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
176. 건드리면 안 되는 도깨비 (2)
출근한 천중명이 메모를 확인한 직후에 유진교와 최만호가 들어섰다. 결재판을 하나밖에 들고 있지 않은 것이 우선 보기에는 좋았다.
“앉으세요.”
“좋은 일이 있으십니까?”
“결재판이 하나여서요.”
농담의 의미를 알아들은 것처럼 두 사람이 비슷한 표정으로 웃었다.
커피를 앞에 두고 소파에 앉은 참이었다.
“거양자동차 관련 방문에 관한 보고입니다.”
“오후 1시 방문으로 알고 있었는데 변동사항이 있습니까?”
“거양자동차 류효양 부사장의 방문 목적이 승용차 부분의 기술이전 요청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그 점에 관해 회장님께서 결정해두신 바가 있으십니까?”
“그런 제안이 실제로 있다면 먼저 신상훈 총괄사장과 현지에 나간 팀장들의 의견을 들어볼 생각입니다.”
“그렇게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리고 어천수 회장의 사건을 맡은 법무법인 변호사로부터 탄원서를 부탁한다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커피잔을 들던 천중명은 먼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어천수를 용서해줄 부분이 있습니까?”
“특허권침해와 영업방해 부분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 외에도 본인이 구속된 가장 큰 이유가 회장님의 결정에 따른 것이라 여기는 눈치였습니다.”
“횡령, 원정도박을 내가 시킨 것도 아닌데 참 생각들 편해서 좋네요. 어천수를 위해 탄원서를 제출할 마음은 없습니다.”
“예, 회장님.”
법무법인의 변호사가 연락한 내용이라 보고했던 것이지, 최만호는 천중명의 답을 예상했던 눈치였다.
인터넷 은행에 관한 내용을 30분쯤 더 의논한 후에야 두 사람이 집무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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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나저제나 하며 소식을 기다리던 허세직은 결국 최철조에게 전화를 넣었고, 그제야 천중명 일행이 나타났었다는 내용을 들었다.
“딸년이 잔머리를 굴려서 천 회장을 부른 모양이었군. 나를 만나러 오면서 천 회장을 부를 줄은 몰랐네.”
- 누가 말했는지를 우리야 알 길이 없지요.
날이 바짝 서 있는 최철조의 음성에 허세직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것 말고도 무슨 일이 있었나?”
- 모르십니까?
“뭐를 말인가? 그러지 말고 말을 해!”
- 저는 어려우니 회장님께 들으십시오.
볼을 씰룩인 허세직은 “알았네.”하고 통화를 마쳤다.
그런 뒤에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최철조가 마지막에 했던 ‘회장님께 들으십시오.’라는 말뜻이 마치 천중명을 가리키는 것처럼 묘하게 느껴져서였다.
뭔가 꼬였다. 그것도 사정없이.
위기라고 알려주는 본능에 따라 허세직은 그나마 말이 통하던 윤병지에게 먼저 전화를 넣었다.
신호음이 서너 번 울린 다음이었다.
- 예. 의원님.
역시나 곱지 않은 음성의 대꾸가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 알고 계신 모양인데 그걸 제게 물으십니까?
“그게 아니라 조금 전 미스터 최와 통화했는데 말하는 것이 이상해서 여쭤보려고 전화한 겁니다. 무슨 일입니까?”
일이 잘못된 것은 확실했다.
그래서 당장은 뭐가 어떻게 돌아간 건지를 알아내는 것이 급했다.
- 의원님. 이번 일을 통해 세상을 사는 데 참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허세직이 입도 떼기 전에 통화가 끝났다.
뭐야? 뭐가 어떻게 됐길래?
그는 급하게 허선영의 번호를 눌렀다.
[고객의 번호로 연결되지 않아….]
신호음도 울리기 전에 거절음성이 들려왔다. 아예 수신 거부 번호로 등록한 모양이었다.
“내가 모르는 일이 있었어.”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허세직은 당당했던 허선영을 떠올렸다.
“이 사악한 년이 나를 함정에 빠트린 거야!”
당장에라도 뛰어가 내용을 들어본 뒤에 요절을 내주고 싶다만, 남들의 시선을 생각해야 했고, 그러기엔 무엇보다 천중명이 무서웠다.
“어쩌지? 이걸 어떻게 알아봐야 하지?”
허세직은 갑자기 마음이 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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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규는 팀원들을 회의실로 모았다.
“목표는 대송그룹이다. 한국에서 재벌은 언론에서조차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정도로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충분히 감안해서 그들이 덮지 못할 약점을 찾아.”
“언론의 협조가 어렵다면 차라리 외국의 폭로사이트에서 터트리면 어떻습니까?”
“우리는 약점만 찾고, 방법은 회장님이 결정한다. 그러니 회장님이 사용할 무기를 찾는다는 생각으로 움직여.”
“예.”
황성규의 지시를 팀원들이 당연한 듯이 받아들였다.
“타락한 거대자본과 재벌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불합리하고 부정적인 방법을 규정과 제도로 만들어버리는 능력을 발휘한다. 그런 면에서 둘은 굉장히 비슷한 모양새를 갖췄다.”
팀원들을 돌아본 황성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대송이 어떻게 버티는지 보자. 거기에 답이 있을 거다. 우리가 거대자본의 횡포를 폭로사이트에서 터트린다고 그들이 쓰러지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잖아.”
“그렇군요.”
“대송도 마찬가지다. 인명사고가 날 정도의 결함이 수없이 보도됐지만,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재벌이 무너지면 경제가 무너진다는 여론, 재벌과 연결되어 살아가는 크고 작은 기업체들의 카르텔을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마.”
“알겠습니다.”
팀원의 답을 들은 황성규가 “움직여.” 하고 지시하는 것을 신호로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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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양은 모처럼 사우나에 다녀온 사람처럼 개운한 얼굴로 남부증권 회장실에 들어섰다.
“나오셨습니까?”
“그럼! 아침인데 커피 한잔 해줘야지?”
기분 좋게 자리에 앉은 박승양은 직원이 가져다준 커피를 후루룩 소리를 내며 통쾌하게 마셨다.
“어제는 어땠어?”
“이명선 과장 말씀이십니까?”
“아니면? 내가 회장의 밤 생활을 물어보겠나?”
“아하하. 어제 포지션이 좋았던 모양입니다.”
어색하게 웃은 남부증권 회장이 얼른 답을 꺼냈다.
“367억 이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음. 소소하네!”
돈 문제를 이토록 허투루 대하는 박승양의 모습은 또 처음이어서 남부증권 회장이 자꾸만 곁눈질로 그를 살폈다. 그러나 그가 어젯밤의 일을 알기는 어려웠다.
“사람이 살다 보면 본의 아니게 한쪽 편에 서게 될 때가 있어.”
“예?”
“그냥 들어.”
“아, 예.”
잔을 내려놓는 박승양을 남부증권 회장이 공손한 태도로 바라보았다.
“당신이 꼭 그래. 이 기회에 상상 못 할 정도로 성공하느냐, 주저앉아서 모든 것을 잃겠느냐의 문제겠지만, 고민할 게 없어. 그냥 시키는 대로 묵묵하게 따라오면 되는 거야. 알았지?”
“예, 회장님.”
답은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남부증권 회장은 박승양의 말뜻을 정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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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중명이 결재서류를 검토할 때였다.
노크와 함께 부속실 직원이 들어왔다.
“회장님. 발전본부 곽대출 이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지 말라는데 참! 앞으로 곽 이사가 올라오면 따로 말하지 말고 바로 들여보내.”
“예, 회장님.”
그렇게 알리고 나서 곽대출이 들어왔다.
아직 부속실 직원이 차를 가져다주기 전이었다.
“그리 앉아.”
“예, 회장님.”
둘이서 점잖게 소파에 앉았고, 이어서 부속실 직원이 차를 가져다주고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다음부터는 바로 들여보내라고 했으니까 부속실 통하지 말고 들어와. 내가 전에도 말하지 않았어?”
“그게 회장님아. 혹시 내가 하나라도 잘못한 일이 나왔을 때, 회장님이 날 편애해서 그렇다는 말이 돌까 싶어서 그렇지.”
“뭐라는 거야?”
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아서 천중명은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곽대출을 보았다.
“이번 신상훈 팀장과 기용도 부사장 승진 인사에 관해 묘한 불만이 있어. 그거 생각하셔야 해.”
“뭔가 했다. 그런 불만이야 당연히 있겠지. 최만호 실장도 염려했던 거고. 조승필이 어떻게 물러났는지를 봤으니 모두 숨죽이고는 있겠지만, 불만 있는 임원들이 하나둘이겠냐.”
답을 하면서 천중명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곽대출을 바라보았다. 툭하면 눈알을 파내느니 어쩌니 하면서도 어느새 조직 생활에 꽤 익숙해진 모습을 하고 있어서였다.
“아 참! 엉뚱한 말 때문에 할 말을 깜빡했었네.”
천중명 앞에서 곽대출이 생각난 것이 있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만섭이가 아까 전화를 했더라고. 평창동 2층의 기계 있잖아. 그거 아침 일찍 용인에 전달해주고 왔대. 그것 말고도 어제 총수님이 2층에 올라가서 만섭이에게 혹시 회장님도 기계 봤냐고 물어보셔서 대답을 제대로 못 했다고 하고.”
상체를 기울여 속삭이듯 곽대출이 건네준 말이었다.
기계를 안성의 윤만석에게 보냈다고?
천중명의 시선을 본 곽대출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제 총수님이 용인에 다녀오셨는데 멀찍이 서 있어서 제대로 듣지는 못했지만, 기계 문제로 윤 실장과 불편한 이야기들이 오가는 눈치였다고 하더라고.”
“윤 실장과?”
“만섭이 놈이 눈치가 워낙 없어서 그렇지, 본 것만큼은 고대로 말하는 건 있잖아.”
“그렇지.”
천중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평창동에 들러볼 생각이었거든. 그런데 그게 윤 실장에게 넘어갔으니 이게 또 애매하게 됐다. 내가 바로 용인으로 가서 뭐하는 기계냐고 물어보기도 그렇고.”
“혹시 총수님이 일부러 그리 가져다 놓은 걸까? 회장님이 만지지 못하게 하려고?”
“글쎄.”
이건 정말 답이 없었다.
“기계에 관해 여쭤보려고 해도 적당한 핑계가 없다. 혹시 어둠을 보십니까? 저는 이렇습니다, 할 것도 아니고.”
“이게 어떻게 하루가 편할 날이 없나 그래?”
“왜 또? 다른 게 있어?”
어깨를 으쓱하며 곽대출이 입을 열었다.
“옆에서 보기에 회장님이 안 됐으니까 그렇지. 어제는 선영 사모님 일. 오늘은 정체도 모를 기계. 그것만 해도 골머리 아플 텐데 계열사 일에 리온자동차, 대송그룹 상대해야지? 나 같으면 하루도 못 버틸 거 같아, 회장님아.”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아서 천중명은 먼저 픽 웃고 말았다.
“우리 둘이 눈 딱 감으면 편하기야 하겠지. 전처럼 직원들 숨통 조이고, 편법 적당하게 쓰면. 그런데 그러고 나서 너나 나나 편하게 잠잘 수 있겠냐?”
“그게 정답이긴 한데 너무 힘들어 보이니까 그렇지.”
“이제 곽대출도 진짜 생각하는 사람이 돼가는 거야?”
“에이, 이 회장님이 진짜!”
둘이서 웃으며 차를 마셨다.
“어제 일로 대송이 너를 특히 벼를 거야. 조심해.”
“그거라면 안심하셔. 그리고 회장님이 말한 대로 선영 사모님과 박승양 회장을 유비캅이 지키고 있으니까 그것도 염려 놓으시고.”
“잘했다.”
부쩍 성장한 곽대출이 힘이 되는 느낌이었다.
“최철조 애들이 반항이라도 해줬으면 아예 후련하게 끝냈을 텐데 애새끼들이 이상하게 고개를 팍 숙이는 바람에 너무 쉽게 끝났어. 그게 아쉬워, 회장님아.”
“그 정도가 좋아. 아무리 우리가 약점을 잡았다고 하더라도 일이 커지면 말이 나오기 마련이고, 말 나와서 좋을 건 없다.”
중요한 이야기가 대강 끝나고 둘이서 5분쯤 상황을 더 나눈 뒤에야 곽대출이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을 나섰다.
조직에 적응하는 만큼 새로운 부담이 문을 나서는 곽대출의 어깨에 올려져 있는 느낌이었다.
책상으로 자리를 옮긴 천중명은 왼손으로 눈썹을 매만지며 복잡하게 얽힌 머릿속을 정리했다.
지경그룹의 천중명이 대단하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그룹의 회장이란 사람이 매번 뛰어다니며 따귀를 때려대고 팔을 부러트릴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곽대출과 박승양이 자꾸 노출되는 것도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어제 같은 일을 알았는데 다른 사람에게 맡겨놓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둠이 허선영의 위기를 알려주지 않았다면 어제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이래서 천호득이 윤만석을 이용했던 걸까?
대송의 윤성일이 최철조 같은 보이지 않는 사람을 이용하는 것처럼?
윤세계와 결혼해서 대송의 요구대로 적당히 눈 감으면 몇 조 원쯤 벌어들일 수야 있겠다.
자동차를 산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그걸 상대해야 하는 직원들의 고충 눌러가면서 말이다.
“꼴통회장 되기 정말 어렵네.”
재벌이라는 게 태어나서부터 결혼까지 이익을 위해 생존하는 거라면 그게 진짜 행복한 삶일까?
허세직도 마찬가지였다.
정치한답시고 양심과 자식까지 팔아가며 그렇게 사는 것이 그는 정말 행복할까?
하나씩 가자.
천중명은 다시 보고서와 결재서류에 시선을 주었다.
오늘 일이 끝나면 우선 천호득을 만나 기계에 관해 질문할 생각이었다. 그걸 해결하지 않는 한 숙제를 미룬 아이처럼 뒤가 계속 찜찜할 테고, 그런 모습은 천중명의 방식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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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은 후에 천중명은 유진교와 최만호를 맞았다.
“거양자동차 일행이 제1접견실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벌써 그렇게 됐나요?”
재킷을 입은 천중명은 유진교, 최만호와 함께 접견실로 걸었다.
달각.
부속실 직원이 열어주는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선 천중명은 잠시 안을 둘러보았다.
다부진 체형에 커다란 머리를 가진 남자가 천중명이 앉을 상석에 가장 가까이 있었다.
“혹시 천중명 회장이시오? 양서평입니다.”
“반갑습니다. 천중명입니다.”
그가 먼저 손을 내밀며 인사를 건넸고, 천중명이 적당하게 답을 하며 손을 마주 잡았다. 손이 꽤 두터웠는데 일부러 힘을 준 것 같지는 않았는데도 악력이 대단했다.
“우리부터 소개하겠소. 거양자동차의 류효양 부사장. 이쪽은 국제변호사로 제 일을 돕는 조양회.”
천중명은 양서평의 소개에 따라 차례로 악수를 나누며 인사했다. 류효양은 퉁퉁하게 살이 오른 몸집이었고, 조양회는 말라서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통역을 위해 모두 다섯 명의 통역사를 부른 참이었다.
우리말을 아는 조양회를 제외하고 통역사들이 일대일로 붙어서 상대의 말을 빠르게 전해주었다.
“우리 지경그룹의 그룹발전본부 유진교 본부장이시고, 최만호 기획실장입니다.”
형식이 이게 맞는지는 모르지만, 양서평이 소개한 것에 맞춰 천중명이 유진교와 최만호를 소개했다.
천중명이 두 사람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을 보여주는 의미여서 나쁠 것도 없었다.
“앉으시죠.”
“예. 그럼.”
여섯 명이 자리에 앉았고, 차를 놓아주는 동안 잠시 어색하게 서로를 둘러보았다.
“회장님을 꼭 한번 뵙고 싶었소.”
양서평이 내놓은 중국말을 천중명의 뒤편에 앉은 통역이 상체를 기울여 빠르게 전해줄 때였다.
화아아아악.
막 대답을 하려는 천중명의 시야가 컴컴해지더니 느닷없이 어둠이 몰려들었다.
‘윤 실장이 기계를 건드렸구나!’
하필이면 이런 순간에!
천중명은 오늘 반드시 그 기계에 대해 알아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그 직후에 눈앞이 밝아오며 비에 젖은 창처럼 흐릿한 화면이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