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
175. 건드리면 안 되는 도깨비 (1)
허선영은 다가온 직원을 의심 없이 대했다.
“허세직 의원님의 예약이 있을 텐데요?”
“네. 이쪽으로 오십시오.”
직원은 중앙에 있는 타원형의 바를 중심으로 윤세계의 맞은편, 입구에서 오른쪽 자리에 허선영을 앉혔다.
“주문은 의원님 오시면 할게요.”
“알겠습니다.”
바를 건너서 작은 무대가 있고, 그 아래로 푹 들어간 곳에 윤병지와 윤세계가 앉아 있어서 당장 허선영이 그 두 사람을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자리에 앉은 허선영은 천천히 바를 둘러보았다.
유학생활도 했고, 국회의원인 아버지를 보좌하며 코리아클럽에 다녀본 그녀가 이런 종류의 바가 낯설다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허선영은 의아한 눈으로 다시 안을 둘러보았다.
세련되지 못한 직원들의 태도가 우선 눈에 걸렸고, 이어서 손님들의 모습이 어쩐지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시간을 확인한 허선영이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플라워의 문을 직원 두 명이 닫고 있었다.
아직 이른 시간인 데다 공연을 하는 것도 아닌데 벌써 문을 닫는다고?
허선영은 이상한 느낌에 계속 문을 닫는 직원들을 바라보았다.
밖에서 안으로 당겨야 잠기는 문이었다.
양쪽에서 직원 두 명이 커다란 나무문의 손잡이를 당기는 것을 보며 허선영은 이상하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고 보니 손님들이 이 시간에 이렇게 많은 것도 이상했고, 그들이 주문한 술과 음식의 종류가 거의 비슷비슷한 것도 수상해 보였다.
설마 이런 곳에서 엉뚱한 짓을 할까?
아무리 징그러운 인간이긴 하지만, 아버지란 사람이 마지막이란 단어를 뱉어낸 이유가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이런 구덩이에 딸을 밀어 넣기 위해서였다고?
일단 나가고 본다.
옆에 두었던 핸드백을 집어 든 허선영이 몸을 일으키는 순간에 바텐더가 턱짓을 했고, 바에 붙은 높은 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들이 몸을 돌렸다.
그 직후였다.
터억!
거의 닫힌 문틈으로 손이 불쑥 들어왔다.
화악! 끼이익!
그리고는 거칠게 문을 열어젖혔다.
“뭐하시는 겁니까?”
“너, 눈알 하나 파줄까?”
허선영은 멍하니 들어서는 곽대출과 만만치 않게 생긴 중년 남자를 보았다. 그러고는,
“중명 씨?”
그 뒤에서 들어오는 천중명을 불렀다.
우르르르.
세 사람이 끝이 아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조직원이 분명한 남자들이 줄줄이 플라워에 들어서고 있었다.
끼이익.
“왜 문을 닫아요?”
상황이 바뀌었다.
문을 닫으려는 조직원들을 직원 복장을 한 남자 두 명이 말리며 버텼다. 그러나 둘이서 다섯을 이기기는 어려워서 문은 바로 닫혔고, 단단하게 안으로 걸기까지 했다.
천중명은 천천히 걸어서 허선영의 앞으로 움직였다.
박승양이 득의양양한 얼굴로 조직원들을 거느린 채 안을 노려보았고, 천중명의 옆을 지키는 것처럼 곽대출이 걷고 있었다.
“아무래도 함정 같아. 여기 있는 인간들이 모두 윤성일 대송그룹 회장 사람들이거든.”
놀란 허선영에게 다가선 천중명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입을 열었다.
“괜찮지? 여기 온 것처럼 당당하게 함께 나갈 거지?”
“네. 그럴게요.”
뜻밖의 답에 천중명은 먼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잠시만.”
그런 뒤에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안을 둘러보던 천중명이 한순간 픽 웃었다.
처음엔 진짜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허선영이 자리에 앉고 나서 문이 닫힐 때까지 말이다.
앞으로 펼쳐질 장면을 기대하는 윤세계의 눈빛을 보면서 비겁하게도 윤병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터억.
그러나 누군가 문을 잡아서 젖힐 때, 그는 생각이 딱 멈췄을 정도로 섬뜩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노상방뇨쯤으로 끌려온 즉결재판에서 느닷없이 “사형!”하는 판결을 받은 느낌과도 비슷했다.
“뭐하시는 겁니까?”
“너, 눈알 하나 파줄까?”
곽대출의 음성을 듣는 순간, 윤병지는 오금이 저렸다.
혹시 심복 곽대출?
불행한 예감은 빗나가질 않는 법인지 그 뒤에서 천중명이 들어서고 있었다.
“저 사람이 왜?”
윤세계는 확실히 윤병지보다는 당찬 구석이 있었다.
허선영을 다독이는 천중명을 보며 파랗게 독이 올랐기 때문이었다. 윤세계를 말리기 위해 윤병지가 다급하게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천중명이 몸을 돌렸고, 수사자처럼 웃었다.
마치 속 썩이는 하이에나를 찾은 갈기 엄청난 수사자처럼 말이다.
[Woo! 내일은 없어! 내 미랜 벌써 저당 잡혔어!]
홀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가사가 이상하게 윤병지의 가슴에 와 박혔다.
천중명은 허선영의 손을 잡고 윤병지와 윤세계가 있는 테이블로 걸었다.
천중명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던 허선영이 이미 두 사람을 발견한 다음이어서, 그녀의 눈에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두 꼬집 정도의 분노가 올라와 있었다.
곽대출이 두 사람의 뒤를 지키며 걸었고, 눈치 빠른 박승양이 조직의 우두머리와 함께 홀 안쪽으로 들어서고 있어서 플라워에 있던 윤성일의 사람들은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흘러나오는 음악마저 없었다면 숨조차 쉬기 어려울 정도로 가슴 뻑뻑한 분위기에서 천중명은 허선영과 함께 윤병지와 윤세계의 테이블 앞에 도착했다.
윤병지는 계면쩍고, 윤세계는 뻔뻔한 얼굴이었다.
“천 회장이 어쩐 일인가?”
차라리 입을 열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천중명이 픽 웃는 바람에 윤병지의 인사는 더욱 비참한 꼴로 음악에 잡혀 먹히고 말았다.
“윤 세계. 내가 경고했었지?”
“내가 소유한 호텔에 오는 걸 그렇게 말할 권리가 있어요? 그리고 무슨 경고요? 경고를 할 거면 돈 몇 푼에 딸을 파는 아버지에게나 하세요!”
허선영 앞이어서 기죽기 싫었던 건지, 아니면 플라워에 있는 80여 명의 숫자를 믿은 건지는 모르겠는데 윤세계는 지지 않겠다는 투였다.
이런 여자랑 무슨 말을 길게 하겠나?
“아버지인 윤성일 회장에게 가서 전해.”
“당신이 직접 하시죠? 왜요?”
“대송그룹 얼마 못 갈 거라고.”
“웃기지 마세요. 지경그룹 회장이 무슨 신이라도 돼요?”
“도깨비.”
뭐라는 거야?
자존심이 상한 윤세계가 고개를 삐딱하게 틀고서 천중명을 바라보았다.
“건드리면 안 되는 도깨비.”
“영화를 너무 보셨나 봐?”
윤세계가 얼굴에 비웃음을 그려낸 직후였다.
쫘아아아아아악!
천중명이 힘껏 휘두른 팔에 끔찍할 정도로 세차게 볼을 맞았고,
콰당! 콰다다다당! 쨍강! 쨍그랑!
테이블에 엎어져서는 함께 벽 쪽에 처박혔다.
비싼 치마가 위로 올라가서 허벅지 위쪽이 비참하게 드러났는데 윤병지조차 수습할 엄두를 못 낼 만큼 천중명의 눈빛은 매서웠다.
“윤병지 부회장님.”
“예, 천 회장님.”
고개를 돌린 천중명이 불렀고, 시선을 떨구며 윤병지가 대답했다.
“침묵하며 따른 건 동조한 겁니다. 그동안 보인 모습을 생각해서 오늘은 넘어가겠지만, 한 번 더 이런 상황에서 뵙게 되면 그땐 아플 수 있습니다.”
윤병지는 대답조차 못했다.
“윤성일 회장에게 말해주세요. 오늘 일로 문제를 일으키면 그만한 대가를 치르게 해줄 거라고요. 돈을 주고받은 증거가 있다면 알아들으실 거라 믿습니다.”
말을 마친 천중명이 고개를 돌렸다.
“최철조가 누구야?”
당장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이름까지 알고 왔는데 설마 못 찾을 거라고 생각해?”
그러나 천중명의 다음 말이 떨어지자 의외로 마른 체형의 남자가 바의 옆에서 한 걸음 나섰다.
황성규가 보내준 사진으로 본 것보다 훨씬 마른 인상이었다.
천중명은 픽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돈이 아무리 좋아도 사람이 할 짓이 있고, 하면 안 되는 짓이 있어.”
도전적인 시선을 보낼 정도의 강단과 무술을 익혔나 싶을 정도로 침착한 면이 있었다.
“이 개새끼가!”
휘익! 퍽!
“컥!”
그러나 그의 옆에 서 있는 게 곽대출이라는 게 그의 불행이었다.
“우리 선영 사모님을 노린 주제에 어디서 눈알을 뻘겋게 떠?”
콰직! 콱! 콱! 콱!
팔꿈치로 후련하게 갈기며 밀고 들어간 곽대출이 바에 허리가 걸린 최철조의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그건 하지 마.”
천중명이 말리지 않았다면 분명 “원수도 따따블!”하면서 눈알을 파냈을 게 분명했다. 곽대출의 하얗게 변한 눈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이를 드러내듯 으르렁거린 곽대출이 최철조의 오른팔을 당겨서는 왼손으로 뱀이 똬리를 틀 듯 말아 쥐었다.
부웅! 콰자자작!
“끄아아-!”
허선영이 천중명의 어깨에 고개를 묻을 정도로 잔인한 장면이었는데 이 정도야 뭐.
하여간 결정적인 일을 빼앗긴 심정으로 천중명은 허선영의 어깨를 감싼 채 출구로 움직였다.
박승양과 시선이 마주친 다음이었다.
“안심하고 가세요. 이 박승양이 다 알아서 합니다. 아후! 심복 이사님의 통쾌한 응징을 보니까 낮에 가슴에 걸렸던 게 쑥 내려가는 느낌입니다.”
그가 너스레를 떨었고, 이어서 입구를 지키던 조직원 두 명이 얼른 문을 열어주었다.
천중명이 허선영과 문을 나선 직후였다.
“바람들어온다. 얼른 문 닫아.”
박승양의 여유만만한 음성이 들린 뒤에 문이 닫혔다.
**
주차장까지 잘 걸은 허선영은 조수석에 오르기 무섭게 눈물을 터트렸다.
호텔을 나선 천중명은 양평을 향해 차를 몰았다.
“후. 고마워요, 중명 씨.”
이럴 때는 묵묵하게 지켜봐 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어서 천중명은 시선만 주었다.
“절대 떨어지지 않을 아버지를 내 힘으로 떨쳐내고 싶었어요. 이렇게 자꾸 중명 씨에게 짐이 되는 게 싫어서요.”
“선영 씨는 잠시 내 등 뒤로 피했던 것뿐이야. 다른 생각하지 마.”
“그런데 오늘 약속은 어떻게 알았어요?”
“누가 선영 씨 꼬드길까 봐 감시하고 있다니까.”
“피!”
그래도 정말 많이 늘었다.
지금도 이런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애쓰는 얼굴이었다.
안쓰러웠지만, 이건 허선영이 이겨내야 할 몫이기도 했다.
“우리 어디 가요?”
“양평에 가서 차나 한잔 마시고 오려고. 괜찮아?”
“좋아요.”
천중명은 손을 뻗어 허선영의 손을 잡아주었다.
“나 있잖아요. 유치하지만, 아까 중명 씨가 윤세계 따귀를 때렸을 때 좋았어요.”
나쁘지 않았다.
저렇게 조금씩 강해지는 것은.
“그런데 윤세계가 경찰에 신고하면 어떻게 해요?”
“못할 거야. 준비한 게 있거든.”
허선영은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면서도 천중명을 신뢰하는 눈빛은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
윤성일의 분노는 상상 이상이었다.
“거기에 어떻게 천중명이 나타나! 그리고 세계가 얻어맞는데 그걸 그냥 보고 있었다니! 이 모자란 인간아!”
그는 윤병지를 향해 집무실이 터져나갈 정도로 거칠게 고함을 질러댔다.
“이럴 게 아냐! 신고해! 최철조는 팔까지 부러졌다면서! 내가 연락해 둘 테니까 신고하라고!”
“천 회장은 최철조가 회장님과 통화한 사실과 오늘 계획을 모두 알고 있는 눈치였습니다.”
“오늘 계획 뭐? 그래 봐야 얻어맞은 건 세계와 우리 애들 아니야!”
“회장님. 천 회장이 어떻게 플라워에 나타났는지를 한 번만 생각해 주십시오.”
“뭐?”
윤병지를 맞이하고 나서 처음으로 윤성일의 음성이 작아졌다.
“허세직 의원이 천 회장에게 붙어서 털어놓지 않은 다음에야 어떻게 그 시간에 호텔에 나타날 수 있었겠습니까?”
윤성일의 눈이 ‘그래?’하는 느낌으로 꿈틀했다.
“그 딸년이 말했을 수도 있잖아?”
“신고하면 불리할 증거가 있다고 했습니다. 허 의원이 돈을 받은 것까지를 다 말했다고 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떠들어봐야 우리만 당할 확률이 높은 데다 지금 검찰총장이 천호득 명예회장의 사람입니다.”
“끄응. 그 더러운 인간이 결국 양다리를 걸치고서 내 돈을 처먹었다 이거지? 그래놓고 천중명의 장인으로 남겠다? 하아! 이런 개 같은 인간이!”
윤성일이 꾹 내민 입술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분노를 이기려 애썼다.
“다른 사람은 다 몰라도 내가 허세직, 이 인간만큼은 반드시 짓이겨서 다시는 고개를 들지 못하게 만들고야 만다!”
그는 씹듯이 말을 뱉었다.
“후! 세계는?”
잠시 숨을 고른 윤성일의 질문에 윤병지는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세계는 어떠냐고?”
“이와 고막을 다쳐서 치료 중이라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허! 허허허!”
기가 막혀서 나온 윤성일의 탄식이 마치 웃음처럼 들렸다.
“재계에 있는 대로 망신을 떨게 생겼네. 허! 허허!”
탄식을 쏟아내고는 있었지만, 윤성일은 당장에라도 천중명을 찢어 죽이고도 남을 정도로 독한 눈빛이었다.
“지경그룹? 어디 누가 이기나 해보자.”
결국, 그는 씹듯이 각오를 뱉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