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
192. 어지간하면 적당히 넘어가십시오 (2)
오후 2시쯤 내부 통신망과 본사 현관에 벤처사업부의 신설에 관한 발표가 있었다. 당연하게 그룹발전본부 곽대출 이사를 신임본부장에 임명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이사님. 인사발표 확인하셨어요?”
문을 열고 들어온 주인영의 말에 곽대출은 모니터를 통해 본부장 발령을 확인했다.
“본부장님과 실장님께 인사하세요. 그게 좋아요, 이사님.”
“아, 그런가?”
곽대출은 재킷을 걸치고 방을 나섰고,
“와아-.”
짝짝짝짝짝짝짝짝짝.
그룹발전본부의 직원들이 그에게 박수를 보내주었다.
그룹발전본부 직원들 사이에 곽대출의 평판이 나쁘지 않았고, 이사에서 단박에 본사 전무나 계열사 부회장 수준의 승진이니 당연하게 박수를 받을 만했다.
좌우로 고개를 숙이며 직원들에게 감사를 표시한 곽대출은 먼저 최만호 실장의 방으로 움직였다.
“실장님, 계셔?”
“잠시만 기다리세요.”
비서가 안에 통보한 뒤에 곽대출에게 들어가라고 안내해주었다.
“어? 곽대출 본부장님? 축하해요.”
“실장님. 그러지 마십시오. 가뜩이나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어허? 곽 이사도 부끄러워할 때가 있나?”
보기 좋게 웃어준 최만호가 책상 뒤에 걸린 재킷을 집었다.
“차는 본부장님께 가서 마시는 게 좋겠어.”
그렇게 두 사람은 유진교를 찾아가 소파에 앉았다.
부속실 직원이 시원한 음료를 가져다준 다음이었다.
“축하해, 곽 본부장.”
“감사합니다, 본부장님.”
유진교가 듣기 좋은 저음으로 축하를 건넸고, 곽대출이 공손하게 답했다.
“자네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자네의 성공이 회장님의 능력이 되고, 자네의 실패가 회장님의 치부가 된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고 여기 최 실장이나 내게 도움을 청해.”
“예, 본부장님. 명심해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직원 보강은 여기 최 실장과 의논해서 처리하기로 하고 그만 일어나.”
자리에서 일어난 곽대출을 향해 유진교가 손을 내밀었다.
“반드시 성공시켜.”
“예, 본부장님.”
곽대출의 손을 잡은 유진교가 묵직한 당부를 전했다.
**
황성규가 놓고 간 자료를 책상으로 옮긴 천중명은 지경 경제연구소의 리포트를 뒤졌다. 자료에 담긴 내용을 확인할 필요가 있어서였다.
‘미친 새끼들.’
대송그룹은 계열사 간에 보증을 선 연결부채비율이 무려 1천 퍼센트를 넘는 수준이었다.
막말로 자산을 다 팔아도 원금 상환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인데 이게 거의 산업은행의 대출이었다.
천중명은 지경연구소의 리포트와 황성규가 두고 간 자료를 번갈아 살피며 사실을 확인했다.
대송그룹만의 문제라고 보기는 어려운 게 47개 그룹 중에서 연결부채가 200퍼센트를 넘는 곳이 20곳이었고, 그중 300퍼센트를 넘는 그룹만 해도 13개였다.
“진짜 껍데기도 못 건질 새끼들이.”
이 정도면 제2의 IMF가 오는 이유가 그룹의 부채비율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집을 사는데 빌린 돈과 가게를 운영하기 위해 빌린 개인 대출은 대부분 주택 담보와 신용 한도 내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룹은 같은 담보와 신용을 이리저리 돌리고 돌려서 무려 1천 퍼센트까지 돈을 빌렸다.
따각. 따각.
정신이 번쩍 든 천중명은 지경의 부채비율을 꼼꼼하게 확인했다.
95퍼센트로 그럭저럭 안정적인 부채비율이었다.
“대송은 부채만 터트려도 그냥 무너지겠는데?”
대송그룹의 연결부채를 확인한 천중명은 고개를 저었다.
이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짓이다.
정부의 출자와 해외 차입금으로 대출하는 산업은행의 돈을 빼다가 떵떵거리는 꼴이었다. 그래놓고 현금 유보금 30조를 움켜쥔 채 경영이 힘들다며 징징거린다.
이래놓고 위기가 닥쳤을 때, 지금껏 쌓아둔 유보금으로 서민의 집과 신용을 단숨에 삼켜서는 영원한 부를 누릴 계획을 세운단다.
“1천 퍼센트?”
천중명은 대송의 부채를 하나씩 살폈다.
대송차그룹의 연결 부채비율이 180퍼센트니까.
‘윤성일 회장님. 아예 껍데기 위에 앉아서 큰소리를 뻥뻥 치신 거네.’
심지어 삼중호텔만 해도 보증 채무와 직접 받은 대출이 1천9백억 원 수준이었다.
부채가 이리저리 연결돼서 경매를 통해 연결채무를 완전히 털어내지 않는 한, 삼중호텔은 매각할 방법도 없었다.
자료를 살피던 천중명은 픽 웃고 말았다.
“당장 팔아도 6백억 마이너스인 호텔을 깔고 앉으셔서 그렇게 큰소리를 쳤다 이거지?”
이왕 살핀 길이다.
자료를 더 넘기던 천중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이렇겠지.”
삼중호텔의 직원 절반 이상이 임시직과 계약직이었다.
심지어 직원들의 30퍼센트는 두 달짜리 아르바이트생으로 대신하고 있었다. 정직원을 시켜준다는 미끼로 수습과 인턴제도를 참 열심히 활용했다.
이러니 천중명이 전직원을 정규직으로 돌린다는 발표를 했을 때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지.
‘너희는 그냥 망해라. 그게 좋겠다.’
천중명은 왼손 검지와 중지로 눈썹을 매만지며 서류를 파고들었다.
똑똑똑.
두 시간에 한 번씩 메모를 전하던 부속실 직원이 천중명을 보고는 뒷걸음으로 물러나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달칵.
문을 닫은 부속실 직원을 향해 실장이 시선을 던졌다.
“노크와 문소리도 못 들으시고 서류에 집중하고 계세요.”
“잘했어. 한 시간쯤 뒤에 전해드려.”
“예, 실장님.”
가슴에 손을 얹고서 자리로 움직이는 직원을 보며 서른 후반의 실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쓸데없는 생각하는 건 아니지?”
“예?”
“집중하시는 회장님을 뵙고 가슴이 설렜다거나 그런 거면 빨리 다른 부서 찾아. 부속실에 속한 직원이 사심 담긴 태도나 눈빛으로 회장님의 집중력을 흐트러트리는 꼴, 나는 못 봐.”
“죄송합니다, 실장님.”
이해한다.
회장님을 보고서 가슴이 설레는 저 여직원의 심정을.
젊은 데다 얼굴이나 몸매 빠지는 구석 없지, 거기에 직원들 챙겨주는 것도 끔찍할 정도지.
용인에서 셔츠 차림으로 타워크레인에 매달린 모습은 완전히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미숫가루를 권했을 때 행복하게 마시는 모습과 리온자동차를 인수하고 돌아온 천중명 회장을 보며 서른 후반의 실장도 가슴이 설렜으니까 뭐.
거기까지.
천중명 회장을 좋아하는 다른 계열사 직원들 수준까지만, 그리고 회장의 업무를 보조하는 데 방해되지 않는 선까지만 허락되는 내용이었다.
실장이 천중명의 일정에 시선을 주었을 때였다.
[지경증권사 송문철 회장을 전화로 연결해 줘.]
천중명의 지시가 인터폰을 통해 나왔다.
“네, 회장님. 그리고 전화 메모가 있습니다.”
[가져다줘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답을 한 실장은 구내전화기의 수화기를 들며 메모를 담당한 여직원에게 눈짓했다.
**
방으로 돌아온 곽대출은 책상으로 움직였다.
그리 넓지 않은 방이다.
책상, 5인용 소파 세트, 옆으로 책장, 옷걸이가 전부인 방이었다.
천중명의 배려가 없다면 지금 곽대출은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지금도 책상 서랍에 간단한 영어 회화책과 미국의 유치원생들이 본다는 영어 동화책이 있는 건 주인영만 아는 사실이었다.
“후.”
뭔가 엄청난 게 가슴을 꽉 누르는 심정이었다.
대단하네, 우리 회장님.
매일 이런 부담을 이겨낸다는 거 아냐?
자리에 앉은 곽대출은 숨을 몇 번 내쉰 뒤에 내일부터 있을 천중명의 계열사 순시 일정을 살폈다. 그리고 지경신문고에 올라온 사항들을 계열사별로 확인했다.
미리 출력했다가 밖으로 새나가면 곤란하니까 출력은 당일 아침에 하거나 아니면 USB를 이용해 해당 계열사에서 해결할 생각이었다.
똑똑똑.
그때 문이 열리며 주인영이 들어왔다.
“이사님. 직원 구성은 어떻게 하실지 생각해 놓으신 거 있으세요?”
곽대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녁에 약속 있으세요?”
곽대출은 이번에도 고개를 젓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럼 퇴근 후에 벤처사업부 조직과 인적 구성에 관해 초안을 작성하는 것으로 알게요.”
“아, 주 과장. 회장님께서 원래 주 과장도 발령내신다고 하셨었거든. 아마 나더러 직접 임명하라는 말씀인 거 같으니까 그렇게 알고 준비 부탁해.”
“예, 이사님.”
주인영이 나가고 나자 곽대출은 커다랗게 숨을 내쉬었다.
**
송문철은 경제학과를 졸업해 증권사에 취업했고, 펀드매니저를 거쳐 임원이 된 전형적인 증권맨이었다.
그는 원래 다른 증권사에서 스카우트를 통해 지경으로 왔는데 대표이사 회장이 된 것에는 사연이 좀 있었다.
2년 전에 지경증권의 임원 전체가 두 편으로 갈라져서 공석이 된 대표이사 회장 자리를 노렸는데, 우습게도 회장 후보 한 명이 청와대 비서관으로 간다며 느닷없이 사퇴해버렸다.
후보 두 명 중, 한 명이 사퇴하는 바람에 싸움은 싱겁게 끝났다.
문제는 오히려 그다음에 있었다.
새로 회장 자리에 오른 주성진 회장은 잔인할 정도로 반대편에 섰던 임원들을 내쳤고, 그 바람에 내부 갈등이 심각했다.
천호득이 그 꼴을 두고 볼 사람이 아니었다.
덕분에 주성진을 비롯해 그쪽 임원들이 또 싹 날아가고, 중립을 지키던 몇 명 안 되는 임원 중 송문철이 회장이 되었다.
그렇게 2년 정도 무난하게 지경증권사를 이끌던 송문철이 천중명의 연락을 받았다.
오후 4시에 방문하겠다는 의사를 듣고 송문철은 이제 증권사 생활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본사로 불러도 되는데 굳이 신임 회장이 직접 증권사로 오겠단다. 더구나 벤처사업부를 신설하고 신임본부장에 천중명 회장의 심복 곽대출을 임명한 날에 말이다.
이제부터 측근으로 계열사 사장단을 교체하겠다는 의미 말고는 다른 이유는 없어 보였다.
‘그동안 잘 지냈지. 메이저 증권사의 대표이사 회장도 했고.’
송문철은 책상의 정면으로 움직여 명판을 물끄러미 보았다.
저 자리에 앉은 날이 있었으니 물러서는 날도 있는 게 사람 사는 일 아니겠나.
세계여행 가자던 집사람이 좋아할까, 아니면 실직했다고 슬퍼할까.
그는 왼쪽 품에 넣어둔 사직서를 만지듯 재킷을 쓰다듬은 뒤에 회장실을 나섰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던 전무와 상무, 간부들과 함께 로비로 내려간 송문철이 현관을 바라볼 때였다.
비서 한 명을 대동한 천중명이 로비에 들어서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이러시지 말라니까요. 그래서 전화로 따로 말씀까지 드렸는데요.”
“아닙니다. 올라가시죠.”
송문철의 안내에 따라 천중명이 엘리베이터로 움직였다.
개인적으로 마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임원들과 중간 간부들,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체면을 세워주는 천중명이 송문철은 고마웠다.
“회장님. 객장을 보시겠습니까?”
“아직 고객분들이 있을 시간이니까 다음 기회에 둘러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회장실로 움직인 송문철은 천중명에게 간부들을 인사시켰다. 10분쯤 그렇게 다 같이 앉아서 차를 마셨다.
‘이건 좀 이상한데?’
송문철은 그때쯤 천중명의 방문목적이 회장단 교체가 아닌 건가 싶었다.
“자, 그럼 나는 여기 송 회장님과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다른 분들은 나중에 또 보기로 하죠.”
임원들과 악수를 나눈 천중명이 송문철과 마주 앉았다.
“의논하고 싶은 내용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회장님.”
송문철은 표시 나지 않게 숨을 들이마셨다.
“우리 증권사의 외환 거래를 늘릴 계획입니다. 그 외에 적대적 인수를 계획 중인데 가능한 방법이 있는가를 검토해 주었으면 합니다. 확신이 서면 법무팀과 협조하도록 지시하겠습니다.”
천중명의 답을 들은 송문철은 목과 명치를 연달아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적대적 인수라니?
지경그룹의 회장인 천중명이 주식을 매입해가며 인수할 기업이 있을까 싶어서였다.
“회장님. 지분 비율이 낮은 기업을 적대적 인수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황금주라는 제도부터 여러 가지 보장책이 있습니다. 대상 기업을 알려주시면 그쪽 정관을 살핀 뒤에 답을 드리겠습니다.”
사표를 준비했던 것도 잊은 채 송문철은 천중명에게 의견을 제시하고, 대꾸를 기다렸다.
외국 기업일까? 아니면 회장님의 마음에 드는 코스닥 기업?
어디지? 그 정도로 탐나는 기업이 있었나?
송문철의 머릿속에 온갖 의문이 떠돌아다닐 때였다.
“대송자동차그룹입니다.”
천중명의 답이 있었다.
입을 벌린 송문철이 “예에에?”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천중명을 바라보았다.
재계 5위 안에 드는 그룹 간에 적대적 인수를 하겠다고?
“회, 회, 회장님. 그러니까 회장님께서 노리시는 기업이 대, 대, 대송, 대송그룹의 그 대송자동차그룹이 맞습니까?”
당황한 송문철을 향해 천중명은 먼저 픽 웃었다.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 줄은 몰랐습니다.”
진심이구나!
놀랄 일인 줄 몰랐다고?
이런 말을 듣고 기절 안 한 걸 칭찬할 일입니다!
송문철은 아예 혼이 천장으로 떠올라 천중명과 마주 앉은 광경을 내려다보는 느낌이었다.
“어차피 부채로 연결되어 있으니 결국 대송그룹 전체가 넘어오겠지만, 방법을 찾았으면 합니다.”
차분하게 내려앉던 송문철의 혼이 다시 천장으로 훌쩍 올라가서 위쪽을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