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
187. 그게 계산이 나오겠다 (2)
다음 날도 지경의 모든 계열사 주가가 상한가나 상한가 근처에서 출발했다. 천중명이 모니터를 통해 주가를 확인했을 때 노크와 함께 유진교가 들어섰다.
“회장님. 혹시 주가를 확인하셨습니까?”
“예. 어제와 다를 게 없네요.”
대화는 간단한데 천중명이 보유한 주식의 가치가 하루 만에 또 1조 원이 올랐다는 사실만은 간단하지 않았다.
“용인의 기계는 어제 자정에 항공편으로 스웨덴에 보냈습니다. 그 사실이 알려지기 전에 간단하게나마 발표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문제가 좀 있는데요. 우선 앉으세요.”
유진교에게 소파를 권한 천중명은 어제 손도운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있는 대로 전해주었다.
“우선 그걸 확인한 손도운 개발자가 그 방면의 전문가가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개발한 기계도 아니고요.”
이어서 천중명은 간략하게나마 윤만석의 아들과 얽힌 이야기도 털어놓았다.
“그런 내막이 있었군요.”
이제야 상황을 짐작한 유진교가 무거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보관 중이던 기계의 가능성을 검토한 것이고, 리온자동차에서 최종 결과가 나와야 답을 할 수 있다고 발표하시면 어떻겠습니까?”
“그 정도면 나쁘지 않네요. 그렇게 발표하시고, 공트와 거양의 제안은 좀 더 고민해 보는 것으로 미루세요.”
천중명은 유진교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공동개발과 기술이전 제안에 관한 답을 뒤로 미뤘다.
“그럼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그나마 홀가분한 표정으로 유진교가 집무실을 나선 뒤에 천중명은 책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당장 할 일은 다했다.
지금은 결과를 기다리며 오늘의 일에 충실할 때였다.
**
기계를 받은 신상훈은 최만호와 통화했고, 이어서 손도운에게 전화를 걸어 기본적인 내용을 다시 확인했다.
다른 사람 아닌 천중명 회장이 직접 보낸 기계였다.
신상훈은 리온자동차의 수석 엔지니어 파크 피터슨을 불러서 내용을 설명했고, 상용화 가능성을 파악해달라고 요청했다.
솔직히 말해야 한다.
엔지니어 특유의 자부심을 지닌 피터슨은 우선 호기심을 보였고, 다음으로 어느 정도는 무시하는 태도였다.
한국에서 20년 전에 만든 기계가 얼마나 대단하겠나.
리온자동차를 인수했다는 이유로 한국의 경영진이 별별 쓸데없는 지시를 내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눈치였다.
“엔지니어 네 명을 배정하겠습니다. 끝나는 대로 보고하지요.”
그래도 새로운 총괄사장의 지시라고 수석 엔지니어 피터슨은 네 명의 보조 엔지니어와 함께 기계를 분석하기로 했다.
이틀이 지난 다음이었다.
회색 작업복에 하얀 안전모를 쓴 수석 엔지니어가 놀란 눈으로 신상훈의 방으로 들어왔다.
“사장님. 이 기계가 정말 20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 맞습니까?”
“무슨 일입니까?”
“이건 말이 안 되는데요! 20년 전에? 상태로 봐선 그런 것 같기도 한데.”
피터슨은 확실히 흥분한 상태였다.
“괜찮으시면 기계를 보시죠. 보시면서 설명하겠습니다.”
그래도 리온의 수석 엔지니어인 피터슨이었다.
유명한 자동차 회사에서 여러 번에 걸쳐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지만, 리온자동차의 정신을 잇겠다며 남은 고집스러운 사람.
신상훈은 냉정하게 살피겠다는 생각으로 그를 따라 연구실로 향했다.
기계는 완벽하게 분해되어 기다란 선반에 놓였고, 맞은편의 벽에 구조도가 붙어 있었다. 신상훈이 들어서자 그곳에 있던 엔지니어 네 명이 한쪽으로 비켜섰다.
이 사람들 봐?
신상훈은 엔지니어들을 둘러본 뒤에 기계가 놓인 선반으로 다가섰다. 자부심 강한 이들의 눈빛에 담긴 놀라움이 신상훈의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하고 있었다.
“이 기계대로라면 블루크루드를 생산하는 엔진의 개발 기간을 대폭 단축할 수 있겠습니다.”
신상훈은 설명을 재촉하는 눈으로 수석 엔지니어 피터슨을 바라보았다.
“초기 버전인 만큼 기술적인 결함은 확실히 있습니다. 특히, 최초 1천도에 가까운 열을 만들어낼 에너지는 배터리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결함을 해결할 수 있습니까?”
“이 5번 탱크에서 최초 에너지를 지원하는 구조인 것 같은데 지금은 텅 비어 있습니다.”
흥분한 수석 엔지니어의 설명을 신상훈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걸 보시면 됩니다. 이 기계는 동력장치를 만든 뒤에 엔진을 붙였습니다. 이 장치가 있으면 엔진이 가동한다. 이해되십니까?”
“거기까지는 알겠습니다.”
“우리는 5번 탱크 대신에 엔진을 이용하는 겁니다. 배터리로 스타트 모터를 돌려서 엔진을 구동합니다. 여기까지는 기존의 엔진 구동과 같습니다.”
신상훈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에 엔진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이용하면 블루크루드 생산에 필요한 1천도의 열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
수석 엔지니어는 마치 자신이 새로운 엔진을 개발한 것처럼 자부심 넘치는 얼굴이었다.
“그렇다면 새로운 엔진을 개발할 수 있다는 말이네요?”
그러나 신상훈의 질문에 피터슨의 표정이 착 가라앉았다.
“이 엔진을 상용화 단계까지 개발하는데 2조 원 정도의 비용이 필요합니다.”
새로운 회사를 인수해서 아직 틀도 제대로 잡지 못했다.
리온자동차를 정상화하는 데만 10조 원의 비용이 들어가는 마당에 느닷없이 엔진 개발 비용으로 다시 2조 원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해야 한다.
“이 기계를 분석한 내용과 가능성을 보고서로 만들어 줄 수 있습니까?”
“그건 이미 만들어 놓았습니다.”
피터슨은 오른쪽 책상에 있던 스웨덴어로 만들어진 보고서를 신상훈에게 건네주었다.
“기간을 얼마로 예상합니까? 상용화 할 엔진을 개발할 때까지요.”
“6개월에서 1년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 분야는 아직 전문연구원이 부족하고, 독일이 기술 유출을 극도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개발비용만 지원된다면 우리 자체 기술로 완성하고 싶습니다.”
“따지기는 싫지만, 실패할 확률도 알고 싶습니다.”
“새로운 엔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기계의 업그레이드 버전을 만드는 일입니다. 실패한다면 아마 기간이 늘어나는 것 정도가 될 겁니다.”
고개를 끄덕인 신상훈은 보고서를 넘겼다.
“사장님.”
그리고 그런 그를 수석 엔지니어 피터슨이 나직하게 불렀다.
“화상회의를 할 계획이라면 나와 엔지니어들도 참석하고 싶습니다. 회장님께 기회를 달라고 직접 부탁드리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사장님께서 회장님께 통역해 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본사의 기획실장님께 요청해보겠습니다.”
보고서를 넘기며 연구실을 나서다가 문에 부딪힐 뻔했던 신상훈을 엔지니어 한 명이 얼른 나서서 상체를 잡아주었다.
고개를 든 신상훈을 향해 엔지니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님께 잘 말씀드려 주십시오. 원격 회의에도 꼭 참석하고 싶습니다.’
스웨덴 엔지니어의 파란색 눈이 신상훈에게 그렇게 열정을 전하고 있었다.
**
기계를 보내고 닷새가 훌쩍 지났다.
그사이 인터넷은행의 허가 신청이 통과되어서 조직과 인원 보강에 그룹발전본부는 정신이 없었다.
대출금 한도, 은행장 임명, 새로운 법인의 주식 보유까지, 하루에도 급한 결재가 다섯 건 이상 새롭게 올라오는 바람에 천중명 역시 정신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다.
똑똑똑.
오전에 정신없이 회의를 마치고 내려갔던 유진교가 최만호와 함께 다시 천중명을 찾았다.
“회장님. 리온자동차 신상훈 총괄사장이 보내온 보고서입니다.”
천중명은 책상에서 일어나 두 사람에게 소파를 권했다.
기다리던 내용이었다.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싶었다.
천중명은 두툼한 보고서의 가장 앞 페이지에 있는 요약본을 먼저 살폈다.
[블루크루드를 생산하는 초기 모델인 것은 확실합니다. 초기 버전인 만큼 기술적인 보완이 필요하다는 평가입니다.]
천중명은 보고서를 계속 읽어나갔다.
[손도운 개발자의 의견에 따라 5번 탱크를 조사해보았으나 붉은빛, 또는 다른 에너지의 반응은 없었습니다.]
그 뒤로 각 부품의 역할과 부족한 점 등이 대략 20페이지의 보고서에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중간 내용을 빠르게 살핀 천중명은 다시 가장 앞 페이지로 돌아왔다.
[수석 엔지니어는 이 기계를 통해 상용화가 가능한 엔진을 완성할 수 있다는 판단입니다.]
그 뒤로 개발 기간과 2조 원의 비용이 필요하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결국, 기적적인 결과는 없었지만, 그래도 한 개발자의 노력이 헛되지 않아 분명한 영감을 전해준 모양이었다.
어쩌면 고물로 팔렸을지 모를 성태환의 개발품이 윤만석의 아들과 천호득의 딸을 통해 천중명에게 전달되더니 느닷없이 2조 원의 개발비를 내놓으라고 하는 꼴이기도 했다.
‘2조 원이라.’
새로운 엔진을 개발하는 일이다.
평창동에서 잠들었던 기계가 어둠을 계속 보여준 이유가 이거였을까?
깨워달라고.
이제는 역할을 하게 해달라고.
당신은 그럴 능력을 지니지 않았느냐고 말이다.
“회장님. 신상훈 총괄사장이 수석 엔지니어를 포함한 엔지니어들과 화상회의를 요청했습니다.”
고민에 빠진 천중명을 최만호가 나직하게 깨웠다.
“엔지니어들이 자발적으로 요청한 일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개발에 강한 자신을 지녔고, 또 단순히 블루크루드를 생산하는 것과는 비교하지 못할 경제성을 지녔다고 판단했답니다.”
천중명을 향해 최만호는 조심스럽게 내용을 전했다.
“지금 기다리는 건가요?”
“예, 회장님. 화상회의에 관한 결정이 나올 때까지 신상훈 총괄사장과 엔지니어 모두 회사에서 대기한다는 보고였습니다. 시차와 회장님의 바쁜 일정을 고려했다고 합니다.”
저렇게까지 기다리겠다는 걸 굳이 외면할 이유는 없는 일이었다.
“어디로 가면 되죠?”
“바로 전화를 넣어서 회의를 준비하라고 지시하겠습니다. 화상회의는 회의실에서 가능합니다.”
최만호가 휴대 전화기로 신상훈과 통화한 뒤에 천중명은 두 사람과 함께 회의실로 움직였다.
기다란 타원형 탁자의 끝에 천중명이 앉았고, 좌우로 유진교와 최만호가 자리했다.
최만호가 스위치를 누르자 짧고 얇은 마이크의 끝에 먼저 빨간 불이 들어왔고, 이어서 정면의 모니터에 신상훈과 그를 중심으로 좌우에 앉은 스웨덴 엔지니어들이 떠올랐다.
-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고생 많지요?”
- 아닙니다, 회장님. 뜻을 받아주셔서 먼저 감사드립니다. 제 오른쪽이 이번 보고서를 작성한 수석 엔지니어 파크 피터슨입니다.
신상훈이 시선을 돌린 다음이었다.
- 안뇽하셉니까? 회장님. 저는 파크 피러슨입니다.
어색한 한국어와 능숙한 스웨덴어 발음이 뒤섞인 묘한 인사가 건너왔다. 확실히 목소리가 화면보다 반 템포쯤 늦게 건너왔다.
“천중명입니다. 반갑습니다.”
콧수염을 두툼하게 기른 피터슨을 비롯해 자리에 참석한 엔지니어 모두 긴장된 표정이었다.
힘겹던 리온자동차를 인수해 10조 원을 투입하는 천중명에게 또다시 연구비로 2조 원을 요구한다는 사실이 그들을 눈치 보게 하는 모양이었다.
“보고서는 봤습니다. 따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 회장님. 그 점에 관해 우선 수석 엔지니어가 드릴 말씀이 있답니다.
천중명의 시선 앞에서 개발에 달려들고 싶은 욕망과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싶은 열정이 수석 엔지니어의 눈과 표정, 태도에 가득 담겨 있었다.
신상훈의 눈짓을 받은 그가 앞에 두었던 A4 용지를 들었다.
- 회장님.
그의 말을 신상훈이 우리말로 전해주었다.
- 이번에 보내주신 기계를 통해 완벽하게 새로운 엔진을 떠올렸습니다. 인원을 보강하고, 장비를 구입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신다면 반드시 지경과 리온의 이름을 빛나게 할 최고의 엔진을 만들겠습니다.
각오를 전하는 중년의 엔지니어를 다른 엔지니어들이 기대 반, 불안감 반을 담아 지켜보고 있었다.
- 이번 개발을 허락해 주십시오.
A4 용지를 내려놓은 피터슨이 고개를 숙였고, 엔지니어 네 명이 또 비슷하고 엉성하게, 그러나 공손한 태도로 함께 고개를 숙였다.
“신상훈 총괄사장.”
- 예, 회장님.
“자신 있어요?”
말이 좋아 2조 원이지 끔찍한 금액이었다.
그 개발을 앞두고 천중명은 자신 있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신상훈 당신과 당신의 판단을 믿어주겠다는 표현을 저보다 더 확실하게 담는 질문이 있을까?
신상훈이 좌우를 돌아본 뒤에 모니터를 향해 시선을 똑바로 들었다.
- 이 도전에 실패한다고 해도 리온자동차의 임직원에게서 2조 원보다 값진 충성도를 얻을 것이라 자신합니다.
스웨덴 엔지니어들이 힐끔힐끔 바라보는 옆에서 신상훈은 단단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 회장님. 무리한 요청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와 리온자동차, 그리고 이곳의 엔지니어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흠.”
테이블을 향해 상체를 기울인 천중명은 확인하듯 유진교와 최만호에게 번갈아 시선을 주었다.
‘회장님께서 판단하십시오.’
‘기회를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두 사람 모두 반대의 뜻은 없어 보였다.
천중명은 정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신상훈 사장.”
- 예, 회장님.
답이 반 템포 늦게 스피커를 통해 나왔다.
“개발합시다.”
멈칫했던 신상훈이,
- 감사합니다! 회장님!
흥분을 감추지 못한 음성으로 답을 터트렸다.
“피터슨에게 멋진 결과를 기대한다고 전해주세요”
- 예, 회장님.
그가 고개를 돌려 스웨덴어를 전한 다음이었다.
- 우아!
주먹을 움켜쥔 피터슨과 엔지니어들이 탄성을 쏟아냈고,
- 타크(Tack)! 타크(Tack)! 감사합니다! 회장님!
불쑥 나온 스웨덴어와 연습한 것이 분명한 우리말 인사가 연달아 먼 거리를 달려와 천중명의 회의실을 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