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
172.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1)
샤워를 마친 천중명이 홈 바로 향한 뒤였다.
김치를 넣은 콩나물국, 나물, 계란찜을 준비한 허선영이 맞은편에 앉은 천중명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알고 있죠?”
“뭘?”
“누가 말해줬어요? 마주친 직원은 없었는데?”
“누가 선영 씨를 꼬드길까 봐 내가 감시하는 거 몰랐어?”
허선영이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정말 말도 안 되게 우연히 알았어.”
“말하지 않은 건 미안해요. 그렇지만 이번만큼은 내가 해결하고 싶었어요. 안 그러면 아버지가 계속 엉뚱한 요구를 할 테니까요.”
천중명은 넉넉하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자식이 잘못된 길을 가면 꾸짖기라도 하겠다만, 부모가 그러는 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사실 천중명도 답은 없었다.
“중명 씨. 나 부탁이 있어요.”
국을 떠서 입에 넣는 천중명에게 허선영이 조용하게 말을 꺼냈다.
“혹시 우리 아버지가 경영에 참견하거나 자리를 부탁하면 절대 내 생각하지 말고 냉정하게 상대해 줘요. 내가 업무를 잘못했을 때도 그렇고요.”
많이 강해졌다, 허선영.
눈물을 보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저런 말을 하면서 밥을 먹다니.
“왜 웃어요?”
“안아보고 싶어서.”
멍했던 허선영이 “진짜 짓궂어!”하면서 웃었다.
“다른 건 걱정하지 말고 힘들면 언제고 말해. 등 빌려줄게.”
“그게 얼마나 힘이 되는 말인지 알죠?”
“뒤를 좋아했던 거야?”
“아, 진짜!”
이제는 허선영과 지내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설거지는 함께한다.
그런 뒤에 먼저 출근준비를 마친 천중명이 커피를 타는 동안 허선영이 준비를 마치고 나온다.
“커피.”
단정한 재킷에 바지를 입고 나온 허선영의 앞에 천중명이 잔을 놓아주었다.
“이거 내가 하면 안 돼요?”
“괜찮다니까. 회장이라서, 남자라서 이런 일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은 안 좋아. 집무실에서라면 몰라도 집에서까지 그런 모습이면 나도 다른 재벌들처럼 권위 따지게 될지 모르니까.”
“고마워요.”
둘이서 커피를 앞에 둘 때가 오전 6시 35분, 집에서 나서는 시간은 대개 6시 50분쯤 됐다.
현관에서 구두를 신은 다음이었다.
“기운 내. 응원할게. 항상 옆에 있을 테니까 언제고 기대.”
대꾸 대신 허선영은 천중명의 품을 파고들었다.
**
집무실에 들어선 천중명은 책상에 놓인 메모를 먼저 확인했다.
박영철이 왜 연락을 했지?
혹시 발전본부에서 부정적인 결과를 통보했나?
그의 이름에 동그라미를 그린 천중명은 이름을 하나씩 살핀 뒤에 지시사항을 체크했다.
다음은 일정 확인이었다.
비서실에서 올린 거양자동차 일행의 방문 일정을 살핀 천중명은 그 보고서를 옆으로 밀어두었다.
최만호와 의논한 뒤에 결정할 생각에서였다.
천중명이 연필을 내려놓았을 때 부속실 직원이 커피를 가져다 책상에 놓아주었다.
“발전본부에 연락해서 자이로텔레콤에 결과를 통보한 것이 있는지 확인해줘.”
“예, 회장님.”
아침만큼이나 활기찬 미소로 답한 직원이 나간 다음이었다.
천중명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집무실을 둘러보았다.
넓긴 진짜 넓다.
육중한 책상, 받침대가 둥그렇게 휜 디자인의 모니터, 소파, 그리고 집무실과 회의실로 통하는 문, 안쪽의 휴게실까지.
안을 둘러본 천중명은 몸을 돌려 책상에 기댄 채 하루를 시작하는 빌딩 숲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습관처럼 몸에 밴 행동이었다.
늘 같다.
저 빌딩 숲과 도로를 가득 메운 자동차들의 행렬은.
간혹 새로 짓는 건물이 있고, 어쩌다 나는 교통사고로 도로가 막힐 때도 있지만, 대개는 지금처럼 아침의 햇살이 빌딩 사이로 갈라져 달려들며 하루가 시작된다.
어제와 같은 오늘을 보내고 나면, 오늘 같은 내일이 오는 것도 늘 같다.
그렇게 많은 날이 흘렀을 때 똑바로 서 있으면 꼴통회장이 되었을 테고, 술 마신 뒤 주정 부리듯 흔들리면 윤성일이나 박영철의 꼴로 있을 거다.
“윤성일 회장님. 나 같은 꼴통회장도 있다는 걸 배워야 할 겁니다. 따님이 따귀를 맞는 건 세상이 당신들에게 주는 경고라고 생각하세요.”
천중명이 픽 웃었을 때였다.
똑똑똑.
노크와 함께 유진교, 최만호가 결재 판을 잔뜩 들고 들어와 인사했다.
“회장님. 오늘은 인사발령 서류입니다.”
“도망가고 싶은데요?”
농담을 건넨 천중명은 소파를 가리키며 그쪽으로 움직였다.
“그리 앉으세요.”
천중명의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
기용도는 이관수를 자주 찾았다.
“커피 드실 거죠?”
부사장인 그가 양손에 들고 온 종이컵 하나를 내밀 때 이관수가 받는 감동의 크기는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좀 어떻습니까?”
털털했다. 그리고 기용도는 격식 따위 차리지 않았다.
3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인재라는데 이관수와 그가 마주 서 있을라치면 마치 동네의 친한 선후배처럼 보였다.
“연구소분들이 워낙 잘 받아주셔서 저는 하루하루가 꿈속을 걷는 것 같습니다. 참! 부사장님!”
웃는 얼굴로 말을 듣고 있던 기용도가 무슨 일이냐는 투로 궁금한 시선을 던졌다.
“어제 제가 장모님과 장인어른, 집사람, 아이들과 정말 비싼 한우고기 집에서 갈비를 실컷 먹었습니다.”
“하하하!”
기용도가 기쁘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증명하는 웃음을 터트린 다음이었다.
“저도 불러주시죠! 그럼 제가 소주 샀을 텐데요!”
그가 기쁘고 반가운 얼굴로 말을 건넸다.
말이 저렇지 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 일할 정도로 기용도가 바쁘게 산다는 사실을 이관수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식당을 나오면서요. 가장 먼저 회장님이 떠올랐고, 다음으로 우리 부사장님이 생각났습니다. 감사합니다, 부사장님.”
감정이 올라왔는지 눈시울을 붉히는 이관수를 기용도는 이해한다는 얼굴로 바라봐주었다.
“열심히 해볼 겁니다.”
“저희가 오히려 좋은 기회를 얻은 건데요.”
기용도가 사람 좋게 웃었을 때였다.
부장 한 명이 빠르게 다가왔다.
“부사장님. 본사에서 인사명령서가 내려왔습니다.”
기용도는 말할 것도 없고, 이관수, 이제야 다가오던 연구소장이 부장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눈을 껌벅였다.
“축하드립니다, 부회장님.”
기용도가 멍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회장님께서 직접 결정하셨답니다.”
“내가? 내가 부회장이라고?”
지경전자의 회장이 천중명이라서 직함이 부회장이지 경영에 관한 전권을 부여받았다고 봐도 무리가 없는 임명이었다.
“아이고! 오늘은 한잔 마셔야겠는데? 축하합니다, 부회장님! 이렇게 되면 우리나라 전자업계에서는 최연소 부회장 아니야?”
“그렇습니다, 소장님.”
연구소장의 질문에 부장이 얼른 답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부회장님.”
“아, 예. 이게 제가 좀 당황스러워서요.”
이관수의 축하에 멍하니 대꾸한 기용도가,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하고는 급하게 연구소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하하! 살다가 부사장…. 아니지. 부회장님이 당황하는 모습을 다 보네! 하하하!”
이관수는 솔직히 직장생활 잘 모른다.
그저 잘 됐다는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저 나이에 부회장이라니? 우리 지경전자 부회장이면 연봉이 한 60억쯤 되나?”
“예에?”
“모르셨어요? 직원 세 명으로 구성된 부속실, 전용자동차와 운전기사, 차량도 국산 대형차와 S클래스 두 대가 배정되거든요. 가만있자. 부회장이면 전결권이 1천억 원인가 그렇지요?”
이제야 이관수는 기용도가 왜 멍한 얼굴을 했는지 나름으로 겨우 이해했다.
“하긴, 그런 것보다는 이쪽 업계에서 그만큼의 힘을 얻었다는 게 더 클 겁니다. 우리 회장님 진짜 대단하시네. 기용도라는 인물을 아예 영웅으로 만들어버리셨네!”
“그러시죠!”
“예?”
“회장님이 그런 분이란 의미였습니다.”
“하, 진짜! 나도 회장님과 차 한번 마실 수 있다면 이달 수당 포기할 텐데.”
천중명을 만났다는 이관수가 부러웠던 모양이었다.
연구소장은 부러움 가득한 눈으로 이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
늦게 퇴근해서도 식탁에서 서류를 살피던 신상훈이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여보, 축하해.”
소리죽여 박수를 치는 그의 아내 역시 자꾸만 입술을 빨아들이며 감정을 삭이고 있었다.
“당신은 그럴 자격 있어.”
말은 이렇게 하지만, 그의 부인도 신상훈이 총괄사장이 되리라는 기대는 솔직히 하지 못했다.
“하아. 우리 회장님 진짜! 어쩌면 사람을 이렇게….”
총괄사장으로 발령 난 신상훈 역시 같은 심정인 모양이었다.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코를 훌쩍인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옆을 걸었다.
“고맙다, 여보. 내가 이렇게 일할 수 있게 믿어주고 뒷받침해 준 거. 후우. 나 정말 잘할게.”
신상훈을 안은 부인이 그의 등을 천천히 쓸어주었다.
“총괄사장님? 이번 주말은 우리 시푸드에서 저녁 먹을까요?”
“그러시죠, 사모님.”
안사람의 농담에 신상훈이 웃으며 답한 다음이었다.
“회장님, 진짜 대단하신 분이다.”
그의 부인이 감탄처럼 말을 꺼냈다.
“뭐가?”
신상훈이 고개를 뒤로 젖힌 뒤에 질문을 던졌고,
“당신이 일하는 모습만 보고 임명하셨다는 거잖아.”
그의 아내가 바로 답을 내놓았다.
“후우.”
다시 안 사람을 안으며 신상훈은 천중명의 모습을 떠올렸다.
현지 책임자의 의견을 그렇게 묻더니?
‘감사합니다, 회장님. 제대로 해내겠습니다.’
각오를 다지는 것처럼 신상훈은 안사람을 꼭 안았다.
**
윤성일은 뒷목에 손을 올린 채 머리를 젖혔다.
“거양자동차의 부사장이 왜 지경그룹을 방문하는 건지 이유라도 알아 와야 할 것 아니야!”
그가 가장 우려하던 일이었다.
그래도 시간 여유가 있을 줄 알았는데 뭔 놈의 인수계약이 며칠 만에 터져 나오더니 이제는 숨 쉴 틈도 없이 거양자동차의 부사장이 직접 한국을 찾는다고 난리였다.
“이러다가 지경이 리온의 브랜드를 달고 중국 시장에 안착하면 우리가 뭐가 되겠어?”
윤성일의 책망에 임원들은 고개만 떨구고 있었다.
리온자동차의 인수를 건의했을 때, 5조 원이 어디 있느냐고 악을 썼던 장본인이 바로 윤성일이었다.
“일이 이렇게 됐는데 내용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
“인수계약부터 워낙 빠르게 진행되어서 정보를 얻을 틈이 없었습니다.”
“그게 말이야! 말이 되냐고! 한 달이 빨리 가는 바람에 당신들 급여 줄 틈이 없었다고 하면 돈 안 받을 거야?”
결국, 입을 열었던 임원이 불똥을 얻어맞고는 고개를 떨궜다.
“푸후.”
윤성일은 버릇처럼 뜨거운 김을 쏟아냈다.
“우선, 류효양 부사장의 일정부터 알아보고, 지경을 방문하는 정확한 목적을 알아와. 중국 측 우리 파트너에게 매달려서라도 알아오라고!”
지시를 마친 윤성일이 꼴도 보기 싫다는 양, 팔을 바깥으로 흩뿌렸다.
임원 다섯 명이 그의 집무실을 빠져나간 다음이었다.
“흐음.”
윤성일은 소파에서 일어나 뒷짐을 진 자세로 오른쪽에 있는 창으로 걸었다. 입술을 고약하게 내밀고서 고민하던 그는 책상을 돌아보았다.
“시간 여유가 있을 줄 알았다가 이렇게 당했는데 이번에도 늦어서는 곤란하지?”
눈가를 좁힌 윤성일은 책상으로 걸어가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검지로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잠시 통화음이 흐른 다음이었다.
“나다. 여유가 없을 것 같으니까 오늘이나 내일로 계획을 당겨. 불러내는 건 반드시 허 의원을 이용해. 그래야 나중에라도 뒤탈이 없다.”
상대의 말을 듣던 윤성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아서 처리해.”
통화를 마친 그는 잠시 망설인 뒤에 다시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윤병지입니다, 회장님.
“너 어디냐?”
- 제 사무실에 있습니다.
“잠깐 들어와.”
답을 확인하지도 않은 채 윤성일은 통화를 마쳤다.
“천호득, 그 양반이 솔깃할 걸 던져야 하는데? 흠.”
혼잣말을 뱉었던 윤성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가 감당하지 못했던 유일한 재계 인물이 천호득이었기 때문이다.
그냥 뱀도 아니고 굶주린 뱀처럼 번들거리는 천호득의 눈을 한 번이라도 마주했던 사람들은 모두 윤성일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두 번 다시는 그 눈을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반응 말이다.
“허선영을 둘째와 묶어주겠다고 해? 허세직은 200억만 더 주면 받아들일 거고?”
윤성일은 야비한 눈으로 스마트폰을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