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171화 (171/315)

# 171

171. 한 가지만 남겨주세요 (2)

윤세계는 소파에 얌전한 태도로 앉아 있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당분간 처신 조심해. 쓸데없는 인간들, 그 박영철 부회장인가처럼 허술한 남자들은 아예 상대하지 말고.”

“예.”

윤성일은 딸이라고 해서 함부로 토를 다는 일 따위 용서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천 회장 같은 사람을 알아보고 선택했었다는 것만은 내가 인정해 주마.”

“감사합니다.”

공손한 태도로 인사를 건넨 윤세계를 윤성일이 삐뚜름하게 노려보았다.

“그 말도 안 되는 계집 앞에서 망신도 당했다면서?”

“예. 그때는 삼촌이 계셔서 함부로 하기 어려웠어요.”

답을 들은 윤성일이 그제야 이해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른이 있는 자리에서는 조심하는 게 당연한 법도지. 그렇더라도 근본 없는 아이에게 망신을 당했으니 갚아는 줘야 하지 않겠냐?”

반짝하고 고개를 든 윤세계를 향해 윤성일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그려냈다.

“그 여자의 아비란 자가 적당한 장소로 불러내면 알려줄 테니 너도 그 자리에 나가. 가서 당했던 것들 풀고 와. 망신당하고 아무것도 못 했다는 말이 돌면 아랫것들이 우습게 알아. 근본 없는 년이 그 일을 떠벌일 수도 있고.”

“명심할게요.”

“앞으로도 어떤 일이든 어른들끼리 해결하게 미리 말을 해.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끼우는 바람에 일이 여기까지 온 게 아니냐.”

“삼촌에게 의논드리고 결과를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칭찬해주실 걸 기대해서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윤세계의 모습이 나쁘지 않았는지 윤성일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며 표정을 좀 더 풀었다.

“천 회장인가 하는 친구는 마음에 들었고?”

“그룹을 위해 적당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답이 흡족했는지 윤성일은 흐뭇한 미소마저 띠었다.

“그래. 사람이라면 응당 근본을 따지고 격에 맞춰 배우자를 선택해야지, 개돼지도 아니고 오다가다 눈 맞아 결혼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말을 마친 윤성일이 신음처럼 숨을 내쉬었다.

“이제 그만 가서 일 봐.”

“예. 건강 살피세요. 많이 피곤해 보이셔서 마음이 아파요.”

“그러게 왜 일을 이렇게 만들어?”

“앞으로 조심할게요. 그러니까 건강 꼭 살피세요.”

“그렇게 살갑게 대하니까 화도 못 내겠다. 어여 가 봐.”

상체를 곱다랗게 숙인 윤세계가 집무실을 나섰다.

문을 향하는 그녀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

중국의 거양자동차의 방문요청은 그룹발전본부에서 답을 통지했고, 이후의 절차는 비서실로 넘겨서 진행토록 했다.

물론 모든 사항이 최만호에게 보고되어 유진교와 천중명에게 올라가는 구조였다.

리온자동차의 인수 과정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거양자동차다. 당연하게 거양에 관한 기본적인 자료는 모두 발전본부에 있었다.

남은 것은 거양자동차의 류효양 부사장이 왜 지경그룹 회장인 천중명을 만나고자 하는가를 알아보는 일이었다.

“중국 지사의 결과는 어떻게 됐어?”

최만호는 구내전화기를 들어 담당 직원에게 질문을 던졌고,

- 한 시간 안에 보고하겠답니다.”

보고를 받은 뒤에 수화기를 내렸다.

그는 모든 업무를 보고서로 시작해 보고서로 끝낸다.

물론 전화로 먼저 이야기하거나 문자로 짧게 의논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천중명에게 보고할 내용은 문서를 통해 확실하게 확인해야 한다.

보고를 올린 이후에 말이 바뀌면?

그야 잘못된 보고를 올린 담당자와 임원이 그에 상응하는 아픔을 겪어야 되는 것이 직장 아니겠나.

“류효양의 방문 의도에 관해서 알아봐 주세요.”

저렇게 말로 업무지시를 내리는 것 역시 지경그룹을 통틀어 천중명에게만 가능한 일이었다.

“하아.”

그렇게 일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최만호가 그룹발전본부에 지원한 직원들을 살피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섣불리 인원을 불리기는 어렵다.

예산이 엄청나게 불어나는 것도 문제이지만, 천중명의 지시가 줄어든다고 이곳의 직원들을 해고할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룹발전본부에 지원하는 직원은 대개 열의에 불타 있었다.

열정을 쏟아 붓고 능력을 인정받고 싶은 직원들이 가장 원하는 모습이 바로 유진교와 최만호라는 사실을 실감할 때면 웃음도 나왔다.

그래. 나도 이런 모습을 원했었지.

그래서 천중명이 리온자동차의 총괄 사장으로 가라는 말을 했을 때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유진교와 기용도, 이중성처럼 지휘관에 적합한 사람이 있다면, 최만호는 참모에 적합한 유형이었다.

그래서 좋았다.

천중명처럼 강한 회장을 모시는 게 말이다.

리온자동차와 계약한 직후에 중국의 거양자동차 부사장이 달려오다니?

대송그룹의 윤성일이 들으면 뒷목을 잡을 일이었다.

**

결혼한 뒤로 빚 없이 살아본 적 없던 이관수였다.

매월 말일이 되면 안식구가 아쉬운 소리를 건네며 전화기를 붙든 채 고개를 조아렸고, 친척들도 이관수 부부가 전화를 걸라치면 여보세요, 소리를 하기도 전에 “내가 지금 형편이 어려운데?”라는 말로 받을 정도였다.

그 이관수가 갈비집에 앉아 있었다.

“어떻게 준비해 드릴까요?”

동네 허름한 돼지갈비집이 아니라 기와로 덮은 지붕의 처마를 멋들어지게 뺀 한우 갈비집이었다.

메뉴판을 본 안식구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보며 이관수가 슬쩍 가격이 얼마인지 시선을 떨궜다.

세상에!

갈비 한 대가 1인분인데 그게 3만9천 원이라니!

대강 짐작은 했다만 이관수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면서 그는 테이블 밑으로 손을 뻗어 아내의 손을 조심스레 쥐었다.

‘여보, 너무 비싸. 이런 짓 하면 우리 죄 받아.’

아내의 눈이 전하는 말을 이관수는 분명하게 알아들었다.

‘이런 곳에 처음 와보잖아. 빚도 다 갚았고, 오늘 하루만 사치할게. 두 분이랑 우리 아이들 앞에서 오늘 저녁만.’

부부는 서로를 마주 본 채 눈시울을 붉혔다.

“우리 다른 곳에 가는 게 어떠냐? 내가 속이 좀 안 좋네.”

이관수가 얼마를 받았는지 모르는 그의 장모가 혹시나 싶어 말을 건넸고, 주문을 기다리던 직원은 어쩌겠느냐는 의미의 시선을 던졌다.

불안해하는 자식들의 눈을 본 아내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이런 날 남편도 기 한번 살고 해야지.

“여보. 당신이 시켜요. 나 많이 먹을 거야. 그래도 되지?”

“그럼. 그래야지.”

아내의 눈을 보며 울컥한 이관수가 “후.”하고 마음을 가다듬은 뒤에 직원을 향해 시선을 들었다.

“우리 한우 갈비로 15인분을 주세요.”

“어후! 사장님. 양이 많으실 수 있거든요. 우선 10인분을 드시고 추가로 주문하시는 게 어떠세요?”

“그래요? 그럼 그렇게 주세요.”

“바로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메뉴를 받아든 직원이 곱게 고개를 숙이고 돌아갔을 때 장인, 장모와 아이들이 멍한 눈으로 이관수를 바라보았다.

“안 사람이 많이 먹을 거라고 해서요.”

말을 하며 이관수는 자꾸만 입술을 빨아들였다.

그를 지금까지 믿고 지지해주었던 아내의 손이 그의 손안에서 떨리고 있어서였다.

“이 서방. 무리할 거 없어. 우리 그렇게….”

“어머님. 오늘 하루만 그냥 받아주세요. 이 사람과 우리 아이들, 그리고 아버님과 어머님 앞에서 폼 한번 잡아보고 싶습니다.”

바보처럼 이관수는 말끝에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그래! 우리 사위가 지경전자의 연구소에 취직해서 이렇게 비싼 고기를 산다는데 내가 제대로 못 먹으면 억울해서 안 되지. 나 소주 한잔해야겠다. 그 정도는 괜찮지?”

“예, 아버님.”

이관수와 그의 부인은 아직 테이블 아래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허허허! 허허허허!”

살다가 이런 날이 다 온다는 말을 삼킨 장인의 웃음이 테이블을 넘어와 이관수를 따뜻하게 위로해줄 때, 아이들은 모처럼 행복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

빌딩들이 칸칸이 빛을 내뿜고, 도로를 가득 메운 승용차의 불빛이 어둠을 밀쳐내는 시간이었다.

“회장님. 저녁은 어떻게 할까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퇴근하세요.”

“예, 회장님. 내일 뵙겠습니다.”

부속실 직원이 고개를 숙인 뒤에 집무실을 나섰다.

저렇게 해도 두 명은 남아서 천중명이 퇴근할 때까지 기다린다.

처음에는 자리를 지키는 직원들이 염려되었는데 대기 근무에 따른 휴일 보장이 나쁘지 않았고, 급여가 좋아서 오히려 부속실을 희망하는 직원이 많다는 말을 듣고서는 그나마 마음을 놓았다.

천중명이 연달아 올라오는 보고서를 살필 때였다.

지이잉.

[선영 사모님. 공장에서 출발했습니다.]

곽대출이 보낸 문자가 휴대 전화기에 올라왔다.

현장을 둘러보겠다는 핑계로 오산에 들렀던 곽대출이 결국, 지경디자인으로 달려가 허선영을 뒤따르는 모양이었다.

적어도 허선영을 걱정할 이유는 사라진 상황이어서 대송그룹과 허세직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의 문제만 남았다.

대송그룹은 어설프게 달려들어서 어찌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다. 대송이 하는 사업마다 지경그룹이 달려든다고 해서 겁을 먹을 정도로 만만한 상대는 더더욱 아니었다.

천중명은 연필을 내려놓은 뒤에 픽 웃었다.

도대체 머릿속에 뭐가 들었길래 저런 부를 쌓아놓고 더 많은 것을 처먹기 위해 자식들의 결혼까지 이용하려는 건지 전혀 이해하기 어려웠다.

지랄들 났다, 정말.

천 년, 만 년 살다가 죽는 거라면 그나마 이해라도 하겠다.

“꽉 움켜쥐고 있어. 그 손에서 하나씩, 하나씩 빼내 줄 테니까. 그때는 뭐라고 하는지 똑똑히 봐주마.”

각오를 꺼내 놓은 천중명은 다시 보고서에 시선을 주었다.

**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 허선영의 휴대 전화기 벨이 울렸다.

운전하는 중이라 그녀는 이어셋을 귀에 걸고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나다.

미국에 있는 허선영의 고모 허미숙이었다.

- 너는 왜 전화 한 통이 없어? 아예 목소리 듣기도 싫어?

“죄송해요, 고모.”

유학생활 중에서 초창기 3년을 챙겨주었던 고모는 괄괄한 음성과 말투로 사람을 윽박지르는 편인데 대신 정이 깊었다.

- 어떻게 된 거야? 너 다시 미국에 온다는 게 무슨 말이야?

“아버지가 그러세요?”

- 밑도 끝도 없이 너를 데리고 있으라길래 내가 시원하게 욕을 퍼부어줬다. 광렬이 새끼 일로 자중하나 싶더니 너를 이용해서 뭔가 하려는 게지?

허선영은 간략하게 상황을 전해주었다.

- 아무튼, 정치한다는 인간들이 왜 그렇게 더럽게 사는지 몰라! 내가 그래서 너더러 들어가지 말라고 했잖아! 그런 인간 밑에 가서 뭐 좋은 꼴 본다고!

허미숙은 하여간 시원시원했다.

- 그런 말에 굽히면 안 된다는 거 알지? 너 그런 일로 미국 오면 내가 머리끄덩이 잡아서 한국으로 던져버린다!

“예, 고모.”

- 캬하하하!

허선영의 답이 마음에 들었던지 허미숙은 귀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통쾌하게 웃었다.

- 선영아.

“예, 고모.”

한바탕 웃음이 지나간 다음이었다.

- 우리 집안에 정치한다는 인간들은 죄 이상한 놈투성이어도 대신 여자들은 바로 살았다. 너도 이 기회에 그 못난 아버지 밑에서 벗어나. 알았지?

전에 없이 따뜻한 말에 허선영은 작게 “네, 고모.”라고만 답했다.

- 내가 이것들 때문에 한국에 다녀오든가 해야지 어디 남사스러워서 살 수가 있나? 국회의원이고 뭐고 죄 머리카락을 뽑아서 아예 고개를 못 들고 다니게 하든가.

분통을 터트린 허미숙의 “후!”하는 숨소리가 이어셋을 통해 넘어왔다.

- 끊자. 통화료 많이 나온다. 밥 많이 먹고, 엄마 챙기고, 너 아껴준다는 남자 손 꼭 붙들고 당당하게 버텨! 정 안 되겠으면 잠깐 와라. 나랑 들어가자.

“예, 고모.”

- 대답은!

통화는 그렇게 걸려온 것만큼이나 당황스럽게 끝났다.

“저 잘 버틸 거예요.”

핸들을 잡은 채 혼잣말로 다짐을 전한 허선영의 얼굴이 조금은 편해져 있었다.

**

저녁을 먹은 천호득은 장만섭과 함께 2층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어.”

“예, 총수님.”

그런 뒤에 그는 낮에 천중명이 들렀던 바로 그 방으로 들어갔다.

“열어봐라.”

장만섭을 시켜 박스를 열게 한 뒤에 천호득은 안에 담긴 기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천호득은 손이 떨린다. 그런데도 그는 떨리는 손을 뻗어 기계의 윗부분을 매만졌다.

“때가 돼서 망가졌겠지. 더는 이 방에 있는 것이 싫었을 수도 있고.”

마치 기계가 말귀를 알아듣는다는 양, 천호득은 애잔한 눈으로 혼잣말을 꺼냈다.

“흠.”

손을 거둔 천호득이 휠체어에 상체를 세운 뒤에 탄식 같은 숨을 내쉬었다.

“닫아라. 누구도 이 방에 못 들어오게 하고.”

“예에, 총수님.”

장만섭이 상자의 위를 덮은 뒤에 휠체어의 손잡이를 잡은 다음이었다.

“혹시 회장이 이걸 보자고 하면….”

말을 하던 천호득이 홱 시선을 돌렸다.

“낮에 이 방에 들어왔었냐?”

번득이는 천호득의 눈매는 매섭다.

그리고 장만섭은 이런 순간을 태연하게 넘길 정도로 뻔뻔하지 못했다.

“그랬구나.”

고개를 끄덕인 천호득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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