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173화 (173/315)

# 173

173.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2)

허선영은 휴대전화기 액정에 올라온 허세직의 이름을 보고서 마음을 굳게 먹었다.

“여보세요?”

- 너, 저녁에 시간 좀 내야겠다.

점심시간 얼마 전에 전화한 허세직은 통닭처럼 머리를 뚝 자른 요구를 허선영에게 던졌다.

“저 오늘 바빠요.”

- 오늘만 나오면 다시는 내가 너에게 전화 안 하마.

정치인의 말을 믿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인데?

잠시 망설였던 허선영은 입술에 굳게 힘을 주었다.

“그 약속 지키실 거라고 믿어요. 안 지키셔도 제가 다시는 뵙지 않을 거고요.”

- 흥. 무섭구나. 그럼 약소 장소를 적어.

“문자로 주세요.”

- 적어!

화가 올라왔는지 허세직의 음성이 쨍하고 울렸다.

“문자로 주세요.”

그러나 숨도 쉬지 않은 채 날아간 허선영의 대꾸에 입을 얻어맞았는지 그는 잠시 반응이 없었다.

- 오냐. 문자로 보내주마.

그게 끝이었다.

휴대 전화기를 내려놓은 허선영은 커다랗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이렇게 하면 돼! 잘했어!”

가슴에 손을 얹은 그녀는 자꾸만 자신을 칭찬했다.

중명 씨!

나요. 해볼게요.

고마워요.

고개를 숙인 허선영은 손목에 걸린 시계와 손가락의 반지를 보았다.

“흐헤헤헤헤!”

기특해서 웃는 천호득의 웃음과 천중명이 픽 웃는 소리가 실제로 들리는 것 같았다.

**

윤성일을 찾은 윤병지가 소파에 앉은 다음이었다.

“내일 중국의 거양자동차 부사장 류효양이 지경을 방문한단다.”

“그렇습니까?”

대꾸가 못마땅했던 모양인지 윤성일의 눈빛이 홱 윤병지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런 사실을 내게서 듣는 데 미안한 마음은 없어?”

“죄송합니다, 회장님. 다음부터 신경 쓰겠습니다.”

눈빛의 의미를 알아챈 윤병지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대꾸가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 하나로 뛰어난 인재를 지방으로 날려버린 사람이 윤성일이었다.

돈을 쥐고 있으면 사람은 언제든 구한다.

아이비리그에서 죽어라 공부하느니 차라리 돈을 움켜쥐고서 그들을 고용해라.

저렇게 떠드는 윤성일에게 대드는 건 그룹을 떠날 각오가 있기 전에는 어려운 일이었다.

“오늘 저녁에 허선영이란 아이가 곤경에 빠질 게다.”

그러나 이어진 윤성일의 말에 윤병지가 화들짝 고개를 들고 말았다.

“그곳에 세계를 데리고 가. 가서 그 돼먹지 않은 아이가 수모당하는 걸 보여줘. 누가 위인지도 알려주고.”

당황한 윤병지의 반응을 보며 윤성일이 차갑게 웃었다.

“그런 뒤에 천호득 회장에게 다녀오너라. 우리 세계와 천중명 회장의 혼담을 먼저 전하고, 다음으로 허선영이라는 아이와 용인에 있다는 둘째를 연결하자고 해.”

눈앞에 있는 윤성일과 삼중호텔 VIP라운지에서 보았던 천중명 중 누가 무섭고 끔찍하게?

운명의 신이 그에게 양손을 내밀고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하고 있었다. 어느 쪽이든 골라야 하는데, 무얼 골라도 그가 감당하기 어려운 결과가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왜 대답이 없어!”

멍했던 그의 생각을 쨍하는 윤성일의 외침이 뚝 잘랐다.

“예, 회장님.”

“이따가 장소를 알려줄 테니 세계를 데리고 저녁에 그곳에 들러.”

“예.”

“나가 봐!”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인 윤병지는 처참한 심정으로 집무실을 나섰다.

**

천중명은 갈비정식이라는 이름의 도시락을 두 개 주문해서 황성규와 마주 앉았다.

“드세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이제는 확실히 황성규와 마주 앉은 것이 편안한 느낌이었다.

잘 구워서 윤기와 숯불 향이 풍기는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던 황성규가 생각났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회장님. 개인적인 감정이라고 말씀하셨던 게 생각나서 여쭙는 겁니다. 거대자본을 상대하는 연습도 할 겸, 대송그룹을 대대적으로 밀어붙여 보면 어떻겠습니까?”

오징어젓갈을 삼킨 천중명은 대답 없이 고개만 들었다.

원하는 건 뺨따귀 한 대 시원하게 올려붙이고, 그런 일로 달려들지 못하게 망신 하나 던져주는 거였는데 아예 대송그룹과 전면전을 벌이자고?

“외람된 말씀이라면 죄송합니다.”

“드세요. 드시면서 말하세요.”

젓가락을 든 손으로 황성규에게 도시락을 권한 천중명이 먼저 식사를 이었다.

“황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실 정도로 확실한 약점이 나왔나요?

“이번에 장만한 장비와 인력을 총동원해서 달려들었고, 나름의 성과가 있었습니다.”

황성규의 말을 듣던 천중명은 퍼뜩 짚이는 일이 있었다.

“혹시 거대자본의 윤곽이 나왔습니까?”

“예, 회장님.”

천중명의 질문에 황성규는 당하기 어렵다는 투로 순순히 답을 내놓았다.

“내용이 꽤 방대합니다. 가자지구에서 일어난 일들로 이스라엘에 대한 비난이 커지자 그것을 무마하기 위해서 시작했던 일이고, 결국 한국을 택한 것 같습니다.”

“돈이 많으니까 별짓을 다하는군요.”

“이스라엘을 압박하는 몇 군데 나라에 한국을 나눠 먹자고 꼬드긴 모양입니다.”

“급하게 대응해야 하는 수준입니까?”

“아닙니다, 회장님. 어차피 최종 보스가 누구인지, 그가 누구와 협상했는지를 파악한 뒤에 움직일 예정입니다.”

그렇게 감도 안 잡히는 대화와 함께 식사가 끝났다.

커피를 앞에 둔 다음이었다.

“우선 태블릿 PC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가방에서 가죽 케이스에 담긴 태블릿 PC를 꺼낸 황성규가 전원 스위치를 누른 뒤에 천중명의 앞에 놓아주었다.

한눈에 알았다.

화면에 올라와 있는 것이 포털에서 지원하는 서울지도라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붉은색 점이 여기저기 찍혀 있었다.

“회장님. 여기 오른쪽 위를 누르시면 내용이 나옵니다.”

천중명은 검지로 황성규가 가리키는 세 줄짜리 칸을 눌렀다.

“휴대 전화번호입니다. 이름대로 확인하시면 현재 위치를 알 수 있습니다.”

올라와 있는 이름은 윤성일부터 주로 대송그룹의 임원들 번호였다. 중간 위쪽에 윤병지의 이름도 있었다.

먼저 신기했고, 다음으로 황성규 같은 사람은 가능하면 적으로 두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으며, 마지막으로 한편이어서 다행이란 안도의 숨이 나왔다.

“불법이기 때문에 혹시 보관하시다가 문제가 생길 소지가 있을 때는 왼편의 저 붉은색 버튼을 터치하십시오.”

붉은 점을 확인한 천중명이 시선을 들자 황성규가 가볍게 웃었다.

“연기는 나지 않지만, 내부의 데이터가 모두 타 버립니다. 디지털 포렌식 아니라 세상없는 방법을 사용해도 복구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신기하군요. 그렇더라도 딱히 내가 이걸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예, 회장님. 그럼 필요할 때마다 정보를 전해드리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혹시 통화 내용을 듣는다거나 주고받은 문자를 보는 것도 가능한가요?”

“통화 내용 도청이나 문자 해킹은 기지국 근처의 전파를 탈취하는 방법과 애플리케이션을 몰래 설치하는 두 가지 방법으로 가능하고, 스마트폰 주변의 소리를 듣는 것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이거 세상이 뭐 이래?

천중명이 혹시나 하는 얼굴로 휴대 전화기를 바라본 직후였다.

“회장님의 휴대전화기는 이미 저희가 관리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통화 내용 도청이나 문자 해킹은 한국의 기술자가 만들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천중명은 문득 허세직을 떠올렸다.

“허세직 의원의 위치와 통화 목록, 그리고 문자 내용을 알아봐 주실 수 있나요?”

“기간을 얼마로 하면 되겠습니까?”

“최근 일주일이요.”

“바로 지시해서 이곳에서 받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기가 막히게도 황성규는 천중명의 지시를 문자로 전했다.

정보를 이렇게 주무르는 황성규를 보자 마치 언제 날뛸지 모를 맹견과 함께 있는 느낌이었는데 그가 개는 아니니까 날뛰지도 않으리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문자를 보낸 황성규가 두 번째로 가방을 열었다.

“이것들이 대송의 내부에서 지키려는 내용들입니다.”

천중명은 서류를 천천히 넘겼다.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대외비에 가까운 내용으로 대송그룹은 급발진 사고를 의도적으로 은폐했습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죠?”

“국과수에서 하는 검사에 대송그룹 직원이 대송의 장비를 들고 파견 나가 조사합니다. 실제 급발진이라고 파악한 사건이 전체 의심 사고의 40퍼센트 정도 됩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지?

이 미친 인간들이 이런 차를 계속 팔고 있는 거라고?

“이걸 터트릴 수 있나요?”

“자료를 구입한 출처를 밝혀야 하기 때문에 그 점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합니다.”

천중명은 답답한 숨을 내쉰 뒤에 페이지를 넘겼다.

“해외 판매는 대당 10만 원에서 50만 원의 수익을 남긴 것에 반해 국내 차량은 대당 1천만 원의 수익을 남긴 점. 수출차량의 품질이 월등히 우수한 점 등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윤성일이 나서서 허세직을 꼬드겼던 걸까?

이 더러운 거래에 천중명을 엮어 넣으려고?

하긴, 천중명도 수출품과 수입품의 차이 따위는 충분히 알고 있을 정도이니 말 다했다.

“개인 비리도 있습니까?”

“여자 연예인과 잠자리. 비자금의 수준에서 몇 가지 있습니다. 전화번호에 올라와 있는 사람 중에 대송물산 부회장 윤병지가 그나마 깔끔했던 것을 제외하면 대개 그 수준이었습니다.”

천중명이 윤병지를 떠올렸을 때였다.

우우웅.

황성규의 휴대 전화기가 가볍게 몸을 떨었다.

“회장님. 허세직 의원의 통화 목록과 문자 내용입니다.”

문자를 확인한 그가 몇 번의 터치 뒤에 태블릿 PC를 앞에 놓아주었다.

은행 거래내역처럼 최신 내용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 있었는데 이건 아예 허세직의 휴대 전화기 화면을 그대로 가져온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혹시나 싶어서 부탁했었던 건데 역시 허선영과의 통화, 그리고 곧바로 문자가 있었다. 그것도 불과 한 시간 전에 말이다.

천중명은 문자 칸을 검지로 눌렀다.

[저녁 8시, 방배동 파셀리티 호텔 5층이다. 공연히 여기저기 알려서 망신 떨 것 없다. 오늘 이후로 나도 네게 더 연락할 일 없다.]

내용을 읽은 천중명은 검지와 중지로 눈썹 위를 문질렀다.

저녁 8시라고 했지?

고개를 끄덕인 천중명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대송의 윤성일 회장과 허세직 의원이 만났었습니다.”

그런 뒤에 천중명은 간단하게 두 사람이 나눈 이야기를 먼저 황성규에게 전해주었다.

“오늘 밤에 분명히 뭔가 꾸미는 눈치인데 그걸 알아봐 주세요.”

“통화와 문자를 검토하면 대개 바로 나옵니다. 확인한 뒤에 연락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황성규가 가방을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평창동 저택을 나선 천호득은 장만섭의 도움을 받아 승용차의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조수석에 장만섭, 운전석 뒷좌석에 송달순이 앉아서 수행했는데 만약 이은명이 함께 움직이게 되면 승합차로 차를 바꾼다.

“용인으로 가자.”

“예, 총수님.”

승용차가 미끄러지듯이 저택 앞을 나서서 큰길을 향해 내려가는 동안 장만섭은 자꾸만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정신 사납게 좀! 앞에서!”

“죄송합니다, 총수님.”

타박을 받아서 조금 줄기는 했지만, 장만섭의 고개는 여전히 좌우로 움직이고 있었다.

용인에서의 교통사고 이후로 저런다는 것을 천호득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말이다. 조수석이 머리 받침대를 치워 시야를 확보해도 갑갑할 판에 앞을 꽉 막은 장만섭의 거대한 머리통이 좌우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있자니 천호득의 말이 곱지 않았다.

“에이!”

저놈이 욕을 한다고 주눅이 드나, 그렇다고 내던질 정도로 작고 아담하길 한가.

혀를 차며 차창으로 시선을 돌린 천호득이 ‘흥.’하며 작게 코웃음을 뱉어냈다. 천중명이 기계를 보았냐고 물었을 때 장만섭의 표정이 떠올라서였다.

저런 놈은 거짓말이란 걸 못 한다.

혹시 연습이라도 시키겠답시고 달려들면 가르치는 사람이 울화통이 터져 죽으면 죽었지, 절대 뻔뻔한 표정으로 다른 소리를 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평일 점심시간을 지난 때여서 도로는 그럭저럭 달릴 만했다.

세상에 천호득이 이런 인간이었든가.

아니면 나이를 먹어서 이렇게 변하는 건가.

괄괄했었을 시절의 천호득이라면 아마 천상기를 벌써 저수지에 빠트려버리고 남았을 텐데, 그것도 자식이라고 눈에 치이고 마음에 걸렸다.

무릎이 더 굳기 전에 마음을 잡아야 치료라도 할 것을, 오전에 통화했던 윤만석의 말을 들어보면 아직 사람의 냄새조차 안 나는 수준이란다.

천봉서가 살아 있었다면 어땠을까?

천호득은 창밖의 저 멀리에 있는 하늘을 보며 서글프게 웃었다. 그놈은 천상기와 달리 아둔했다만, 꾸짖으면 겁을 먹고 잘못했다고 비는 순진함도 있었다.

그래서 스스로 뛰어내려 생을 마감했지만 말이다.

“이제 털어낼 때가 됐어.”

“예?”

“아니다.”

송달순의 반문을 천호득은 짧은 말로 털어냈다.

평창동 2층 방을 정리할 생각이었다.

그런 이유로 가장 먼저 윤만석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여우는 고향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호랑이는 가죽,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데, 천호득은 지경그룹과 천중명을 남겼으니 그다지 아쉬울 것 없는 삶이었다.

“흐음.”

천중명을 떠올린 천호득이 뜻 모를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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