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178화 (178/315)

# 178

178. 회장님께 새롭게 배우는 느낌입니다 (1)

막히는 시간을 피한다고 했어도 용인에 도착한 것은 오후 5시가 훨씬 넘어서 저녁 식사를 준비해야 할 시간이었다.

경계를 서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집 앞에 멈춘 차에서 천중명이 내리는 것과 비슷하게 윤만석이 현관에서 나왔다.

“오셨습니까? 연락이라도 주시죠.”

“평창동 들렀다가 형도 궁금하고, 실장님께 여쭤보고 싶은 것도 있어서 무작정 들렀습니다. 괜찮다면 마당에서 있었으면 싶은데요.”

현관을 통해 거실을 바라보는 윤만석에게 천중명이 건넨 제안이었다.

“날벌레가 있을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갑갑한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요.”

“알겠습니다.”

천중명은 윤만석과 함께 마당 안쪽의 테이블에 앉았다.

저 멀리서 새롭게 깔리는 저녁의 기운이 아직 남은 하루의 열기를 밀어내기 위해 노을을 타고 마당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음료를 가져다준 대원에게 천중명은 고맙다는 의미로 눈인사를 전했다.

“실장님. 전 이리저리 말을 돌리는 것이 불편합니다. 그러니 바로 말씀드리죠.”

윤만석이 하나뿐인 눈동자를 움직여 천중명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버지께서 가져주신 기계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괜찮다면, 아니 내키지 않더라도 며칠만 그 기계를 살펴보고 싶습니다.”

윤만석은 먼저 입 끝을 움직여 가볍게 웃었고, 이어서 졌다는 듯이 숨을 내쉬었다.

“회장님은 점점 더 젊은 시절의 총수님과 똑같아지시는군요.”

“성격을 말씀하시는 거죠?”

“눈빛도 그렇습니다.”

천중명은 가볍게 웃으며 잔을 들었다.

단맛이 없어서 좋은데 이상하게 치약 냄새가 강해서 솔직히 더 마시고 싶지는 않았다.

“회장님. 죽은 아들놈이 사업을 해보겠답시고 꽤 들고 다녔던 기계입니다. 총수님께서 알아보셨는데 성공 가능성이 없다고 결론 내셨답니다. 이제는 그만 녀석을 보내고 싶습니다.”

죽은 아들을 자꾸만 되새겨야 하는 윤만석의 솔직한 심정이 그의 얼굴과 말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다 안다. 이해한다.

그러나 말하기 어려운 천중명의 고민이 문제였다.

어둠이란 게 나타나서 과거니 현재니 미래 중 하나를 뺑뺑이 돌린 것처럼 제 마음대로 골라서 보여준다고 해?

그래서 저걸 꼭 가져가서 확인해 봐야겠다고?

성창욱의 아버지인 성태환이 만들었을지 모른다는 기계란 말도 해야 하는 거야?

천중명은 잠시 치약 맛 음료수를 바라보며 고민했다.

솔직하고 직선적인 것도 정도가 있는 거니까 적당하게 넘어가는 게 지금은 현명한 처신이었다.

생각을 정리한 천중명은 잔에서 고개를 들었다.

“다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실장님의 아픔을 어느 정도는 알 것 같습니다. 그렇더라도 부탁합니다. 며칠만 내게 맡겨주세요. 내가 기계를 살필 최소한의 시간을요.”

윤만석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눈으로 천중명을 바라보았다.

“이유를 말씀드리지 못하는 점도 이해해주세요. 제 성격에 말씀 못 드릴 때는 얼마나 갑갑하겠습니까?”

“흐음.”

마침내 그가 결심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어디로 보내드릴까요?”

그리고는 천중명의 심장이 두근거리는 답을 내놓았다.

“우선 지경화장품으로 가져갈까 합니다. 조심스럽게 운반하고 싶으니까 내가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그 정도는 제가 하겠습니다. 비용을 아끼지 않는다면 포장 이사를 이용해도 문제없이 보낼 수 있습니다. 내일 보내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실장님.”

“설마 분해하셨다가 조립이 안 된다며 부품으로 주시는 건 아니시죠?”

서글픔이 가득 묻은 농담에 천중명은 미안한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혹시 총수님께서 저 기계를 어디에서 구하셨는지 말씀해 주셨습니까?”

“들었습니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그 답은 아버지께 직접 들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뭔가 치사한 것 같지만 천중명은 천호득에게 들었던 말을 전하지 않았다.

천호득 역시 설명해주지 않았던 일이었다.

그걸 굳이 천중명이 직접 죽은 천수아의 사건을 처리하는 동안, 정작 자기 아들이 남긴 기계가 서울로 향했다는 사실을 말해줄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였다.

윤만석의 아들, 천호득 딸의 순서로 죽었는데 기계가 딸의 집에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둘째 형님은 투약 이후로 계속 잠에 빠져 있습니다.”

“시간이 꽤 걸릴 거란 생각으로 기다리는 겁니다. 물론 윤 실장님의 수고에 기대서요.”

“큰형님의 자녀분들을 챙겨주신 것도 그렇고, 둘째 형님을 이렇게 따로 모시는 걸 보면 회장님은 의외로 가슴이 따뜻한 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의외로는 또 뭡니까?”

천중명의 농담을 핑계로 둘이서 가볍게 웃었다.

“다른 집안도 마찬가지지만, 후계자 싸움에서 진 쪽은 모두 죽거나 해외로 나갔습니다. 둘째 형님은 심지어 회장님을 공개적으로 노리기까지 했는데 이렇게 지켜주시잖습니까?”

“설마 다들 그러려고요?”

“대송만 해도 형제 중 두 명이 이미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총수님께 눌려서 그렇지, 윤성일 회장 역시 재계의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는 분은 아니었습니다.”

지금 다투는 일을 알고서 윤만석이 주는 조언처럼 들렸다.

“대송은 주력 사업에서 단 한 번도 기득권을 빼앗긴 적 없는 그룹입니다. 그만큼 관련 부처에 사람을 단단히 심어놓았고, 법규마저 그들에게 유리하게 만들어 왔습니다.”

“황성규 선생이 답답해 보이셨던 모양이죠?”

나직한 웃음을 흘린 윤만석이 오늘 처음 보여주는 밝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친구는 아직 재벌의 특성을 제대로 익히지 못했습니다. 경험이 쌓이고 나면 엄청난 역할을 할 텐데 가려운 곳을 놔두고 자꾸 엉뚱한 곳을 긁어대는 것 같아서 지켜보기 갑갑할 때는 있습니다.”

“직접 말씀해 주시면 더 좋잖습니까?”

“성장을 지켜보는 것이 이곳에서 지내는 또 하나의 즐거움입니다, 회장님.”

죽은 아들의 아픔을 잊을 정도로 윤만석에게 황성규는 기쁜 존재였던 모양이었다.

“가봐야겠습니다.”

“기계는 내일 오전 중으로 지경화장품으로 보내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천중명을 따라 윤만석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최만호는 다자통화가 가능한 회의실에 앉아 신상훈 리온자동차 총괄사장, 세 명의 팀장들과 함께 한 시간쯤 의논을 나누었다.

- 실장님. 거양자동차는 유럽진출을 강력하게 희망하고 있습니다. 중국 내수 시장을 통해서 엄청난 자금을 확보했기 때문에 당장 유럽의 기준에 맞출 자동차 기술과 배터리 기술을 얻을 수 있다면 돈은 문제가 아니라는 태도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리온을 인수하는 데 들어가는 5조 원을 지급한다고 할 정도라면 굉장한 조건이 아닌가?”

- 리온의 류효양 부사장은 이미 리온의 승용차 부분만 가져가는 조건으로 우리 돈 7조 원을 제시했었습니다. 에릭슨이 직접 말해준 내용입니다.

“승용차 부분 이전에만 7조 원을 제시했었으니 기술이전만 하는데 5조 원은 적당한 가격인 셈이로군.”

- 그렇습니다. 또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될 내용 하나는 유럽시장의 중국자동차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입니다.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가 모두 중국의 규정대로 합작 회사를 만들었지만, 중국의 자동차 수출은 미미합니다.

“흠.”

지금의 통화가 모두 녹음되고 있는데도 최만호는 신상훈의 의견을 빠르게 메모하며 들었다.

- 자칫하면 리온자동차의 브랜드 가치가 심각하게 훼손될 수 있습니다. 그 점도 고려해주셨으면 합니다.

“대강 정리하지. 자네는 거양자동차와의 합작에 부정적이다, 이런 견해인 거지?”

- 그렇습니다. 훼손되는 브랜드 가치를 따지면 기술이전료 5조 원은 상당히 부족한 금액입니다.

메모하던 최만호가 녹음기를 향해 시선을 들었다.

“기술이전에 합의한다면 자네는 얼마의 금액이 적당하다고 판단하나?”

- 10조 원 이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술이전 뒤에 거양자동차에서 심각한 안전상의 결함이 발견된다면 리온의 브랜드 역시 마찬가지 타격을 받게 됩니다.

“알았어. 고생하고, 또 연락하지.”

통화를 마친 최만호는 메모했던 것을 처음부터 넘기며 내용을 살폈다.

“후! 아직 배워야 할 것이 정말 많구만.”

혼잣말을 뱉어낸 최만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

운전기사와 단출하게 움직인 참이어서 천중명은 바로 삼성동 빌라로 향했다. 차 안에서 이중성 대표에게 연락해 기계가 도착할 테니 조심해서 관리해 달라는 요청도 전했다.

집에 도착한 것이 대략 저녁 7시쯤이었는데 허선영은 아직 퇴근 전이었다.

얼마 만인지 모를 정도로 일찍 퇴근한 길이었다.

샤워한 뒤에 편안한 운동복 차림으로 홈 바에 앉은 천중명은 언젠가처럼 거실의 창을 통해 밖을 바라보았다.

길었던 해가 사라지며 어둠이 깔렸고, 그만큼 탄천을 밝히는 가로등 불빛과 자동차의 불빛이 선명해져 있었다.

알고 싶었다.

왜 몸뚱이가 바뀌었고, 어떤 이유로 어둠이 밀려들어서 엉뚱한 모습을 보여주는지 말이다.

천호득이 어둠을 보고 있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차라리 그가 사실을 전부 알고서 천중명을 받아들인 것이었으면 싶어서 그랬다. 가진항에서의 눈물과 아버지라 부르라던 그 모습이 현실을 완전히 알고서 해주는 말이었으면 싶어서.

내일부터 알아보면 되겠지.

천중명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새로운 날이 시작되면 또다시 엄청난 보고서와 싸워야 하고, 양서평 일행과 저녁을 먹어야 하며, 기계에 숨겨진 비밀도 캐내야 한다.

대송그룹과의 피하기 어려운 싸움도 있었다.

천중명은 휴대 전화기를 들어서 곽대출의 번호를 눌렀다.

- 예, 회장님.

“오늘 용인에 들렀다가 조금 전에 삼성동에 왔다. 내일 윤 실장이 기계를 지경화장품으로 보내주기로 했다.”

- 잘됐습니다, 회장님. 이제 비밀만 알아내면 되겠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오전에 하자.”

- 예.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주방을 향해 몸을 돌렸다.

“좋아! 오늘은 모처럼 라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내일은 올 테고, 포기하지 않는 한 꼴통회장을 향해 걷는 길은 변함이 없을 테니까 지금은 그저 기운을 잃지 않는 도깨비가 되는 것이 좋았다.

**

다음 날 아침은 역시 유진교와 최만호를 맞이하면서 시작되었다. 신상훈의 의견을 담은 보고서를 앞에 두고 천중명은 두 사람의 의견을 들었다.

“결정은 아무래도 우리가 국내에 생산공장을 설립할 것인지에 따라 다를 것 같습니다.”

“그 점은 시간을 두고 결정해야 할 것 같은데요. 블루크루드를 이용한 차세대 엔진 개발을 위해 리온자동차를 인수한 거라 생산공장을 신설하는 것은 좀 더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리고 이것이 인터넷 은행의 초안, 이것이 쇼핑몰에 대한 계획서입니다. 결재해 주시면 주요부서 책임자급의 스카우트를 시작할 예정입니다.”

아침부터 커다란 숙제를 받아들었는데 이 모든 것이 천중명의 지시에 따른 일이었다.

“스카우트 과정에서 잡음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해 주세요. 두 분이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송그룹과 좋지 않은 일이 있었습니다.”

“예, 회장님.”

유진교는 역시 무언가 아는 듯한 답을 내놓고 추가로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듬직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무섭기도 한데 하여간 황성규와 마찬가지로 한편이어서 다행이었다.

“본부장님. 고맙습니다.”

“예?”

“때론 갑갑하고, 또 어떨 때는 당황스러우실 텐데 묵묵하게 거친 제 모습을 받아주셔서요.”

유진교가 웃는 모습을 참 오랜만에 본 것 같았다.

“회장님. 저는 직원들이 행복한 회사를 상상해본 적 없습니다. 그래서 늘 회장님께 새롭게 배우는 느낌입니다.”

최만호가 ‘이 두 사람이 뭐가 있었나?’ 하는 얼굴로 바라보았는데 그런 거 없이 감정의 전달만으로 주고받은 대화였다.

“일어나겠습니다, 회장님.”

두 사람이 나간 다음이었다.

천중명은 바로 기다리고 있을 곽대출을 불렀다.

똑똑똑.

노크와 함께 곽대출이 바로 들어왔다.

“커피는 괜찮다고 말해 두었습니다.”

“잘했어. 앉아.”

소파에 앉은 뒤에 천중명은 먼저 문을 확인했다.

“일이 복잡해. 천봉서와 천상기가 미국에서 죽인 딸의 이름이 천수아거든. 윤만석의 아들 윤성태가 가졌던 기계가 그 죽은 딸의 집에서 나왔단다.”

“뭐가 이렇게 복잡해? 나이가 어떻게 되는 거야? 연인 관계였나?”

“아무튼, 그 두 사람의 관계는 나중에 황 선생에게 알아보라고 하면 되니까 뒤로 미루고. 하여간 오늘 오전 중에 기계를 지경화장품으로 가져다 놓겠다는 답을 들었어.”

“누가 그걸 확인하지? 회장님?”

예상했던 질문이어서,

“손도운과 이관수 개발자면 적당하지 않겠냐?”

천중명은 바로 답을 내놓았다.

“하아, 멋지네. 우리 회장님!”

“하여간 나는 오늘 그 일을 볼 테니까 그렇게 알고, 혹시 기계를 만질 때면 네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

무슨 뜻이냐는 의미를 가득 담은 곽대출의 시선을 보며 천중명은 바로 입을 열었다.

“지경화장품에서 몸이 바뀐 거잖아. 남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개발자들이 기계를 보기는 하는 건데, 거기에서 몸이 바뀌었던 거라 준비를 해두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 거지.”

“알았습니다. 그런데 혹시 만일을 대비해서 다른 곳으로 기계를 옮기면 어떠실까?”

“그걸 나도 생각했었는데 그랬다가는 배려해 준 윤 실장의 의심을 살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일단 그냥 두기로 했다. 어차피 어떤 기계인지 확인만 할 거고.”

“그러네. 오늘 오전이라고 그러셨지?”

고개를 끄덕인 곽대출이 질문을 던진 직후였다.

지이이잉.

[기계를 싣고 출발했습니다. 한 시간 뒤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예상 밖으로 이른 시간에 윤만석이 보낸 문자가 휴대 전화기에 들어왔다.

“후.”

천중명은 먼저 숨을 길게 내쉬었다.

혹시 비밀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올라오는 작은 흥분을 털어내기 위해서였다.

“기계가 출발했단다.”

“아, 씨!”

곽대출도 비슷한 흥분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는데 반응은 천중명과 확실히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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