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180화 (180/315)

# 180

180. 회장님께 새롭게 배우는 느낌입니다 (3)

양서평은 1박에 350만 원 한다는 호텔의 객실에서 보이차를 앞에 두고 멀리 보이는 한강을 노려보았다.

“부총재님. 좀 더 높은 금액을 제시해도 됩니다.”

양서평은 거만한 동작으로 손을 들어서는 류효양 부사장의 간청을 막았다.

“영웅은 호걸을 알아보는 법이지. 내가 볼 때 천 회장은 우리의 조건을 받아들일 거야.”

류효양은 답답한 심정으로 양서평의 뒤에 서 있던 조양회를 바라보았다.

그가 아는 천중명은 절대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게다가 전해들은 신상훈의 역량 역시 무시할 수준이 아니어서 어떡해서든 단번에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 현명했다.

“중국 시장을 탐내는 눈빛이었어. 우리와 손을 잡기만 하면 탄탄대로가 펼쳐질 텐데 이번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있나?”

그러나 천하태평인 양서평이 문제였다.

저 무식한 삼합회의 3인자가 공산당의 위세를 등에 업고 거양자동차를 한낱 자전거 대리점 취급하고 있으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류효양은 차마 답답한 심정을 내보이지 못한 채 과장된 표정과 몸짓으로 으스대는 양서평을 바라보았다.

지경전자의 3분기 메모리 생산량을 독점했고, 올해 아시아 최고의 화장품인 미라클 유통권을 손에 쥔 것에 고무돼서 양서평은 이번 계약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었다.

“류 부사장은 나만 믿어.”

믿기는 뭘 믿어, 이 무식한 돌대가리야!

이번 기회가 유럽시장에 거양자동차가 진출하느냐, 못하느냐를 판가름한다니까!

계약에 실패하면 그 책임을 어떻게 감당하겠다는 거냐고!

류효양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분노를 꿀꺽 삼킨 직후였다.

“저녁까지는 시간이 있으니 그때까지 우리의 운을 시험해보는 건 어떨까?”

양서평이 답을 요구하는 표정으로 뒤에 서 있는 조양회를 보았다.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조양회의 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바로 류효양을 노려보았다.

“도박은 인생이라는 지루한 여정의 활력이지. 안 그런가, 류 부사장?”

“당연한 말씀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내일 오전까지 카지노에 저 인간을 처박고 싶다는 심정을 안고서 류효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천중명이 어떻게 나올까?

류효양의 머릿속은 온통 천중명 생각뿐이었다.

**

경제전문가 제임스 김이 황성규의 책상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팀장님. 이것 좀 보십시오.”

서류를 황성규 앞에 놓아준 제임스가 책상에 한쪽 팔을 짚은 자세로 서류를 가리켰다.

“비트코인입니다.”

“이게 왜?”

“모사드 출신인 테드 케블린이 지난 1년간 헤지펀드에서 했던 일이 바로 이 비트코인 파트였습니다.”

“모사드가 개입되었다는 말은 들은 적 있다.”

힐끔 시선을 들어 제임스를 보았던 황성규가 페이지를 넘겼다.

“테드 케블린이 홍콩물고기와 어떻게 연결되었는지를 조사하다가 나왔습니다. 2008년 시작된 비트코인이 이렇게 성장한 데는 중국의 힘이 가장 컸습니다.”

제임스가 시선으로 가리키자 황성규가 얼른 서류를 넘겼다.

“중국의 부자들과 부패한 정치인들이 자금을 빼돌리는데 가장 적합한 방법입니다. 문제는 비트코인의 발행총량이 2천1백만 개로 정해졌다는 데 있습니다.”

황성규가 눈을 찌푸리며 서류의 앞면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쉽게 결론만 말해.”

황성규의 지적을 들은 제임스가 멋쩍게 웃은 뒤에 설명을 이었다.

“간단합니다. 유대계가 만들었고, 중국이 올렸으며, 일본이 가장 많은 비트코인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비트코인의 가치가 폭락한 뒤의 상황입니다.”

제임스의 말에 황성규가 앞쪽 페이지를 다시 살폈다.

“비트코인이 폭락하면 중국과 일본, 유대 자금에 일시적인 공황 상태가 벌어집니다. 환율이 요동치고 달러가 무력화됩니다. 이럴 때 한 가지가 더해지면 완벽합니다.”

황성규는 시선만 돌렸다.

“예! 전쟁입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는 것은 어려워.”

“비트코인의 폭락을 해결하기 위해 전쟁이 필요합니다. 한반도가 아니라면 팀장님은 어디를 노리시겠습니까?”

“그야 이스라엘에게 눈엣가시인 중동이겠지.”

제임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냈다.

“빙고! 조만간 그쪽에 긴장이 고조될 겁니다. 그리고 미국이 막대한 무기를 팔아먹는 국지전으로 이어지다가 비트코인이 폭락합니다.”

황성규가 “후-!”하고 숨을 내쉬며 상체를 세웠다.

“중동에서의 긴장 고조, 국지전, 비트코인 폭락, 맞지? 그게 왜 한국의 위기를 초래하지? 제2의 IMF 사태가 벌어지려면 무엇보다 한국의 달러가 바닥나야 하는데?”

“미국은 달러 가치의 회복을 원합니다. 비트코인을 통해 숨은 자금이 외환시장에 개입해서 달러를 적극적으로 매입할 겁니다. 미국은 그 기회를 이용하기 위해 긴축통화로 바뀌고요.”

제임스가 황성규 앞에 놓인 서류를 넘기고서 시선으로 가리켰다.

“미국이 이자율을 연속으로 세 번 올리면 끝입니다. 한국은 이자율을 높여서라도 달러를 잡으려 할 겁니다. 그때가 저들에게 기회가 됩니다. 외환시장에 개입해서 막대한 이익을 얻을 테니까요.”

황성규가 눈을 반짝였다.

“그러니까 환율을 안정시키기 위해 한국 정부와 기관이 외환에 개입할 때 계속 몰아붙인다는 거지? 과거의 IMF 때처럼?”

“그렇습니다. 한국은 얻어맞으면서도 무조건 방어해야 합니다. 달러를 빌려가면서요. 그 싸움이 끝나는 시기는 정해져 있습니다.”

“그건 무슨 소리야? 다 죽으면 끝나겠지.”

이번만큼은 황성규도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질문을 건네고 있었다.

“폭등한 비트코인은 반드시 폭락합니다. 그 손실을 누군가 메워줘야죠. 유대 자본, 중국, 일본이 키운 비트코인의 손실 폭을 받아줄 정도로 체력도 있어야 합니다.”

“그렇구나! 그 정도 경제력을 가진 나라를 고르자면 한국만큼 적합한 나라도 드물지!”

“2만5천 달러 근처가 맥시멈입니다. 그런 비트코인 2천1백만 개를 사줄 나라는 많지 않습니다.”

“후우-.”

황성규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미국의 이자율 상승, 한국이 외환시장 공격, 그리고 비트코인 폭락?”

“2번과 3번의 순서가 바뀔 수 있습니다. 비트코인이 폭락하면서 한국의 위기가 옵니다. 그리고 손실폭을 한국의 자본으로 메우는 겁니다.”

“이 돈에 미친 인간들이….”

“실컷 먹고 한국에게 책임지라는 꼴입니다. 과거의 IMF 위기에서 살아난 나라로 한국이 유일하니까요.”

제임스가 상체를 세우고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좀 더 확실한 증거를 찾아. 그리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도 알아보고.”

“팀장님. 지경그룹의 힘만으로는 절대 감당하지 못합니다. 한국의 대기업이 보유한 현금이 500조 원을 넘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위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돈으로 폭락한 부동산만 매입해도 정말 천년만년 먹고살겠군.”

“자료를 더 확보해 보겠습니다.”

제임스가 자리로 돌아간 뒤에도 황성규는 한참 동안 제임스가 두고 간 서류를 읽고 또 읽었다.

[나카모토 사토시라는 비트코인의 창시자는 아직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유대계 자본이 만들어낸 가상인물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그는 보고서의 중간에 있는 한 덩어리의 문구에 동그라미를 커다랗게 그렸다.

**

박삼종이 지경화장품에 도착한 것은 점심시간이 막 지나서였다. 손도운은 먼저 그를 이중성에게 인사시킨 뒤에 함께 공장 안쪽에 있는 기계로 움직였다.

구석에서 한줄기 조명을 받아 외롭게 서 있는 기계를 본 박삼종이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천천히 다가갔다.

“와아.”

기계를 본 뒤에 박삼종이 보인 첫 번째 반응은 탄식 같은 감탄이었다.

“왜?”

박삼종은 대답도 없이 기계의 옆면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만졌다. 손도운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도로 기계에 정신이 팔린 모습이었다.

기계의 몸통 위로 느슨하게 걸린 체인, 올록볼록 튀어나온 몸통, 배기구처럼 보이는 관들이 지나간 것을 둘러싼 아래쪽을 그는 정말이지 세심하게 손으로 쓸었다.

“맞네요. 제가 기억하는 그 기계가 완성된 거.”

박삼종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제 기억이 맞는다면 이 안쪽에서 1천도의 열을 감당하게 제작됐을 겁니다. 800도 이상의 공간에서 물에 있는 수소를 추출해 이산화탄소와 결합하는 방식이거든요. 거기에서 가스나 액체 상태의 연료를 얻습니다.”

“그게 이퓨얼(E-Fuel)이잖아?”

손도운의 반문에 기계를 향해 쪼그려 앉았던 박삼종이 몸을 일으켰다.

“저도 최근에 이퓨얼에 관한 기사를 보고 좀 놀랐었습니다. 이거 분명 선생님이 20년도 전에 연구하셨던 거거든요.”

박삼종의 시선을 따라 손도운 역시 기계를 바라보았다.

20년도 전에 이퓨얼을 생산하는 기계를 만들었다고?

손도운은 퍼뜩 떠오르는 궁금함을 담고서 박삼종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전원이 없던데?”

“이론상으로는 태양광이나 풍력, 혹은 배터리를 이용하는 거로 되어 있거든요. 와! 이걸 진짜 만드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이거 때문에 사모님이 다치셨던 건데…….”

“그게 무슨 소리야?”

“그때 가진 장비로 800도에서 1천도의 열을 감당하는 기계를 만들기가 쉽지 않았거든요. 압력을 가하는 순간에 수시로 폭발이 있었어요. 전원을 공급하는 배터리도 제대로 개발되지 않은 시기라서.”

설명을 하던 박삼종이 고개를 저어댔다.

“그걸 아예 엔진 형태로 개발하셨나 보네요.”

“그렇지? 이거 엔진 맞지? 나도 그런 게 아닌가 싶었거든.”

“예! 승용차는 배터리로도 충분히 움직이지만, 그보다 큰 힘을 요구하는 대형 트럭이나 중장비는 어쩔 수 없이 연료를 태우는 엔진이 필요하거든요.”

이제야 기계를 이해한 듯 손도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개발한 분의 성함이 어떻게 된다고?”

손도운의 질문에 박삼종이 고개를 돌렸다.

“성태환 선생님이요. 당시만 해도 미쳤다는 소리 많이 들으셨어요. 물로 가는 자동차라는 표현이 지금도 정상적으로 들리지는 않으니까요.”

“그랬겠지.”

엉뚱한 상상을 현실의 기계로 만드는 개발자들이 흔히 듣는 말이어서 두 사람 모두 미쳤다는 표현이 낯설지 않은 표정이었다.

“어떻게 움직이게 하는지는 알겠어?”

“그건 아래쪽을 살펴봐야 짐작이라도 할 것 같아요. 그때와 많이 달라서 쉽지 않네요. 여기 벨트 보이시죠? 이걸 배터리나 외부 힘으로 구동하면 되는 거고, 물을 공급하는 관이 있을 겁니다.”

“알았어. 일단 보고하고.”

“예.”

답을 한 박삼종이 홀린 듯이 기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

천중명은 휴대 전화기를 든 채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고, 창으로 걸었다.

- 성태환이란 분이 개발한 기계가 확실한 것 같습니다. 물에서 추출한 수소와 이산화탄소를 결합해서 구동하는 엔진이랍니다. 박삼종이라고 후배 개발자가 그분의 제자로 일할 때 만들던 기계여서 바로 알아보았습니다.

“그렇군요.”

- 구동을 해보려면 기계를 들어서 전원 연결 장치와 물을 공급하는 관을 찾아야 합니다. 회장님께 우선 허락을 받고 손을 대려고 먼저 전화 드렸습니다.

천중명은 감정을 정리하기 위해 듣고만 있었다.

- 그전에 휘어진 벨트 연결 부위를 보강해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그러려면 먼저 기계 주인의 허락을 얻어야 합니다. 통화한 뒤에 전화 드리죠. 아! 그 박삼종이란 후배분의 수고비를 어떻게 결정할지 알려주세요.”

- 회장님. 이 기계를 알아보는 일만큼은 제가 회장님께 드리는 성의로 받아주시면 안 될까요? 꼭 해드리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가볍게 웃은 천중명은, “고맙습니다.”하는 인사로 통화를 마쳤다.

먼저 숨을 크게 들이마셨고, 천천히 내쉬었다.

결국, 돌고 돌아서 이렇게 온 거구나.

창을 짚은 채 서서 천중명은 교통사고로 죽은 진짜 천중명의 말을 떠올렸다.

- 우리가 왜 이렇게 됐는지 알 거 같아!

손을 비비던 놈은 분명 그런 말을 했었다.

- 6개월 뒤에 이천 냉동창고! 평택 공장에 새로운 기계가 들어와!

- 무슨 기계?

천중명이 반문했을 때 오지은이 들어오면서 기계에 관한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났었다.

죽은 놈이 말했던 기계와 지금 지경화장품에 있는 기계가 같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기계를 만졌을 때 어둠이 찾아오는 것이라면 적어도 연관성은 있는 게 분명했다.

천중명은 먼저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예, 회장님.

“윤 실장님. 오전에 확인한 결과, 보내주신 기계는 새로운 연료를 자체 생산해서 움직이는 엔진으로 보인답니다.”

- 예?

점잖은 윤만석의 놀란 질문이 먼저 날아들었다.

“블루크루드라는 청정연료를 이용하는 엔진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이번에 리온자동차를 인수해서 개발하려던 바로 그 엔진의 초창기 모델이라고 보셔도 틀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 엔진이라니요? 총수님께서 알아보신 결과로는 성공 가능성이 없어서 포기하셨을 정도라고 들었습니다.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불과 5년 전만 해도 블루크루드는 허황된 상상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침울한 윤만석의 숨소리가 먼저 넘어왔다.

“가동해 보고 싶습니다. 괜찮으시다면요.”

- 회장님께서 판단해 주십시오. 엔진이라는 것을 알아내셨으니 오히려 제가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그럼 준비가 끝나는 대로 다시 연락드리죠.”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바로 손도운의 번호를 눌렀다.

- 예, 회장님. 손도운입니다.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가느다란 답이 바로 나왔다.

“손 선생님. 기계를 가동하거나 당장 손대지는 마시고, 수리와 가동에 필요한 연장과 장비들을 준비해 주세요. 특히 안전에 유의하시고 준비가 끝나면 연락 주십시오.”

- 예, 회장님. 장비로 들어서 기계 하부를 점검하는 정도는 괜찮을까요? 충분히 조심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휴대 전화기를 내려놓은 천중명은 입술에 힘을 꾹 준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