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177화 (177/315)

# 177

177. 건드리면 안 되는 도깨비 (3)

어둠이 보여준 모습은 뜻밖에도 윤만석이었다.

유리에 끼었던 서리가 사라진 것처럼 또렷해진 빛줄기 안에서 그는 천중명이 보았던 기계를 매만지고 있었다.

“이게 뭐라고.”

혼잣말을 마친 그가 “하아.”하고는 기다란 숨을 내쉬었다.

“총수님이 해도 성공하기 어려웠던 기계였단다. 약에 절어 살던 네가 가졌던 마지막 희망은 원래부터 이뤄질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죽은 아들을 떠올리는 게 분명했다.

저 기계가 마지막 희망이었다는 말을 들으며 천중명은 대강의 얼개를 짐작할 수 있었다.

죽은 윤만석의 아들이 남긴 기계를 천호득이 지니고 있다가, 오늘 전해주었다는 것 정도지만 말이다.

잠시 기계를 내려다보던 윤만석이 독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기계를 만지면 어둠이 달려든다 이거지?’

천중명이 상황을 짐작하는 순간에 어둠이 달려들었다.

그런 뒤에 기다렸다는 것처럼 접견실이 눈에 들어왔다.

“회장님을 뵙고 싶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천중명의 반응이 굼떴던 모양이었다.

혹시 말을 못 알아들었나 싶었던지 통역이 조용하게 양서평의 말을 다시 전해주었다.

“나도 그렇습니다.”

이번엔 양서평의 뒤에 있던 통역이 그의 귀에 대고 천중명의 말을 전했다.

“회장님. 비록 불미스러운 일로 알게 되었지만, 나는 메모리 거래와 미라클 유통을 시작으로 우리의 관계가 좋은 방향으로 발전할 거라 확신합니다.”

과장된 표정의 양서평이 류효양과 조양회를 돌아본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잠시 뒤에 우리의 관계를 더욱 발전시킬 훌륭한 제안을 드릴까 합니다.”

“기대되는군요.”

천중명의 대꾸를 들은 양서평이 흡족한 듯 웃었다.

“내가 관상을 알지요. 우리 천중명 회장님은 확실히 용 같은 기상이 눈매에 있으니 조만간 세상에 그 이름을 떨칠 것입니다.”

떠돌이 약장수와 같은 말이었다.

“좋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천중명이 인사하는 건너편에서 류효양과 조양회가 고개를 끄덕였고, 유진교, 최만호는 적당한 미소로 분위기를 맞추었다.

천중명은 대화에 집중했다.

어둠이 보여준 기계에 정신이 팔려서는 지경그룹의 신임회장이 건방지다거나, 대화조차 제대로 못 하는 인물이라는 평을 듣게 된다면 그것이 곧 지경그룹의 이미지나 평판이 된다.

“회장님. 류효양 부사장의 제안을 들어보십시오.”

본인은 멋지게 대화를 이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양서평은 확실히 싸구려 장사치의 느낌이어서 중요한 사업을 중재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회장님. 우리 거양자동차는 리온이 지닌 승용차 부분의 기술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충분한 대가를 치를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

“그렇군요. 기술이전 문제는 이 자리가 끝난 뒤에 우리 최만호 실장과 논의해 주시겠습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회장님.”

류효양은 우선 고개를 숙이겠다는 태도로 천중명을 대했다.

**

따귀를 맞고 하룻밤이 지난 윤세계는 깨어나서부터 수시로 울었다.

왼쪽 눈은 핏줄이 올라와 시뻘겋게 충혈되었고, 볼은 볼거리 앓는 아이처럼 퉁퉁 부은 데다 시퍼렇게 멍까지 들어서 원래 얼굴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흉측한 몰골이었다.

“흐윽. 흐으윽.”

그런 얼굴로 윤세계는 서럽게 울었다.

‘개자식!’

어쩌면 따귀를 때려도 아랫것들 앞에서 그렇게 무참하게!

윤세계의 눈에 독이 파랗게 올라왔다.

아랫것들도 그렇지만, 허선영의 눈앞에서 그런 꼴을 당했다는 사실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치욕스러웠다. 그냥 맞은 것도 아니고, 테이블을 안은 채 쓰러져 기절한 모습까지 보였으니 이제 허선영 앞에 어떻게 선다는 말인가.

‘두고 봐. 이 개자식!’

이를 악물려던 윤세계가 왼손으로 볼을 감싸며 인상을 찌푸렸다.

“흐으으!”

서럽다. 억울하다.

그때였다.

달각.

문이 열리는 소리에 윤세계가 움찔했다.

“흐으으윽!”

저렇게 작은 소리에도 화들짝 놀라는 자신의 반응이 서글퍼서 또 울음이 나왔다.

“좀 어떠냐?”

병실을 들어선 윤병지에게 윤세계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마음 독하게 먹어.”

“흐으윽. 흐윽. 흐으으윽.”

윤세계는 고개를 숙인 채 그저 울기만 했다. 환자복은 왜 이렇게 헐렁해서 사람을 더 비참하게 만드는 건지.

“몸조리하고 있어라.”

무언가를 말하려던 윤병지가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삼츤.”

볼이 부은 데다 입을 제대로 놀리지 못하는 윤세계가 이상한 발음으로 윤병지를 불렀다.

“슬마 이대루 너므가는 거 아니지여. 나는 주그믄 즈거찌 이대루는 모너머가여.”

그녀의 눈을 바라본 윤병지는 먼저 깊은숨을 내쉰 뒤에 입을 열었다.

“회장님께서 각오를 단단히 세우셨다. 먼저 허 의원을 벌하고, 다음으로 천 회장이 물러날 때까지 지경을 몰아붙이시겠단다.”

“삼츤. 나 느무 층피해요. 나 이제 망신스러워서 어뜨케 사라요.”

“그럴 것 없다. 우리가 순진하게만 살아서 허세직이란 인간에게 당했던 것뿐이야.”

“츤증명이도 또가튼 인간이에요!”

씁쓸한 표정으로 윤세계를 바라보던 윤병지가 고개를 주억거려준 뒤에 병실을 나섰다.

너, 이 인간. 이제 큰일 난 거야.

회장에서 밀려나면 두고 봐.

내가 너희 둘을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게 만들어줄 거야!

특히, 허선영 너!

허선영을 향해 독기를 피워내던 윤세계가 움찔했다.

“선영 씨에게 또 쓸데없는 짓을 하면 따귀를 얻어맞게 될 거야.”

어제 보았던 천중명의 눈빛이 떠올라서였다.

그 눈빛을 떠올리기만 해도 이상하게 몸이 먼저 반응하고 있었다.

**

양서평과 다음 날 저녁을 함께 먹기로 약속한 천중명이 실무진 면담을 위해 먼저 접견실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로부터 30분쯤 뒤에 유진교와 최만호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본사 앞에서 배웅하고 올라왔습니다.”

“고생했습니다. 특별한 내용이 있나요?”

“류효양 부사장은 리온자동차를 인수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전액 지불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천중명은 새삼스럽다는 얼굴로 유진교를 보았다.

뭔 승용차 부분 기술이전 조건에 인수비용 전액을 지불하겠다는 건지.

유진교는 거양자동차와 양서평 사이에 무언가 숨겨진 내막이 있다고 짐작하는 눈치였으나 질문을 하지는 않았다.

“실장님이 신상훈 총괄사장의 의견을 들어본 뒤에 결정하기로 하죠.”

“알겠습니다, 회장님.”

“나는 조금 뒤에 평창동에 들를 생각입니다. 다른 특별한 일은 없죠?”

“예. 그럼 저희가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유진교와 최만호가 나간 뒤에 남은 일들을 정리한 천중명은 먼저 전화기를 들었다. 천호득의 번호를 누르고 신호음이 몇 번 울린 다음이었다.

- 여보세요?

건조한 천호득의 음성이 들렸다.

“아버지. 중명이입니다. 잠시 말씀드릴 게 있어서 찾아뵐까 하는데 오후에 집에 계실 건가요?”

- 와.

“예. 그럼 지금 출발하겠습니다.”

통화는 평소보다 간결했고, 투박했다.

윤만석과의 일도 있을 테고, 기계를 넘기는 과정에서 심기가 불편할 수 있을 거라 짐작만 했다.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재킷을 들고 집무실을 나섰다.

아직 오후의 중간이라 길은 딱히 막히지 않았다.

평창동에 들어섰을 때 정원은 텅 비어 있었다.

현관을 들어선 천중명에게 장만섭과 송달순이 인사했고, 거실 안쪽에서 이은명이 나왔다.

“저 왔습니다. 아버지는요?”

“서재에 계셔.”

“제가 갈게요. 의논드릴 게 있어서 왔거든요.”

천중명은 천호득의 서재 문을 두드린 후 문을 열었다.

“아버지. 저 왔습니다.”

“큰애 좀 불러. 위층에 가고 싶어.”

“예.”

마치 천중명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한 듯한 천호득의 지시가 있었다. 천중명이 장만섭을 불렀고, 그렇게 세 사람은 위층의 거실로 올라갔다.

“너는 내려가서, 내가 부를 때까지 올라오는 사람이 없도록 해라.”

“예에, 총수님.”

메이드가 수박을 갈아 만든 주스를 두 잔 가져다주고는 장만섭과 함께 내려갔다.

“무슨 일이냐?”

“아버지. 짐작하시겠지만, 허락 없이 방에 들어가서 망가졌다는 기계를 봤습니다.”

천호득은 굳은 얼굴로 듣고만 있었다.

“마음을 많이 쓰시는 것 같아서 할 수 있다면 비슷한 다른 것으로 준비해드릴까 싶어 그랬던 건데 말씀드리지 않은 건 잘못했습니다.”

“흥. 덩치 큰 놈이 네게 말을 전하는 모양이구나?”

“전에는 절대 그런 적 없었습니다. 다만, 이번은 아버지께 거짓말은 못 하겠고, 말씀드리지 말라는 저와의 약속도 못 지켜서 그 점을 알려줬습니다. 그것도 모두 제 잘못입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창을 향해 앉은 천호득이 눈만 돌려서 천중명을 본 뒤에 다시 시선을 앞으로 가져갔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윤만석 실장의 죽은 아들 이름이 성태였다.”

용서를 구하는 천중명에게 천호득은 엉뚱한 말을 꺼내 들었다.

“심약한 구석이 있어서 외로움도 타고, 그런 와중에 동양인이라는 차별을 견디기가 어려웠던 모양인지 약을 해서 사고를 치곤 했었다. 그러던 놈이 사업을 한답시고 돌아다니는데 내 눈에 그 모습이 좋게 보이지 않았다.”

언제 적 이야기일까?

“지금 생각하기에도 당시에 내 성격이 대단했었지.”

천중명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천호득의 혼잣말이 있었다.

“그 뒤에 다시 사고가 터졌었다. 도와주고 싶어도 하필이면 흑인들과 얽힌 총기사고여서 나서지 못했다. 중요한 사업을 앞두고 마약과 총기사건에 얽히면…. 후. 미국진출이 날아가니까.”

창밖의 하늘을 향해 시선을 둔 천호득이 감정을 추스르듯 잠시 입맛을 다신 뒤에 입을 열었다.

“윤 실장이 개입되는 것도 싫었고, 결정적인 계약을 앞두고 정보가 절실할 때 다른 짓을 하는 꼴도 못 봤다. 개 놈, 소 놈, 욕도 퍼부었고. 그게 끝이다.”

생선의 뒷부분을 칼로 쳐내듯 느닷없이 윤성태와 관련된 이야기가 뚝 끝나버렸다.

“그 사고로 성태가 죽었다. 그래서였는지 나도 큰형이나 둘째, 너, 죽은 아이에게 매몰차게 굴었다. 윤 실장 보란 듯이.”

“아픈 이야기를 꺼내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천호득의 입맛 다시는 소리가 울린 다음이었다.

“미국에서 죽은 수아의 집에서 나왔다.”

이건 또 뭔 소리야?

천중명은 묻지도 못한 채 멍하니 천호득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왜 그 기계가 그 아이 집에 있었는지는 모르겠다만, 죽은 수아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나왔다. 그래서 바로 윤 실장에게 못 줬다. 죽은 놈을 생각해서라도 내가 제대로 회사를 일으켜서 주려고.”

과거를 눈앞에 펼쳐놓은 것처럼 천호득은 아득한 먼 곳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윤 실장이 당시에 아버지 일을 도울 때였는데 누나 집에서 기계가 나왔다는 것을 몰랐을 리가 있습니까?”

“자살처리는 쉽지 않지. 특히 우리 같은 경우에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게 조용히 처리해야 했고, 하필 미국이어서 일이 더 힘겨웠다. 윤 실장이 그 일로 분주할 때 직원들이 달려가 바닥에 떨어진 먼지까지 싸서 서울로 가져왔다.”

“용도는 알아내셨어요?”

“흥! 무한동력이라던데 천하에 쓸모없는 물건이라지.”

느닷없이 뒤통수를 각목으로 얻어맞은 느낌이어서 천중명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가끔 혼자 도는 소리를 낼 때는 있었다. 그럴 때면 내가 올라오곤 했지. 방에서 그 기계가 울면 서재에서 들리니까. 수아가 생각날 때면 들여다보기도 했었고.”

부질없는 짓이란 말 대신 천호득은 씁쓸하게 웃기만 했다.

“이제 방을 치워야 할 때가 왔나 보다.”

고개를 돌렸던 천호득이 의아한 눈으로 천중명을 보았다.

“죄송합니다. 이야기에 너무 빠져들었나 봅니다. 기계가 울었다는 말씀을 이해하기도 힘들었구요.”

“그걸 이해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으냐. 이제 다 끝난 이야기다. 윤 실장에게 보냈으니 알아서 처리하겠지.”

말을 하느라 목이 탔던지 떨리는 손을 움직인 천호득이 빨대를 이용해 주스를 마셨다.

“그래. 회장은 그 말을 하려고 왔던 게야?”

“중국의 거양자동차가 리온자동차의 기술을 얻고 싶다는 제안을 해온 게 있어서 아버지의 훈수를 들을 욕심도 있었습니다.”

“회장의 생각은 어떤데?”

“총괄사장의 의견을 들어본 뒤에 결정하자고 했습니다.”

천호득은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고 있으면서 뭘 물어볼 게 있어. 지금처럼 해.”

“예, 아버지.”

아직 해가 한참 남은 시간이었다.

거실로 늘어진 햇살을 즐기는 것처럼 천호득은 하늘을 향해 시선을 들었는데 그 옆에서 천중명은 숨이 안 쉬어지는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무한동력이라니.

황성규도 찾아내지 못했던 그 기계가 어떻게 윤만석의 아들을 거쳐 이전에 죽었다던 딸의 집에 있었을까?

머릿속이 온통 헝클어진 상태여서 천중명은 멍하니 주스 잔을 바라보았다.

뭐가 이리 복잡해?

천중명은 숨을 들이마시며 생각을 털어냈다.

이럴 때는 도깨비 방식대로 직선으로 가주는 게 최고다.

윤만석을 찾아가서 어떡해서든 기계를 가까이 두고 살펴보면 된다.

“저녁을 먹고 갈 생각이야?”

“조금 일찍 나온 김에 용인에 들러볼 생각입니다.”

천상기 때문인지 윤만석을 만나려는 건지 묻지도 않은 채 천호득은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가 봐.”

“장 비서를 부르겠습니다.”

“놔둬. 난 좀 더 여기 있고 싶으니까.”

천중명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먼저 내려가겠습니다.”

“그래.”

천중명이 인사하고 내려가자 천호득은 천천히 정원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는 놓아주어야지.”

그런 뒤에 홀로 남은 천호득의 혼잣말이 거실 바닥에 나직하게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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