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
186. 그게 계산이 나오겠다 (1)
손도운과 박삼종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형님! 형님도 봤죠? 붉은빛?”
5번 탱크의 연결부위를 푼 순간에 피처럼 붉은빛이 쏟아졌다가는 어둠을 파고드는 비수처럼 날카롭게 뻗은 뒤에 사라졌다.
“전에 성태환 선생님과 개발할 때도 이런 게 있었어?”
“아뇨. 처음 봤어요. 이거 완벽하게 블루크루드를 생산하는 장치잖아요. 이쪽에서 연료를 생성해서 옆의 엔진을 돌리는 거요. 그런데 선생님은 무한동력에 집착하셨거든요.”
손도운은 이제야 감을 잡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차라리 이퓨얼 시스템으로 발표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무한동력장치에 집착하셨던 게 문제였던 것 같다. 당시에는 이 구동장치를 유지할 배터리도 제대로 없었을 텐데.”
“그러게요. 그럼 5번 탱크의 아까 그 빛이 배터리를 대신했을까요?”
박삼종의 질문을 들은 손도운이 허리를 숙여서 내시경 카메라를 들었다.
“우선 안을 살펴보자. 거기 좀 잡아 봐.”
“예.”
앞쪽에 카메라와 플래시가 내장된 굵직한 선을 5번 탱크 안으로 넣자 내부의 모습이 모니터를 통해 나왔다.
“뭐야? 텅 비었잖아요?”
“후! 그럼 그 빛에 비밀이 있는 건가?”
손도운은 한쪽에 세워놓은 디지털카메라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분해하는 과정을 찍는 중이어서 녹화된 영상을 돌려보면 붉은빛을 확인할 수 있을 일이었다.
“됐다. 이 정도면 블루크루드를 자체 생산해서 구동하는 엔진을 개발한 수준이니까 더 이상은 우리가 아니라 엔진 전문가가 확인하는 게 맞다.”
내시경 카메라를 꺼낸 손도운은 마른걸레를 들었다. 그런 뒤에 그는 성태환이라는 개발자에게 보이는 예우처럼 기계의 구석구석을 세심하고 꼼꼼하게 닦았다.
‘뵙지는 못했지만, 선생님이 개발한 기계를 제가 확인했습니다. 20년 전에 이런 개발품을 만드신 선생님께 존경의 뜻을 전합니다.’
박삼종이 의아한 눈으로 볼 정도로 경건한 태도로 기계를 닦은 손도운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선생님이 개발하신 이 엔진이 세상을 청정하게 만들고, 작게는 지경, 넓게는 우리나라에 큰 이익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선생님의 개발품을 이렇게 볼 수 있었음에 감사합니다.’
손도운은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마지막 인사를 마쳤다.
“왜?”
“형님이 인사하는 걸 보니까 갑자기 선생님 생각이 나서 그래요. 선생님을 형님이 대우하는 거 같아서요.”
먹먹한 얼굴로 건네는 박삼종의 답을 들으며 손도운은 장비를 들었다.
“이제 조립하자.”
“예. 그런데 형님? 이거 바로 실용화할 수 있을까요?”
“그건 또 그 분야의 전문가가 판단할 일이지 우리 몫이 아니야. 조심해! 그래!”
커버를 든 손도운은 행여나 작은 흠집이라도 날세라 조립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
분당을 향하는 동안 천중명은 천상기와의 대화 내용을 곽대출에게 들려주었다.
“천봉서 회장이 모두 쥐고 죽었다는 거네, 회장님?”
“그렇지. 일단 여기까지만 하자. 제대로 알아내는 것도 없이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녀서 일만 만드는 꼴이잖냐.”
그런 뒤에 천중명은 어둠처럼 붉은 연기가 감쌌던 일을 말해주었다.
“오!”
“왜?”
“뭔가 좀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누군가 어둠의 심장을 푹 찔러서 더는 어쩌지 못한다는 의미 같기도 하고.”
곽대출의 말에 픽 웃었을 때 눈앞에 납골당이 보였다.
주차장에서 내린 천중명은 국화를 한 다발 사서 본관 건물로 들어갔다. 복도를 걸어 도착한 곳에서 어머니는 지난번과 똑같은 눈빛과 미소로 천중명을 받아주었다.
바깥과 달리 이곳은 시간이 정지한 느낌이었다.
‘보고 계세요? 아버지의 흔적을 찾았는데 당장은 알아내기 어려워요. 조금 여유를 갖고 알아볼게요. 서두른다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아서요.’
국화를 앞에 놓은 천중명은 그렇게 잠시 서 있었다.
‘잘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최선을 다하고는 있어요. 또 올게요.’
10분쯤 뒤에 천중명은 밖으로 나왔다.
“여기.”
음료수를 사놓고 기다리던 곽대출이 권하는 담배를 받았고, 둘이서 불을 붙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그리고 그때 휴대 전화기가 울었다.
“여보세요?”
- 회장님. 손도운입니다. 통화가 괜찮으실까요?
“예, 말씀하세요.”
천중명은 곽대출을 향해 ‘손도운 개발자’라고 입 모양으로 알려주었다.
- 블루크루드를 자체 생산해서 엔진에 연결해놓은 장치로 보입니다. 저는 윤곽만 알아봤기 때문에 정확한 판단은 이 분야를 담당한 엔지니어가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그 옛날에 이런 기계를 발명한 거라고?
정말이지 뜻밖의 결과여서 천중명은 바로 답을 하지 못했다.
- 회장님?
“아! 들었습니다. 블루크루드를 자체 생산하는 장치로 보인다, 맞죠?”
- 예, 회장님. 그런데 제가 내부의 다섯 번째 탱크를 확인할 때 붉은빛이 쏟아져 나왔었는데 탱크 내부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붉은빛이요?”
곽대출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서 천중명을 바라보았다.
- 예, 회장님. 분명 정말 붉은 빛이었습니다. 혹시 몰라서 오늘 분해과정을 녹화해 놓았는데 어떻게 된 건지 영상이 제대로 찍히지 않았습니다. 붉은빛은 분명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그게 장비의 작동에 필요한 건가요?”
- 아마 자체 구동을 위한 에너지였던 것 같은데 지금은 배터리를 연결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고생하셨어요. 이중성 대표에게 잘 보관하라고 전해주시고, 절대 말이 새나가지 않도록 부탁합니다.”
- 고생이라니요? 회장님을 위해 뭔가 도와드릴 일이 있어서 행복했고, 이런 위대한 개발품을 직접 확인할 기회를 주신 것에 오히려 감사합니다. 염려하시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겠습니다.
통화가 끝났다. 그리고 천중명은 당연하게 곽대출에게 지금 내용을 알려주었다.
납골당의 본관 건물에서 주차장으로 향하는 열댓 개쯤 되는 계단 앞의 벤치였다.
“뭐가 이래, 회장님? 총수님은 그 기계가 답이 없다고 하지 않았어?”
“20년 이전에야 이걸 알아보는 사람이 드물었겠지. 기계를 좀 더 정밀하게 조사해 본 뒤에 결과를 가지고 가서 말씀드리면 그때 알 수 있겠지.”
“그러네.”
천중명은 벤치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시선의 저쪽에서 상복을 입은 사람들이 주차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버지 성태환의 마지막 모습은 어땠을까?
알고 싶은 것은 산더미 같은데 지금은 인내심을 가지고 순서를 기다려야 할 때였다.
**
양서평은 심각한 표정이었다.
“프랑스의 공트 자동차가 공동개발을 의뢰할 정도의 엔진을 개발해 놓았으니 우리가 내민 조건이 보일 리가 없겠지.”
말을 뱉은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류효양을 노려보았다.
“거양이 이래서는 안 돼. 공트가 공동개발을 제안할 정도의 엔진 개발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이 말이 돼? 그 바람에 내가 헛소리나 지껄인 인간이 됐잖아.”
“죄송합니다.”
“크흠.”
불편한 심사를 토해낸 양서평은 출력해 온 기사에 시선을 떨궜다.
“이 엔진이 그렇게 좋아?”
“배터리로 한계가 있는 트럭과 중장비에 적합한 엔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중국에서도 얼마든지 환영받을 게 아닌가.”
“그렇습니다.”
류양회의 답을 확인한 양서평의 눈에 욕심이 서서히 올라왔다.
“매연을 내뿜지 않는 트럭이라?”
“요소수를 사용하는 것과도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청정한 엔진입니다.”
“천 회장이 그렇게 배짱을 부렸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군.”
양서평은 뭔가 결심한 얼굴이었다.
“중국의 모든 트럭을 바꿀 수 있다면 얼마나 벌어들일 수 있지?”
양서평의 질문을 받은 류효양은 바로 답을 하지 못했다.
정부의 지시 한 마디면 엔진을 바로 교체해야 하는 곳이 중국이었다.
트럭과 중장비를 모두 새로 만들어서 판매한다고?
당장 계산조차 안 되는 엄청난 규모였다.
**
윤성일은 바늘을 세워놓은 소파에 앉은 사람처럼 참혹한 얼굴로 윤병지를 노려보았다.
“천호득, 그 영감이 허선영이란 아이를 데리고 세계가 운영하는 호텔에 나타났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이야!”
윤병지는 고개를 숙인 채 숙명처럼 윤성일의 고함을 묵묵하게 받아들였다.
“뭔가 방법을 좀 내놔 봐! 고개 숙이고 시간 지나가기만 바라지 말고! 제발!”
윤성일의 고함이 그의 현재 처지와 심정을 완벽하게 표현해 주고 있었다.
손님으로 왔으니 내쫓기도 어려운 판에 하물며 그 손님이 재계에서 가장 성질머리 더럽고, 뒤끝 오래가는 데다, 괴팍하기로 첫손가락에 꼽히는 천호득이니 말 다했다.
딸은 따귀를 맞아서 병원에서조차 화들짝 놀라는 증세를 보이는데 폭행한 아들의 아버지가 예비 며느리를 데려와 커피를 주문하고서 시간을 보낸다고 들었다.
삼중호텔 직원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나.
그들이 앞으로 윤세계는 물론이고, 윤성일까지 대송그룹의 집안을 어떻게 여기겠느냔 말이다.
“딸의 뺨을 때려놓고, 한쪽에서는 엔진을 개발해? 내가 지경을 두고 보면 사람이 아니다!”
윤성일이 어찌나 어금니를 세게 깨물었는지 그의 볼 뒤쪽이 시뻘겋게 변해 있을 지경이었다.
당장에라도 쫓아내라고 고함을 지르고 싶다.
아니면 달려가서 당신이 여길 무슨 낯짝으로 오냐고 물이라도 얼굴에 끼얹어 주고 싶은데….
윤성일은 천호득의 섬뜩한 눈빛과 아집 가득한 입술을 떠올리며 인상만 찌푸렸다.
“에이, 천하에 사악한 인간! 그래도 난 아들을 사위 삼겠다고까지 했었는데 그걸 모를 리 없는 양반이 어떻게 호텔에 그 천박한 여자아이를 데리고 나타 나냐고!”
처절한 윤성일의 혼잣말이 고개를 떨군 윤병지를 거쳐 집무실 바닥으로 사라졌다.
**
천중명은 먼저 윤만석에게 전화를 넣었다.
그런 뒤에 기계에 관해 설명했다.
“원래 만나서 의논하는 게 옳은 것 같은데 오늘 이미 한번 뵀으니 전화로 하죠. 괜찮다면 엔진을 리온자동차에 보내고 싶습니다.”
천중명의 제안을 들은 윤만석은 답이 없었다.
이해한다.
죽은 아들이 남긴 기계를 해외로 보내는 것이 내키지 않을 테고, 성공하기 어렵다고 들었던 기계가 느닷없이 청정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다고 하면 누구라도 생각이 많아질 일이었다.
- 회장님. 자신 있으십니까?
“그런 것보다는 헛되게 묵혀두느니 세상에서 빛을 보게 하는 것이 더 옳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직은 로열티를 얼마 주느니 하는 말 따위를 할 때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말이다.
정을 느끼지는 못하지만, 천중명의 입장에서는 어머니가 남은 평생을 병원에서 보내다가 쓸쓸하게 죽게 한 원인이었고, 아버지 성태환이 만든 기계이기도 했다.
가능성을 더 판단해서 전문가의 의견이 나오고, 생산하겠다는 결정이 떨어졌을 때, 공정하게 윤만석의 몫을 정해주는 게 좋았다.
- 회장님의 판단에 따르겠습니다.”
꽤 지루한 고민 끝에 윤만석의 답이 있었다.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통화는 그렇게 뜬금없이 끝났다.
“윤 실장이 우리 뜻대로 하란다.”
곽대출에게 결과를 알려준 천중명은 바로 최만호의 번호를 눌렀다.
- 예, 회장님. 최만호입니다.
“지경화장품에 있는 기계를 최대한 서둘러서 리온자동차로 보내주세요. 그 결과에 따라 공시도 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 예, 회장님. 절차를 확인해보고 항공편으로 발송하도록 준비하겠습니다.
“보내는 게 우선입니다. 못 보낼 상황이 아니면 절차나 과정은 보고하지 않아도 됩니다.”
천중명은 통화를 마쳤다.
뭔가 복잡하게 돌고 돌아서 천중명의 품으로 들어온 것 같은데 그만큼 풀지 못한 숙제가 많이 있었다.
“회장님. 만약 블루크루드를 생산해서 움직이는 엔진이면 우리 예상 수입이 얼마나 되는 거야?”
“그게 계산이 나오겠냐. 유럽은 기준이 강화돼서 바로 투입이 가능하고, 중국 시장의 상용 자동차 대수까지 합하면 진짜 천문학적 매출이 나올 텐데.”
“거참. 모르는 사람이 보면 리온자동차를 인수한 이유가 정말 이 엔진 때문이라고 생각하겠네. 5년 안에 블루크루드를 이용하는 엔진을 만들려고 했었는데 그게 완성품으로 딱 나타난 거 아니셔?”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는 천중명을 향해 곽대출이 장난기 가득 담긴 표정으로 눈을 부라렸다.
“왜 이래? 내가 이래도 그룹발전본부 이사야.”
“오!”
“어허! 이 망할 회장님이 진짜!”
그래도 곽대출 덕분에 웃는다.
어쩌면 지치고 힘들었을 오늘이 말이다.
“이제 어디로 가시나?”
“저녁 먹고 평창동에 들려보려고. 기계에 관해 말씀드리는 게 좋겠다.”
“그럼 일어납시다. 뭘 드실까, 회장님아?”
“짜장면에 탕수육?”
“코올!”
곽대출이 흡족한 얼굴로 승용차를 향해 걸었다.
**
곽대출과 함께 저녁을 먹은 천중명은 그 차를 타고 평창동으로 향했다.
“용인에 들렀다면서?”
“예, 아버지.”
서재에 들어선 천중명을 천호득은 모처럼 밝은 표정으로 맞았다.
“윤 실장이 전화했었다.”
“엔진 관련한 이야기도 들으셨어요?”
“큰형을 시켜 기계를 확인했었는데 전혀 쓸모없는 기계란 말을 듣고는 2층 거실에 두었었다. 세월이 흘러 기술을 발견한 건지….”
천호득은 말끝을 삼키고는 씁쓸한 웃음만 보였다.
“리온자동차로 보내서 정확하게 파악해 볼 생각입니다.”
“윤 실장의 한을 풀 수 있으면 좋겠지. 회장이 알아서 해. 그러면 돼.”
천중명의 설명을 천호득은 순순히 받아들였다.
“오늘 점심은 어떠셨어요?”
“윤성일이 속 좀 탔겠지.”
“예?”
반문하는 천중명을 천호득이 천천히 돌아보았다.
“대송의 윤성일을 만만하게 보면 큰일 나. 회장이 능력이 있다고 해도 그는 오랫동안 쌓아둔 인맥이 있거든. 그걸 쉽게 생각하지 마.”
“조심할게요, 아버지.”
“흥! 내가 오늘 다녀왔으니 당분간 인맥을 이용하겠다는 생각이야 함부로 못 하겠지.”
천호득은 윤성일이 앞에 있다는 것처럼 날카로운 눈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