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190화 (190/315)

# 190

190. 나중에 엄청난 힘이 될 거야 (3)

천중명은 모처럼 허선영과 청담동의 유명한 극장 시네홀로 향했다.

입구에서 직원에게 차를 맡긴 뒤에 8층으로 올라가면 테이블과 그 좌우에 놓인 1인용 소파에서 편안하게 영화를 즐길 수 있는 VIP 상영관이었다.

퇴근길에 바로 만나서 두 사람 모두 정장 차림이었다.

함께 북적이는 사람들 틈에서 단맛, 고소한 맛의 반반 팝콘과 음료수를 산 뒤에 VIP 관람석에 들어갔다.

VIP 상영관이라고 해도 두 명만을 위한 자리는 아니어서 영사실의 바로 앞쪽으로 대략 열 개의 테이블에 스무 명 정도의 자리가 있었다.

자리에 앉은 천중명은 광고가 나오는 동안 팝콘과 음료수를 마시며 길이 생각보다 덜 막혔다, 점심은 도시락이었다는 따위의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남들이 누리는 삶이었다.

약간 비용을 더 내는 것이 다르지만, 한 회 관람에 스무 명 정도가 이용하는 자리여서 그다지 큰 사치는 아니었다.

영화는 내내 노래를 부르더니 결국 한 명도 죽지 않은 채 끝났다. 곽대출이 끔찍해 했을 영화가 끝나고 실내에 조명이 들어왔을 때, 허선영은 마법에서 깨어난 얼굴이었다.

“맥주 한잔 할까?”

“내가 사도 되면요.”

“기쁘게 받아들이죠, 사모님.”

둘이서 극장을 나서서 승용차를 받은 천중명은 극장 뒤편의 카페로 향했다.

역시나 발렛으로 차를 맡겼다. 그리고는 접는 유리문을 길게 열어놓은 카페에 앉았다.

“이런 시간을 보내는 게 꿈 같아요.”

어둠이 내려앉은 청담동의 골목을 배경으로 웃는 허선영을 보며 천중명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꿈같다, 이런 생활이.

고통스러운 죽음 뒤에 몸이 바뀌었고, 거짓말처럼 후계자 싸움에 엉켜 들더니 어느새 여기까지 와 있었다.

직원이 위가 넓은 잔에 담긴 생맥주와 견과류 안주를 가져다주었다.

“건배해요.”

천중명은 가볍게 허선영과 잔을 부딪쳤다.

조금은 시끄러운 음악, 잘 차려입었거나 눈에 띄는 특이한 복장을 한 손님들 틈에서 천중명은 허선영과 함께 맥주를 마셨다.

행복하냐고? 무지하게 행복하다.

마음껏 웃을 수 있냐고? 그건 잘 모르겠다.

원하지 않았던 후계자 싸움이나 생각지도 못했던 홍콩물고기의 등장처럼 대송그룹과 거대자본이 꿈틀대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 생각하죠?”

“아니.”

“눈빛이 그랬는데요? 요 며칠 힘들어 보여서 걱정했었는데 지금은 다시 자신 있는 눈빛이어서 좋아요.”

천중명은 허선영을 향해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그룹의 일이 많아질수록 책임질 범위가 커지는 느낌이야. 그래서 항상 머리 한쪽에 그런 일들이 맴돌아. 딱히 대책은 없는데 피할 수도 없는 싸움처럼.”

“대송 때문이에요?”

“그 정도면 편하게?”

설마 더 큰 싸움이 있다고?

허선영이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천중명을 바라보았다.

“선영 씨. 우리 신혼여행 어디로 가지?”

“못 갈 것 같은데요? 바쁘잖아요. 난 신혼여행 가서도 일에 매달리는 회장님 때문에 속 썩고 싶지 않아요. 전화도 많이 올 거고요. 그때마다 서류보고 할 텐데 싫어요.”

“그럼 신혼여행은 내가 알아서 합니다?”

“그러세요, 회장님.”

허선영의 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가까운 자리에 앉은 남녀가 ‘꼴값들 떤다.’ 하는 얼굴로 천중명과 허선영을 곁눈으로 보았다.

“자기. 이번에 내가 뽑은 신형 뽀르쉐 색이 좀 그렇지 않아?”

여자가 이쪽이 들으란 것처럼 질문을 던졌고,

“2년만 타다 바꿔. 그것도 싫으면 내년에 바꾸면 되지. 참! 자기 아버지 병원에 속 썩인다는 의사는 어떻게 됐어?”

남자가 자부심 넘치는 대꾸를 건네고 있었다.

웃음이 나와서 천중명은 잔을 들어 맥주를 마셨다.

미안하다, 어쩌다가 회장님이란 말이 나왔는데 진짜 직함이 그래서 나온 거니까 혹시 듣기 거북했다면 그렇게라도 기분 풀어라.

잔을 내려놓은 천중명의 입가를 허선영이 닦아주었다.

“아버님도 이렇게 닦아드렸어요.”

“어디서?”

“떡국 드셨을 때요.”

이런 게 행복일 거다.

짙어가는 어둠처럼 세월의 흐름에 따라 추억으로 한 켜, 한 켜, 켜켜이 쌓이는, 아주 나중에 돌이켜 보면 이 추억에 환상이 적당하게 묻어서 더 소중하게 느껴질 이 시간이 말이다.

**

행복한 사람이 있으면 불행에 이마를 얻어맞아 좌절하는 사람도 있고, 노력한 것 이상 일어서는 집안이 있으면 반대로 뜻하지 않게 무너져서 고통스러운 가족도 있는 게 인생 아니겠나.

퇴원한 윤세계와 그녀를 바라보는 윤성일, 중간에 끼인 윤병지는 아무래도 불행한 쪽에 선 모양새였다.

“크흠.”

아직 눈가에 멍이 남은 딸을 지켜보는 윤성일의 신음에 윤병지의 고개가 저절로 앞으로 떨어졌다.

“너는 당분간 뒤로 물러나 있어.”

“예.”

지금 같은 윤성일의 지시에 반항하는 건 어디 멀리 떠나겠다고 각오했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다른 때 같으면 무슨 말씀이냐고 한마디 했을 윤세계가 조신하게 답을 내놓았다.

“자네가 삼중호텔의 경영을 잠시 살펴.”

“예, 회장님.”

윤병지의 답을 들은 윤성일이 고개를 다시 돌렸다.

“너, 허세직이란 인간이 어떻게 됐는지 들었지?”

“예. 그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 기운을 차려 퇴원했습니다.”

입을 움직일 때마다 윤세계의 볼과 눈가에 달린 멍이 현란하게 색을 바꾸는 느낌이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이다. 그러니 당분간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일 없도록 조용하게 지내.”

“허락해주시면 당분간 미국에 있을까 합니다.”

“미국은 나중에 가고, 당분간은 별장에서 지내든가 해.”

뜻밖의 지시에 윤세계가 슬쩍 눈을 들었다.

아직 흰자위 바깥쪽에 시뻘겋게 핏물이 올라와 있었다.

“지경의 천중명 회장과 그 모자란 여자아이가 무너진 걸 직접 가서 봐야지.”

왈칵 서러움이 올라왔는지 윤세계가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됐다. 살다 보면 개에 물릴 때가 있어. 앞으로 경영을 하다 보면 더한 일도 있을 테니까 마음 단단하게 먹어.”

“감사합니다, 아빠.”

“어허!”

“너무 감사해서 저도 모르게 나왔어요.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회장님.”

애틋한 딸의 모습에 윤성일이 “하아.”하고 커다랗게 숨을 내쉬었다.

**

박승양은 스텝도 가볍게 한알저축은행에 들렀고, 바람결에 흩날리는 능수버들 가지처럼 손짓해서 김도정 부장을 불러냈다. 그렇게 김도정을 불러낸 박승양은 한알저축은행 법인카드로 시원하게 밥을 먹은 뒤에 커피전문점에 들렀다.

“캐러멜 마키아토.”

주문도 평소와는 다르게 했다.

차를 앞에 둔 다음이었다.

“김 부장은 혹시 돈 냄새 맡아본 적 있어?”

“매일 맡습니다. 특히 신권이 들어올 때면 두통까지 일어날 지경입니다.”

답을 들은 박승양은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돈 말고! 내 주머니로 들어올 돈의 냄새! 그 특별하고 섬세하며 오묘한 돈 냄새를 맡아본 적 있냐고?”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김도정이 궁금한 얼굴로 박승양의 말을 기다렸다.

“내가 말이지. 천중명 회장님을 딱 뵀을 때 훅하고 돈 냄새가 풍겼던 거야! 그때 알았지. 이거 진짜다! 이거 실화다! 이거 리얼로 돈 냄새다! 이렇게.”

“예에.”

“그 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남부증권에서 얼마나 이득이 있었는지?”

김도정 부장은 반쯤 홀린 얼굴로 박승양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천 회장님의 눈빛을 보는 순간, 나는 그만 심장이 딱 멎는 줄 알았어.”

“또 돈 냄새를 맡으셨습니까?”

“지난번 냄새가 피라미가 풍기는 비린내라면 이번은 고등어 수준이야! 알지? 고등어?”

너스레를 떨 듯이 말을 쏟아내던 박승양이 매서운 얼굴로 김도정을 노려보았다.

“왜 그러시는지…….”

“내가 말이지. 저축은행 세 개쯤 인수할 생각이거든.”

김도정의 화들짝 놀란 눈을 들여다보던 박승양은 주변을 둘러본 뒤에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대부업체도 두어 곳 꾸릴 생각이고. 일본에서 자금을 받는 게 아니라 지경에서 지원받을 거야. 자네도 알지? 저축은행이 대부업체 꾸려서 충분히 대출해 줄 수 있는 고객도 그쪽으로 밀어내는 거.”

“그야…….”

“천중명 회장님께서는 그런 일을 보시고 불같이 노하시어 대부업체의 이율을 20퍼센트 이하로 하라 지시하시었다.”

말을 뚝 자른 박승양이 자세를 바로 세웠다.

“한알을 인수할 생각이거든. 도움을 주겠지?”

“예, 회장님.”

답은 기다렸다는 것처럼 바로 나왔다.

워낙 쉽게 툭 나와서 지금껏 약을 판 박승양의 맥이 다 풀릴 지경이었다.

“언제고 꼭 모셔보고 싶었습니다. 지난번 용인에서 직원 구해내실 때 얼마나 바랐는지 모릅니다. 내일 제가 한알저축은행 적정가격을 뽑아서 드리겠습니다.”

박승양이 고개를 뒤로 뺄 정도로 김도정은 적극적이었다.

**

다음 날 아침이었다.

가볍게 샌드위치로 아침을 먹은 천중명은 커피를 준비하며 허선영을 기다렸다.

사랑하는 여자에서 결혼을 앞둔 여자로 바뀌는 것은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픽 웃은 천중명이 커피를 따를 때였다.

지이이잉.

홈바의 위에 올려놓은 휴대 전화기가 짧게 울었다.

[회장님. 미국이 금리를 0.25퍼센트 올리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앞으로 1년 안에 네 번에 걸쳐 1.5퍼센트 상승할 것이라는 언질도 있었습니다.]

황성규의 문자를 확인한 천중명은 바로 답을 건넸다.

[회사에서 의논하고 싶은데 9시 30분쯤 어떠세요?]

[그 시간에 찾아뵙겠습니다.]

“무슨 일이에요?”

“아니. 오전에 약속을 하나 잡느라고. 오늘 그 옷 정말 예쁘다.”

“지난번에 아버님이 사주신 옷이에요.”

“여기 커피.”

홈바의 맞은편에 앉은 허선영이 물끄러미 천중명을 보았다.

“안 좋은 일이에요?”

“내 눈빛이 그렇게 보여?”

허선영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잘 해낼 거죠?”

“솔직히 이번 일은 아직 잘 모르겠어. 그래도 해야 하는 일이니까 제대로 해볼 생각이야.”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중명 씨는 누구보다 잘해낼 거예요. 지금껏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잖아요.”

10분쯤 함께 커피를 마신 뒤에 주차장에서 헤어져 각자 회사로 향했다.

집무실에 들어선 것은 오전 8시쯤이었다.

“회장님. 그룹발전본부 곽대출 이사가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올라오라고 해. 나는 커피 마셨으니까 곽 이사 차를 줄 때 물을 한 병 부탁해.”

“네, 회장님.”

재킷을 벗어서 옷장에 넣은 천중명이 전화 메모를 살필 때 노크와 함께 곽대출이 들어왔다.

물과 커피를 앞에 둔 다음이었다.

“고민 끝났어?”

“예.”

“결론은?”

곽대출이 먹먹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기회를 주셨으니까 회장님께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던지 곽대출은 증권사에서 싸우고 났을 때보다 눈이 더 푹 꺼져 있었다.

“야, 이 새가슴 도깨비야.”

천중명의 말을 들은 곽대출이 바람 빠지는 것처럼 웃었다.

“뭐가 겁나? 그래놓고 결국 해낼 거면서? 주 과장하고는 이야기했어?”

“아직 못했습니다.”

“말투 계속 그렇게 뻑뻑하게 할래?”

“앞으로 이렇게 지낼 생각입니다.”

의아해하는 천중명을 향해 곽대출이 설명처럼 입을 열었다.

“비서실장도 하고, 계열사 임원으로 갈 정도의 실력을 쌓아야 한다면…….”

“지랄한다.”

“아, 거? 사람이 좀 진지하게 말을 하면 들어주는 맛이…….”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 시끄러워, 속 빠진 도깨비 새끼야.”

“에이! 이 회장님이 진짜!”

그렇게 둘이서 웃고 난 다음이었다.

“미안하다, 대출아. 앞으로 네가 이겨내야 할 일들이 끔찍하고 산더미 같을 텐데 그래도 너 말고는 다른 사람이 없어. 알지?”

형의 당부를 듣는 동생처럼 눈매가 매서운 곽대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 조직 설립하고, 너 하고 주 과장 발령낸다. 알아서 잘 해결해.”

“그룹발전본부에서 근무하는 거지, 회장님?”

“당장 폭력을 사용해서 나를 노리는 게 아니라면 이참에 네가 밖에서 자유롭게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아.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뭔가 걸리는 게 있으신 거야?”

“그보다는 뭔가 뒤통수에서 간질간질하거든.”

천중명은 오랜만에 엄지와 검지만 편 오른손을 좌우로 흔들어 보였다. 위험이 다가온다는 도깨비들의 신호여서 그걸 본 곽대출의 눈빛이 단박에 달라졌다.

“거대자본? 아니면 대송? 그것도 아니면 둘이 동시에. 어떡하겠냐? 달려드는데?”

“재미는 있겠습니다. 회장님.”

“그렇지?”

천중명과 곽대출이 비슷한 표정으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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