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
174.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3)
황성규의 연락은 두 시간이 조금 넘어서 있었다.
- 회장님. 내용을 정리해서 이메일로 보내드렸습니다.
“이메일을 확인한 뒤에 연락드리죠.”
- 관련자가 많아서 일련번호를 붙여놓았습니다. 짐작하셨던 것보다 일이 큽니다. 차라리 경찰에 연락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전화기를 통해 들리는 황성규의 음성에 걱정이 묻어 있었다.
허선영이나 천중명이 다치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공연히 구설수에 오르는 일을 염려하는 눈치였다.
“보고 판단하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마우스를 잡고서 황성규의 메일을 열었다.
인원수가 많아서 그렇지 내용은 간단했다.
윤성일과 최철조란 인간의 통화가 1번이었다.
그 뒤에 최철조의 전화를 받은 윤성일이 다시 윤병지와 윤세계에게 차례로 전화를 넣은 것이 2번이었다.
회장이란 인간이 별 시답잖은 일로 바쁘게 산다.
다음은 다시 최철조였다.
윤성일과 통화한 그는 허세직, 파셀리티 호텔의 5층 ‘플라워’라는 바에 전화를 걸었다.
오늘 저녁에 다른 손님을 받지 말라는 지시였다.
우선 하나씩 범위를 줄여나가는 게 좋겠다.
천중명은 휴대 전화기를 들어 문자 란을 열었다.
[파셀리티 호텔의 소유자와 지분자들을 확인해서 문자로 알려주세요.]
[예, 회장님.]
황성규의 답문을 본 천중명은 다시 메일에 있는 내용을 살폈다.
최철조는 그 시간대에 40통이 넘는 통화와 역시 80개가 넘는 단체 문자, 그것도 모자라 50여 개의 개별문자를 보냈다.
[의심 사지 않도록 복장을 단정히. 시간 엄수. 신호를 주기 전에 절대로 시선을 주지 말 것.]
그 뒤에 마지막으로 최철조가 대송그룹의 윤성일과 두 번 통화한 흔적이 있었다.
최철조는 폭력 전과 12범이었고, 문자를 받은 남자와 여자들 역시 비슷한 전과가 있었는데 실제 처벌은 벌금이나 집행유예 등으로 때우다시피 했다.
이것들이 8시에 허선영을 어떻게 하려고?
윤병지와 윤세계에게 연락한 걸 보면 그 두 사람 앞에서 개망신을 주거나 따귀라도 때리려고 했겠지?
아니면 결혼을 포기할 정도로 치욕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거나?
지이이잉.
그때 황성규가 보낸 문자가 들어왔다.
[파셀리티 호텔은 대송의 일가친척 소유입니다. 가장 많은 지분을 윤세계가 가졌고, 다음이 윤병지의 순입니다.]
[고생했습니다.]
답을 보낸 천중명은 휴대전화기를 내려놓은 뒤에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재미있는데?”
방배동 번화가의 규모 있는 호텔에서 불렀으니 허선영이 장소를 의심하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윤세계와 윤병지의 지시라면 CCTV 역시 조작할 테니 허선영은 무슨 꼴을 당하든 어디 가서 하소연하기도 어렵다.
“후.”
천중명은 뜨거워진 열기를 뿜어내는 것처럼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돈이란 게 좋은 일에 쓰려면 진짜 쓸 곳이 많아, 이 개 같은 인간들아.
그걸 왜 이따위 지랄 같은 일에 뿌려대는 거야?
창을 짚고 선 천중명은 그나마 점잖았던 윤병지를 떠올렸다.
그도 알고 있을까? 이 더럽게 추악한 계획을?
가보면 알게 될 거다.
8시에 파셀리티 호텔에 도착해 보면 말이다.
남은 건 하나밖에 없었다.
천중명은 집무실 창에서 물러나 휴대 전화기를 들고는 책상에 걸터앉았다. 그런 뒤에 황성규의 번호를 눌렀다.
- 예, 회장님.
“윤성일과 허세직 의원의 거래가 있을 겁니다. 전화기를 도청하든, 문자를 파악하든, 두 사람이 뭘 주고받았는지 알고 싶습니다.”
- 알겠습니다, 회장님.
황성규의 듬직한 답을 들은 천중명은 책상에 걸터앉은 자세 그대로 빌딩 숲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말이지.
꼭 목을 조른다거나 칼로 찔러야 다치는 게 아니거든.
영혼에 상처를 입히면 눈에 보이지는 않는데 그때부터 그 사람은 그냥 지옥에서 숨만 쉬는 꼴이 된다고.
기가 막히니까 자꾸 헛웃음이 나왔다.
이런 거였냐?
사람 하나쯤 얼마든지 주물러도 된다고 생각하고, 그런 걸 보고 자라서 다른 사람들을 원숭이에 비유할 수 있었던 거?
천중명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허선영에게도 이럴 지경인데 저런 인간들에게 김순례의 딸 이명선이 밉보였다거나, 강남스퀘어의 김민희 매니저가 찍혔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겠나.
“죽고 싶어서 몸이 꼬이는 모양인데 도깨비가 소원을 들어주마.”
혼잣말을 뱉어낸 천중명은 여전히 책상에 걸터앉은 자세로 휴대전화기를 들었다.
- 예, 회장님.
“어디야?”
- 그룹발전본부에 있습니다.
천중명의 감정을 느꼈는지 곽대출의 음성에 묘한 흥분이 묻어 있었다.
“잠깐 올라와.”
- 예! 회장님!
들떠하기는!
곽대출이 아무리 흥분한다고 설마하니 지경그룹의 회장이 유명호텔에서 윤세계의 따귀라도 때리겠어?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픽 웃었다.
아직 한 통의 전화가 남았다.
번호를 누른 천중명이 휴대전화기를 귀에 가져간 직후였다.
- 아이고! 우리 천 회장님! 바쁘실 텐데 이 박승양이를 잊지 않으셨네!
분명히 옆에 있는 누군가에게 들으라고 과장하는 눈치였다.
- 점심은 드셨고? 건강은 어떠셔요? 이명선 과장은 아주 잘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겨우 179억 손실밖에 안 냈습니다.
어쩐지 박승양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 그래? 어쩐 일이십니까?
“회장님. 제가 저녁에 곤란한 일이 있어서 회장님의 손을 빌리고 싶은데요?”
- 우리 천 회장이 곤란한 일이 있으시다고?
“손을 대자니 잔챙이고,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자니 자존심 상하고 그런 일입니다.”
- 흐하하하하하!
마침내 쌓였던 감정이 폭발한 듯한 박승양의 웃음이 넘어왔다.
- 가뜩이나 스트레스가. 이명선 과장 때문은 아닙니다. 하여간 그런 것 때문에 갑갑했는데! 어디로 가면 됩니까?
천중명은 느긋하게 장소와 시간을 알려주었다.
“지난번 중국 조직처럼 뒷정리를 부탁드립니다.”
- 그때 그 양반들이 부탁 하나는 들어준다고 했었지요. 안심하세요, 천 회장님.
박승양의 답은 듬직했다.
**
오후 2시의 용인은 어디선가 나타난 구름이 태양을 안아서 우중충한 날씨였다.
장만섭이 휠체어에 천호득을 앉혀준 다음이었다.
“오셨습니까?”
다가와 기다리던 윤만석이 고개를 숙였다.
“저쪽으로 모셔주게.”
“예에, 실장님.”
장만섭이 휠체어를 움직이는 동안, 송달순은 현관 앞에 단정한 자세로 섰다.
울퉁불퉁한 마당을 지나 테이블에 자리한 다음이었다.
“차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시원한 걸 마시고 싶어. 너무 차가운 건 싫으니까 얼음 넣지 말고.”
“알겠습니다, 총수님.”
대원 한 명에게 눈짓을 한 윤만석이 천호득의 왼편에 앉았다. 그 사이 장만섭이 자그마한 송달순의 옆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자네는 얼굴이 좋아 보이는구만.”
“이곳이 나쁘지 않습니다.”
자연스레 기른 머리와 점잖은 티셔츠, 편안한 바지 차림의 윤만석은 실제로도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주스를 들고 나온 직원이 송달순 앞에서 검사받고 있었다.
“볼수록 기특합니다.”
“헤휴-.”
말하기도 귀찮다는 듯 천호득이 한숨을 푹 내쉴 때였다.
품에서 비닐 랩을 꺼낸 송달순이 음료수 잔에 빨대를 넣었다.
“저런 걸 가지고 다니나 봅니다?”
“작은 아이는 그래도 머리가 붙어 있잖나?”
뭔 소리인가 하고 송달순과 장만섭을 번갈아 보았던 윤만석이 내용을 짐작했는지 가볍게 웃었다.
“약을 복용한 이후로 둘째 아드님은 최근 잠이 많이 늘었습니다.”
“내가 보낸 여자아이는?”
“일주일에 두 번씩 부친 면회를 다녀오는 것을 제외하면 얌전합니다. 방을 요구해서 둘째 아드님 옆방을 내주었습니다.”
천호득은 고개만 끄덕였다.
“언제고 밖에 나갈 수 있도록 배려하셨는데 오지은을 굳이 데리고 있을 이유가 있겠습니까?”
윤만석이 궁금한 얼굴로 천호득을 바라보았다.
한쪽 눈은 정면을, 다른 쪽 눈은 엉뚱한 방향을 향해 있었는데 흉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신임회장이 아직 자리를 완벽하게 못 잡았어. 꿈틀대던 것들이 조승필을 보고 놀라서 입을 닫고 있을 뿐이지, 기회만 생기면 언제고 이를 드러낼 게다. 여자아이는 그에 대한 경고다.”
“리온자동차의 인수로 어느 정도는 입지를 다진 것으로 보았습니다.”
잘게 떨리는 얼굴로 천호득은 어렴풋한 미소를 그려냈다.
“총괄사장 자리에 현지 인수팀장을 임명했다. 그 자리를 바라던 인간들의 배신감이 오죽하겠나. 지경전자도 마찬가지지. 그러니 밀려날 게 뻔한 인간들이 조만간 또 반기를 들겠지.”
“유진교 본부장이 그런 면에 관해 조언하지 않겠습니까?”
“지켜보는 중일 게야. 신임회장이 말한다고 들을 성격도 아니고. 어쩌면 아무 일 없이 지나갈지 모를 일을 굳이 미리 떠들 사람이 아니잖아.”
나직하게 말을 건넨 천호득이 상체를 기울여 음료수를 마셨다. 그런 뒤에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세웠다.
맛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성태 있잖은가?”
천호득이 입을 연 직후였다.
미국에서 죽은 아들의 이름을 들은 윤만석이 번득하고 하나밖에 안 남은 눈을 매섭게 움직였다.
“그 아이가 남긴 물건을 내가 가지고 있었다.”
윤만석은 대꾸가 없었다.
“어떡해서든 그 제품으로 회사를 일으켜서 자네에게 줄 생각이었는데 누구도 그 기계를 인정하지 않았지.”
“어디 있습니까?”
“평창동 2층 방에 있다.”
무서운 음성으로 질문을 던졌던 윤만석이 고개를 떨구고는 볼을 씰룩였다.
“자네에게 전해줄까 하는데 그게 아니라면 적당하게….”
“제가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고개를 세운 윤만석이 건넨 요청이었다.
감정을 많이 누른 눈치였는데 아직 볼이 씰룩이는 것만은 감추지 못했다.
“원하는 대로 해. 이상하게 그걸 건네주려고만 하면 일이 있었다.”
천호득은 시선을 움직여 윤만석의 오른손을 보았다.
“제가 그걸 찾아다녔다는 것을 알고 계셨잖습니까?”
“우연히 손에 넣었다. 감정이 복받치는 것은 알겠다만, 함부로 넘겨짚지 마라.”
“지난번에 말씀해주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럴 경황이 있었든? 그 뒤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누구보다 네놈이 잘 알 텐데?”
느닷없이 솟구친 날카로운 감정이 눅눅한 오후의 틈으로 사라지도록 천호득과 윤만석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원래 독선적이고 고집이 센 천호득과 아들의 일이 한으로 남았던 윤만석의 대결처럼 보였다.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너를 괴롭히려고 내가 용인까지 와서 기계가 있다는 말을 하는 것 같으냐? 네놈이 앙금을 털어내지 못했다고 나까지 그랬으리라 생각하지 마라.”
지난번 일로, 손목과 발목, 눈을 잃은 것을 계기로 과거의 앙금을 모두 털었다고 생각했는데 윤만석의 가슴에는 아직 아들의 일에 대한 앙금이 남았던 모양이었다.
그는 몇 차례나 토해내는 것처럼 숨을 쏟아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서야 윤만석은 고개를 들었다.
“죄송합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네 가슴의 한이 커서 그런 게지. 다 내가 잘못 살아온 탓이다. 장소를 알려주면 내가 저기 덩치 큰 놈을 시켜서 보내주마.”
“감사합니다, 총수님. 좀 전에 감정을 자제하지 못한 건 죄송합니다.”
“그럴 것 없다니까. 자식을 잃었는데 그게 어떻게 쉽게 잊혀.”
윤만석이 의아하게 여길 정도로 천호득은 기운이 없었다.
시선을 든 그의 눈에 천호득의 눈과 볼에 매달린 회한이 분명하게 들어왔다.
**
죽을 곳에 끌려갈 때면 소도 눈물을 흘린다더니 파셀리티 호텔에 들어서는 윤병지의 심정이 꼭 그랬다.
특급은 아니어도 나름의 명성을 유지한 호텔이었다.
그런데 그 파셀리티의 화려한 외관이 윤병지에게는 마치 거대한 관처럼 보였다.
환장할 일이다.
“얼른 오세요.”
머리까지 새로 손질한 데다 더할 수 없이 화려하게 치장한 윤세계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손짓하는 모습이 죽음의 골짜기에서 손짓하는 마녀처럼 보이는 것은.
“삼촌!”
도망쳐야 해.
지금밖에 없어.
“삼초-온! 뭐 하세요!”
윤세계를 알아본 직원들이 엘리베이터를 붙들고 있는 통에 안에 있는 승객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어지러우세요?”
어느새 다가온 윤세계가 멍하니 있는 윤병지의 팔을 안고서 엘리베이터로 걸었다.
“어! 조금 그러네.”
“좋은 구경이라면서요? 이거 끝나면 제가 병원에 모시고 갈게요. 아시죠? 제가 전화하면 시간에 상관없이 진료 받으시는 거?”
5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의 숫자를 보며 윤병지는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때앵.
5층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왼편으로 돌자 정면의 위편으로 휘갈겨 쓴 ‘플라워’라는 영문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문은 열려 있었다.
정장 차림의 남자들과 비슷한 차림의 여자들이 힐끔 윤병지와 윤세계를 돌아본 뒤에 다시 자기들만의 대화에 빠져들었다.
설마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독한 짓을 하지는 않겠지?
“이쪽으로 오십시오.”
자리까지 미리 정해놓았을 정도로 준비한 모양이었다.
윤병지와 윤세계를 알아본 직원이 두 사람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입구에서 조금 들어간 중앙에 외딴 섬처럼 타원형의 바가 있었고, 그 안에서 직원이 간단한 술과 안주를 내놓고 있었다.
왼편 안쪽으로 피아노와 작은 무대가 있었는데 지금은 최근 유행하는 팝송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플라워의 내부를 가로지른 윤병지와 윤세계는 입구의 반대편 안쪽 테이블에 앉았다.
1인용 소파로 구성된 자리여서 테이블의 높이가 꽤 낮았다.
“긴장 돼요.”
윤세계가 입구를 보며 던지는 말을 윤병지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그리고 그 직후에 주문도 하지 않았는데 직원이 다가와 몇 가지 주전부리와 음료수 잔을 테이블에 놓아주었다.
이 정도면 큰일이야 있겠나.
적당히 지켜보다가 심하다 싶으면 말리는 척을 할 수도 있겠고.
아무래도 천중명에게 너무 겁을 먹은 모양인가?
윤병지가 용기를 내기 위해 숨을 들이마실 때였다.
“삼촌! 왔어요!”
윤병지를 향해 상체를 바싹 기울인 윤세계가 속삭이듯 말을 건넸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윤병지의 눈에 문을 들어서는 허선영이 보였다.
‘잘못됐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윤병지는 오늘 일이 꼬일 거라고 확신했다.
플라워에 들어서는 허선영의 당당한 태도 때문인지, 종일 불안했던 그의 심정 탓인지, 그도 아니면 ‘이 모든 건 우연이 아니니까. 운명을 찾아낸 둘이니까.’ 하는 가사 때문인지 알기는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