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
182. 다시 만나게 된다면 (2)
밥알이 곤두서고, 잘 구워놓은 굴비가 당장에라도 눈알을 들어서 주변을 둘러볼 정도로 방 안의 분위기는 숨 막혔다.
“중국의 강남을 책임진다며?”
반말이었다.
양서평의 뒤에서 당황한 기색의 통역이 벌겋게 변한 얼굴로 중국어를 쏟아냈다.
“양서평이란 이름 석 자를 믿고 계약을 체결하면 여기 있는 두 명의 임원과 지금도 지경그룹과 리온자동차를 위해 일하는 직원들의 노력은?”
통역을 향해 고개를 살짝 돌린 양서평이 매서운 눈으로 천중명을 노려보고 있었다.
“사업을 하려면 사업가답게 중재하고, 조직원으로 나선 거면 어설픈 짓 말고 지난번처럼 돼지 잡는 칼을 들고 와.”
말을 마친 천중명은 류효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류 부사장.”
“예, 회장님.”
“앞으로 많이 팔 수 있다는 말보다는 어떻게 신뢰를 지킬 것인지를 먼저 고민해. 리온자동차를 인수할 때처럼 뒤에서 엉뚱한 짓 하지 말고.”
“죄송합니다, 회장님.”
지금 나눈 대화 역시 통역을 통해 양서평이 함께 듣고 있었다.
“내가 말을 이해 못 했다. 여기 있는 지경의 임원과 직원들이 왜 문제가 되는지 설명해 주겠나.”
조직의 간부가 지닌 위엄을 뿜어내면서부터 양서평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차라리 처음부터 저렇게 나왔으면 훨씬 좋았겠다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나는 기술 이전에 관한 전권을 여기 두 분과 신상훈 총괄사장에게 넘겼다. 거기에서 나온 결론에 나는 결정만 내려.”
당장에라도 툭 튀어나올 정도로 양서평이 눈알에 힘을 주고 있었지만, 그런 모습에 깨알만큼도 주눅 들 천중명은 아니었다.
“그렇게 지시한 일을 술상에서 나눈 몇 마디 말에 바꿀 수 있나?”
“거래를 안 해 봤나? 오늘 같은 자리에서 주는 양보가 지경이란 큰 밭에 얼마의 이득으로 돌아올지를 생각해야지.”
“양서평 부총재.”
통역의 말을 들은 천중명은 곧바로 양서평을 불렀다.
“다른 사람과의 대화에도 집중하는 습관을 키워. 그리고 앞으로 누군가를 상대할 때는 이득 말고 신뢰를 쌓을 방법을 먼저 고민하고. 좋아. 그렇게 체면을 따지니 거래를 허락하지. 양서평이란 이름 석 자를 봐서.”
조양회와 류효양이 시선을 마주쳤다가 다시 천중명을 향해 고개를 돌린 다음이었다.
“내 이름 석 자를 걸 테니 기술 이전료로 50조 원을 내놔.”
통역이 말을 전한 다음이었다.
“푸후.”
양서평이 대놓고 뜨거운 김을 뿜어냈다.
“우리 중국인과의 거래에 대해 전혀 모르시는군. 관계란 돈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야. 나와 기술을 이전하겠다는 약속을 먼저 하고, 그 뒤에 대가를 더 달라면 되지 않나?”
“중국이 세계로 나가는데 가장 큰 걸림돌을 하나 알려주지.”
제법 커다란 조직을 이끄는 간부의 모습을 한 양서평에게 천중명은 작정하고 입을 열었다.
“당신들의 방식을 강요하지 마. 관계를 베푼다는 생각도 버리고. 처음 만난 자리에서 형이니 동생이니 부르다가 수틀리면 욕을 해대는 것보다는 마음이 통할 때를 기다리는 것이 내 방식이니까 그것도 알아두고.”
이를 악물었는지 양서평의 볼이 씰룩했다.
식사는 이미 끝났다.
다시 분위기가 좋아질 리도 없을 일이고, 좋아진다고 해도 이미 식어버린 밥과 반찬을 다시 먹자고 권하기는 어려웠다.
“흐음.”
양서평이 복잡한 심정을 뭉뚱그려서 뱉어낸 다음이었다.
“오늘은 이만 하고 내일 오전에 일정을 다시 잡아서 차를 마시든, 식사를 하든 하지.”
천중명이 제안을 꺼내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양서평까지.
불편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고, 어색함 속에서 재킷을 걸쳤으며, 답답한 표정으로 방을 나섰다.
한정식집 앞의 주차장에서 천중명은 먼저 조양회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조양회.”
“예, 회장님.”
방안에서의 일이 있어서 그런지 조양회는 천중명을 확실히 윗사람으로 대했다.
“통역을 물리고 양 부총재에게 내 말을 직접 전해줘.”
천중명의 지시를 받은 조양회가 양서평의 옆에서 지시를 기다렸다.
“내일 약속을 정해서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사업가 양서평으로 참석했으면 싶다고 전해줘.”
조양회가 빠르게 중국어로 말을 건넸다.
“리온자동차의 인수를 도와준 점에 감사한다는 말도 전하고.”
“예, 회장님.”
조양회에게서 중국어로 말을 전해 들은 양서평이 멋쩍은 얼굴로 시선을 주었다.
잠시 후, 양서평이 “하오!” 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지켜보던 류효양이 길게 숨을 내쉬는 것을 유진교와 최만호가 빠르게 살폈다.
**
간이 바짝 타들어 가던 허세직은 삼성동 사거리에 있는 호텔의 사우나로 들어섰다.
“오셨습니까?”
허세직은 윤성일의 가장 심복이라는 전충호를 처음 봤다.
“안에서 말씀 나누시죠. 제가 좋은 차를 준비해 가겠습니다.”
탈의실에는 CCTV를 설치하지 않는다.
게다가 습식 사우나에 들어가 수건 한 장을 허벅지에 둘러서 추한 부분만 가리기 때문에 대화를 녹취할 방법도 없었다.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지금은 허세직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습식 사우나 부스에 들어간 허세직이 나무로 만든 기다란 의자의 한쪽에 앉았을 때였다.
플라스틱 잔을 양손에 들고 사우나 부스에 들어온 전충호가 그걸 중간에 내려놓았다.
“중국에서 가져온 차입니다. 가격이 비싼 만큼 노폐물을 밖으로 빼주는 효험도 있답니다.”
“고맙네.”
허세직은 보기에 왼편에 있는 잔을 들었다.
이런 게 좋다.
서로 의심하지 않아도 되니까.
전충호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남은 잔을 들어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저렇게 나오니까 안 마실 수도 없는 일이다.
허세직이 예의상 마셨던 차를 들여다본 뒤에 또다시 입으로 가져갔다.
마실 때는 쌉싸름했는데 그 뒤 코에 남는 향이 제법이었다.
“말씀은 들으셨지요?”
“나중에 들었네. 윤 회장의 영애가 얼굴을 다쳤고, 미스터 최는 팔이 부러졌다고 하더군.”
“회장님께서는 천 회장이 그 자리에 나온 것보다 어떻게 허 의원님께 돈을 건넨 사실을 알고 있는지 그걸 염려하십니다.”
“그게 나도 미칠 노릇이지.”
전충호가 차를 마시며 허세직과 대화를 나누었다.
“의원님. 그 부분을 명쾌하게 해명해 주셔야 관계가 회복됩니다.”
“허어! 내가 말한 게 아니래도 그러는군. 아무렴 이 허세직이 다른 사람 아닌 천 회장에게 그런 일을 말했을까.”
“이렇게 뵈니까 의원님이 허튼 말씀을 하시는 것 같지는 않은데 저도 그 점이 안타깝습니다. 혹시 도청을 당한 건 아닌지 돌아가시면 주변을 살펴주십시오.”
“나도 그 생각을 했지. 그런데 딱히 짚이는 것이 없어요.”
전충호가 허세직의 의견을 받아주면서 5분쯤 대화가 이어졌다.
“제가 회장님께 의원님의 억울함을 최대한 전하겠습니다.”
“그래 주게. 그리고 내일 내 개인 사무실로 와. 심부름을 하려면 주머니가 좀 두둑해야지.”
“아닙니다. 그보다는 예약해 두었으니 이왕 오신 거, 남들 눈도 피할 겸해서 마사지나 받고 가시죠.”
습식 사우나에서 몸도 풀렸겠다, 따끈한 차도 마셨고, 무엇보다 전충호가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서 허세직은 사양하지 않은 채 사우나 부스를 나섰다.
간단하게 샤워를 마친 허세직은 가운 차림으로 탈의실 안쪽에 있는 마사지실로 움직였다.
“어서 오세요, 의원님.”
“이곳에도 여자 마사지사가 있었나?”
“오래 안 오셨나 봐요? 영동대교 앞에 호텔 두 곳과 신사동, 그리고 여기는 모두 여자 마사지사가 남자 손님을 상대해요, 의원님.”
“그런가? 어차!”
허세직은 이상하게 나른한 몸을 베드에 눕혔다.
‘이거 이상한데?’
몸이 쑥 꺼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눈앞에 보이는 사물이 이리저리 일그러졌고,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자극을 바라는 간절함이 피어올랐다.
‘당했구나!’
허세직이 아차 하는 순간이었다.
그의 사타구니로 손이 쑥 들어왔다.
‘안 돼! 안 돼-애!’
생각과 달리 이미 손길에 반응한 그의 몸뚱이가 추악하게 꿈틀거렸다.
**
박승양이 마련한 남부증권 전 직원 회식이었다.
짜디짠 사채업자로 소문난 송도상인 박승양이 사봐야 짜장면이겠지 했는데 뜻밖에도 회식 장소는 돼지 갈비집이었고, 주문은 ‘무제한 원폴제’라는 레슬링 용어였다.
앉은 자리에서 먹을 수 있는 만큼 먹는 회식이어서 모처럼 푸짐하게 주문했다.
“들어, 이 과장. 많이 들어. 다른 거 신경 쓸 것 없어. 그저 잘 먹고 체력을 비축해서 씩씩하게! 알지? 씩씩! 튼튼! 응?”
“예, 회장님. 감사합니다.”
가장 중앙 테이블에 박승양과 남부증권 회장, 건너편에 이명선이 앉았고, 남은 한 자리를 한알저축은행 김도정 부장이 차지했다.
“뭐해? 고기 탄다!”
“예, 회장님.”
박승양의 타박에 김도정이 집게와 가위를 들었고,
“제가 할게요.”
손을 내미는 이명선을 박승양이 막았다.
“어허! 오늘은 우리 김 부장이 내는 거니까 이 과장은 그냥 편안하게! 알지-이? 릴랙스! 어? 릴랙스하게 먹으면 돼.”
오늘 회식비용을 김도정이 부담하는 건 이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만 아는 사실이었다.
아무튼, 가운데 테이블의 부담스러움을 피한 먼 곳의 테이블에서는 제법 웃음도 나오고 있어서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30분쯤 고기 굽는 냄새가 가게를 가득 메운 뒤였다.
“뭐야?”
열린 문 쪽에 앉은 직원 몇 명이 홀을 향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뭔데 그래?”
옆 테이블에 있는 직원들까지 상체를 기울여 홀을 살피는 바람에 궁금해 하던 박승양의 손짓을 받은 한알저축은행 김도정 부장이 문을 열었다.
[그동안 자숙하는 모습을 보였던 허세직 의원은 이번 사건으로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이미지에 타격을 입었습니다.]
화면에 나온 기자가 마이크를 들고는 흥분한 음성으로 멘트를 쏟아내고 있었다.
[한편 허하수 국회의장은 이례적으로 기자회견을 열어 허세직의원의 징계를 결의했고, 이번 일을 계기로 의원들이 품위를 지켜주기를 당부했습니다.]
저게 뭔 소리야?
다들 목을 빼고 화면을 바라볼 때였다.
사우나 복 차림의 허세직이 형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호텔을 나서는 모습이 화면에 올라왔다.
[마약을 복용한 상태에서 여자 마사지사를 성폭행한 허세직 의원에 대해 당은 어떠한 이유로도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질렀다는 논평을 먼저 내놓았으며, 비상대책회의를 열어 허세직 의원의 당원 자격을 박탈하는 안을 논의 중에 있습니다.]
“미친 인간 아냐? 얼만 전에 아들이 약을 했다고 반성한다느니 하더니만 결국 자기도 했었던 거네.”
“뭐, 미쳐서 또 저런 곳에 가서 저랬지?”
[경찰은 이미 허세직 의원의 것으로 추정되는 체액을 확보해서 DNA 분석을 의뢰한 상태입니다.]
“뭐해? 고기 탄다! 고기!”
적당히 뉴스를 본 박승양이 재촉하자 다들 상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기가 타요. 고기가. 그러게 왜 돼먹지 않은 수작을 피워서는 인생을 망치느냔 말이야. 왜.”
남부증권 회장이 힐끔 바라보았을 때 박승양은 잘 익은 고기를 입에 넣고 이리저리 굴려가며 씹고 있었다.
**
천중명은 밤 9시쯤 퇴근한 허선영과 함께 탄천을 걸었다.
“괜찮아?”
“그럼요. 어쩌면 아버지를 위해서도 잘된 일인지 몰라요. 정치에 이미 중독되어서 인간성을 잃어 버린 분이니까요.”
말을 마친 허선영이 천중명의 손을 꼭 쥐었다.
“그런데 중명 씨. 정말 대송그룹과 문제가 생기면 어쩌죠?”
천중명은 시선만 주었다.
“중명 씨는 다짐했던 일을 꼭 해내잖아요. 그날 대송그룹을 응징하겠다는 말이 자꾸 걸려서 그래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천중명은 잠시 시선을 앞에 둔 채 걸었다.
“우리나라의 대기업이 보유한 현금이 500조 원이 넘어. 그래놓고도 쉬운 해고가 불가능해서 외국으로 나가겠다고 떠들지. 미국에 가면 지금 하는 짓만으로도 100년 형은 받을 사람들이.”
천중명이 질문과 다른 답을 꺼내놓자 허선영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그날 호텔에 가지 못해서 윤성일 회장의 의도대로 됐다면 지금 우리 둘은 어떤 심정으로 마주하고 있을까? 그 자리에 김민희 매니저나 김순례 씨의 딸 이명선이 있었다면?”
생각하기도 싫은지 허선영은 시선을 먼 곳으로 돌렸다.
“돈이 많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인생을, 그것도 나와 선영 씨를 망치려 했어. 그래놓고 사과는커녕 오히려 이를 드러내고 있는데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
“중명 씨는 참 특별해요.”
“꼴통 회장이니까.”
천중명이 돌린 시선 앞에서 허선영이 가볍게 웃었다.
“도깨비는 무슨 말이에요? 윤세계를 때리기 전에 그랬잖아요?”
“내가 좀 그렇잖아. 도깨비처럼 여기저기 불쑥 나타나고, 선영 씨의 위기도 바로 알아내고.”
“그럼 나는 도깨비랑 결혼하는 거네요?”
천중명은 팔을 뻗어 허선영의 어깨를 안았다.
“이제는 싫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사모님.”
“네, 도깨비 회장님.”
천중명은 감싸 안은 허선영의 어깨를 기분 좋게 다독여주었다.
“대송그룹은 어떻게 상대할 생각이에요?”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볼 생각이야.”
아무래도 그룹 간에 큰 분쟁이 있을까 봐 염려된 모양이었다. 허선영이 아까의 질문을 조심스럽게 다시 꺼냈고, 천중명은 적당하게 답했다.
대송이 끝까지 달려들면요?
둘 중 하나가 무너져야지.
그들이 그걸 원할 테니까.
허선영은 질문을 삼켰고, 천중명은 답을 대신해 먼 곳을 바라보았다.
유치한 감정에서 시작된 싸움이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변한 꼴이었다.
돈이면 모든 일을 다 이룰 줄 알고 있는 인간들에게 양보나 고개 숙이는 것만큼 힘든 일도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는데 그렇다고 천중명이 물러설 마음도 없었다.
그러니 어쩌겠나.
죽기 싫으니까 죽여야지.
천중명은 나직하게 숨을 뱉어내며 허선영의 어깨를 좀 더 감싸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