동차 주가로 환산하면 고작 3조 원이 전부였다.
자사주는 의결권 제한이 걸려 있어서 이 정도면 대송자동차는 아예 주인 없는 회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상속세를 피하고자 돌리고 돌리다가 문제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
“이 정도로 허술하게…….”
만약 중간에 끼인 회사 중 하나라도 경영권을 빼앗기게 되면 나머지는 줄줄이 넘어가게 된다.
공격하는 쪽은 하나만 때리면 되지만, 반대로 방어하는 대송은 네 개를 모두 신경 써야 한다.
하긴 이러니까 해외의 헤지펀드에 당해서 380억을 뜯긴 사례가 생기기도 하는 거지. 그런데도 대송차그룹의 경영권 방어 전략도 사실 어수룩하기 그지없다.
‘쉽게 가자.’
증권 거래를 통해 주식을 거둬들이는 방법이 있다.
5퍼센트가 대략 1조 원 수준이니까 거기까지 매입에는 문제없다. 다만, 5퍼센트를 매입하면 금감원에 대주주 신고를 해야 하는 규정 탓에 그 선에서 지경의 의도가 밝혀진다.
지경과 두 곳 내지 세 곳이 합세해서 한꺼번에 달려들면 어지간해서 대송은 막아내기 힘겨운 상태였다.
“20퍼센트면 현재 주가로 12조 원, 주가가 치솟는다고 가정해도 20조 원에서 25조 원이면 대송자동차 그룹이 넘어온다는 뜻인데?”
가족끼리 지분싸움을 벌인 적은 있지만, 국내에서 지경이 대송을 노린 것처럼 그룹 간의 대결은 없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경영계에서 ‘또라이’나 ‘미치광이’, ‘정신병자’와 같은 막말을 들을 텐데?
계산을 마친 송문철의 가슴이 갑자기 후끈 달아올랐다.
천중명의 눈빛이 떠올라서였다.
누구에게 지시하기조차 조심스러워서 송문철은 오랜만에 노트북을 열고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적대적 인수합병의 가능성을 입력할 때마다 그의 심장이 더 크게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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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경그룹의 약점을 파악한 보고를 받을수록 윤성일의 표정이 고약하게 변했다.
강승애와의 지분싸움을 통해 천중명의 지배구조가 워낙 확실하게 굳어 있었고, 천상기와의 내분 이후로 조직의 구조 역시 워낙 탄탄하게 짜였다.
“한 놈이면 되는데.”
회계를 오래 담당한 직원이 내부 자료를 터트려주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그때 대송 법무팀과 회계팀, 홍보팀이 달려들어서 물어뜯으면 아무리 조세원이라 해도 그걸 덮어줄 수는 없을 일이었다.
“감히 우리 호텔에 나타나서 커피를 마셔?”
그날 객장을 담당했던 매니저를 단숨에 강릉으로 날려버렸고, 서빙 직원들을 전부 해고했는데도 윤성일은 분이 풀리지 않았다.
허세직은 합의만 해준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다고 나서고 있지만, 막상 도움될 일은 없었다.
서류를 만지는 것조차 더럽다는 듯한 동작으로 윤성일은 허세직 관련 서류철을 한쪽으로 옮겼다.
“차명 계좌를 관리했다?”
그는 사채업자 박승양의 흔적에 집중했다.
몇 번 만나서 골프도 했었고, 밥도 함께 먹어서 그가 얼마나 야비한 인간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윤성일이었다.
비록 천중명을 따라 깡패를 몰고 호텔에 함께 나타났지만, 그는 돈이라면 마누라도 팔 딱 그 수준의 인간이 아니던가.
돈만 준다면 나를 위해서도 깡패를 데리고 올 인간이긴 하지. 고개를 비틀며 서류를 모로 노려보던 윤성일이 눈빛을 반짝 빛냈다.
윤성일은 스마트폰을 들어서 박승양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사랑한다 말해주세요. 정신을 못 차릴 거야.]
통화대기음 수준하고는!
- 어이구! 우리 윤 회장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어쩐 일이냐고?
남의 호텔에 깡패들을 데리고 나타났던 인간이?
“허허허. 공이나 한번 치러갈까 싶어 주변을 둘러보니 우리 박 회장님이 떠오르지 않겠습니까? 지난번의 일로 오해도 있고 한번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 요즘 연습 좀 하셨나?
사채업자 놈이 점점!
윤성일은 쏟아지는 뜨거운 숨을 억지로 삼킨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한 타에 한 장으로 하고 오전 8시에 용인 CC에서 티-오프 어떻습니까? 7시쯤 클럽하우스에서 뵙고 식사한 뒤에 나가면 적당하겠습니다.”
- 예, 회장님. 그럼 내일 뵙지요.
통화를 마친 윤성일은 곧바로 인터폰을 눌렀다.
“내일 오전 8시 타임에 나갈 테니까 용인 CC 앞뒤로 비워놓으라고 지시해. 클럽하우스는 7시.”
[네, 회장님.]
준비는 끝났다.
어색하게 받을 줄 알았더니 박승양은 시원시원했다.
내일 보자, 박승양.
뜻을 안 따르면 허세직과 같은 꼴로 만들어주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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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를 마친 박승양은 휴대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었다.
“냄새가 나.”
“예?”
“알 거 없어.”
김도정의 질문을 매몰차게 잘라낸 박승양은 야비함 넘치는 미소를 그려냈다.
“사냥에 나선 맹수가 숨소리도 못 감추다니.”
한알저축은행의 자료를 살피던 김도정은 엉뚱한 말에 대꾸를 내놓지 못했다.
“하이에나는 사냥할 때, 서너 마리가 다리를 꽉 물어뜯거든. 그럼 나머지가 뒤로 가서 꼬리 아래, 요기. 어? 항문 근처를 뜯어먹어. 살이 연해서 바로 뜯기고, 내장이 딸려 나오니까.”
내용보다는 박승양의 눈빛이 무서워서 김도정은 또 대꾸를 못 했다.
“도망가봐야 내장이 뒤로 나오기 때문에 뜯기는 순간 끝나. 늙거나 홀로 떨어진 사자도 한순간에 끽! 알지? 뒤를 뜯겨서.”
“예, 회장님.”
“그런데도 엉덩이를 내게 들이미는 인간이 다 있네?”
“누구 말입니까?”
“알 거 없다니까. 얼른 서류 파악해서 적정 인수 가격이나 뽑아.”
김도정은 박승양의 지시대로 고개를 서류로 파묻었다.
최근 헬렐레하는 표정으로 다녀서 깜박 잊고 있었는데 박승양은 원래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금 같은 눈빛을 할 때면 절대 거슬러서도 안 되는 인물이었다.
누구는 보름달 뜨는 밤에 늑대로 변한다고 하지만, 박승양은 시도 때도 없이 승냥이로 변하곤 했고, 그럴 때면 꼭 상대의 뒤를 죽을 때까지 물고 늘어지는 독종이었다.
‘누군지 안됐네.’
김도정은 떠오른 생각을 꿀꺽 삼킨 뒤에 서류를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