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
188. 나중에 엄청난 힘이 될 거야 (1)
신상훈과 화상 회의를 마친 천중명이 유진교, 최만호와 함께 집무실로 돌아온 다음이었다.
“개발 비용은 주식회사 지경에서 지원하는 것으로 결재 올리겠습니다. 대신 2조 원에 해당하는 리온자동차의 전환사채를 확보할까 합니다.”
늘 한 걸음 빠른 유진교가 투자방법을 제시했다.
“나쁘지는 않네요. 그렇게 하죠.”
“알겠습니다, 회장님.”
두 사람이 나간 뒤에 천중명은 부속실 직원을 불렀다.
“지경화장품의 손도운 개발자에게 연락해서 박삼종 개발자, 그리고 지경전자의 이관수 개발자, 이렇게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해 줘. 가족 모두를 초대하고 싶으니까 그렇게 뜻을 전하고.”
“예, 회장님.”
“식당은 부속실에서 적당한 장소로 정하고 손도운, 이관수 개발자에게 함께 하고 싶은 개발자들이 있다면 역시 가족들과 참석해도 괜찮다고 전해줘. 인원에 전혀 부담 갖지 말라고 꼭 전하고.”
“알겠습니다, 회장님.”
부속실 직원이 나간 뒤에 천중명은 천호득과 윤만석에게 차례대로 전화를 넣어서 개발 계획을 알려주었다.
“회장이 알아서 해. 왜 자꾸 그런 걸 말해?”
귀찮은 척하지만 흐뭇해하는 천호득의 답이 있었고,
“저는 회장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하는 윤만석의 간단한 답도 들었다.
“윤 실장님. 로열티 문제는 개발이 끝나면 의논하기로 하겠습니다.”
“저는 그런 걸 바란 적 없습니다, 회장님.”
“아드님의 뜻을 기린다는 의미로 생각하죠. 아직 개발이 끝나지 않았으니 당장 급하게 의논할 것도 아니고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윤만석의 먹먹한 인사를 끝으로 통화가 끝났다.
어둠이 왜 나타났는지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고, 빨간 연기가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만, 1단계는 그럭저럭 해피엔딩이었다.
“이제 한 명 남았는데?”
천중명은 모니터에 올라온 주가를 확인하며 곽대출을 떠올렸다.
이쯤에서 비서실이나 부속실로 데려오고 싶은데 당최 적당하게 떠오르는 자리가 없었다.
“옆에 책상을 하나 더 놔둬?”
책상 옆의 빈자리를 보며 픽 웃은 천중명은 인터폰의 버튼을 눌렀다.
“그룹발전본부 곽대출 이사를 불러줘.”
[네, 회장님.]
매일 도시락 함께 먹으면서 옆자리에서 일하라면 곽대출이 뭐라고 할까?
실없이 웃은 천중명은 서류에 시선을 주었다.
이틀 연속 상한가 근처에서 놀던 주가는 그 자리를 지키는 것처럼 움직임이 없었다.
**
송순주는 뜻밖의 손님을 맞아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떡해요? 이렇게 지저분한데? 말씀이라도 주시고 오시죠? 아니면 저를 부르시던가요?”
“우리가 그럴 사이예요? 서운하게 왜 그러세요?”
어찌할 바를 모르는 송순주의 손을 이은명이 따뜻하게 잡아주었다.
“저도 과일만 덩그러니 들고 왔어요. 흉보시는 거 아니죠?”
“무슨 말씀이세요? 누추하지만, 들어오세요.”
과일 바구니를 받은 송순주가 이은명을 안으로 안내했다.
“참 아늑하네요.”
“앉으세요, 사모님.”
소파로 움직이던 이은명이 걸음을 멈추고는 송순주에게 다가갔다.
“삼성동에서 우리 함께 지냈잖아요. 사모님이라고 부르시니까 서운해요. 그러지 마세요.”
“예.”
누가 봐도 이은명의 표정에는 진심이 담겨 있어서 손을 마주 잡은 송순주는 고마운 표정으로 답했다.
“유자차를 담가놓은 것이 있는데 괜찮으세요?”
“그럼요. 솜씨가 좋으셔서 기대되는데요?”
둘이서 물을 끓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잠시 뒤에 테이블에 차를 놓고 마주 앉았다.
“우환이 있으신데 이런 말씀드려서 죄송해요.”
유자차를 한 모금 마신 이은명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의원님의 일이 짧게 끝나지 않을 것 같고, 어차피 총수님께서도 조용하게 식을 올리셨으면 해서 그걸 의논드리러 왔어요.”
면목이 없어서 송순주는 고개를 떨군 채 손만 만지작거렸다.
“회장이 이곳에 들러서 허락을 받았다고 하던데요?”
“네.”
이은명은 백을 당겨서 분홍색 봉투를 꺼내 송순주의 손에 쥐어주었다.
“이건 아닙니다! 이러시면 제가 너무 면목이 없어요.”
“제가 드리는 게 아니라 총수님께서 준비하신 거예요. 시계는 지난번에 사 주셨으니 다른 예물은 절대 하지 마시고, 반지만 준비하셨으면 하신다고.”
왈칵 눈물이 올라온 송순주를 본 이은명이 비슷하게 눈시울을 붉혔다.
“삼성동에서 당분간 살게 하면 어떨까 싶어요. 결혼하면 제가 더 조심하겠습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부족한 아이인데 많이 가르쳐주셔야지요.”
“며느리야 시어머니가 안 보이는 게 최고 아니겠어요? 예쁜 아이를 회장의 배필로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장이 잘하겠지만, 저도 곁에서 잘 지킬게요.”
“고맙습니다. 저는 그저….”
또다시 눈시울이 붉어진 송순주의 손을 이은명이 곱게 다독였다.
“저도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게 두려워서 함부로 나가지도 못했어요. 우리 아픈 사연이 있는 사람들이잖아요. 결혼식 끝나면 우리끼리 맛있는 것 먹으러 다니고 좋은 구경도 하고 해요.”
“네, 사부인.”
“참 듣기 좋네요, 사부인!”
송순주를 배려하는 것처럼 이은명은 평소와 다르게 호들갑스러운 음성이었다.
저 마음을 왜 모르겠나.
송순주는 그저 고맙고, 미안해서 자꾸만 입을 삐죽였다.
**
허선영은 오후의 중간에 모친인 송순주의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날짜를 잡기로 했다는 말도 들었다.
- 봉투만큼은 돌려드리겠다고 했는데 총수님의 성격을 알지 않으냐면서 끝내 그냥 가셨어.
“네.”
허선영은 어제 천호득을 만났던 일을 간단하게 설명해주었다.
“총수님 성격에 그거 돌려드리면 두고두고 타박하실 거예요. 받으세요, 엄마. 그리고 우리 오래 갚아드려요.”
- 5억이나 돼.
적당하게 받자고 했던 허선영이 멍해서 답을 하지 못했다.
- 게다가 반지를 제외하고는 절대 다른 혼수를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어. 예단이나 예물도 필요 없다고 하시고. 결혼식도 양쪽 모두 열 명 안쪽에서만 초대하는 선에서 조용하게 치르고 싶으시대.
지금은 허선영도 정말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저녁에 의논해보고 전화 드릴게요.”
- 그래.
통화를 마친 허선영은 멍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잘할 수 있을까?
‘또 그런다. 잘할 거라면서?’
이럴 땐 정말 천중명 말고는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
곽대출과 마주 앉은 천중명은 편안하게 기계의 개발에 관한 내용을 전해주었다.
“손도운 개발자와 함께 일했다는 박삼종 개발자, 그리고 다른 분들도 가족 동반해서 저녁 식사에 초대하기로 했다. 벤처사업부를 시작할 때도 됐고, 기계 분석 건으로 도움받았는데 섣불리 봉투를 건네기도 그렇고 해서.”
“잘하셨어, 회장님.”
“너, 말인데 매번 불러서 내용 설명하기도 그렇고, 계열사를 한번 쭉 돌아볼 참인데 그 뒤에 본격적으로 일을 맡아야 하지 않겠냐?”
“지금도 암행어사 아닙니까, 회장님아?”
“우선 여기 옆에 책상 하나 더 가져다 놓고 함께 일할래?”
“에이, 진짜!”
곽대출의 반응은 천중명이 예상한 그대로였다.
“대강 체계 잡혔으니까 계열사를 돌아볼 때도 되셨지. 아직 지방은 지경전자처럼 독불장군들이 꽤 있는 것도 같아, 회장님아. 지경 신문고에 올라온 억울한 사연의 대부분이 지방 계열사에서 올라온 거니까.”
“너 올리자고 기존에 수고한 사람을 밀쳐내는 건 도리가 아닌 것 같으니까 자리는 고민해 볼게. 이번 계열사를 도는 것은 그룹발전본부에서 수행하는 것으로 하자.”
“회장님이 알아서 하셔.”
답을 한 곽대출이 씨익 웃었다.
“왜?”
“아후! 지방을 돌면 잠시라도 서류에서 빠져 있는 거 아니겠어? 나 또 행복해지려고 해, 회장님아.”
“어련하겠냐. 나도 죽겠다.”
“회장님이?”
곽대출의 질문에 천중명은 진지한 얼굴로 책상을 가리켰다.
“하루에도 많을 때는 열 건이 넘는 결재가 올라온다. 저거 한 번 밀리면 결국 유진교 본부장에게 미뤄야 하는데 그때부터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거 아니겠냐.”
“아후, 끔찍하네.”
“아무튼, 지방에서 올라온 억울한 내용을 계열사별로 추려놔. 현장을 돌아보고 판단하게.”
“예, 회장님.”
대강 의논이 끝난 다음이었다.
“이제 어둠이 밀려오는 건 정말 끝난 걸까? 손도운 선생이 봤다는 붉은빛을 회장님도 본 거잖아? 그게 끝났다는 표시였을까?”
곽대출이 궁금한 얼굴로 질문을 내놓았다.
“모르겠다.”
1인용 소파에 등과 머리를 기댄 천중명은 모처럼 편안한 자세로 입을 열었다.
“그나마 기계가 어떻게 우리 손에 왔는지 윤곽을 안 거로 만족하기로 했다. 시간이 지나면 하나씩 알게 되지 않겠냐. 그때 알아보지 뭐.”
“그러셔, 회장님.”
편안하게 대꾸를 건넨 곽대출이 약과를 집어 들었다.
**
천중명의 예상보다 놀라운 반응이었다.
참석을 신청한 개발자들만 20명에 가까웠고, 그들이 가족을 동반하면서 상상 이상으로 숫자가 불어났다.
- 회장님. 이런 기회에 가족 앞에서 으스대고 싶은 모양입니다. 면목 없습니다.
“제가 바랐던 일인데요. 오히려 잘됐습니다. 전혀 마음 쓰지 마세요. 걱정하지 마시고 원하는 분들을 편안하게 초대하세요.”
- 감사합니다, 회장님.
손도운만 해도 이미 수입이 100억 원을 넘겼다.
저녁 식사비용쯤 그도 얼마든지 지불할 능력이 있었는데 지경그룹 회장이 초대한 식사와 손도운이 돈 벌었다고 사는 저녁이 같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20명이 부인과 아이들, 양가 부모와 식구들을 부르는 바람에 참석 인원이 200명을 넘어서 여의도의 유명한 뷔페를 아예 통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예약했다.
1인당 단가를 평소보다 높여서 음식의 종류와 양이 부족하지 않도록 배려했고, 참석한 개발자들이 케이크를 들고 갈 수 있도록 준비했다.
천중명은 곽대출, 주인영 과장, 그리고 부속실 직원들과 함께 여의도의 뷔페로 들어섰다.
짝짝짝짝짝짝짝짝짝.
준비했던 모양이었다.
천중명 일행이 들어서는 순간에 커다랗게 박수가 울려 나왔다.
“회장님.”
대표로 앞에서 기다리던 손도운과 이관수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회장님께서 이렇게 초대까지 해주셔서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지난번 기계 분석까지 수고해 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이관수 개발자님도 고생 많으시죠?”
“고생이라니요? 저는 요즘 천국에서 지냅니다, 회장님.”
천중명과 인사하는 두 사람을 뷔페에 있는 이들이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회장님. 식사 전에 간단하게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
손도운이 뷔페의 안쪽을 가리켰다.
계단 두 개를 붙여놓은 듯한 높이에 네 명이 서면 적당한 크기의 둥그런 무대였다.
이런 자리에서 뺄 게 뭐 있겠나.
무대에 오른 천중명이 외롭게 있던 마이크 앞에 서자 뒤로 곽대출과 주인영, 부속실 직원들이 자리했다.
“안녕하십니까? 지경그룹 천중명입니다.”
짝짝짝짝짝짝짝짝짝.
다시 박수가 뷔페를 가득 메웠다.
“오늘 이 자리는 손도운 개발자님과의 인연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제게 정말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미라클은 다들 아시죠?”
“예에-!”
손도운의 가족으로 보이는 일행과 주변에서 자부심 넘치는 답이 있었다.
“그 뒤로 이관수 개발자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지경은 앞으로도 여러분이 개발한 제품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가능하다면 지원하겠습니다. 외롭고 힘겨운 길을 선택하신 개발자님께 존경의 말씀을 드립니다.”
개발자들 몇 명이 고개를 떨구며 감정을 추스르는 것이 보였다.
“박삼종 개발자님?”
천중명이 부르자 중간 저쪽에서 쭈뼛거리며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일어섰다.
“이번에 도와주신 점 감사합니다.”
짝짝짝짝짝짝짝짝짝.
박삼종을 격려하는 박수가 나온 다음이었다.
“오늘은 여러분의 노고를 위로하는 자리입니다. 마음껏 드시고, 편안하게 즐겨주시면 저는 더 바라는 것 없습니다. 다시 한 번 이 자리를 빌려 손도운, 이관수 개발자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말을 마친 천중명이 무대에서 내려올 때까지 박수는 계속 이어졌다.
천장을 타고 물결처럼 도드라진 공간에서 조명이 바뀌었고, 한쪽에서 기다리던 연주자들이 피아노와 현악기를 연주하며 분위기를 바꾸었다.
“이쪽입니다, 회장님.”
천중명은 직원들과 함께 둥그런 테이블에 앉았다.
오늘 저녁 식사비용만 4천만 원이 넘었다.
그러나 미라클이 벌어들인 수익, 이관수가 만들어낼 새로운 형태의 메모리와 배터리, 그리고 앞으로 연결될 개발품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별거 아닌 비용이었다.
“주인영 과장.”
“예, 회장님.”
“우선 편안하게 식사해. 다른 직원들도 마찬가지고.”
천중명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직원들이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편안하게 하자고 해도 뭐 저런 거야.
‘회장님. 폼 납니다.’
곽대출만 좀 다른 표정이었다.
“곽 이사. 개발자들과 친분을 쌓아. 나중에 엄청난 힘이 될 거야.”
“예, 회장님.”
음식을 향해 걸으며 천중명이 조언했고, 곽대출이 나직하게 답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