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
189. 나중에 엄청난 힘이 될 거야 (2)
개발자 가족의 삶은 힘겹다.
손도운이나 이관수처럼 성공한 이들의 가족도 가슴에 멍에가 남을 정도이니 그렇지 못한 가족들의 삶은 당연히 힘겨울 수밖에 없었다.
천중명은 음식을 담으며 개발자들 또는 그 가족들과 일부러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말해주고 싶었다.
지치더라도 포기하지 말라고, 앞으로 기회를 만들 테니까 조금 더 힘을 내라고 말이다.
지경그룹 천중명 회장이었다.
방송에도 나왔고, 보도 매체에 나온 건 세기도 어려울 정도고, 리온자동차를 인수한 주인공이었다. 그런 천중명이 개발자들을 존중하고, 아끼고 있음을 증명하는 자리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족들, 특히 아이들의 눈에 담기는 희망을 천중명은 분명하게 보았다.
힘들겠지.
천중명이 누구보다 잘 아는 일이었다.
가끔이겠지만, 이렇게라도 위로받을 자리 만들어볼게.
적어도 노력하는 개발자가 모든 희망을 빼앗기고 우는 일은 없게 해볼게.
그것이 꼴통 회장이 할 일이니까.
아쉬움 가득한 느낌으로 자리가 끝났다.
천중명은 뷔페의 입구에 서서 케이크를 들고 가는 개발자들과 그 가족들을 배웅했다.
“아버지 멋지시지?”
뿌듯해하는 손도운의 딸 모습은 사진으로 남겼으면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모두를 배웅한 다음이었다.
“나는 여기에서 바로 퇴근할 테니까 두 사람은 알아서 움직여.”
“제가 모시겠습니다.”
“불편해! 나도 내 시간이 필요하고. 간다, 곽 이사.”
곽대출에게 농담처럼 인사를 건넨 천중명은 뷔페를 나섰다. 그리고는 주차장에서 기다리던 승용차에 올랐다.
“삼성동으로 부탁해.”
“예, 회장님.”
승용차가 출발한 뒤에 천중명은 휴대 전화기를 꺼내 버튼을 눌렀다.
- 아이고! 바쁘실 텐데 우리 천중명 회장님께서 이 박승양을 잊지 않으셨네!
누군가 들으라고 받는 게 분명한 대꾸였다.
“박 회장님. 내일 남부증권에서 잠깐 뵐까 하는데 어떠세요?”
- 남부증권에서요?
“이명선 과장도 격려할 겸해서 식사나 함께할까 합니다.”
- 역시 우리 회장님은 마음 씀씀이가 다르십니다! 그렇다면 11시쯤이 어떠십니까?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오늘 할 일은 마쳤다.
천중명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대송그룹과 거대자본을 상대하려면 남들이 지니지 못한 것들을 하나씩 준비해야 한다.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
다음 날, 출근한 천중명은 곽대출을 집무실로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앉아. 아침인데 커피 한잔 해야지?”
“감사합니다.”
부속실 직원 앞이라고 곽대출은 제법 점잖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커피를 앞에 놓은 다음이었다.
“무슨 일로 이렇게 일찍 부르신 거야, 회장님?”
“커피 마시자고.”
“아, 뭔데 그러셔? 사람 궁금하게.”
천중명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에 느긋한 표정으로 곽대출을 보았다.
아직 좀 이르다, 대출아.
그건 내가 누구보다 잘 안다.
힘들 거라는 것도 안다.
그렇더라도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정말 방법이 없을지 몰라. 그러니 어렵더라도 함께 가자.
“곽대출.”
“뭐, 회장님아?”
평소처럼 대꾸했던 곽대출이 평소와 다른 천중명의 표정을 살핀 직후였다.
“알다시피 허 의원님이 문제가 생겨서 벤처사업부를 이끌 사람이 필요해. 네가 맡아, 벤처사업부.”
곽대출이 잠시 멍한 얼굴로 천중명을 보았다.
“왜 이래? 회장님아? 지금 하는 일도 겨우 버티는 거라니까. 나는 아직 일도 미숙하고…….”
“못 배웠지.”
쿡 하고 명치를 얻어맞은 얼굴이었다. 곽대출은.
이른 시간이었다.
이제야 빌딩 숲의 사이로 삐져나온 햇빛이 집무실 창을 환하게 물들이는 안쪽에서 곽대출은 급소를 맞은 표정으로 있었다.
“벤처사업부 멋지게 성공시킨 뒤에 비서실을 맡아. 비서실장으로.”
이번엔 생각이 많은 눈빛이었다.
이해한다, 곽대출.
차라리 비서실에 넣어서 차곡차곡 일 배우고 나중에 비서실장 해도 되는 거니까.
“벤처사업부 성공시켜. 남들이 다른 소리 전혀 못 하게. 내가 지켜주는 곽대출이 아니라 능력과 실력으로 당당하게 일어서. 나중에 언제고 계열사를 맡길 수 있는 비서실장. 천중명의 유일한 심복으로 성장해.”
“진심이야, 회장님?”
천중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서실에서 경력을 쌓을 수도 있지. 그런데 그렇게 하면 나중에 계열사로 보냈을 때 너를 안 먹어줘. 밑에서 치고 올라올 수도 있고. 그런다고 눈알을 뺄 수도 없잖냐.”
곽대출이 시선을 떨궈서 찻잔을 멍하니 보았다.
“벤처사업부가 딱이야. 틀에 묶여 있지 않은 자유로운 상상이 필요하고, 개발자들의 독특한 발상을 받아들일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너 말고 더 있어?”
“내가 그런 걸 할 수 있을까, 회장님아?”
“할 수 있어, 곽대출. 주인영 과장하고 둘이서 제대로 일으켜 봐. 주 과장이 싫으면 다른 사람으로 바꿔줘?”
“그건 아니고.”
곽대출의 대꾸가 웃겨서 천중명은 픽 웃었다.
“고민할 시간을 조금만 주셔.”
“하루면 되지?”
“예.”
천중명은 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네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옆에 둘 거다. 대신 네가 다른 사람에게 당당한 모습이었으면 싶다. 벤처사업부를 맡으면 개발품에 따라 계열사 전체를 상대해야 돼.”
“혹시 그래서 이번에 계열사를 돌아보겠다고 하신 거야?”
“겸사겸사.”
졌다는 얼굴로 곽대출이 천중명을 바라보았다.
“각 계열사의 특성을 익힐 좋은 기회다. 모르는 일들이 나오면 악착같이 공부해. 그래서 계열사 어느 곳에서 자리가 비든 그곳을 메울 수 있는 임원이 돼 주라.”
“후우.”
“부탁한다, 곽대출.”
곽대출이 픽 웃었다.
“계열사 돌아본 뒤에 본격적으로 일을 맡아야 하지 않겠냐는 말도 그렇고, 뷔페에서 개발자들을 많이 알아두라고 하더니 흉악한 우리 도깨비 회장님은 이미 계산이 다 있었네!”
“얘기 끝났지?”
“하여간 하루만 시간을 줍쇼!”
“미친놈. 그 얼굴로 무슨 고민을 해?”
곽대출의 고민을 천중명은 빤히 알았다.
일을 망쳐서 천중명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염려하는 저 표정과 눈빛을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나.
“하루다. 그 정도에서 고민 끝내라.”
“예, 회장님.”
자리에서 일어난 곽대출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집무실을 나섰다.
**
오전을 바쁘게 보낸 천중명은 10시 40분쯤 본사를 나섰다.
그리고 11시에 남부증권에 도착했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승용차에서 내리는 천중명을 기다리고 있던 박승양이 맞았다.
“올라가서 뵈면 되는데 뭐하러 나와 계셨어요?”
“회장님이 먼 걸음을 하셨는데 당연히 나와 있어야지요. 아! 인사하시지요. 남부증권 문요양 회장, 그리고 이명선 과장입니다.”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회장님. 우리 남부증권에 주신 도움, 제가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문요양과 인사를 마친 천중명은 이명선에게 시선을 주었다.
김순례를 연상시키는 얼굴선과 눈매, 입술을 지녔는데 확실히 눈매만큼은 예상했던 것보다 강단 있어 보였다.
“반가워요, 이명선 과장.”
“회장님! 늘 뵙고 싶었습니다. 뭐라 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를 은혜를 입었습니다.”
진심이 묻어난 인사였다.
떨리는 눈가와 붉어진 볼이 그녀의 심정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파생거래를 하는데 이렇게 자리를 비워도 되나요?”
“제가 오전에 포지션을 모두 정리하라고 미리 말해 두었습니다. 점심 식사 때까지 거래가 없으니 그 점은 안심하셔도 됩니다.”
박승양이 대신 답을 한 다음이었다.
“이러지 마시고 올라가셔서 마저 말씀하십시오.”
문요양 회장이 권유해서 천중명은 남부증권 건물로 들어섰다.
미리 지시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대기하던 남자 직원 두 명이 천중명을 안내했으며, 5층의 사무실에 들어서자 직원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불편한 과정을 거쳐 문요양 회장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이고, 회장님! 이리 앉으십시오.”
“상석은 주인이 앉으셔야죠.”
“그렇게 하시면 제가 불편합니다.”
문요양이 천중명에게 상석을 양보하겠다고 나섰고,
“뜻을 받아주십시오, 회장님. 그래야 우리도 좀 편안하게 앉지요.”
박승양이 거드는 바람에 결국 소파의 상석에 천중명이 앉았다.
비서실의 여직원이 녹차를 가져다준 다음이었다.
예의상 한 모금을 마신 천중명은 이명선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전에 고생 많았어요. 그때 잘 견뎌줘서 고마웠는데 이제 얼굴을 보네요. 요즘 거래는 어때요?”
“이제야 파생 거래가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습니다, 회장님.”
긴장한 와중에도 눈빛을 빛내는 이명선의 말이 천중명을 든든하게 만들어주었다.
“회장님. 우리 이 과장이 하루 70억을 안정적으로 찍어내고 있습니다. 많이 올리는 날도 있고, 작은 손해를 보는 날도 있는데 1주 5일 거래를 따져보면 아무튼 하루 70억 원의 수익입니다.”
흐뭇한 박승양의 설명도 있었다.
“박 회장님께서 앞으로도 잘 지켜주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제가 매일 나와서 우리 이 과장이 필요한 건 없는지, 불편한 점은 없는지를 살핍니다. 허허허허.”
그렇게 이명선의 거래에 관한 이야기로 시간을 잠시 보냈다.
“회장님. 이 근처가 직장인들이 많아서 점심시간에는 꽤 북적입니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지금 점심을 하시지요?”
“그럼 지금 일어나시죠. 제가 사겠습니다.”
“에헤이! 뭔 말씀을 그렇게 서운하게시리! 여기 안쪽에 탕을 잘하는 집이 있거든요. 설렁탕, 어떠십니까? 설렁탕? 가격도 비싸지 않아서 여기 문 회장이 대접하기에 적당합니다.”
박승양의 말을 끝으로 넷이서 함께 일어나 회장실을 나섰다.
식당은 남부증권 바로 뒷골목에 있었다.
나무로 된 틀 안의 유리에 ‘설렁탕’과 ‘수육’이라는 글씨를 적어놓은 낡은 식당이었다.
특별한 대접 따위 없었다.
“오셨어요? 안으로 들어가세요.”
그저 반가운 인사가 전부였다.
박승양이 앞서서 안으로 들어간 네 사람은 널따란 공간 안쪽에 따로 있는 골방의 작은 상을 차지했다.
“여기! 특! 특으로 네 개!”
주문은 박승양이 여러 번 강조한 ‘특설렁탕’이었다.
거짓말처럼 주문하고 김치와 깍두기를 그릇에 담기 무섭게 특설렁탕이 나왔다.
“드시죠.”
“맛있게 드세요, 회장님.”
국물을 먼저 떠서 입에 넣은 천중명은 천호득과 허선영을 떠올렸다. 그 두 사람과 한번 와봐야겠다 싶을 정도로 설렁탕은 좋았다.
세 사람은 바닥을 깔끔하게 비웠고, 이명선은 절반 조금 못되게 남기고서 식사가 끝났다.
“아, 잘 먹었다. 우리 회장님도 다 비우셨네?”
“정말 좋았습니다. 가시죠. 밥을 얻어먹었으니 제가 차를 사겠습니다.”
“뭐 그런데 돈을 쓰십니까? 그냥 올라가서 마시면 됩니다. 얼른 가십시다. 회장실에 아까 마신 녹차 말고도 맛있는 차가 몇 가지 더 있습니다.”
박승양이 나서서 결국 남부증권을 향해 움직였다.
5층의 사무실 앞에 도착한 다음이었다.
“회장님. 저는 여기에서 인사드리겠습니다. 언제고 시간 주시면 어머니 모시고 꼭 식사 대접하고 싶습니다. 바쁘실 테니 몇 년 뒤여도 괜찮습니다. 건강하세요, 회장님.”
이명선이 천중명을 향해 깊숙하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나보다는 여기 박 회장님이 애써주셨고, 이명선 과장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정도로 노력한 덕분입니다. 기운 잃지 말고 힘내서 더 실력을 만드세요.”
“명심하겠습니다, 회장님.”
이명선이 돌아선 뒤에 천중명은 남부증권 문요양 회장실로 다시 들어갔다. 좋은 차가 많다던 회장실에서 이번에 나온 것은 봉지 커피였다.
설렁탕의 맛과 최근에 나온 엔진이 어떤 거냐는 따위의 보도 내용을 이야기하며 잠시 시간을 보냈다.
“박 회장님께 부탁이 있습니다.”
그런 뒤에 천중명은 박승양에게 생각하고 있던 것을 꺼내놓았다.
“말씀만 하십시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하겠습니다.”
“저축은행을 인수할까 합니다.”
뭐든 하겠다던 박승양이었다.
그런 그가 의아한 눈으로 천중명을 보았다.
“회장님. 단단한 저축은행은 2조 정도의 인수자금이 필요하고, 그보다 싼 놈들은 인수해서 3천억에서 5천억 원 정도 증자를 해야 합니다. 하자도 제법 있을 테고요. 물론 뭐! 내가 원래 그런 쪽 전문이기는 하지요.”
자부심 가득한 말을 뱉어낸 박승양이 표정을 단숨에 바꾸고는 상체를 천중명에게 기울였다.
“인터넷 은행도 만드셨는데 혹시 금융 회사를 제대로 일궈보실 생각이십니까?”
“체계가 필요할 것 같아서요. 멀리 보고 준비한다는 생각인데 다만, 대부업체의 금리는 년 20퍼센트 안쪽으로 할 생각입니다.”
문요양을 돌아보았던 박승양이 얼른 시선을 가져왔다.
“저축은행은 좀 덜하지만, 대부업체는 손실률이 30퍼센트를 웃돕니다. 열 명에게 돈을 빌려주면 세 명 반은 안녕인 거지요. 그 손실을 감안하면 20퍼센트 안쪽에서는 힘듭니다.”
“대부업체는 5천억 원 수준에서 시작하고, 저축은행은 5조 원 선에서 몇 개 업체를 인수했으면 싶습니다. 손실이 생기면 추가로 지원하겠습니다.”
박승양이 천중명의 눈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뭔가 있으시구만!’
그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전에 말씀드렸던가요? 우리 천 회장님 하시는 일이라면 칼을 물고 불길에라도 뛰어들겠다고.”
그런 뒤에 그는 눈빛에 걸맞는 각오를 꺼내놓았다.
“회장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그럼 제가 가지고 있는 5조 원으로 인수하면 됩니까?”
“인수도 박 회장님이 직접 하시는 거로 하시죠. 그보다 더 필요하다면 제가 증자에 참여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긴장된 표정으로 눈치를 살피는 문요양 앞에서 박승양이 시원하게 답을 내놓았다.
본격적인 준비가 제대로 시작되고 있었다.
거대자본은 환율을 이용할 테니까 대략 예상해도 최소 300조에서 500조 원이 들어가는 싸움이었고, 이기면 그만큼을 먹고 지면 여러 사람 인생 완벽하게 망가지는 싸움이었다.
이 정도는 기본 준비니까.
천중명은 픽 웃으며 봉지 커피가 담긴 잔을 들었다.
이스라엘? 모사드 출신?
홍콩물고기와 비슷하게 잡아주면 되지.
잔을 내려놓는 천중명을 박승양이 궁금해 미칠 것 같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