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
170. 한 가지만 남겨주세요 (1)
언제나처럼 어둠이 물러가면서 현실이 그 자리를 메웠다.
평창동 저택의 2층 방이었다.
장만섭이 지켜보는 앞에서 천중명은 상체를 기울인 채 체인으로 된 벨트를 손가락으로 잡고 있었다.
‘이걸 움직였는데 어둠이 또 몰려온다면?’
커피포트에 감전되었을 때와는 다른 확신과 알지 못할 두려움이 달려들 때, 천중명은 다시 벨트를 움직였다.
끼릭. 끼리릭.
화아아아아악!
그리고 그 직후에 어둠이 삽시간에 들이닥쳐서 천중명을 감쌌다.
너였어?
내가 어둠에 휩싸인 이유가?
천중명은 어둠 속에서 똑바로 앞을 노려보았다.
이번엔 뭘 보여줄까?
그런데 이번 어둠은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은 채 서서히 물러났다.
‘뭐야? 충전할 시간이 필요한 건가?’
다시 현실로 돌아온 천중명이 기계를 노려보았을 때였다.
“누가 올라옵니다.”
장만섭이 우릉대는 소리로 속삭였다.
이 방은 천호득의 허락 없이는 함부로 들어오지 못한다.
상체를 일으킨 천중명은 장만섭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든 송 비서와 의논해! 함부로 설치다가 오늘 같은 일이 또 생기면 그때는 정말 가만 안 둘 테니까 알아서 하고!”
이럴 때 나직하게 죄송하다는 답이라도 해주면 좀 좋으련만, 장만섭은 고개를 떨군 채 말이 없었다.
“회장님.”
그리고 그때 밖에서 송달순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천중명은 어설프게 닫혀 있던 문을 손으로 밀었다.
“총수님께서 찾으십니다.”
“후-.”
화를 털어내는 것처럼 한숨을 내쉰 천중명은 장만섭을 한번 노려본 뒤에 방을 나섰다.
저 기계는 뭐지?
왜 평창동에 저게 있지?
천호득은 저 기계가 어둠을 불러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거실을 가로질러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오징어 다리처럼 여러 가지 생각이 동시에 천중명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계단을 내려갔을 때 천호득은 거실에 있었다.
“찾으셨어요?”
“혹시 손을 대거나 한 건 아니지?”
“그보다는 한 번만 더 아버지를 노엽게 하면 해고하겠다고 따끔하게 나무랐습니다.”
계단을 힐끔 돌아본 천호득이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가져왔다.
지금 물어볼까?
어떤 걸 망가트렸는지 확인하다가 보았다고?
질문을 던져볼까 했던 천중명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천호득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방에 들어간 것도 그렇지만, 지금 어설프게 질문했다가 불똥이 튀면 다시는 기계를 살피거나 질문하기 어려울 거란 판단에서였다.
“아버지. 그럼 저는 이만 회사에 가보겠습니다.”
“그래.”
“어머니. 갈게요.”
“조심해서 가. 너무 무리하지 말고.”
인사를 마친 천중명이 현관을 나설 때 장만섭과 송길순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살펴 가십시오.”
천중명은 장만섭의 인사를 받으며 현관을 나섰다.
설마 천호득도 어둠을 통해 다른 곳의 모습을 보는 건 아니겠지?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정문을 나선 천중명은 운전기사가 기다리는 승용차의 뒷자리에 몸을 실었다.
차가 출발한 다음이다.
“미안한데 집으로 좀 가줘.”
“예, 회장님.”
삼성동으로 방향을 바꾼 천중명은 바로 휴대 전화기를 꺼내 들고 번호를 눌렀다.
- 곽대출입니다, 회장님.
“평창동에서 삼성동 집으로 가는 길이다. 어지간하지 않으면 지금 삼성동으로 움직여.”
- 예, 회장님.
천중명의 음성에 담긴 감정을 알아챈 곽대출이 묵직하게 답을 건네주었다.
천중명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분명 체인으로 된 벨트를 돌렸을 때 어둠이 밀려왔다.
저게 뭔데 평창동에 있었지?
천호득이 정말 천중명처럼 어둠을 통해 다른 곳을 보나?
참 오랜만에 미칠 것처럼 달달한 커피와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
대송그룹 회장 윤성일은 허세직의 전화를 받았다.
- 알아듣게 전하기는 했는데 제가 자식을 잘못 키웠는지 막무가내로 나오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가슴 아픈 일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애쓰셨습니다. 결단을 내리느라 우리 허 의원의 상심이 얼마나 크십니까?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윤성일은 마치 더러운 것을 만진 사람처럼 엄지와 검지만으로 스마트폰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허선영이 네 예상대로 고집을 피운다는구나.”
그러면서 그는 왼편 앞쪽 소파에 앉은 윤병지에게 내용을 전했다.
“네가 수고 좀 해줘야겠다. 내가 전화를 넣을 테니까 천호득 명예회장을 만나보고 다음으로 신임회장도 만나.”
“회장님. 그러지 마시고 천중명 회장과 자동차 산업의 협력을 모색해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흥.”
윤병지의 조심스러운 조언을 윤성일은 코웃음으로 단박에 밀쳐냈다.
“정의감에 사로잡혀서 날뛰는 철부지를 만나서 무슨 망신을 당하라고? 올해 우리가 수출한 차가 300만 대인데 수익이 3천억 원이야. 국내 판매는 50만 대에 3조4천억 원이 남았고.”
윤성일은 차마 발표하지 못하는 판매실적을 토해내며 분통을 터트렸다.
“국내 고객만 호구 잡아 돈 번다고 까발려? 아니면 실제로는 기준치 이상의 매연이 나오는 수준이라 디젤엔진은 수출도 못 한다고 떠들어?”
마치 그 모든 잘못이 윤병지의 탓인 양, 윤성일은 독기 어린 눈을 하고 있었다.
“정신 차려, 이 사람아. 이렇게라도 혼인을 성사시키려는 이유를 몰라? 최소한 우리의 아픈 곳을 찌를 적을 만들지는 말아야 할 것 아니냐고.”
“죄송합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후우-.”
윤병지의 사과를 들은 윤성일은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왜 결혼도 시키기 전에 덜컥 후계자로 정해서 일을 이렇게 만드는지, 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호득 명예회장이라면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알 텐데 말이야.”
윤병지는 잠자코 윤성일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여기에서 더 그의 심기를 거슬렀다가는 송중대와 비슷한 직급을 달고 강원도 바닷가에서 근무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가 약속을 정하고 연락할 테니까 그렇게 알아.”
“예, 회장님.”
윤병지는 얼른 인사를 마치고 회장실을 나섰다.
‘꼼짝없이 나도 따귀를 맞게 생겼구나.’
그는 참담한 심정으로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부장 직급을 달고 바닷가로 향하든가, 따귀를 맞고라도 부회장 자리를 지키든가.
세상은 그에게 단 두 가지의 선택지만 주었다.
천중명이 마음을 바꿔서 윤세계를 선택해?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윤병지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천중명을 떠올리자 맞지도 않은 뺨이 얼얼해지는 느낌이었다.
**
그래도 곽대출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삼성동 빌라의 홈 바에 앉아 달달한 커피를 앞에 두고 담배를 입에 물면서 생각이 하나씩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허세직의 이야기를 전했을 때,
“그 씨발 인간이 진짜! 우리 선영 사모님만 아니면 당장에라도 달려가서 눈알을 하나 파내주고 싶네!”
곽대출의 후련한 반응이 마음을 달래주기도 했다.
찰칵.
“후우.”
둘이서 넥타이를 벗어 던진 것은 물론이고, 셔츠의 목 단추와 소매 단추까지 풀어놓은 채 편안하게 담배를 입에 물었다.
“하나씩 해결하십시다, 회장님아.”
“뭘? 어떻게?”
곽대출의 번들거리는 눈을 보자 이상하게 웃음이 픽 나왔다.
“내가 만섭이랑 해서 평창동의 기계를 살짝 빼내겠습니다.”
“야! 거기 물건 함부로 손대다 걸리면 나도 너 못 지킬 수 있어. 지경그룹 발전본부 이사가 평창동에서 절도로 잡혀봐라?”
“그게 걸릴까?”
“그게 안 걸리겠냐?”
아쉽다는 투로 곽대출이 눈알을 오른쪽 허공으로 넘겼다.
“좋아!”
그런 뒤에 그가 다시 천중명을 바라보았다.
“그럼 그건 천천히 생각하기로 하고. 허세직 의원은? 회장님이야 아무래도 선영 사모님이 있어서 움직이기 불편하잖아. 내가 적당히 알아서 밤에 집에 들어갈 때 뒤통수를 똭!”
“너 요즘 불만이 많았냐? 왜 이래?”
“울화통이 터지니까 그렇지!”
엉뚱한 소리인 거 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천중명의 답답한 속을 위로해주기 위해 헛소리라도 지껄이는 노력인 것도 알고.
“하나씩 가자. 우선 대송그룹이 먼저다.”
“어떻게?”
“우리에게는 황성규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지.”
“아하!”
곽대출이 의미심장한 미소로 웃었다.
“이번엔 잊지 말고 따귀를 갈겨줘. 정 뭐하면 그 자리에 나를 부르든가. 까짓것! 회장부터 딸까지 시원하게 갈겨주고 내가 폭행죄로 처벌받는다. 한두 번도 아니고.”
곽대출의 말을 듣던 천중명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왜 그러셔?”
“혹시 어둠 속에서 이 모습을 보고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렇다.”
“뭐?”
섬뜩한 얼굴로 두리번거리던 곽대출이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들어보셔. 회장님은 몸이 바뀐 거잖아. 그 뒤로 어둠 속에서 다른 곳의 장면을 보는 건데 총수님은 몸이 바뀐 것 같지는 않잖아?”
헛소리인 건 알았지만, 이상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그래. 그거 신경 써 봐야 도움되는 건 아무것도 없지. 아무튼, 대송그룹과 허세직 의원을 해결하고, 기계가 어떻게 평창동에 있게 된 건지, 실제로는 어떤 작용을 하는지를 알아보자.”
고개를 끄덕이던 곽대출이 갑자기 뭔가 떠오른 얼굴로 천중명을 보았다.
“참! 중국에서 회장님 면담 요청이 정식으로 있었어. 거양자동차의 류효양과 양서평, 조양회로 되어 있던데? 양서평이랑 조양회는 삼합회 인물이라고 하지 않으셨어?”
“맞아.”
답을 한 천중명은 커피잔을 들었다가 안을 들여다보았다.
“한 잔 더 마실 건데 너는?”
“내가 끓이지요.”
“거지 같이 물을 많이 부어서 너는 안 돼.”
“아, 이씨! 회장님을 확! 나 요즘 생활 펴서 물 조금 부어! 두 봉 탈 때도 많아!”
오랜만에 둘이 킬킬거리며 커피를 다시 탔다.
달달한 냄새를 맡으며 다시 마주 앉은 다음이었다.
“너, 지난번에 불렀던 경호팀 있었잖아. 그쪽에 부탁해서 가능한 한 빨리 선영 씨 좀 지켜달라고 해줘. 본인은 모르게.”
“오케이.”
크게 해결책이 나온 것은 별것 없는데 그래도 속을 털어놓고 나자 마음은 한결 편했다.
“샤워한 뒤에 옷 좀 갈아입고 나올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
“걱정 말고 씻으셔. 나는 그동안 유비캅에 전화해 둘 테니까.”
곽대출의 답을 들은 천중명은 샤워실로 향했다.
짧게나마 샤워를 하고 나면 좀 더 정신이 맑아질 것 같아서였다.
어둠을 불러오는 기계라니?
샤워실을 향하던 천중명은 또다시 뇌리에 매달리는 기계를 떨치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천천히 가자.
서두르다가 오히려 일 망칠 수 있다.
지금은 샤워를 해서라도 냉정함을 되찾아야 할 때였다.
**
본사로 나온 천중명은 독한 심정으로 보고서에 매달렸다.
말이 쉬워서 보고서지, 이 몇 장의 서류를 만들기 위해 몇 날을 매달렸을 임직원의 노력을 생각한다면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볼 것이 없었다.
두 번째 보고서를 확인하던 천중명이 궁금한 사항을 연필로 메모했을 때였다.
지이잉.
문자가 들어왔다는 진동이 울렸다.
[유비캅의 서상현 이사와 직원 한 명이 현장에 도착했다는 보고입니다. 퇴근 이후에는 도깨비도 갑니다.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문자를 확인한 천중명은 픽 웃었다.
이왕 보고서에서 눈을 뗐으니 잠시 대송의 목을 조를 준비를 하는 것도 나쁠 것은 없었다.
천중명은 바로 번호를 눌렀다.
- 황성규입니다, 회장님.
“대송그룹을 절반쯤 무너트릴 생각입니다. 다시는 내 앞에서 고개를 못 들게 하고 싶은데 그럴 만한 자료가 필요합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도 담겼습니다.”
이렇게까지 강하게 말한 적은 없어서 황성규는 잠시 멈칫하는 느낌이었다.
- 최선을 다해 자료를 준비하겠습니다.
“거대 자본을 상대해야 할 시간에 개인적인 감정을 해소하기 위한 일을 맡겨서 미안합니다.”
- 회장님. 저희는 사조직입니다. 미안하다는 표현을 쓰실 일은 저희 조직을 해체하라는 지시를 내릴 때 외에는 없습니다.
천중명의 말을 황성규가 멋지게 받아주었다.
- 마음에 흡족하실 자료가 있는지 샅샅이 훑어보고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래 주세요. 기다리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의자를 돌린 뒤에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집무실 창으로 들어온 햇살이 셔츠와 정장 바지 차림의 천중명을 안아서 책상을 향해 그림자를 그려놓는 시간이었다.
똑똑똑.
“회장님. 점심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고개를 돌린 천중명의 시선에 그림자를 밟지 않으려는 것처럼 멀찍이 떨어진 부속실 직원이 서 있었다.
“추천해줄 게 있나?”
“새로운 메뉴로 갈비정식이 있습니다. 부속실 직원 다섯 명이 모두 만점을 주었습니다.”
“그럼 그거로 하죠.”
“준비하겠습니다, 회장님.”
부속실 직원이 나간 뒤에 천중명은 다시 빌딩 숲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버지. 혹시 어둠 속에서 저를 보고 계시면 다른 건 다 잊어버리시고 이것만 들으세요.”
오른팔로 집무실의 창을 짚은 천중명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경을 바른 기업으로 만들 겁니다. 세상의 표준이 되는 기업이요. 그렇지만, 아버지가 이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한다면 조용히 따르겠습니다. 대신 한 가지만 남겨주세요.”
마치 천호득이 앞에 있는 것 같아서 천중명은 픽 웃었다.
“제가 버는 돈으로 가끔 만나서 함께 식사할 수 있고,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얼굴 보러 갈 수 있는 아버지만큼은 계속 그 자리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말을 마친 천중명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부속실 직원이 서 있던 자리에 천호득의 시선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 때문이었다.