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183화 (183/315)

# 183

183. 우리가 해결하면 되지 (1)

천호득은 이른 아침에 이어셋을 귀에 걸고서 윤만석의 번호를 눌렀다.

- 확실히 대송 윤성일 회장의 작품입니다. 전충호가 사우나에 함께 있는 것까지 확인했습니다.

“흥. 그 인간이 이제는 제법 독해진 모양이군.”

- 총수님께 눌려서 그렇지 이전에도 윤 회장이 누구에게 밀리는 분은 아니었습니다.

윤만석의 당돌한 대꾸에 천호득이 입가만 움직여 웃었다.

“내가 총장에게 연락할 필요가 있을까?”

- 대송의 법무팀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번은 흘러가는 대로 지켜보셔도 허세직 의원이 살아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 회장의 짐을 윤성일이 잘라줄 줄 누가 알았겠나. 이럴 줄 알았으면 예전에 한 번쯤은 양보해줄 걸 그랬어.”

전화기 너머에서 웃음을 참는 듯한 윤만석의 숨소리가 넘어온 다음이었다.

- 지경화장품에 보낸 기계가 이퓨얼이라는 청정에너지를 이용하는 엔진 종류라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오늘 본격적으로 확인 작업이 있다는 전화가 있었습니다.

“그렇군.”

- 다른 소식이 있으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쉬십시오, 총수님.

통화를 마친 천호득은 창을 통해 밖의 정원을 보았다.

“다 좋은데 결혼이 뒤로 밀리잖아. 에이! 평생 도움 안 되는 인간 같으니라고!”

그러면서 그는 특유의 타박을 불쑥 쏟아냈다.

**

양서평은 류효양을 방으로 불렀고, 특별하게 조양회까지 한 테이블에 앉게 한 뒤에 미국식 조찬을 주문했다.

“나는 운을 시험하러 가볼 테니까 오늘은 류 부사장이 조양회 실장과 함께 지경을 방문해.”

밤새 놓지 못했던 여러 가지 생각이 아직도 양서평의 커다란 눈과 볼에 남아서 복잡한 그의 심사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다음에 볼 때는 사업가로 보자는 말이 괘씸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아프기도 하더구만.”

류효양과 조양회는 눈치만 살폈다.

“그러니 오늘은 류 부사장이 가서 사업으로 부딪쳐 봐. 그전에 내가 한 가지 조언만 하지.”

평소라면 호텔의 거실이 꽝꽝 울리도록 시끄러웠을 양서평이 나직한 음성으로 말을 건네고 있었다.

“강북의 가등섭이 나를 노리고 호텔을 덮친 적이 있어. 그 계획을 알고 있던 나도 가등섭을 제거하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총재께서 호텔에 오셨지.”

선생에게서 훈계를 듣는 학생들처럼 류효양과 조양회는 시선을 찻잔에 둔 채 숙연한 자세로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호텔을 들어서시던 총재님의 눈빛이 지금도 생생해. 나처럼 체격이 큰 것도 아니고, 가등섭처럼 매섭게 생긴 것도 아닌데 우리 두 사람 모두 꼼짝도 못 했어.”

삼합회 3인자의 위엄을 펄펄 풍기며 양서평이 말을 이었다.

“나중에 생각해 봤거든 가등섭과 내가 힘을 합하면 그때 총재님을 상대할 수 있었을까 하고.”

놀라운 내용이라 슬쩍 고개를 들었던 류효양이 얼른 시선을 떨궜다.

“어제 그 눈을 또 봤어. 주차장에서 마주 선 천 회장의 눈빛이 그때 보았던 총재의 눈과 똑같더란 말이지. 내가 확실히 관상 보는 능력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지.”

양서평이 말을 마친 순간이었다.

딩동, 딩동.

벨이 울리는 바람에 조양회가 얼른 문으로 움직였다.

호텔 직원 두 명이 주문했던 조식을 테이블에 옮기느라 잠시 틈이 있었다.

넓은 접시에는 토스트, 프라이, 베이컨이, 작은 두 개의 접시에는 빵과 과일이 각각 놓였다.

조양회가 딸기잼을 작은 접시에 따라놓은 다음이었다.

“류 부사장은 어떡해서든 천 회장에게 매달려. 그래서 기술 이전을 성사시켜. 알았나?”

“예, 부총재님.”

토스트를 반으로 접은 양서평이 딸기잼을 찍은 뒤에 거칠게 입으로 가져갔다.

우걱우걱. 우걱우걱.

아직 양서평이 먹으란 말을 하지 않아서 류효양과 조양회는 주인의 식사를 바라보는 충직한 개처럼 접시만 내려다보았다.

**

출근한 허선영을 비서가 바로 찾았다.

“대표님. 손님 오셨습니다. 명함을 드리면 아실 거라고 하던데요.”

겨우 핸드백을 내려놓고 재킷을 벗으려던 허선영은 명함을 확인했다.

“들어오시라고 해줄래요? 커피도 주고요.”

“네. 대표님.”

비서가 나가기 무섭게 마흔 초반의 남자가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네, 오랜만이네요. 이리 앉으세요.”

허선영과 남자가 테이블에 마주 앉기 무섭게 비서가 커피를 놓아주고는 밖으로 나갔다.

“어쩐 일이세요?”

“의원님의 심부름으로 왔습니다. 바쁘실 테고, 일이 급하게 돌아가서 바로 용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허세직의 보좌관인 남자는 침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의원님께서는 이번 사건이 의원님을 노린 모함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다른 그 어느 곳보다 지경의 법무팀이 나서주길 바라고 계십니다.”

말을 전한 보좌관이 힐끔 허선영을 살폈다.

“말씀을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이번에 지경의 법무팀이 나설 수 있게만 해주면 다시는 찾지 않겠다고 약속하시겠답니다.”

“보좌관님.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으세요?”

“의원님이라기보다는 아버님이란 사실을 보고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허선영은 입술을 몇 번 빨아들인 뒤에야 시선을 들었다.

“가서 전해주세요. 나는 지경의 법무팀을 움직일 능력이 없고, 설사 그런 능력이 있더라도 절대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거라고요.”

“꼭 그렇게까지 하셔야 합니까?”

“더한 일도 하셨던 분이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면 알아들으실 거예요. 이만 일어나 주세요. 오늘 일이 정말 많아요.”

허선영을 오래 봐왔던 보좌관은 꽤 놀란 눈치였다.

그가 기억하기로 허세직의 요구에 허선영이 이토록 강경한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

“그만 가주세요.”

“알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보좌관이 서운하고 실망한 얼굴로 사무실을 나선 다음이었다.

허선영은 복받치는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창으로 움직였다.

서럽다.

성폭행범의 딸이라는 낙인과 시선이.

미안하다.

장인이 그런 사람이라는 손가락질을 천중명에게도 받게 하는 현실이.

정치 욕심이 뭔지.

허세직이 호텔의 마사지사를 성폭행했다는 말을 허선영은 믿지 않는다. 그녀가 아는 아버지, 허세직은 그런 일 따위로 정치인생을 망칠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성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아버지 허세직은 그가 했던 일들을 그대로 되돌려 받아서 몰락하는 모양이었다.

잔을 치우러 문을 열었던 비서가 허선영을 보고는 조심스럽게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후.”

어쩌면 윤세계의 말대로 허선영은 천중명의 앞을 가로막는 짐일지도 모른다.

그때였다.

반짝.

창으로 달려든 햇살이 허선영의 왼손 약지에 걸린 반지 속에서 그녀를 불렀다.

뭘 그런 생각을 해?

기운 낸다면서?

천중명의 말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내가 너무 뻔뻔한 건 아니죠?

허선영이 슬픈 눈으로 반지를 바라본 직후였다.

우우웅. 우우웅. 우우웅.

책상에 두었던 그녀의 휴대 전화기가 울었다.

손바닥 안쪽으로 눈물을 닦아낸 허선영은 휴대 전화기를 들었다. 그러고는 몇 번 큼큼, 댄 뒤에 통화버튼을 눌렀다.

“예, 총수님. 전화 받았습니다.”

- 나 떡국 먹으러 갈 거니까 1시까지 백화점으로 와.

천호득답게 정말이지 투박하고 간결한 지시가 전화기를 타고 건너왔다.

- 왜 대답이 없어?

“아닙니다. 1시에 뵙겠습니다.”

- 회장은 바쁠 테니까 연락할 것 없어. 그리고 내가 오늘 심심해. 그러니까 오후 일정은 다 비워.

“예?”

- 두 번 말하게 하는 버릇이 있구나.

“아닙니다, 총수님. 말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허선영이 답을 건넨 다음이었다.

- 흥. 이 천호득의 며느리라면 더 독기가 있어야지. 어떤 일이 있더라도 눈 똑바로 뜨고 당당하게 허리 펴고, 고개 들고.

“예.”

- 이번이 기회야. 다른 사람들이 모두 놀랄 정도로 강단을 보여. 백화점에 나올 때는 그런 얼굴로 와. 이 천호득의 며느리, 회장의 아내는 그런 사람이어야 해.

“예, 총수님.”

허선영이 겨우 답을 했을 때 전화가 뚝 끊겼다.

휴대 전화기를 내린 허선영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저 정말 독하고 강한 여자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총수님과 회장님을 지킬 수 있는 며느리와 아내가 되겠습니다.”

붉게 물든 눈과 코끝을 하고 허선영이 뱉어낸 당찬 각오였다.

**

손도운과 후배인 박삼종이 경영에 관해 모른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 가장 큰 실수였다.

장이 시작되기 무섭게 상장된 지경 계열사의 주가가 상한가를 찍거나 상한가 근처에 있었고, 지경전자를 비롯한 비상장 주식들은 부르는 것이 값이 될 정도로 품귀현상을 빚고 있었다.

유진교와 최만호가 평소와는 다르게 급한 얼굴로 천중명을 찾았다.

“회장님. 지경화장품에서 신형 엔진의 개발을 마쳤다는 소문과 함께 사진까지 인터넷에 올라와 있습니다.”

소파에 앉기 무섭게 유진교가 인터넷에 올라온 자료들을 보여주었다.

“증권거래소에서 사실을 확인해달라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일부 언론사는 아예 이 사진들을 보도하면서 엔진 개발이 끝난 시점에 맞춰 리온자동차를 인수한 것이 아닌가 한다는 추측성 기사까지 올리는 상황입니다.”

누가 봐도 휴대 전화기로 대강 찍은 사진이었다.

천중명은 혹시 해서 손도운에게 전화를 넣었고, 그 사진들이 개발자들 모임에 뿌린 것이라는 답을 들었다.

“이게 문제가 되나요?”

“주가가 이렇게 폭등하면 사실 확인 요청이 있을 겁니다. 답을 하지 않으면 금융당국의 제재를 받게 됩니다. 무엇보다 인터넷은행을 발표하는 시점이어서 모른 척 넘기기도 곤란한 상황입니다.”

천중명은 결재판에 담긴 자료들을 살폈다.

[대형트럭에 사용하는 엔진이라고 봅니다. 이퓨얼이라는 청정연료를 엔진에서 바로 생산해서 구동하는 방식이라고 합니다. 기계를 직접 본 개발자의 말이기 때문에 확실합니다. 지경이 이 엔진을 리온자동차의 트럭에 얹기만 하면 세계 트럭시장을 휩쓰는 것이 일도 아닙니다.]

분명 손도운이나 박삼종을 아는 개발자겠구나 싶을 정도로 확신에 찬 게시물이었다.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가 나중에 엔진을 개발했다고 하면 그것도 문제겠지요?”

“그건 아예 발표를 안 하니만 못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일이 이상하게 달려가고 있어서 천중명은 왼손으로 눈썹을 매만지며 보도 자료를 다시 살폈다.

거짓말로 주가를 올리는 것일 수도 있다는 댓글, 세상에 물로 가는 자동차가 말이 되냐는 비난들도 제법 눈에 띄었다.

“우선 손도운 개발자의 평가를 들어본 뒤에 발표하기로 하죠.”

“지난번에 블루크루드를 발표한 것과 물려서 소문이 소문을 낳고 있습니다. 오늘 오전 상황만으로도 회장님께서 보유한 주식의 가치가 1조 원 이상 올랐다는 점도 알아두셔야 합니다.”

천중명은 의아한 눈으로 유진교를 보았다.

“회장 취임 직전에 병원에서 주식회사 지경의 주식을 상속받아서 처리하셨습니다.”

“아! 그게 그렇게 오르나요?”

“계열사의 의결권을 행사할 지분을 주식회사 지경에 모아두었기 때문에 지금처럼 계열사 전체가 일제히 상한가에 올라가면 당연히 나오는 결과입니다.”

주식을 넘긴다고 할 때도 그러려니 했지 그게 이 정도로 가치가 올라갈 줄은 상상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현찰이 통장이나 주머니에 들어온 것은 아니지만, 그렇더라도 하루에 1조 원을 앉아서 벌다니, 가장 먼저 웃음이 나왔다.

“류효양 부사장이 오후 1시에 방문해서 기술 이전에 관한 제안을 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습니다. 만나보시겠습니까?”

“그 건은 최만호 실장님이 신상훈 총괄사장과 의논해서 정리하세요.”

“예, 회장님. 그럼 1시에 류효양 부사장을 만나겠습니다.”

“증권거래소에 답변을 건네려면 하루나 이틀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회장님.”

두 사람이 일어서서 집무실을 나서자 천중명은 책상에 앉아 휴대 전화기를 들었다.

먼저 찾은 것은 이중성 대표의 번호였다.

- 예, 회장님. 이중성입니다.

“그곳에 보낸 기계의 사진이 유출되는 바람에 오전에 주가가 크게 상승하고 있답니다.”

- 예, 회장님. 그것도 있지만, 지금 이쪽에 기자들이 몰려와서 출입문을 잠근 상태이고, 일반인들의 문의 전화가 폭주해서 업무를 수행하기 어려울 지경입니다.

통화를 하는 그 순간에도 일반 전화기의 벨소리가 연신 들리고 있었다. 대표이사실이 저 정도면 일반부서는 말해 봐야 입만 아픈 상황이었다.

“일단 더 이상 사진 유출과 말이 새나가지 않도록 단속하시고, 기자들에게는 공식 발표가 있을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하세요.”

- 예, 회장님.

그나마 이중성이 연륜이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답답한 얼굴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이런 상태에서 천중명이 지경화장품에 들어가는 장면이 보도된다면 이건 완벽하게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천중명이 인상을 찌푸리며 기사들을 살필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휴대 전화기에 손도운의 이름이 올라왔다.

“여보세요?”

- 회장님. 손도운입니다. 죄송합니다.

풀이 죽은 음성이었다.

“너무 그러실 것 없습니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요. 대신 기계가 엔진이 맞는지, 작동은 어느 수준까지 가능한지에 대한 답을 조금은 빨리 주셨으면 합니다.”

- 네, 회장님. 20분쯤 뒤부터 외부 커버를 벗겨낼 예정입니다. 결과가 나오는 대로 가장 먼저 전화 드리겠습니다.

“부탁합니다.”

휴대 전화기를 내려놓은 천중명은 기계와 관련된 일들을 떠올렸다.

- 6개월 뒤에 이천 냉동창고! 평택 공장에 새로운 기계가 들어와!

이건 지난번에 생각했던 거고.

뭔가 더 있었는데?

- 그 화재 사건 뒤에 후계자 결정이 있었다…요.

그 뒤에 그런 말을 했었고,

- 나는 형님들의 지시를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천중명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맞아! 천상기, 너는 뭔가 알고 있을 수 있겠네!

어차피 오늘은 지경화장품에 일찍 가기는 틀렸고.

생각을 정리한 천중명은 휴대 전화기를 들어 번호를 눌렀다.

- 예, 회장님.

“곽 이사. 11시쯤 나랑 용인 좀 다녀오자. 점심 먹고 올 거니까 그렇게 준비해.”

- 알겠습니다, 회장님.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보고서와 결재서류를 펼쳤다.

우선 할 일은 해놓고 간다.

용인에 천상기를 만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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