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
179. 회장님께 새롭게 배우는 느낌입니다 (2)
손도운 개발자야 원래 지경화장품에 출근하는 상황이었다.
“안녕하세요? 천중명입니다. 부탁이 있어서 전화 드렸습니다.”
- 회장님께서 부탁이시라뇨?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있을지 그게 걱정입니다.
천중명의 전화를 손도운은 감동 그 자체인 음성으로 받았다.
“조금 뒤에 지경화장품으로 기계가 도착할 겁니다. 무한동력 원리를 이용한 기계라는데 훼손되지 않는 선에서 우선 살펴봐 주셨으면 합니다.”
- 기계의 작동 여부를 확인하라는 말씀이신가요?
“그것을 포함해서 어디에 사용하는 기계인지를 알아봐 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솔직히 기계에 문외한이라 어디에서 전원을 넣는지도 모릅니다. 아! 그리고 벨트를 연결한 지지대가 꺾이는 바람에 그 부분이 헐거울 겁니다. 참고하세요.”
- 먼저 살펴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럴 때 회장님께 꼭 도움이 되고 싶은데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개발자님 같은 분이 봐주시는 게 훨씬 정확한 판단이 나올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 기계를 개발한 분 역시 비슷한 심정이었을 테니까요.”
- 예, 회장님. 최선을 다해 살펴보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내용을 곽대출에게 전해주었다.
“햐! 이번에 기계에 대해서 제대로만 알게 되면 아쉬울 때마다 버튼을 눌러서 어둠을 불러오는 거 아니셔? 그럼 궁금한 걸 그때그때 바로바로?”
“정신 차려. 그랬다가 잘못돼서 너랑 몸이라도 바뀌면 어떡하냐?”
“나랑 회장님 몸이? 그럼 우리 주 과장은 어쩌고?”
“그 상황에 걱정한다는 말이 그거냐? 자칫해서 천상기랑 몸이 바뀌면 그건 답도 없다.”
이제야 천중명의 염려하는 바를 조금이나마 실감했는지 곽대출은 가라앉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언제 가보실 거야, 회장님아.”
“지금이야 지켜보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으니까 손도운 개발자가 살펴본 뒤에 시간을 정하자. 저녁에 양서평과 약속도 있어서 어쩌면 내일이 될 수도 있고.”
“알았습니다. 그럼 난 이만 내려가 있을게, 회장님.”
자리에서 일어난 곽대출이 집무실을 나서자 천중명은 책상으로 향했다.
지금은 두 사업의 초기 예산이 10조 원에 달하는 인터넷은행과 쇼핑몰의 사업에 관한 보고서를 살피고 그 사업을 결재할지, 보류할지를 결정해야 할 때였다.
인터넷은행은 짜임새가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쇼핑몰은 아무래도 물류창고나 배송이 문제였다.
보고서를 펼친 천중명은 특히 타 업체와의 비교부분과 지경이 지닌 특별함을 눈여겨보았다.
해결하기 어려운 딜레마였다.
고객은 하루라도 빠른 배송을 원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배송직원에게 무리한 일정을 맡길 수밖에 없다.
그 외에도 배송과 관련된 문제는 또 있었다.
배송료를 올려서 배송직원을 인간적으로 대하겠다면 다들 박수를 치지만 정작 주문은 배송비가 저렴한 다른 곳에 한다.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것은 소비자의 당연한 욕구이니 다른 해결책이 필요했다.
배송을 직접 고용하려면 법규에 아쉬운 구석이 많았다.
보고서에 천중명이 해놓은 연필 메모가 빼곡하게 찼을 때쯤 검토가 대강 끝났다.
가장 먼저 나온 반응은 역시 나직한 한숨이었다.
그렇게 보고서를 덮자 이번엔 기계 쪽으로 생각이 달려갔다.
궁금한 것이 많았다.
윤만석 아들과 미국에서 죽었다는 천호득의 딸 천수아의 나이, 관계 등등.
그러나 순서를 무시하고 마구잡이로 정보를 구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황성규는 대송이라는 거대한 괴물의 뒤를 살피는 중이어서 당장은 그 부분에 집중하도록 여유를 주는 게 좋았다.
**
윤성일은 아직 윤세계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얻어맞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눈이 뒤집힐 지경인데 만약 퉁퉁 부은 딸의 얼굴을 봤다가는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윤성일은 하루에도 몇 번이나 검찰, 정치인, 하다못해 조폭 조직까지 떠올렸다가 이를 악물어가며 분노를 누르곤 했다.
어쭙잖게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지경을 무너트린다는 결심에서였다.
똑똑똑.
그런 그의 집무실에 키가 훤칠하게 큰 전충호가 들어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됐어?”
“우선 이걸 보십시오.”
전충호는 ‘조폭 증권사로 사채업자 기습’이라는 보도 자료를 윤성일이 보기 좋도록 앞에 놓아주었다.
“지난번에 떠돌던 말이 거의 사실인 것 같습니다.”
윤성일이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소파 옆에 서 있는 전충호를 보았다가 다시 보고서를 향해 시선을 떨궜다.
“양서평과의 인연도 그 사건에서부터 이어진 게 분명합니다. 박승양 역시 그 시기에 남부증권을 출입했고, 지금은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냥 나가 앉아 있지는 않을 거고, 명목은?”
“박승양은 이명선이란 과장을 통해 파생상품 거래를 하고는 있습니다. 이명선은 평창동 천호득 명예회장 저택 메이드의 딸입니다.”
“이리 허접한 것들이 우리 세계를 그렇게 욕보였단 말이지?”
치욕을 이겨내려는 것처럼 윤성일은 소파의 팔걸이를 꽉 움켜쥐었다.
“여기 사진을 봐. 증권사에 일어난 칼부림이야. 수습을 위해 정치권이나 행정부에서 도움을 주었을 거 아냐? 누가 도움을 줬는지 찾아. 그럼 내가 접촉해볼 테니까. 그리고 말이지. 증인도 좀 찾아보고.”
“남부증권에서는 그날 일이 금기어 같습니다. 그 외에 고성의 가진 항에서도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쪽도 지경에서 얼마나 손을 썼는지 상인들이 아예 입을 닫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입을 열 사람을 찾으라고!”
“예, 회장님.”
상체를 기울인 채 보고하던 전충호가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됐고. 그래서 천중명의 약점은?”
“과거를 문제 삼지 않는다면 당장 걸리는 게 없습니다.”
기가 막힌 심정에 분노를 덮어쓴 눈빛으로 윤성일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 그럼 과거에는? 오지은인가 하는 여자아이가 있었잖아?”
윤세계와 결혼을 고민하며 슬쩍 알아보았던 내용을 윤성일이 먼저 들췄다.
“오지은은 천호득 명예회장의 지시로 용인에서 천상기 회장과 지내고 있습니다.”
전충호의 표정을 본 윤성일은 “허!”하는 탄식을 쏟아냈다.
“그렇다니까! 그 독한 영감이 그런 일을 약점으로 둘 사람이 아니지.”
한숨을 푹 내쉰 윤성일이 야비한 눈빛으로 전충호를 보았다.
“과거를 뒤져봐야 흠집 내기가 될 거고. 현재는 개인적인 약점이 없다. 이거지? 그렇다면 만들어. 무슨 말인지 알지? 만들어. 어떡해서든.”
“예, 회장님.”
“일단 손가락질을 받게 한 다음, 인수와 관련해서 중국의 폭력조직과 연계되었다는 보도 터트리고. 앞쪽에 천상기, 오지은의 일도 만져.”
“예. 회장님.”
전충호의 답을 들은 윤성일은 각오를 다지는 듯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천호득 영감이 뒤에서 막아주는 것도 한계가 있을 테니까 천중명의 실체가 추악하다는 인식만 심어. 그런 뒤에 일이 터지면 돕는 사람들은 또 그러려니 해.”
“알겠습니다, 회장님.”
윤성일을 향해 인사한 전충호가 집무실을 나선 다음이었다.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가르쳐주마.”
홀로 남은 윤성일이 뿜어낸 독기가 그의 집무실을 떠돌았다.
**
천호득은 서재에 앉아 귀에 이어셋을 걸었다.
“여보세요?”
- 총수님. 내용을 확인했습니다. 신임회장이 대송그룹 윤세계 양의 뺨을 때려서 현재 병원에 입원 중입니다.
윤만석의 보고에 천호득의 고개가 불쑥 올라왔다.
- 이와 고막을 다쳐서 일주일 정도 치료해야 하고, 무엇보다 멍이 심하게 들어서 보름 이상은 병원에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천호득이 웃는데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이유는?”
- 일이 좀 복잡합니다.
그때부터 대략 5분간, 윤세계가 천중명을 탐냈고, 리온자동차의 인수까지 겹치며 윤성일이 일에 개입했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흐헤헤헤헤.”
두 번째 설명을 들은 뒤에 천호득의 웃음이 터졌다.
“윤성일, 그 자존심 강한 인간이 죽을 맛이겠군.”
- 상황이 쉽지 않습니다. 신임회장의 평가가 독불장군에 홀로 정직한 척한다는 비난까지 받고 있어서 대송이 전면전을 각오하는 모양새도 부담스럽습니다.
“그쪽에 사람이 있던가?”
- 전충호라고 중급 심부름꾼이 있기는 합니다.
천호득이 입술을 얇게 늘이며 코웃음을 털어냈다.
“그렇게 내게 눌리고도 아직 그런 인간을 데리고 있다니. 우리는 지켜보는 것으로 하지. 지난번 조승필의 일로 이미 한번 아쉬운 소리를 했던 터라 바로 하기도 어렵고.”
천호득이 결론을 내린 다음이었다.
- 총수님. 회장이 어제 용인을 방문했었습니다. 기계를 며칠 살펴보고 싶다고 간곡하게 말씀하셔서 오늘 일찍 지경화장품으로 보내놓았습니다.
“으음.”
천호득은 입맛을 다시는 사람처럼 입술을 움직였다.
“황성규인가 하는 아이는 뭘 하고 있던가?”
- 대송을 상대할 자료를 확보하느라 바쁜 눈치였습니다.
“크게 보는 법이 부족하잖아. 윤성일은 절대 혼자 달려들 인간이 아니야. 게다가 우리 내부에서 또 조승필 같은 인간들이 나올 수도 있고.”
- 전에 있던 직장이 워낙 임무를 던져주면 그쪽을 깊게 파고들던 방식이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윤만석의 설명을 들은 천호득이 “그렇군.”하고 입을 다물었다.
“지켜보세.”
- 예, 총수님.
이어셋을 내려놓은 천호득이 간헐적인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리 강단 있다고 해도 윤성일이 아끼는 딸의 뺨을 때릴 생각을 하다니. 미쳤구나. 미쳤어. 흐헤헤헤헤!”
그러다가 그는 특유의 웃음을 터트렸다.
“그 성질머리 못된 놈이 얼마나 화가 치밀었을까? 흐헤헤헤헤.”
천호득은 모처럼 유쾌한 얼굴이었다.
**
트럭이 도착하자 공장의 지게차로 기계를 받았다.
천중명의 지시를 받았던 이중성과 사명감을 눈에 담은 손도운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장의 가장 조용한 곳으로 움직인 지게차가 조심스럽게 기계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스펀지와 뽁뽁이를 이용해 이중으로 감싼 뒤에 종이 박스에 넣었고, 그걸 다시 나무 박스에 담아두어서 기계를 꺼내는데도 시간이 제법 걸렸다.
“수고들 했어. 자네들은 이제 나가 봐.”
직원들을 내보낸 이중성이 손도운과 함께 기계에 다가섰다.
손도운은 나름 개발자들 사이에서 연륜과 지명도를 갖춘 사람이었다. 손도 대지 않은 채 우선 전체 모양을 살폈고, 이어서 고개를 바싹 들이밀고 연결 부위와 부품들을 확인했다.
“이건 처음부터 아예 깎아서 만든 것처럼 보입니다.”
상체를 세운 손도운이 지켜보던 이중성을 향해 설명처럼 입을 열었다.
“도면을 만들었는데 적당한 부품이 없으면 직접 주문하거나 아니면 비슷한 부품을 사다가 일일이 깎거든요.”
“손 선생님 같은 개발자가 만든 모양이네요.”
허벅지 위로 올라올 정도로 높이가 있었고, 옆으로 족히 1미터는 되는 작지 않은 기계를 이중성은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여 살폈다.
“나는 짐작도 못 하겠는데, 뭐 하는 기계인가요?”
“이렇게 봐서는 전혀 모르겠습니다. 오래전에 제작된 기계라 동작스위치도 못 찾았고요. 내부를 보자고 함부로 뜯었다가는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서 시간을 두고 하나씩 점검해볼 참입니다.”
“그러세요. 그럼 나는 이만 올라갑니다.”
“예, 사장님.”
흥미를 잃은 이중성이 사무실을 향해 움직인 뒤에 손도운은 시간을 가지고 꼼꼼하게 기계를 살폈다.
자동차 수리점에서 사용하는 볼록 전구가 박힌 라이트를 당겨 와서 이리저리 비춰보았고, 혹시나 기계 부품을 알 수 있는 숫자나 이름이 있는지를 면밀히 살폈다.
30분쯤 지난 다음이었다.
스마트폰을 꺼낸 손도운은 정면, 옆면, 그리고 특징적인 면을 향해 카메라의 버튼을 눌렀다. 그런 뒤에 그는 개발자 모임방을 열어 열 장이 넘는 사진을 모두 전송했다.
[혹시 이 기계를 본 적 있거나, 짐작 가는 분은 도움 부탁해요. 내가 삼겹살에 소주 대접합니다. 개인적으로 꼭 알아내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한 마디라도 도움을 주세요.]
손도운이 내용을 설명하고 나자 연달아 글이 올라왔다.
[이건 뭐야? 신기하게 생겼네.]
[손도운 씨. 성공했다고 하더니 방앗간 차리려고?]
기다렸다는 듯 농담이 먼저 올라왔다.
그 뒤로 개발자들 특유의 궁금함이 발동해서는 크기와 관련한 질문, 벨트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라는 조언, 연결 부위가 이상하다는 의견들이 줄줄이 있었다.
[작동 스위치는?]
[밖에서는 모르겠네. 코드를 연결하는 부위도 따로 없고.]
질문에 손도운은 아는 바대로 답을 했다.
개발자 모임방에 가입된 회원 30명이 거의 살폈는지 문자를 확인하지 않았다는 숫자가 ‘3’까지 떨어졌는데도 손도운이 만족할 만한 답은 없었다.
[궁금해서 그런데 나중에 용도를 알게 되면 꼭 좀 알려줘요. 마음 같으면 달려가서 한번 뜯어보고 싶네요.]
[우리 가서 한번 다 같이 뜯어볼까요? 소주에 삼겹살 얻어먹고 온다고 생각하지 뭐.]
개발자들답게 다들 정체가 궁금하다는 의견을 내놓을 때였다.
[도운이 형님. 이거 어디에서 났어요?]
뒤늦게 들어온 박삼종의 질문이 날아들었다.
[이거 선생님이 전에 만드셨던 기계랑 비슷한데요.]
그러면서 그는 기계를 알아보는 듯한 문자를 보내왔다.
[선생님이라니?]
[개발을 시작한 게 제품 만드는 일을 돕다가 어깨너머로 배워서였거든요. 그때 만들던 기계가 물을 분해해서 움직이는 엔진이었어요. 이론상으로는 특허를 받았는데 제품 생산에서 실패해서. 형님? 그거 지금 어디 있어요?]
문자를 확인한 손도운이 기계를 한번 보고는 얼른 스마트폰 자판에 손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