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181화 (181/315)

# 181

181. 다시 만나게 된다면 (1)

다행인지 불행인지 장비를 이용해 기계를 들어보았던 손도운은 하루 정도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보내주었다.

“급한 일이 아니니까 편안하게 하세요. 그리고 무엇보다 안전에 유의하시고요.”

- 감사합니다, 회장님.

가느다란 손도운의 음성을 끝으로 통화가 끝났다.

여유 있게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저녁에 양서평 일행과의 식사 약속을 앞두었던 참이라 오히려 마음은 훨씬 편했다.

천중명은 먼저 결재서류를 내려 보냈다.

인터넷은행은 원안대로 시행하고, 쇼핑몰은 운송 부분을 보완한 뒤에 다시 보고하라는 메모를 붙였다.

큰 숙제를 마치고 난 기분이라 한숨을 돌리려던 참이었다.

노크가 있더니 최만호가 들어왔다.

“회장님. 자이로텔레콤의 제안을 검토한 결과입니다.”

그는 천중명이 소파를 권할 틈도 없이 책상으로 다가왔다.

최만호가 펼쳐준 결재판을 들여다본 천중명은 올라오는 아쉬움을 감춘 채 뒤에 이어진 내용을 살폈다.

‘역시.’

제안은 신선했는데 시기가 너무 늦었다는 의견이었다.

이미 화상회의 시스템이 꽤 보급되었고, 일정한 비용만 지불하면 다자간 회의 역시 안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평가였다.

“박영철 부회장에게 따로 전화를 넣을 테니까 발전본부 이름으로 서운하지 않을 선에서 정중하게 결과를 통지해주세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답을 한 최만호가 바로 집무실을 나섰다.

천중명은 앞에 놓인 결재판을 다시 한 번 살폈다.

눈에 익은 프로그램도 있었지만, 이름조차 생소한 프로그램 중에는 자이로텔레콤의 이희철 부사장이 제안했던 것보다 높은 수준의 보안 기능을 지닌 제품들이 꽤 있었다.

이런 것도 조사하지 않은 채 사업을 제안했을까?

아니면 알면서도 이미 했던 것이 아까워서 달려들었던 걸까?

사람만 아깝네.

이희철을 떠올린 천중명은 인터폰에 손을 뻗었다.

“자이로텔레콤 박영철 부회장 연결해줘.”

[네, 회장님.]

보고서를 한쪽으로 옮겨놓았을 때였다.

[회장님. 1번에 박영철 부회장 연결되었습니다.]

부속실 직원의 연락이 있었다.

천중명은 수화기를 들고서 1번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예, 회장님. 박영철입니다.

어쩐지 밝은 음성으로 전화를 받으라고 강요한 것처럼 어색한 대꾸가 있었다.

“지금 그룹발전본부에서 의견이 올라왔는데 결과가 부정적입니다.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고,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함께 의논해 보죠.”

- 아.

당연하게 실망한 음성이 먼저 넘어왔다.

- 회장님. 지난번에 설명이 부족했을 수 있습니다. 우선 오늘 밤에라도 시간을 내주시면 함께 저녁이라도 하면서….

“박영철 부회장님.”

그가 원하는 것을 알 것 같아서 천중명은 중간에 말을 끊었다.

“어설프게 접대니 개인적인 친분이니 하는 걸 업무와 연관 짓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런 일이 있으면 다시는 박 부회장과 개인적으로 연락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참.”

통화를 마치려던 천중명은 생각난 것이 있어서 말끝을 늘였다.

“이희철 부사장에게 내가 몹시 아쉬워한다고 전해주세요. 부사장의 열정을 보아서 나 역시 기대가 컸던 건인데 시기가 너무 늦어진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대꾸할 말을 잊은 것처럼 박영철이 멍한 틈을 천중명은 놓치지 않았다.

“그럼 다음에 연락합시다.”

인사를 전한 천중명은 그렇게 통화를 마쳤다.

**

통화가 끊기자 박영철은 눈만 껌벅였다.

마침 천중명을 어떻게 접대할 건지를 논의하느라 박태곤 회장실에 이희철까지 모여 있던 참이었다.

소파의 테이블에 올려놓은 휴대 전화기의 스피커폰을 눌러놓았다. 그 덕분에 세 사람 모두 지금 천중명과의 통화를 함께 들었다.

“크흠.”

통화가 끝나기 무섭게 아쉬움과 답답함을 섞은 박태곤의 심정이 테이블로 쏟아져 나왔다.

능숙하고 나름 위엄을 갖춘 천중명과 어리숙한 박영철이 확실히 비교되어서 우선 서운했다.

다음으로 저런 아들을 둔 천호득이 부러웠으며, 마지막으로 통화조차 능숙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어버버’ 거리는 박영철이 한심스럽기도 했다.

“에이.”

불만은 이희철을 향해서도 뿜어졌다.

저 인간이 뭘 어떻게 보였길래 부사장의 열정이 아쉽다는 소리가 나올까?

그래서 이희철을 바라보는 박태곤의 눈빛은 곱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아무렴 눈빛이 그런데 음성이라고 곱게 나오겠나.

“지난 몇 년을 준비했던 게 헛수고로 날아가게 생겼어. 가입자는 뚝뚝 떨어지고, 우리는 지경처럼 와이파이 망을 공개할 처지도 못 돼. 대책이 있어야 할 것 아니냔 말이야. 대책이.”

“최선을 다해 방법을 준비하겠습니다.”

“자네는 먼저 나가 봐.”

“예, 회장님.”

이희철을 내보낸 박태곤이 불안한 표정의 박영철에게 시선을 주었다.

“대송그룹이 지경그룹과 전면전을 벌일 모양이다. 너도 세탁기 싸움은 들었지?”

“예?”

“에이, 이 부족한 사람아.”

욕을 자제하려는 박태곤의 초인적인 의지가 이상한 호칭을 불러냈다.

“OLED와 QLED를 놓고 자존심 싸움을 벌이던 그룹 임원들이 엉뚱한 세탁기 전시장에서 몸싸움했던 일을 몰라?”

박영철은 그제야 생각난 것이 있는 얼굴로 뒤통수를 매만졌다.

“겉으로는 지경이 리온자동차를 인수한 것으로 싸우는 양상이지만, 어디서 어떻게 터질지 몰라. 공연히 잘못 끼었다가 불똥이 우리에게 튀면 감당하기 어려워.”

“그럼 천 회장에게 연락을 자제할까요?”

“이 멍청한 사람아! 끼어들지 말라고 했지 지경을 멀리하라는 말이 아니잖아! 그러게 책을 좀 읽어! 책을! 매일 그 엉뚱한 멧돼지와 고스톱 좀 그만 치고!”

결국, 박태곤은 불처럼 화를 터트리고 말았다.

**

거양자동차의 세 사람을 천중명이 초대한 자리였다.

천중명은 유진교, 최만호와 함께 비서실에서 예약한 삼성동의 한정식집으로 들어갔다.

식탁 아래가 푹 파인 온돌방이었다.

뭐가 이렇게 거대해?

식탁을 처음 본 느낌은 그랬다.

등받이가 있는 좌식 의자 여섯 개가 식탁을 둘러싸듯 있었고, 한시를 휘갈겨 써 놓은 병풍과 오래된 장식장들이 제법 운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회장님. 이쪽입니다.”

한복을 입은 종업원이 자리를 알려주는 옆에서 천중명이 내부를 둘러볼 때였다.

“천 회장!”

과장된 표정의 양서평이 방으로 들어왔고, 상황을 살피는 조양회, 그리고 자세를 낮춘 류효양의 순서로 들어섰다.

“반갑습니다. 앉으시죠.”

여섯 명이 돌아가며 인사를 나눈 뒤에 함께 좌식의자에 앉았다.

저녁을 먹는 자리였다.

그런데도 접견실에서처럼 뒤에 통역이 한 명씩 있었고, 한복차림의 여직원 세 명까지 식탁에 앉아있어서 방안이 가득 찬 느낌이었다.

“내가 오늘 운이 좋아요! 아주 좋아요!”

물수건에 손을 닦는 천중명을 향해 양서평이 꽥꽥대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카지노에서 계속 잃다가 마지막 두 판에 모든 것을 걸어서 오히려 득을 보지 않았습니까?”

“잘되셨군요.”

“마치 우리의 관계 같습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렇게 발전했으니까요.”

“그렇군요.”

적당하게 대화를 맞춰주는 동안, 죽과 새싹과 소스를 얹은 얇게 썬 소고기, 가지 절임 따위의 전채 요리가 나왔다.

“드시죠.”

“감사합니다.”

죽을 먹으면서도 양서평은 분위기를 이끌기 위해 입을 쉬지 않았다.

도박에 관한 이야기도 그렇고, 거친 손동작, 과장된 표정, 시끄러울 정도로 높은 음성이 전혀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았는데 불행하게 본인 양서평만 그걸 눈치 채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술은 위험한데?

양서평의 흥분한 모습이 그랬다.

그러나 저녁식사에 초대해서 탄산음료를 마시라고 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적당하게 전채를 마치고 나자 엄청난 종류의 요리들이 들어왔고, 중간에 하얀 도자기에 담긴 술도 나왔다.

“받으세요.”

“좋습니다. 좋아요! 아주 좋아요!”

천중명이 거양의 세 사람에게 술을 따라주었고, 양서평이 지경의 세 사람에게 차례대로 잔을 채워주었다.

“건배합시다!”

원래는 초대한 사람이 한마디라도 먼저 하는 법인데 양서평이 불쑥 나섰다.

“오늘 이런 자리를 마련해 준 우리 천중명 회장님에게 감사합니다! 나는 이 자리에서 지경그룹과 나, 그리고 거양자동차가 형제의 정을 나누기를 바랍니다!”

통역에게서 말을 전해 들은 천중명은 적당하게 미소만 지었다.

“자! 건배!”

상체를 좌우로 돌려 잔을 보여준 땅땅한 체격의 양서평이 털듯이 잔을 입에 쏟아 넣었고, 그를 따라 천중명을 비롯한 모두가 잔을 비웠다.

이번에도 양서평이 잔을 채워주었고, 지경에서는 유진교가 상대방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천 회장. 한 말씀 하십시오!”

천중명은 잔을 적당하게 앞에 들었다.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앞으로 좋은 관계가 되길 희망합니다.”

“좋아! 아주 좋아!”

연신 “하오(好)!”를 외쳐댄 양서평이 두 번째 잔마저 털어 넣자 이번엔 류효양이 도자기 주전자를 들었다.

“회장님. 과거 중국에서는 석 잔을 비우고서야 식사를 시작하던 관행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취하지 않으면 귀가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많이 마시는 것이 호기로운 남자라는 인식이 있습니다.”

통역이 천중명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전해준 말이었다. 연달아 술을 마시는 이유를 설명해주고 싶었던 눈치였다.

“이번 한국 방문이 좋은 결과를 만드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유진교의 덕담에 결국 세 잔을 비웠고 네 번째 잔을 채웠다.

“이제 식사를 드시죠.”

천중명이 권하면서 식사가 시작되었다.

애처롭게도 이번 방문의 가장 큰 이유인 류효양은 이제껏 한마디 말도 꺼내지 못했다.

양서평은 시끄럽고, 천중명은 어려운 눈치였다.

“류 부사장님은 어떻게 거양에서 일하게 되었습니까?”

“공대를 나와서 중국의 자동차 산업에 이바지하고 싶은 열망이 있었습니다. 작년 중국의 자동차 판매 대수가 2천8백만 대, 누적 판매 대수는 2억 대를 넘어섰습니다.”

기회를 엿보던 모양이었다.

볼이 퉁퉁한 류효양이 기다렸다는 듯 숨도 쉬지 않은 채 말을 쏟아냈다.

“운전면허 보유자만 3억6천만 명입니다. 우리 거양자동차는 중국 내수에서만 앞으로 2억 대의 판매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식사하는 자리다.

적당한 화제를 주고받으면 오죽 좋겠나.

그러나 양서평에 눌려 기회가 없었던 류효양은 아예 한을 풀겠다는 듯 말을 쏟아냈다.

“기술이전만이 아닙니다. 원하시면 합작 형태로 중국 내에 새로운 회사를 설립하는 것도 추진하겠습니다. 또한, 우리는 청정한 중국을 모토로 전기자동차의 연구와 생산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양서평이 류효양을 응원하는 것처럼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지경전자가 생산하는 배터리를 전량 거양자동차가 수입할 의지도 있음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식사하면서 이야기하죠.”

차라리 집에 가서 얼큰한 라면을 하나 끓여 먹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누르며 천중명이 젓가락을 움직일 때였다.

“천 회장.”

양서평이 묵직하게 천중명을 불렀다.

“이렇게 나왔으니 아예 답을 주시오.”

그런 뒤에 그는 머리와 꼬리를 뚝 잘라낸 요구를 내놓았다.

“어차피 천 회장이 결정하는 일 아니오? 이 양서평의 얼굴을 봐서 기술 협력을 해주겠다고 한마디 답을 주시오.”

천중명은 입에 있던 고기를 여유 있게 삼켰다.

이럴 것 같았다.

떠돌이 약장수처럼 떠들 때부터 무리한 요구를 하겠지 싶었다.

“물론 최종 결정은 내가 합니다. 그러나 실무자의 의견을 더 들어봐야 하고, 여기 있는 두 분의 임원과 상의할 과정이 남았습니다. 답은 그 뒤에 드리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천중명이 생각해도 참 적당한 대꾸였다.

“오늘 이 자리는 나, 양서평이 있다는 점을 생각해 주시오.”

그러나 두꺼운 팔로 가슴을 두 번이나 두드린 양서평이 눈알을 굴리며 천중명의 대꾸를 밀쳐냈다.

“양 부총재라고 하셨지?”

천중명이 눈치를 살피는 조양회를 향해 질문을 건넸고, 그가 바로 “예.”라고 답을 내놓았다.

“양서평 부총재님. 류 부사장만 방문했다면 저녁 자리는 없었을 겁니다. 이렇게 식사에 초대하는 이유가 양 부총재의 체면을 세워드리기 위한 것이고, 실무는 실무자들의 의견을 종합한 뒤에 결정합니다. 그것이 지경과 나의 방침입니다.”

“혹시 나를 너무 가볍게 보는 건 아니오?”

“기술 협력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통역이 전하는 말을 듣기 무섭게 바로 오간 대화였다.

한복을 입은 여직원들이 고개를 떨구었고, 통역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이어질 말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래서 이 양서평이 이렇게 청하는데 기술 협력에 대한 답을 못 주시겠다는 거요?”

통역이 전하는 양서평의 강요를 들은 다음이었다.

“후.”

천중명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상체를 천천히 세웠다.

그리고는 고개를 삐딱하게 튼 양서평의 커다란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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