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185화 (185/315)

# 185

185. 우리가 해결하면 되지 (3)

묘한 웃음이었다.

천중명의 질문 하나로 천상기는 마치 모든 것을 알았다는 의미의 웃음을 웃었다.

“인정해.”

“뭘?”

“너, 진짜 천중명 아니지.”

질문을 던진 천상기가 눈알을 흘려 천중명을 보았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인간의 독하고 강한 의지 하나만큼은 인정한다.

“네가 다 망쳐놓고 나한테 묻는 게 그렇잖아.”

약 기운에 쏟아져 나오는 말이어서 천중명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기계고, 화재고 형님이 다 알아서 하기로 했던 건데 네가 죽게 했잖아. 우히히히. 안 그랬으면 총수님이 죽었을 테니까 그게 그건가?”

미친 사람처럼 웃던 천상기의 표정이 딱 굳었다.

“형님이 보여. 나 좀 살려줘.”

그런 뒤에 그는 종잡기 어려운 말을 내뱉었다.

“나도 당해서 이 꼴이에요! 나한테 이러지 마세요! 아아악! 무서워! 저리 가! 왜 나한테 그래!”

팔을 위로 천상기가 힘겹게 버둥댔다.

“끄윽! 끄으윽!”

천상기가 제 목을 조르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토해내고 있어서 천중명은 팔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터억!

어디에서 이런 힘이 났을까?

천중명의 손목을 잡은 천상기가 무서운 눈과 표정을 하고는 상체를 반쯤 침대에서 띄웠다.

“나 죽이지 마. 제발!”

“안 죽여.”

“죽이면 안 돼!”

“아버지하고 약속했어.”

인생이 불쌍해서 건넨 답이었다.

천호득이 지켜달라던 천상기는 이렇게 비참한 모습이었다.

“안 죽일 테니까 안심해.”

약 기운을 더는 이기지 못한 모양이었다.

천중명의 눈을 노려보던 천상기가 털썩 소리가 나도록 머리를 떨구고는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들은 거라곤 모든 것을 지휘하던 천봉서가 죽었다는 답이었다.

“후-.”

천중명은 잠시 잠든 천상기를 보았다.

그렇게 욕심을 부리더니 너는 지금 행복하냐?

천상기의 이런 모습이 어쩌면 그가 지은 죄에 대한 벌일 테고, 천봉서가 그렇게 죽은 것 역시 지은 죄가 커서 그런 것은 아닐까 싶었다.

천중명은 픽 웃었다.

죄가 많으면 자식에게 간다더니 젊은 시절 천호득의 악행이 자식들을 이렇게 망친 건가 싶어서였다.

‘그럼 나는?’

몸이 바뀔 정도로 악하게 살았었나?

아니면 어머니 악착같이 챙기며 버틴 것에 대한 상이라고 혹시 재벌집 아들과 몸뚱이를 바꿔준 건가?

당장 답이 나올 리 없는 일이어서 천중명은 천천히 일어나 문을 나섰다.

곽대출이 문 한쪽으로 비켜서자 현관 쪽 의자에 앉아있던 윤만석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하나뿐인 눈이 천중명을 향해 묻고 있었다.

‘내 아들이 죽은 것에 둘째 형님이 관련된 겁니까?’

천중명은 그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는 게 없나 봅니다. 약 기운에 죽은 큰형님이 보인다고 떠들 정도였으니까 거짓말은 아닌 것 같고요. 실장님. 커피 있으면 한잔 주세요. 밖에서 마실게요.”

“예, 회장님.”

윤만석은 커피를 준비하려는 대원을 손짓으로 막고는 직접 주방으로 움직였다.

**

허선영이 백화점 꼭대기 층의 VIP룸에 들어갔을 때 천호득은 이미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장만섭과 송달순, 백화점 사장, 임원들이 쭉 서서 기다리고 있어서 뭔가로 꽉 짓누르는 듯한 분위기였다.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늦지 않았다.

그러나 허선영은 천호득이 기다렸다는 사실이 미안해 얼른 고개를 숙였다.

단정하게 손질한 머리, 셔츠, 재킷, 잘 닦은 구두, 얇은 담요를 다리에 올려놓은 채 휠체어에 앉은 천호득은 어느 것 하나 소홀한 구석이 없었다.

“가자.”

“예.”

천호득이 전에 볼 수 없을 정도로 매서운 눈길로 허선영을 노려보았다.

“옆에 서야지. 내가 혼자 왔어?”

“예, 총수님.”

“다시 대답해.”

허선영의 놀란 눈을 천호득이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예, 아버님.”

“흥! 가자.”

천중명과는 다른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천호득의 휠체어를 장만섭이 붙들었다. 그는 철저하게 허선영의 걸음에 보조를 맞추고 움직였는데, 그건 뒤편에서 따라오는 송달순도 마찬가지였다.

“백을 팔에 걸어. 허리 펴고, 내려다 봐. 그게 사람이든 물건이든. 네가 원한다면 이 백화점에 있는 걸 모두 사주마. 그런 자신을 가지고 둘러 봐.”

말을 건넨 천호득이 질책하듯 허선영을 보았다.

“예, 아버님.”

“그래. 처음부터 숙이면 너는 그냥 적당히 대해도 되는 사람이 되고, 그런 감정이 회장을 얕보게 한다. 대송그룹? 그것들도 별거 없어. 지금은 네가 더 높으니까 앞으로 그것들을 만나도 내려다봐.”

때앵.

엘리베이터가 열린 다음이었다.

백화점 사장부터 간부들이 줄줄이 휠체어의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랐고, 침묵 속에서 내려가 지하 1층에 도착했다.

“과일 주스가 마시고 싶어.”

지하의 소란스러움 탓도 있었다.

그러나 천호득은 실제로 허선영이 들을 정도의 음성으로 말을 건넸다.

두리번두리번.

“그걸 왜 네가 찾아!”

매장을 찾는 허선영을 향해 쨍하는 천호득의 호통이 달려들었다.

“총수님께서 과일 주스를 드시고 싶다고 하세요.”

“이쪽입니다.”

지하 매장을 담당한 임원이 바쁘게 앞으로 나섰고, 천호득은 그의 뒤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허선영이 걷자 장만섭이 휠체어를 밀었다.

소란스러운 백화점의 지하 1층을 가로질러서 주스 매장에 도착한 다음이었다.

“됐다. 떡국을 먹으러 가자.”

정말이지 괴팍하기 이를 데 없는 천호득의 요구가 있었다.

잠자코 떡국을 먹으러 가는 길에 알았다.

지하 매장에 있는 직원들, 고객들의 놀라고 신기한 눈빛을 보면서 말이다. 천호득은 입소문이 가장 빠르다는 백화점의 지하 매장을 허선영과 함께 다니고 있었다.

이 아이가 내 며느리가 될 것이고, 지경의 안주인이 된다.

그러니 얕보려면 각오 단단히 해야 할 거다.

카리스마를 넘어서 독기마저 풍기는 천호득의 태도와 표정은 그런 의미인 게 분명했다.

그렇게 다 같이 식당으로 움직였고, 전에 식사했던 공간에 천호득과 허선영 단둘이서 마주 앉았다.

“맛있게 드십시오, 총수님.”

떡국을 가져다준 직원이 별실 문을 닫은 다음이었다.

천호득이 떨리는 손으로 숟가락을 들어서는 떡국의 국물과 떡살을 떠서 허선영의 그릇에 넣어주었다.

멍한 허선영을 천호득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편안한 얼굴로 보아주었다.

“당당해져, 이 사람아.”

예상하지 못했던 따듯한 음성에 허선영은 왈칵 눈물이 올라왔다.

“지경의 안주인은 뻔뻔하고 독해야 돼. 알았어?”

“예, 아버님.”

“얼른 먹어. 그래야 기운 나지.”

천호득이 떡국을 떠서 입으로 가져가며 식사가 시작되었다.

“아버님. 여기요.”

떨리는 손 때문에 국물이 튈 때마다 허선영이 닦아주었는데 천호득은 그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대략 20분쯤 걸려서 식사를 마쳤다.

후식을 주문할 참이었다.

“차는 삼중호텔에 가서 마시자. 모자란 것들이 너를 쉽게 봤다면서? 오늘은 나랑 가자. 대송 윤성일이 예전에 내게 몇 번 당한 적이 있거든.”

하여간 오늘 천호득은 허선영을 놀라게 하려고 철저하게 작정한 사람처럼 보였다.

“큰애를 불러.”

“예, 아버님.”

허선영이 일어나 장만섭을 불렀고, 백화점 사장과 임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지하에서 승합차에 올랐다.

“삼중호텔로 가.”

“예에, 총수님.”

장만섭의 답을 신호로 승합차가 출발했다.

“병원에도 가볼까?”

“예?”

“대송의 딸아이가 입원했다는데 문병을 가봐야지?”

이 정도로 위해줄 줄은 몰랐다.

정말 천호득이 이렇게 옆에 있으며 한편이라고 지켜주는 것에 힘도 생겼다. 천호득이 주는 마음을 모른다면 허선영은 아마 바보쯤 될 거다.

“이제 좀 지경의 사람 같구나.”

“고맙습니다, 아버님. 저 이제부터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흐헤헤헤헤.”

특유의 웃음을 쏟아낸 천호득이 왼손을 뻗어 허선영의 손을 가볍게 다독여주었다.

**

오후의 햇살이 열기를 던져대는 가운데 천중명은 천상기와 있었던 길지 않은 대화를 그대로 전해주었다.

“기대를 좀 했었는데 알아낸 건 큰형님이 전부 계획했었던 일이라는 게 전부입니다. 담배 하나 피워도 되겠죠?”

“편하게 하십시오, 회장님.”

천중명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고, 불을 붙였다.

“회장님께서는 왜 기계에 관해 이렇게까지 알려고 하십니까? 회장님께서 나서지 않으셨다면 지금 말씀한 내용이 밝혀졌을 리도 없을 텐데요?”

“저도 여기까지만 할 생각입니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확인하기도 어렵구요. 윤 실장님이 달려들어도 제대로 알아내지 못했던 일이고, 황 선생조차 더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답니다.”

천중명은 답답한 심정을 연기에 담아 뱉어냈다.

“뒤를 보는 건 여기까지요. 멍청한 짓 같기도 하네요. 파면 팔수록 답답해졌으니까요. 언젠가 때가 되면 또 알게 되겠죠. 아니면 할 수 없고요.”

천중명은 하늘을 힐끔 바라본 뒤에 다시 말을 이었다.

“억울하게 죽은 분들이 시켰나 봅니다. 최소한 알아달라고요.”

엉뚱한 답변이었다.

그런데도 윤만석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어둠이 왜 생기는지는 알아보는데 추악한 과거의 일들만 자꾸 나온다.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천중명은 오랜만에 분당의 어머니에게 들를 생각으로 곽대출을 돌아보았다.

“가자.”

“예, 회장님.”

윤만석이 배웅을 위해 옆을 걷는 동안이었다.

화아아아악.

어둠이 다가오는 것처럼 붉은 연기가 천중명을 휩쌌다가는 바로 사라졌다.

뭐지? 이건?

“왜 그러십니까?”

“아닙니다, 잠깐 눈이 침침해서요.”

윤만석의 질문에 답하는 동안, 눈치 빠른 곽대출이 서둘러 운전석으로 움직였다.

“신경을 너무 쓰셔서 피곤하신 모양입니다.”

“그런가 보네요.”

분명 어둠과 같은 느낌으로 핏빛 기운이 달려들었었다.

천중명은 잠자코 뒷좌석에 타고서 윤만석과 눈인사를 나눴다.

“분당에 어머니께 잠시 들렀다 가자.”

“그러셔. 그런데 혹시 어둠 본 거 아니셔?”

곽대출이 룸미러로 천중명을 살폈다.

“맞아. 그런데 이번엔 피처럼 붉은색이었다. 다른 장면을 보여준 것도 없이 바로 사라졌고.”

“이것들이 이제 색을 섞어?”

곽대출의 반응이 웃겨서 천중명은 픽 웃음이 나왔다.

**

류효양의 제안은 파격적이었다.

기술이전료와 리온자동차의 브랜드를 거양에 붙여 쓰는 조건으로 제시한 금액이 7조 원이었고, 협상이 가능하다는 전제를 붙였다.

원한다면 더 높은 금액을 지불할 용의가 있다는 의미였다.

리온자동차 인수, 거양과의 기술이전, 인터넷 은행, 그렇게 업무에 치이는 최만호에게 생각지도 못했던 제안이 들어왔다.

“공트 자동차? 프랑스?”

“예, 실장님. 우리가 개발하는 새로운 엔진과 자동차를 공동 개발하고 싶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엔진이라니?”

“그 부분이 정확하게 표기가 돼 있지 않아서 제가 확인했습니다. 지경화장품에서 조사 중인 엔진을 공동 개발하자는 제안이었습니다.”

최만호는 제안서를 가져온 직원에게서 시선을 떨궜다.

신임 회장은 하여간 뭐든 건드리면 일이 어마어마하게 커진다.

“공동개발을 하는 조건으로 지분참여, 혹은 로열티를 지급할 의사가 있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이번을 계기로 한국 시장에 본격적인 참여를 희망한다는 의사도 밝혔습니다.”

프랑스어로 작성된 제안서의 뒤에 우리말, 마지막에 영어로 표기된 부분을 최만호는 천천히 넘겼다.

“자동차 개발이야 신 총괄사장과 의논하면 되는 문제이기는 한데, 우리도 아직 확인 못 한 기계를 엔진이라고 확신하고 공동개발하자는 제안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구만.”

두 페이지짜리 제안서를 천천히 살핀 최만호가 시선을 들었다.

“우선 결과를 보고 대응하기로 하지.”

“예, 실장님.”

직원이 방을 나서자 최만호는 제안서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내일 오전에 보고하면 신임 회장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천중명의 반응은 보고해 봐야 알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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