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
193. 어지간하면 적당히 넘어가십시오 (3)
대략 30분에 걸쳐 천중명의 의지를 확인한 송문철은 마지막 질문을 꺼내 들었다.
“회장님. 외람된 질문입니다만, 안 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탈모가 진행되는지 안타까운 머리숱을 한 송문철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송 회장님의 경영은 훌륭했습니다. 실적보다 내실을 추구하는 점도 좋았고, 인턴 직원을 정직원으로 전환한 과정 역시 합리적이며 공정했다고 보고요.”
증권사답게 각종 출력물과 경제 잡지, 관련 출간물들이 잔뜩 올려진 책상 앞의 소파에서 천중명은 뜻밖의 설명을 먼저 꺼냈다.
“첫 번째로 대송이 우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기다리다가 당하느니 먼저 치는 게 좋지요.”
관계가 틀어졌다는 소문은 들었다.
그러나 그룹 회장이 나서서 적대적 인수합병을 요구할 정도로 악화된 줄은 짐작하지 못했었다.
“다음으로 리온자동차의 안전기술을 중국이 아닌 국내에 심고 싶습니다. 우리 고객도 이제는 안전한 차를 탈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상적인 그룹을 꿈꾼다는 말도 들었다.
“외국 차를 베껴서 만든 승용차를 애국하는 심정으로 구매했던 고객들입니다. 또한, 나는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제품은 국내에서 가장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말은 맞지.
그렇게 하면 돈은 어떻게 버냐고? 돈은?
정직원으로 다 돌리고, 제대로 만들어서 싼 가격에 판매하면 급여는 누가 만들어 주냐고요?
송문철이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항변이었다.
“마지막으로 규모의 경제가 필요합니다.”
“회장님. 인수를 하게 되면 구조조정은 필연적으로 따라옵니다. 결국, 직원을 해고하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할 텐데 회장님께서 원하는 방식은 그런 것이 아니셨잖습니까?”
“왜 직원을 해고해야 하죠?”
“대송과 우리는 사업 영역이 거의 판박이 수준입니다. 통합하는 순간에 필연적으로 업무 영역이 겹치고 그곳에서 잉여 인력이 발생합니다. 게다가 파벌 싸움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송문철의 조언에 천중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를 일으키는 임직원이라면 몰라도 고용만큼은 그대로 승계할 생각입니다. 아직 계획 단계이니까 조심스럽게 살펴주세요. 지금 이 이야기는 유진교 본부장도 모르는 내용입니다.”
“예, 회장님.”
“외환 거래 딜링룸의 규모를 키우세요. 스카우트를 통해서라도 능력 있는 외환딜러들을 확보했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외환딜러는 인재풀이 빤하다.
다른 사업과 달리 거래 규모를 키운다는 의미가 능력 있는 외환딜러에게 더 큰 거래를 맡기는 것이어서 두 명에서 세 명 정도 인원을 보강하는 선이면 충분한 일이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천중명을 따라 일어선 송문철은 엘리베이터 앞까지 함께 걸었다.
기다리던 비서실 직원이 버튼을 누른 다음이었다.
“배웅은 여기까지만 하시죠.”
“살펴 가십시오.”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선 천중명을 향해 송문철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
다음 날 오전에 천중명은 곽대출이 올린 보고서를 가장 먼저 펼쳤다.
계열사가 61개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서류로 확인하자 엄청난 부담감이 어깨를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해외법인을 포함해 직원 수가 18만 명이 넘는다.
한 사람당 가족 두 명만 딸려있다고 해도 숫자는 금방 54만 명으로 불어난다.
계열사 순시를 앞에 두어서 그런가.
분명하게 계열사 숫자와 매출까지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까지 부담감을 느끼는 것은 처음이었다.
하루에 세 곳씩 돌아도 대략 20일이 걸린다.
물론 지경디자인, 지경화장품, 냉동창고, 지경전자는 뺄 테니까 하루쯤 벌겠다.
일단 순시를 통해 내부를 단단하게.
천중명은 보고서를 넘겼다.
‘제법인데?’
곽대출은 신문고의 투고 내용이 많은 계열사를 앞쪽에 오게 정리해 놓았다. 거기에 동선을 계산해서 근처에 있는 계열사를 비고란에 따로 적어 두는 꼼꼼함도 보였다.
오늘 가볼 곳은 지경물산과 지경엔지니어링의 두 곳이었다.
두 곳 모두 경직된 조직 문화가 화근이었다.
음주를 강요하는 회식, 그에 따른 상습적인 성희롱, 폭언, 뒷거래까지, 신문고 내용만 봐서는 비리 백화점 수준이었다.
다음은 지경엔지니어링이었다.
본사는 서초동, 공장은 인천과 군산에 있는 계열사였다.
이곳은 또 본사의 어린 직원들이 나이 있는 현장직 직원들을 함부로 대하고, 멸시하는 사례가 잦았는데 특히 계약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된 직원에 대해 유독 심한 성향을 보였다.
“후-.”
두 회사 모두 현장직 근무자들의 갈등도 문제였다.
임금협상이나 기타 노사 문제에 관해 기존의 정규직 직원이 새롭게 정규직이 된 직원들의 의견을 묵살하는 경우가 잦아서 발생하는 문제였다.
“곽대출, 머리 좀 아팠겠네.”
뒤편에 쭉 올라온 투고 내용을 읽으며 천중명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대강 살폈다.
나머지는 이동하면서 봐도 충분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급한 결재를 마쳐야 했다.
천중명은 연필을 들고 결재서류를 펼쳤다.
지루하고 힘든 일이지만, 천중명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제대로 움직이는가를 확인하는 가장 정확한 방법이었다.
**
곽대출은 좀 무섭게 생겼다.
좋을 때는 동네 형 같은데 눈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저 사람이 지금껏 내가 알던 그 곽대출인가 싶게끔 무서운 인상으로 변한다.
“주 과장. 나는 회장님 모시고 외근 다녀올게.”
“예, 이사님.”
점심을 먹은 뒤에 양치를 마친 곽대출이 방을 나선 다음이었다.
벤처사업부에 지원하고자 하는 직원들이 주인영에게 은근슬쩍 또는 아예 대놓고 매달렸다.
조직도를 짜고, 필요한 인원과 직급을 정하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당장 지경신문고의 업무를 담당하던 인원을 다 빼낼 수도 없었다.
자리에 앉은 주인영은 목을 뒤로 젖히며 쌓인 피로를 잠시 풀었다.
게으름을 피울 수 없었다.
업무에 필요한 단어를 휴대 전화기에 담아 수시로 외우는 곽대출을 보면 힘들다는 생각이 싹 달아나곤 했다.
‘결혼은 좀 미뤄야겠지?’
그룹발전본부 안에서도 곤란한 판에 벤처사업부에서 부부로 근무하는 건 서로에게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언젠가 곽대출은 주인영의 도움이 없어도 홀로 설 사람이었다.
그때까지만.
주인영은 보고서 작성을 위해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
천중명은 곽대출, 비서실 직원들과 함께 본사를 나섰다.
비서진을 포함해 두 대의 차로 이동하는 길이었다.
“지경물산에 통보는 했지?”
“예, 회장님.”
곽대출에게 질문을 던졌던 천중명은 지경물산의 신문고 내용을 마지막으로 살폈다.
의류 부서에는 여직원이 많았고, 지경건설과 별도로 운영되는 건설 파트에서는 거친 남자직원이 많아서 늘 그와 관련한 일이 있었다.
문제는 사장단의 대처 방식이었다.
그런 사건들을 지경물산의 특성이라고 넘겨버리는 바람에 개선될 여지가 거의 없었다.
“제가 보관하겠습니다.”
천중명이 덮은 서류철을 곽대출이 받아서 가방에 넣었다.
뭉툭한 저 엄지손가락으로 무슨 짓을 했는지 알게 되면 지경물산 임원들이 얌전해질 텐데, 그걸 보여주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
지경물산은 아침부터 비상이었다.
오전 10시부터 책상과 주변을 정리하라는 지시가 내려왔고, 탕비실을 과장급들이 직접 돌아보며 혹시라도 흠이 잡힐 일은 없는지 살폈다.
비서실에서 천중명이 출발했다는 연락이 있은 다음이었다.
지경물산 이중배 사장이 김경준 회장의 방으로 들어왔다.
“회장님을 맞을 준비를 마쳤습니다.”
“방송은?”
“10분쯤 뒤에 할 예정입니다.”
입술을 내민 채 숨을 길게 내쉰 김경준이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총수님의 성격을 그대로 닮았다고 하잖나. 전자 쪽 조승필 회장과 임원들이 어떻게 됐는지 알지? 무조건 납작 엎드려. 내가 지시한 대로 분위기 띄워주고. 참! 그 건은 어떻게 됐어?”
“감사 결과를 준비해놓았습니다.”
“그거로 되겠어?”
질문을 던진 김경준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눈살을 찌푸렸다.
“우선 감사 결과에 따랐다고 보고하시고, 분위기를 봐서 추가로 조사하겠다고 답하시면 어떻겠습니까?”
“관리 좀 해요! 관리! 어떻게 했기에 부장이란 사람이 여직원 몸을 더듬는 일이 생겨?”
“죄송합니다.”
“경고처분은 분명하게 했지?”
“예, 회장님.”
이중배가 고개까지 숙이며 답을 한 직후였다.
딩동댕동.
[잠시 후 지경그룹 천중명 회장님께서 본사를 방문하십니다. 회장님을 환영하실 지경물산 가족들은 현관으로 나와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방송을 들은 김경준이 묘한 웃음을 흘렸다.
“저 정도로 되겠어? 아예 부서를 정해서 내보내지?”
“지난번에 정규직으로 전환된 직원들과 여직원들 사이에서 인기가 대단하십니다. 저 방송으로 충분할 겁니다.”
“그러시지. 워낙 젊은 데다 방송에 나온 모습도 있고, 직원들이 좋아할 만한 점을 많이 갖춘 분이니까. 자! 그럼 우리도 슬슬 나가볼까?”
내용은 나쁘지 않은데 어쩐지 말투는 곱지 않았다.
재킷을 매만진 김경준이 앞섰고, 그 뒤를 이중배가 따랐다.
**
승용차가 지경물산의 현관 앞에 멈추고 천중명이 차에서 내린 순간이었다.
“꺄아아-!”
“회장님! 환영합니다!”
“멋져요! 사랑합니다, 회장님!”
연예인이 나타난 것처럼 요란한 환호가 지경물산의 로비와 현관을 뒤덮었다.
솔직히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오셨습니까?”
곽대출과 함께 주변을 둘러보는 천중명의 앞으로 김경준과 사장단, 임원들이 다가왔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지경물산을 책임지고 있는 김경준입니다, 회장님.”
“이렇게 뵙는 건 처음이네요.”
“예, 회장님.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늑대의 얼굴에 여우 눈을 한 김경준은 완벽하게 자세를 낮춘 모습이었다.
“회장님! 멋져요!”
“꺄아! 어떡해! 회장님!”
스마트폰을 들고 촬영하는 직원이 있을 정도로 로비는 열광적인 분위기였고, 천중명을 보는 것이 진심으로 반갑고 기쁜 얼굴이었다.
직원들을 향해 고맙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 천중명은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회장님을 뵙고 싶다는 직원들이 워낙 많아서 잠시 시간을 허락했습니다.”
위로 올라가는 동안 김경준이 깍듯한 자세로 건넨 말이었다.
“이렇게라도 직원들을 보아서 좋았습니다.”
천중명은 간단하게 답만 했다.
엘리베이터로 내린 천중명을 김경준은 곧바로 회의실로 안내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중앙에 매달린 커다란 빔프로젝터였고, 다음으로 말발굽 형태로 휘어진 거대한 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천중명을 중앙에 앉게 한 김경준은 왼쪽 자리를 곽대출에게 권하고 오른쪽에 앉았다.
“우선 바쁘신 중에 어려운 걸음 해주신 회장님께 감사 인사드립니다. 그럼 회장님께 임원들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제 오른쪽이 물산을 책임지고 있는 이중배 사장입니다.”
김경준이 마이크에 대고 직급과 이름을 부를 때마다 한 명씩 자리에서 일어나 천중명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사장단과 임원 16명의 인사가 끝난 다음이었다.
“이번에 새로 벤처사업부를 맡게 된 곽대출 이사입니다.”
천중명의 시선을 받은 곽대출이 자리에서 일어나 지경물산 회장과 임원들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회장님. 간단하게 물산의 사업현황을 브리핑하겠습니다.”
김경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회의실의 조명이 어둡게 변했고, 곧바로 직원 한 명이 천중명의 맞은편으로 나섰다.
그는 지경물산이 작년 한 해 7천4백억 원의 매출을 올렸고, 2천2백억 원의 이익을 얻었다는 사실을 빔프로젝터를 이용한 차트로 강조했다.
금액으로 봐서 사장단과 임원들이 자부심을 가질 정도이긴 한데 그룹 전체로 보면 중간 수준이었다.
의류브랜드별 판매 현황, 내년에 해외에서 수주받을 공사까지 설명한 것으로 대략 40분에 걸친 브리핑이 끝났다.
“고생했어요.”
천중명은 고개 숙여 인사하는 직원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회의실의 조명이 밝아지자 좌우에 앉은 사장단과 임원들이 천중명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그룹의 방향과 모습을 이제는 익히 아시리라 믿습니다.”
테이블에 팔을 올려 상체를 기울인 천중명의 음성이 스피커를 통해 회의실에 울려 퍼졌다.
“실적은 만족합니다. 특히 고용부담이 늘어난 상태에서 이루어내는 결과라 더욱 고맙습니다.”
시선을 교환한 임원들이 흡족한 표정으로 천중명을 바라보았다.
“김경준 회장님.”
“예, 회장님.”
계열사에 대표이사 회장이란 직함이 생기면서 총수란 직함이 새로 만들어졌다. 아닌 게 아니라 서로 회장이라고 불러대는 게 은근 헛갈리는 일이기는 했다.
“물산의 기업문화가 경직돼서 그에 따른 사건 사고가 잦은 편인데 대책은 있습니까?”
“신문고에서 말씀하신 내용이라면 이미 조사를 마쳤고 결과를 보고했습니다.”
김경준은 막힘이 없었다.
“회장님께서 직원들을 아끼시는 점을 생각해서 오늘 이후로 제가 다시 한 번 사건을 살피고 부족한 점이 있다면 반드시 후속조치를 통해 보완하겠습니다.”
천중명은 자세를 납작 엎드린 김경준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거 봐? 이런 방법이 있었네.
비록 가식적인 복종이라도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처럼 그를 추궁할 구석이 없어진 꼴이었다.
이 여우를 어떻게 상대하지?
픽하는 웃음을 감추기 위해 천중명은 우선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