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191화 (191/315)

# 191

191. 어지간하면 적당히 넘어가십시오 (1)

오전 9시 30분에 늘 보던 재킷에 셔츠, 그리고 진바지 차림의 황성규가 집무실에 들어섰다.

저 양반을 백화점에 데리고 가서 옷을 한 벌 사줘야 할까 싶었는데 황성규가 돈이 없어서 저러는 건 아닌 일이었다.

“안녕하셨습니까, 회장님?”

“어서 오세요. 그리 앉으세요.”

부속실 여직원이 차를 가져다준 다음이었다.

소파에 앉은 그는 등에 메고 들어온 가방에서 꽤 두툼한 서류철을 여러 개 꺼내서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미국의 금리 인상에 관한 분석 자료입니다. 조만간 한국의 대출금리가 5퍼센트 대로 상승할 테고, 미국이 추가로 1퍼센트 가량 금리를 올리면 우리 쪽 대출금리는 9퍼센트 대로 올라섭니다.”

“이미 언론에서 비슷한 내용을 보도하며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는데 우리나라가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할까요?”

차를 마시며 천중명이 궁금한 점을 건넸다.

“자금 경색은 끓는 물속의 개구리처럼 마지막 순간에 목을 조릅니다. 한국의 가계부채 규모가 1천400조 원으로 국민 1인당 2천9백만 원의 빚이 있는 수준입니다.”

황성규가 지금 전해주는 내용 또한 지경연구소의 리포트를 통해 천중명이 최근에 읽은 내용이었다.

“한계 계층, 자영업자, 중산층의 순서로 무너지면 그때부터 부동산 가격이 폭락합니다. 우리나라 가계 자산의 70퍼센트가 부동산에 몰려 있는 것도 아픈 일입니다.”

“그런 위기를 막기 위해서라면 황 선생님이 판단하기에 어느 정도의 자금이 필요합니까?”

“대략 1천조 원의 돈이 필요합니다.”

천중명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5만 원 권으로 1천조 원을 쌓으면 부피가 얼마나 될까?

300조 원에서 500조 원의 싸움도 실감이 안 나는 판국에 그 보다 두 배 이상의 자금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으니 저절로 한숨만 나왔다.

사람이 말이다.

5백만 원이 필요한데 1천만 원을 준비하라면 어디 손 벌릴 구석이 없는지 살필 수라도 있는데 단위가 1천조 원이라면 아예 답이 없는 금액이었다.

‘꼴통 회장이 되겠다고 했더니 아예 불가능한 숙제를 던진다 이거죠?’

슬쩍 창을 보았던 천중명이 다시 황성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본격적인 시작까지 얼마나 여유가 있을까요?”

“짧으면 3개월, 길면 1년 안으로 보고 있습니다.”

천중명은 인터넷 은행 설립과 저축은행, 대부업체의 설립에 관해 황성규에게 설명했다.

“아래쪽을 지키시려는 겁니까?”

“워낙 큰돈이 부족해서 고통받으면 포기라도 하는데 몇만 원이나 몇십만 원이 절박해서 좌절하는 건 정말 견디기 어렵거든요.”

천중명은 황성규와 대략 20분쯤 거대 자본의 움직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송이 분명 회장님을 노리고 있습니다. 허세직 의원에게 조심스럽게 딜을 건넨 정황도 발견했습니다. 성폭행 사건의 합의서와 탄원서를 제출하면 전에 아들의 마약 사건을 고려하더라도 충분히 집행유예를 노려볼 만도 합니다.”

“대신 내게 함정을 파는 역할을 맡겠군요.”

“그런 의미로 판단했습니다.”

허세직이라면 충분히 그러고 남을 사람이라 더 물어볼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 외에도 대송자동차는 중국의 자동차 시장에서 리온자동차를 받지 않는 조건으로 대대적인 판촉행사를 벌일 계획도 세웠습니다.”

“판촉행사요?”

질문을 받은 황성규가 중간쯤에서 뽑은 서류철을 펼쳤다.

“전에 미국 시장의 점유율을 높일 때 썼던 방법입니다. 중대형 승용차를 사면 소형 승용차를 끼워주는 판매방식입니다.”

워낙 기가 막힌 상황이라서 천중명은 아예 헛웃음마저 웃고 말았다.

“실제로 미국 시장에서 그렇게 자동차를 판매하면서 중대형 승용차의 가격도 우리나라에서보다 7백만 원가량 싸게 판매합니다. 물론 연말 보유량을 털어내느라 그런 면이 없잖아 있습니다.”

“아직 우리는 판매하지도 않는데요?”

“기존에 있던 중국 시장의 리온자동차를 아예 밀어내겠다는 의도로 보입니다. 더불어 국내 판매도 어떤 식으로든 막아보겠다며 전략을 짜는 모습도 확인했습니다.”

천중명은 눈살을 찌푸리며 보고서를 살폈다.

이렇게 해외에서 자동차를 원플러스원으로 팔더라도 국내시장에서 매년 3조 원 이상을 벌어들이는 대송이라면 얼마든지 덤벼볼 만한 일이었다.

“그 외에 대만의 메모리 생산 회사에 투자, 저가 통신사 설립, 블루크루드의 부정적인 인상을 위한 기사 제공 등의 움직임이 연달아 포착되고 있습니다.”

“대송치고는 너무 상식선 안에서 움직이는데요?”

“마지막 카드는 아무래도 천호득 명예회장님인 것 같습니다.”

서류를 바라보던 천중명은 눈만 들어 황성규를 보았다.

“비자금 문제와 가족사를 터트릴 계획으로 보이는데 재벌 전체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다는 판단에서 준비만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군요.”

천중명은 상체를 세우고 대송의 윤성일을 내려다보듯 테이블에 놓인 보고서를 바라보았다.

“지난번에 허 의원을 작업했던 전충호라는 인물이 주로 움직입니다. 공작 분류로는 중급 수준으로 과거 군 정보국에서 근무했던 경력자입니다.”

“알겠습니다. 혹시 특별한 사항이 있으면 그때그때 알려주세요.”

“그렇지 않아도 테드 케블린이라는 과거 모사드 정보원을 계속 추적하고 있습니다. 거대 자본의 윤곽을 포함해 어떤 정보든 급한 내용이 있다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40분쯤 이야기를 나눈 황성규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마치고 일어섰다.

**

분노에 가득 찬 윤성일의 의지는 무서웠다.

사람이 살다 보면 감정 다치는 일이야 얼마든지 있다.

윤성일도 그랬으니까.

따귀쯤? 물론 화가 너무 나면 때릴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말이다.

그건 구질구질하게 사는 아랫것들 이야기지, 적어도 대한민국 재계 서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대송그룹의 윤성일 가문에서 벌어져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두고 보자, 천호득, 천중명.

너희가 잘났다고 설치는가 본데 나도 그 정도는 한다.

윤성일은 학동역 사거리의 조용한 찻집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낮에는 문을 닫는다. 그리고서 예약한 손님을 한 팀만 받는다.

“먼저 와 계셨습니까?”

찻집 안으로 들어선 윤성일이 반가운 얼굴로 중앙 탁자로 다가섰다.

“오다 보니 시간이 그렇게 됐습니다. 우리 윤 회장님이 약속을 잡아준 덕분에 모처럼 제대로 된 쌍화차를 마십니다.”

“허허허. 그렇다면 나도 오랜만에 쌍화차를 한번 마셔볼까요?”

조세원 국세청장과 악수를 나눈 윤성일은 자리에 앉으며 여주인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요즘은 운동 안 나가십니까?”

“일이 많아서요. 눈치도 보이고. 어쩌다 휴일에야 겨우 한 번씩 나갑니다. 윤 회장은 어떠십니까?”

“저도 비슷합니다. 허허허.”

쉰 중반의 여주인이 진한 한약 냄새를 품은 쌍화차를 윤성일 앞에 놓아 줄 때까지 두 사람은 골프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그래. 어쩐 일이십니까?”

적당히 반가움을 나눈 뒤에 조세원이 윤성일에게 질문을 건넸다.

“어흠! 우리 청장님께 내가 뭘 가리겠습니까? 들으셨을지 모르지만, 내 딸아이가 이번에 아주 크게 망신을 당했습니다.”

조세원은 전혀 내용을 모르는 눈치였다.

“지경그룹의 천중명 회장이 우리 아이를 손찌검했지 뭡니까?”

“예?”

“따귀를 때려서 아직도 귀와 이를 치료받고 있습니다.”

어쩐지 놀란 반응이 좀 극적이다 싶은 느낌에 윤성일은 눈매를 좁히며 조세원을 살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우리 청장님께서 도움을 주셨으면 싶습니다.”

윤성일의 당부가 끝나기도 전이었다.

조세원이 서운할 정도로 냉정하게 들고 있던 쌍화차 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어지간하면 적당히 넘어가십시오.”

그리고는 전혀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청장님?”

“지경의 신임회장을 내가 좀 압니다. 한번 물면 끝이 무서운 사람이에요. 죽은 천봉서 회장의 처가를 기억하셔야 합니다. 천상기 회장이 지금 어떤 모습인지도 살피셔야 하고.”

“그렇지 않아도 그 일도 좀 들춰낼까 생각 중입니다. 어쩌면 불법 감금일 수도 있어서…….”

“어허.”

조세원이 딱하다는 투로 윤성일의 말을 잘랐다.

“회장님과 얼굴 뵌 지가 대략 7년쯤 됩니다. 그런데도 내가 이리 말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 정도라면 참으세요. 공연히 화근 만들지 마시고.”

이 양반과 천중명 사이에 뭔 일이 있었구나.

그것도 대한민국 국세청장 조세원이 질린 얼굴을 할 정도로 꺾여버린 일이.

“하아. 우리 청장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고민하겠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매달려봐야 얻을 것이라고는 외면밖에 없다.

인생 제법 산 윤성일은 얼른 태도를 수습했다.

적당한 선에서 말이다.

“젊은 회장이 우리 청장님께 그 정도로 인정받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나저나 언제 공치러 한번 나가셔야죠? 차 식습니다.”

쌍화차를 든 윤성일이 웃는 얼굴로 차를 권했다.

눈과 입술, 볼까지 완벽하게 웃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얼마나 잔을 꽉 움켜쥐었는지 오른손 엄지손톱이 하얗게 변할 정도였다.

**

점심은 궁중 도시락 세트였다.

굴비, 갈비구이, 젓갈, 신선한 쌈 채소, 풋고추, 각종 나물 무침에 찌개만 두 가지였다.

하여간 개당 17만 원짜리 도시락 세 개를 주문한 천중명은 유진교, 최만호를 불러 회의실에서 점심을 함께 먹었다.

테이블에 찬합이 꽉 들어찬 가운데 흑미밥과 소고기뭇국을 각자 앞에 두고 함께하는 식사였다.

“벤처사업부를 독립 법인으로 발족할 생각입니다. 자본금은 3천억 수준에서 시작할 생각입니다.”

점심을 먹으며 하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운 화제였는데 유진교와 최만호는 이런 상황에 익숙해진 사람처럼 별로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새로 신설되는 벤처사업부의 본부장으로 그룹발전본부의 곽대출 이사를 고려하고 있습니다.”

천중명이 뜻을 밝힌 직후에 최만호가 얼른 물컵을 들었다.

당연하게 천중명과 유진교가 잔을 내려놓는 그를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혹시 저더러 벤처사업부를 맡으라 하실까 봐 긴장하는 바람에 목이 막혔었습니다.”

최만호의 엉뚱한 답에 천중명과 유진교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진심인가 싶어 들여다본 최만호는 실제로도 벤처사업부를 책임지지 않는 것에 안도하는 얼굴이었다.

“곽 이사의 임명을 염려할 줄 알았는데 좀 의외이긴 하네요.”

“벤처사업부는 새로운 계열사를 책임질 정도의 위치에 있는 사장단은 누구나 피하고 싶은 자리일 겁니다, 회장님.”

밥과 반찬을 입에 넣은 천중명은 좀 더 설명을 원하는 눈으로 유진교를 바라보았다.

“벤처사업에 투자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책임의 범위가 워낙 넓은 데다, 자칫 자금을 함부로 운용했다는 평가가 나오면 더는 자리를 보존하기도 어렵습니다.”

“드시면서 말씀하세요.”

“게다가 자칫 보수적으로 운용했다가는 꾸지람을 들을 텐데 임원들 누구도 책임자로 가고 싶지는 않을 겁니다. 오히려 곽 이사를 벼르던 이들에게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천중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밥을 입에 넣었다.

역시 곽대출을 벼르는 인간들이 제법 있는 모양이었다.

“두 분이 곽 이사를 많이 도와주세요.”

“분명하게 지켜보겠습니다. 어쩌면 회장님께 반기를 들 임원들을 찾아내는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유진교가 저런 식의 말을 꺼낼 줄은 몰랐다.

“그룹발전본부를 지원했다가 탈락한 직원들이 상사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는 일이 조금씩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난 조승필 회장의 인사발령까지는 지켜보았는데 기용도 부사장이 부회장이 되자 집단으로 반발하는 눈치입니다.”

적당하게 식사가 끝났다.

후식으로 함께 온 수정과를 마신 천중명은 테이블에서 상체를 세웠다.

“앞으로 일주일이나 열흘에 걸쳐 지방의 계열사를 돌아볼 생각입니다. 오전에 서류를 처리해놓고 오후에 움직일 생각인데 시간이 부족하면 이틀에 한 번 결재하겠습니다.”

“곽 이사와 움직이시겠습니까?”

확실히 유진교는 상황을 바라보는 눈이 달랐다.

“계열사에 앞으로 협조하는 게 좋을 거란 협박 정도는 해줘야 벤처사업부의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회장님.”

농담을 섞은 대꾸의 끝에서 유진교가 굵고 나직한 음성으로 천중명을 불렀다.

“모든 것을 단숨에 바꿀 수는 없습니다. 큰 물줄기를 갑자기 비틀면 꺾인 부분에서 반드시 물이 넘치게 됩니다. 그 점만 감안해 주십시오.”

옛날에 말이다.

왕이 있어서 나이 든 충직한 신하와 조용하게 대화를 나눈다면 꼭 지금 천중명과 유진교의 느낌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다고 최만호가 내시 느낌이라는 말은 아니었다.

“회장님.”

내시……, 아니 최만호가 천중명을 불렀다.

“곽 이사와 주인영 과장을 시샘하는 임원이 적지 않습니다. 온갖 험담이 그쪽에서 생산되고 있습니다.”

천중명은 묵묵하게 최만호의 말을 받아들였다.

학력이 그렇고, 무식한 행동이 그렇게 보이기 쉬웠으며, 하필이면 지금까지 해온 업무가 임원들의 비리를 캐내는 일이라 더 그럴 만했다.

“돌아보면 알겠죠.”

“지경이 더 단단하게 발전할 수 있도록 이번 순시에서 그 기틀을 만들어 주십시오.”

천중명의 말을 유진교가 듬직하게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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